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에 해당되는 글 2건

  1. 일한만큼 받을까, 살만큼 받을까,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2. 일중독자와 포르노배우의 유사성,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짧은 분량, 쉬운 서술로 '비주류 경제학'(이지만 언젠가는 주류가 되라!)의 이론들을 전한다. 리뷰에도 자세히 썼지만, 특히 임금에 대한 정의가 흥미로웠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가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대략 짐작.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류동민 지음/웅진지식하우스/279쪽/1만3000원


경제학은 깔끔하다. 가격 형성 과정을 떠올려보자. 수요가 늘어나면 가격이 오르고,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이 내린다. 수요와 공급의 선이 엇갈려 가격을 결정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래프는 수학적으로 명쾌하고 시각적으로 단정하다. 


그런데 우리 삶은 경제학처럼 깔끔하지 않다. 오히려 빈 틈이 많고 너저분하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을 때면 시장조정 과정을 통해 균형이 회복된다”는 표현을 살펴보자. 이 문장 속 ‘균형 회복’의 과정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을 수도 있다. 


19세기 이후 경제학은 물리학을 닮으려 노력했다. 물리학은 간단하게 정리된 수식으로 사물의 이치를 설명한다. E=mc2(제곱약물임)이란 공식으로 세상이 정리된다니 얼마나 간결한가. 그러나 원자는 충돌해도 아픔을 느끼지 않지만, 인간은 ‘시장조정 과정’에서 고통을 당한다. 


경제학의 용어들은 ‘가치중립적’ 혹은 ‘현상설명적’임을 자처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사용되는 ‘노동 유연화’라는 용어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은 채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말하려는 것이다. ‘경영의 효율성 제고’란 말 역시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임금 삭감, 근무시간 연장 등을 뜻한다. ‘가격현실화’란 사실 ‘가격인상’이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은 이렇게 ‘주어가 없는’ 경제학 용어의 주어를 돌려주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경제학에서 사람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인 저자가 한 번도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책의 메시지는 “경제학은 휴머니즘이다”라고 할 수 있다. 


거시경제의 지표, 숫자와 기호로 구성된 복잡한 수식 뒤에는 일하는 사람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있다. 연봉 7000만원의 직장 입사를 꿈꾸는 반도체학과 대학생, 문자메시지로 해고 통고를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잦은 해외 출장으로 축난 몸을 지키려 여가 시간에 헬스클럽에 다니는 샐러리맨, 하루 100군데 배달해야 일당을 맞추는 택배 노동자, 아르바이트생 인건비를 벌기 위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주인이 저자의 시선에 포착된다. ‘노동’이라는 프리즘으로 이들의 삶을 포착하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이 책은 우리의 ‘통념’과는 어긋난 경제학 지식들을 전해준다. 이 시대의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일까. 이는 학생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같다. 정답은 ‘지루함을 참아내는 능력’이다. 커다란 공장 혹은 학교에서, 자신과 비슷한 마음을 먹은 사람들과 함께, 같은 시간에 일 혹은 수업을 시작해 같은 시간에 끝내고, 다음날 다시 같은 시간에 출근 혹은 등교한다. 100명의 몸과 마음은 100개인데, 이들에게 하나의 행동 양식을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시간관리, 행동관리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길들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다. 


재벌과 그들이 다스리는 기업은 자신들을 위한 특수 이익을 마치 보편 이익인 것처럼 꾸민다. 어느 경제신문이 주관하는 ‘경제이해력검증시험’에는 이런 문제가 나왔다. “다음 중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규제가 무엇인지 고르시오”. 정답은 ‘대기업 집단의 상호출자 금지와 출자총액 제한’이었다. 저자는 이것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아놓고는 이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선전한 1970년대 독재정권의 교과서가 연상되는 궤변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자본가와 그들을 대변하는 세력의 집요하고 은밀한 공세 때문에 바뀐 용어들이 몇 가지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반대쪽에 서있는 이는 ‘자본가’였지만, 요즘은 자본가라는 말 대신 ‘사용자’라 칭하는 경우가 잦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함으로써 그와 ‘관계’를 맺지만, 사용자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한다. 여기서 노동력은 노동자라는 한 고유한 개인의 인격과 분리돼 상품처럼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된다. 이제 인간 사이의 ‘관계’는 ‘거래’로 바뀐다. 


