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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왜 그랬을까, <미완의 파시즘> (1)

미완의 파시즘

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김석근 옮김/가람기획/400쪽/2만5000원


일본의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1886~1968)가 그린 세로 193.5㎝, 가로 259.5㎝의 대작 ‘아쓰시마 옥쇄’는 1943년 ‘결전미술전’에 출품됐다. 그림은 누가 일본군인지 미군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할 수 없는 거대한 혼돈의 전장을 묘사한다. 작품이 그려진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한 일본군의 용맹을 칭송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듯 하다. 반면 전장의 모습이 끔찍하게 묘사된 것을 보면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후지타 쓰구하루의 '아쓰시마 옥쇄'


그림의 배경은 1943년 5월 29일 밤에서 30일 새벽 사이, 알류산 열도 서쪽 끝의 애투 섬(일본에게는 아쓰시마)에서 벌어진 전투다. 일본군은 1942년 6월 미국령이던 이 섬을 점령했다. 알래스카 반도 바로 앞의 이 섬을 차지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의 연락로를 차단하고, 미군이 북방 해역의 섬에 일본 공습용 비행장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알래스카 바로 앞에 적군이 진치고 있는 모습을 방관할 미국이 아니었다. 1943년 5월 12일, 해군 기동부대의 엄호를 받는 미 육군 제7사단 소속 1만1000명이 애투 섬 탈환 작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이 애투 섬을 지키기 위해 남긴 병력은 불과 2600여명. 병사의 수나 장비의 질 면에서 중과부적이었다. 


용기 있게 싸우되, 패전이 확실해지면 항복하는 것이 정상적인 군대의 모습이다. 그것이 불필요한 사상자를 줄이고 훗날을 도모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달랐다. 1941년 1월 일본 육군 수뇌부가 장병들에게 배포한 훈시집 <전진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않고 죽어서 죄화(罪禍)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 육체는 죽어도 혼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니,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불교식 세계관을 전시의 마음가짐에 접목한 셈이다.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5월 29일 밤 남은 병력은 150명 정도였다. 그러나 <전진훈>을 따른 일본 수비대 사령관은 미군을 야간 기습하기로 했다. 사령관은 “총탄이 떨어지면 총검으로, 총검이 부러지면 철권으로, 철권이 깨지면 이빨로 물어뜯어라”고 훈시했다. 죽을 것이 뻔한 ‘최후의 돌격’이었다. 결국 살아서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한 일본군은 의식을 잃은 부상병 등 30명 정도였다. 애투 섬 수비대의 99%가 죽었다. 


대체 왜 이랬던 걸까. <미완의 파시즘>은 일본을 패전으로 몰아간 군국주의자들의 오판을 하나씩 짚어나간다. 일본의 군 수뇌부가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고, 걷잡을 수 없는 시대 분위기에 정신을 놓고 편승한 결과는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으나, 전쟁은 그만큼의 인명과 국가 재정 손실을 안겼다. 어딘지 찝찝한 승리의 기쁨을 즐기고 있던 일본에 뜻밖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바로 1차 대전의 발발이다. 유럽은 부족한 총기, 탄환, 선박, 군복, 철강, 두류(콩) 등을 줄기차게 주문했고, 전쟁특수를 맞은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1차대전에 참가한 일본은 중국 칭다오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 독일군의 수는 많지 않았기에 일본군의 승리가 유력해보였다. 하지만 일본군 수뇌부는 공격에 뜸을 들였다. 러일전쟁 때처럼 보병이 돌격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기는 대신, 비행기와 이동식 대포 등 최신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투는 ‘아시아에서의 근대전의 전시회’였다. 독일군은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한 지 8일만에 항복했다. 유명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는 “근대 병기 앞에서 살아 있는 몸은 너무나도 공허하다”며 “국가의 생산력이 곧 군대의 전투력”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군은 물량전, 과학전, 총력전, 보급전이라는 근대전의 성격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물적 토대는 근대전을 지탱할 정도로 탄탄하지 않았다. 일본은 아시아의 열강으로 거듭났지만, 미국, 소련, 영국 등 서구의 열강과 대적하기엔 기술력, 생산력, 자원이 모두 모자랐다. 일본군 수뇌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가진 나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근대전에서 ‘갖지 못한 나라’ 일본이 어떻게 이길 것인가. 일본 육군의 대표적인 전략가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엇갈린 계획을 내놨다.  


‘작전의 귀신’이라 불린 오바타 도시로는 ‘황도파’를 대표하는 군인이었다. 황도파란 천황에게 절대적 충성을 서약하고 국가에 목숨을 바치는 군인을 말한다. 현재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황도파란 명칭은 비현실적, 비합리적이겠지만, 오바타는 당대 일본이란 나라가 처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세월이 흘러도 일본이 구미 열강과 같이 ‘가진 나라’가 되기는 힘들다고 파악했다.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와 장기전, 보급전으로 가면 필패다. 이러한 인식의 끝에 도달한 계획은 놀랍게도 ‘단기섬멸전’이다. 인원, 물자의 보급을 뜻하는 ‘병참’ 개념을 무시한, 초단기전만 계획했던 것이다. 