이 책이 탐구하는 ‘임금’에 대한 정의도 흥미롭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들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 다섯시쯤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었다. 아침에 나온 사람은 당연히 불평했다. 포도원 주인은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주는 것이 내 뜻이오”라고 말했다. 


이 비유를 염두에 두고 임금의 정의를 생각해보자. 임금은 한 일에 대한 대가인가,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인가. 그러니까 노동자가 일한 만큼만 돈을 줘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다음날에도 일할 수 있도록, 즉 가족을 건사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줘야 하는가. 아침에 온 일꾼처럼, 즉 임금이 생산의 기여분에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이라고 보기 위해선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노동자 한 명이 생산에 기여한 바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 그러나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데 하루에 8시간 일한 노동자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그 비율을 정할 수 있는가. 혹은 경향신문이 발행되는데 기여한 어느 기자의 노력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다음 노동자의 기여와 생산된 가치가 같은 시간의 지평을 가지고 움직일 것. 즉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했다면 그날 하루동안 생산된 생산물에만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노동은 세월에 따라 누적된다. 10년간의 경험을 가진 숙련된 재봉사가 하루 10벌의 옷을 만들었다고 할 때, 이 10벌에는 그날의 노동 뿐 아니라 그의 10년 경력이 함께 담겨있다. 그러므로 두번째 조건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임금은 하루 노동의 대가라기보다는 노동 능력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대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은 임금이 “그때그때의 노동에 대한 그때그때의 보상”이라는 원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비정규직이 늘어난 것은 그 사례다. 반면 “주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것”이라는 노동 계약은 무너뜨리고 있다. 야근은 물론, 퇴근 후나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노동자다. 심지어 주말에 회사가 주최하는 체육대회에 나오라는 식으로 노동자의 일상까지 통제한다. 


자본가가 ‘사용자’로 변신했다면, 노동자는 ‘소비자’로 바뀌었다. 24시간 영업하는 대형 마트는 싸고 편하게 장을 보려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한다. 그리고 늦은 퇴근 시간 후 한 푼이라도 아껴 장을 보려는 이들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다. 마트에서 소비자가 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의 고통에 힘입어 생계를 유지한다. 노동자이자 소비자라는 이 두 얼굴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같다. 마트 노동자가 한밤에도 근무하도록 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로 심야의 마트행을 자제한다면? 소비자로서 비합리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신제도주의’라는 경제학 이론이 있다고 한다. 이 이론은 “조직을 유지함으로써 드는 거래비용이 지나치게 커지면 기업 활동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시장 거래로 바뀌는 경향”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어느 대기업이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조직을 직접 꾸리는 것보다 홍보 회사에 위탁하는데 드는 비용이 싸다면, 홍보 조직이 기업에서 떨어져나가는 식이다. 이후 대기업과 홍보 회사는 기업 내부 지휘 관계가 아니라 광고주와 광고 회사의 거래 관계로 변하지만, 둘 사이의 상하 위계는 그대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경제 모델이 그렇다. 택배 기사, 대형 마트에 상품을 납품하는 영업사원, 대리운전 기사, 출판사의 기획위원 등은 형식상 개인사업자이지만, 사실상 ‘갑을 관계’로 종속돼 있다. 노동자는 실패의 위험성은 스스로 지고, 일의 자율성은 누리지 못한다. 저자는 이를 ‘유흥주점형 경제 모델’이라고 부른다. 룸살롱에는 업주-웨이터-마담-접대부의 위계가 있지만, 이들이 고용-피고용 관계가 아니라 개인 간 거래관계라는 점에서 따온 말이다. 


그래서 추상의 경제학에 구체의 인간을 돌려놓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저자는 지금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저자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기’가 어렵다면 소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기’에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한다. 여기에서 견고해 보이던 일상에 대한 ‘균열 내기’가 시작된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맞설 때 가끔씩이라도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의식하도록 노력하는 것, 비정규직 노동을 반면교사로서가 아니라 최소한 배려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일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서만이 아니라 삶의 소중한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잠깐씩이라도 만들어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의 일과 삶을 더디게나마 바꾸어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마트 안가기’는 어떨까. 나 하나 대형 마트에 가지 않는다고 당장 전통 시장이 살아나거나 마트의 부당한 노동자 대우 관행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마트에 가지 않는다면 나만 불편해질 뿐이다. 그러나 때로는 ‘의지적 낙관’이 필요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불가능하다. 한두 사람이라도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 언젠가는 그 꿈들이 모여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