아군이 많고 적군이 적어야 포위섬멸이 가능하며, 그 반대의 경우는 힘들다. 허나 천황의 명령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황도파 군인들이 전투의 유불리를 따지긴 어렵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물질, 인원의 열세를 뒤집을 무형의 전력, 즉 정신력이다. 오바타는 잠을 자지 않고 이동해 적을 치는 야간 기습을 좋아했다. 그것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다수의 적군을 단기간에 섬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국력에 대한 오바타의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승의 신념’이라는 허황된 정신주의로 도약해버렸다. 


이시와라 간지는 ‘통제파’를 대표한다. 황도파가 ‘갖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와 대적할 수 있는 수단인 ‘신들린 정신주의’에 관심이 있었다면, 통제파는 ‘갖지 못한 나라’를 ‘가진 나라’로 이끌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려 했다. 통제파의 시야는 군 내부의 문제 뿐 아니라 국가 운영 전반으로까지 나아갔다. 즉, 이들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계획 경제를 선호했다. 


이시와라 간지가 일본을 ‘가진 나라’로 바꾸기 위해 세운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만주에 주목했다. 일본의 자원만으로는 서구 열강에 대적하기 힘들다. 하지만 만주를 끌어들인다면 다르다. 만주를 영유하면 일본을 세계에서 으뜸가는 산업국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가진 나라’가 된다. 그것이 이시와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시와라의 생각에도 역시 황당한 부분이 있었다. 이시와라는 니치렌슈(日蓮宗) 승려 다나카 지가쿠의 추종자였다. 다나카는 일본이 독창성은 없지만 바로 그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비평하고 모방하고 소화할 수 있는 무(無)의 나라이며, 언젠가 벌어질 큰 전쟁 이후 세계의 평화를 가져올 사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시와라는 다나카의 생각을 이었다. 일본은 동양의 대표, 미국은 서양의 대표이므로, 언젠가 두 나라는 세계의 최종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전쟁을 치르기 전까지 일본은 ‘가진 나라’가 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시와라는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인 이세 신궁을 참배하다가 “금색의 빛이 일본에서 만주를 향하여” 비추는 장면을 봤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나카시바 스에즈미는 전시 일본 내각, 군대를 총지휘한 도조 히데키의 브레인이었다. 그가 바로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전진훈>을 지은이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나카시바는 무형의 전력인 ‘정신력’을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는 황도파와 맥을 같이 했다. 그래도 황도파는 상대의 전력을 고려해 싸울 상대와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를 구분하려 했다. 그러나 나카시바는 교전 상대를 정하는 것은 군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싸우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싸워야 한다는 것이 나카시바의 신념이었다. 결국 그는 정신력의 가능성을 거의 무한대로 두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해도 아쓰시마처럼 옥쇄(명예를 위해 죽음)에 옥쇄를 거듭하면 적의 간담은 서늘해지고, 언젠가는 승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부대의 절멸이란 지휘부의 무능을 드러내는 말일 뿐이지만, 여기에 ‘옥쇄’라는 말을 붙임으로서 죽음은 미화되고 오히려 이것이 궁극의 전략으로 승화된다. 


패전이 가까워지자 일본에서는 별 생각들이 다 나왔다. 남성이 전장에 동원돼 모자라자, 여성이 ‘정신적으로’ 단련해 남성 못지 않은 몫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정신주의의 무용함이 드러나자 국민 개개인의 지혜, 창의를 모으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한번 잘못 잡은 나라의 방향을 되돌리기에는 턱 없는, 패전 직전의 애처로운 몸부림일 뿐이었다. 


오바타 도시로, 이시와라 간지, 나카시바 스에즈미의 생각들은 때로 받아들여졌고, 때로 거부됐다. 이들의 생각들 중 많은 부분은 패전 이후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에 의해 사라졌지만, 요즘의 우익 정치인이나 시민들에 의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이 감지되기도 한다.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인 저자의 목적은 군국주의, 확장주의로 치달은 일본에 대한 윤리적 반성이 아니라 현실적 질책인 것으로 보인다. 근대의 일본은 여러 가지 준비와 행운으로 인해 아시아의 맹주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때 일본은 소국은 아니었을지언정 확실한 대국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웅크리고만 있으면 자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발돋움’을 했지만, 그 발돋움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발돋움이 잘 되었을 때의 기쁨보다도, 굴러떨어졌을 때의 고통이나 슬픔을 상상해보자”고 그는 제안한다. 


일제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한국의 독자로서는 읽기 불편한 대목도 있다. 저자의 태도는 “제국주의로 이웃 국가를 괴롭혔기에 반성한다”가 아니라, “제국주의엔 불가피한 부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에 맞는 정책이 아니었다”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아이디어와 그를 둘러싼 현실적 조건을 자세히 살필 수 있어 유익하다. 특히 그들의 생각을 당대의 문학자, 종교인 등과 연관해 서술하는 대목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