비주류 경제학의 이론들을 현실의 문제에 빗대 친근하고 조곤조곤하게 설명한다.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방안을 찾는 사람에게는 ‘개인적 차원의 실천’을 말하는 결말이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완전히 새로운 통찰은 아니지만, 신랄한 비유가 많아 재미있게 읽었다. 나의 경우는 리뷰가 책의 분위기를 닮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리뷰의 표현도 신랄해졌다.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스베냐 플라스푈러 지음·장혜경 옮김/로도스/212쪽/1만4000원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당신이 듣기에 거북살스러운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독일의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는 당신이 포르노 배우 같다고 말한다. 이 30대 후반의 여성 철학자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욕망, 탈진, 중독, 우울증 등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고 한다. 


왜 내가 포르노 배우인가. 새벽부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만원 지하철에 우겨넣은 뒤 직장으로 달려간 내가, 담배 피고 화장실 갈 시간을 아껴 일한 내가, 10분만에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남는 시간에 운동을 하거나 영어 공부를 한 내가, 퇴근 후에도 다음날 회의에 내놓을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휴일에도 e메일을 체크하면서 일을 손에 놓지 않은 내가! 물론 일중독자라고 불리는건 수긍한다. 하지만 포르노 배우 같다고 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서 포르노그래피의 특성을 떠올려보자. 포르노 배우들은 인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기예를 보인다. 그들은 언제 어디에서든 섹스를 할 준비가 돼 있다. 일단 시작하면 인간이 할 수 있을까 싶은 고난도의 자세로 절정을 향해 오른다. 그렇게 격렬한 행위의 끝에는 힘찬 사정이 이뤄진다. 이게 끝이 아니다. 포르노 배우는 곧 다음 상대를 만나 또다른 섹스에 도전한다. 발기가 되지 않아 비아그라를 먹거나, 사정을 못하는 포르노 배우를 본 적이 있는가. 길고 나른한 전희에 1시간을 쏟아붓는 포르노그래피를 본 적이 있는가. 


반면 에로틱은 육체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휴식, 나른함, 수동성, 여유를 동반한다. 에로틱은 “할 수 없음”도 인정한다. 포르노 배우가 보여주는 체위를 시도했다가는 허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웃으며 받아들인다. 


그래서 포르노그래피는 현대 노동 세계에 대한 상징이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있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직장인에게는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는 사정하지 못하는 포르노 배우와 같다. 발기한 성기가 있다면 섹스가 이루어지듯,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해야 한다. 이 모든 행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포르노 배우는 보이지 않는 관객을 위해 섹스하고, 일중독자는 자신을 관찰하는 조직 혹은 규율을 위해 일한다.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지는 않는다. 


“나는 일하는게 즐겁다”는 반박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일하고 성과를 내는데서 쾌락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일해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더 좋아, 일을 할 수 없다면 내 존재의 의미는 사라질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이런 노동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종종 사용되는 ‘근로자’란 어휘에도 ‘부지런하게 일하지 않으면 노동자라 부를 수도 없다’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노동자들은 ‘향락 노동’을 하고 있다. 


정말 그렇냐고 플라스푈러는 되묻는다. 이를 위해 그는 ‘향락’의 의미를 고찰한다. 원래 ‘즐김’은 죄였다. <성서>의 ‘창세기’는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계몽주의 철학자들 역시 인간이 쾌락의 노예로 전락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즐기기 위해서만 사는 이의 실존은 가치가 없다고까지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플라스푈러의 모습. 영어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거의 독일어 웹페이지다. 대학 1학년때까지만 해도 사전 찾으면서 더듬더듬 독어를 읽을 정도는 됐지만, 이제는 '디 데어 데어 디' 같이 의미없는 주문만 할 줄 안다. 


향락에 죄의 그림자를 드리우려했던 인류의 노력에는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동물처럼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하고, 그 욕구의 실현에 금기를 두지 않았으면 오늘날의 인류 문명은 없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옥죄고 통제함으로써 자연과 대비되는 의미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 “금욕과 충동유예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으로, 다시 말해 사유하는 존재, 창조하는 존재, 그리고 도덕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에서 ‘탐욕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동물은 금기를 모르지만, 인간은 율법을 안다. 율법이 있어서 욕망은 더욱 매력적이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의 성기를 가리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금기가 없으면 향락도 없다. . 


현대의 향락 노동자들은 이러한 향락의 특징을 잘 안다. 향락을 즐기려면 무언가를 위반해야 하는데, 현대의 노동자들이 위반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 자신의 능력이다. 노동자들은 “할 수 있어”라는 주문을 되뇐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도 이 주문에 따라 해낸다. 그래서 “북극에 가서 에어컨을 팔아라”라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회사는 이를 ‘자기 극복’이라 하겠지만, 다른 말로는 ‘자기 착취’다. 플라스퓔러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인용하면서 이 논리를 전개한다. 


일에 대한 태도를 사랑의 여러가지 양태와 비교해보면 좋겠다. 자유롭고 열정적인 사랑과 강박적인 사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타인을 소유하거나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수시로 전화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온갖 기상천외하고 값비싼 방법으로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런 연인은 서로를 믿기 때문이다.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은 연인에게 속을까봐 불안해하는 시기가 아니라, 재회를 기다리는 설렘의 시기다. 


강박적인 사랑을 하는 이는 자기가 준 사랑을 돌려받지 못할까봐 불안해한다.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전력을 다해 사랑한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늘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고, 상대방이 흘리는 미약한 사랑의 증거를 찾으려고 안달한다. 일중독자는 바로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지 않고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잃지 않기 위해 일에게 봉사한다.”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는 현대인의 노동 양태에 대한 분석을 넘어 현대 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신체를 향한 성형의 욕망은 어떻게 봐야할까. 얼굴을 넘어 가슴, 허벅지, 성기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물론 성형은 전적으로 현대적인 현상은 아니다. 미의 기준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고, 많은 문화권이 나름의 성형수술을 했다. 로마 여성들은 크고 반짝거리는 동공을 위해 맹독성 식물인 벨라도나 열매의 즙을 눈에 털어뜨렸다. 중국 여성은 전족을 했고, 사모아 남자아이는 무릎에서 엉덩이까지 빽빽한 문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옛 성형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 현대의 성형에는 한계가 없다. 코를 세우면 턱을 깎고 싶고, 이후엔 가슴을 크게 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피부에 기미가 많은 것 같고, 이빨이 누렇게 보인다. 신체를 변형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자유가 생기자, 아름다움의 기준은 하늘로 치솟았다. 이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의 외모가 어딘지 조금씩 부족하다. 


육체의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된다. 예전에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약재로 달랠 수는 있었지만 없애지는 못했다. 출산의 고통은 구약성서의 신이 여자를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면서 안겨준 것일 정도로 유래가 깊다. 그러나 현대의 산모들은 척추에 무통주사를 맞음으로써 산통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몸살이 났다고, 생리통이 심하다고 결근을 하는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출근길 약국에 들려 독한 약 한 봉지를 털어넣은 뒤 회사로 들어선다. 어딘지 몽롱하긴 하지만 통증이 사라져서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그래서 일할 수 있다. 


하지만 통증은 몸이 인간에게 보내는 신호다. 잠시 멈추어서서 어디가 말썽을 부리는지 알아보라는 뜻이다. “나는 통증을 통해서만 나와 세상의 경계를 느끼고, 통증을 통해서만 일이건 사랑이건 운동이건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통증이 사라지면 유기체는 세상 속으로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과거엔 도보, 말, 배를 이용해야 했지만,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한 시간이면 간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남은 시간으로 무얼 하는가. 다른 일을 찾는다. 시간이 남으면, 또 다른 일을 한다. 어차피 일에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시간을 단축해도 끝없이 일을 해야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유는 짐이자 재난이다. 


플라스푈러는 ‘놓아두기’ 혹은 무위를 제안한다. 흔히 능동성은 삶, 수동성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요즘 같은 사회에 ‘놓아두기’를 말하면 일손을 놓자는 뜻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니 니체는 이미 100년도 전에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무엇을 행동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즉,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이다. 


퇴근후 혹은 주말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지도, 가기 싫은 헬스 클럽에 나가지도, 영어 시험 공부를 하지도 말고 있어보라는 말이다. 그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감각에 문을 여는 것이다. 이런 ‘깊은 권태’의 시간에 접어들어서야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이 시간의 무료함, 불확실함을 견뎌내고 즐기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는 범위를 벗어난 일을 지시받을 때마다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인간, 시스템, 법률도 바틀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이 기묘한 줄거리의 단편은 미국 단편문학 사상 매우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이유를 알겠다. ‘안 하기’는 매우 적극적인, 심지어 혁명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