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에 해당되는 글 2건

  1. 누가 더 과학적인가 <언던 사이언스>
  2. 작가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기, <28> (2)


오랜만에 과학책을 프런트로. 




언던 사이언스

현재환 지음/뜨인돌/248쪽/1만4000원


미국에선 일찌감치 유방암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중년 남성을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한 현대의학 및 과학 연구에서 여성 질환인 유방암이 경시되어 왔다”고 비판해왔다. 반면 의학계 내부에서는 유방암 연구가 제대로 이뤄져 왔음에도 일부 여성 활동가들이 과학에 대해 알지도 못한 채 성차별주의 관념을 내세운다고 반박했다. 결국 ‘나쁜 과학자 집단 대 정의로운 여성운동가들’, 혹은 ‘진실한 과학자 집단 대 히스테릭한 여성들’이라는 이분법적 선악 구도가 유방암 관련 논쟁을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대결 구도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광우병 논쟁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일부 부위를 제외하고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려 했고, 이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대가 연일 광화문 부근을 가득채웠다. 정부와 보수세력은 일부 좌파들이 과학적 진실을 왜곡하고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시위대는 친미적인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다. 양측은 서로 자신들이 ‘과학적 진실’의 담지자임을 주장한 것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특정 목적을 위해 과학적 진실을 오도한다고 여겨지는 집단을 ‘용의자 X’라고 부른다. 과학 논쟁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용의자 X를 찾아낸 뒤, 그에게 소동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용의 선상에 오르는 이는 시국에 따라 정부, 기업, 언론, 좌파세력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시각에 내재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용의자 X론’은 “과학을 오용하는 일부 사람들이 문제일 뿐 과학 자체는 순수하고 가치중립적이며 확실한 답을 제공해 주는 진리의 집합체라는 믿음”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본다. “과학 활동은 사회 바깥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이뤄지고 정치적·문화적·사회적 맥락들이 과학지식 생산과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뭔가 정제되고 독립적이며 순수한 과학적 진리만을 따로 솎아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과학의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학, 너는 비과학'이라고 싸우는 사람들. /뜨인돌 제공


이런 작업을 수행하려면 과학에 대한 고정 관념 혹은 신화를 깰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학자인 쉴라 자사노프는 1990년 ‘규제 과학’(regulatory science) 개념을 제안했다. 규제 과학이란 ‘규제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는 혼종적 영역’이다. 학술과학은 대학 실험실 등의 장소에서 명료한 방법론, 연구자들의 높은 합의 수준, 확립된 기준에 의해 수행되기에 논쟁이 적다. 하지만 규제과학의 결과물은 정부·기업·대중 등 이해 당사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에, 이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과학적 목적 외에 정치적·경제적 목적까지 개입될 수밖에 없는 규제과학은 “다양한 수준의 과학적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을 포함한다.


광우병 관련 논쟁만 지켜봐도 규제 과학의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을 알 수 있다. 당시 정부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의 표준에 근거해 미국 소고기 수입안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OIE의 기준 자체가 소고기 수입국과 수출국들의 치열한 논쟁 끝에 다수결로 결정된 사안이었다. 즉, OIE의 ‘과학적 진실’은 표결에 의한 것이었다.


구제역 대처법을 두고도 큰 논란이 있었다. 구제역 대처법은 크게 봐서 두 가지로 나뉜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살처분 방식을 써온 반면, 다른 유럽 국가나 남미는 백신 접종을 선호해왔다. 상황은 유럽통합 작업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1989년 유럽경제공동체는 구제역 통제 정책의 손익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살처분 비용이 백신 예방접종 비용보다 적게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는 ‘백신을 사용하지 않는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차지해 가축 수출을 늘리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영국과 유럽연합의 살처분 결정은 ‘국익’ 혹은 사회 전체의 ‘공공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공공선은 결국 ‘경제적 이익’을 뜻하는 것이며, 이는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닌 축산업 수출에 관련한 개인 혹은 집단의 이익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공공선을 농촌 환경파괴에 관련된 환경적 관점, 농부들의 정신적 피해나 동물권에 관련된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이겠지만, 살처분은 오직 경제적 관점의 공공선만을 지지할 뿐이다. 저자는 “영국 구제역 사태에서 영국 정부가 내렸던 ‘비합리적인’ 정책적 결정 또한 ‘합리적’인 과학에 기대어 이뤄진 것”이라고 썼다.


과학 논쟁은 섬세하고 미묘하다. 세상엔 분명 악당이 있고 이들이 음모를 꾸밀지 모르지만, 모든 나쁜 일이 특정집단의 계략에 의해 벌어지는 건 아니다. 표면만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이면을 살피면 예상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계산에 의한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정부와 대기업, 그리고 이들의 ‘청부과학자’가 유포하는 과학지식을 의심하고 검증하려는 시도는 당연하고 또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들의 반대편에 선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적 진리로 승인하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언던 사이언스’(undone science), 즉 ‘수행되지 않은 과학’이란 특정 지식이 어떤 사회적·정치적·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생산됐으며 또 무시되고 배제됐는지 살피기 위해 제안된 용어다. 저자는 여러 차례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진술이 “과학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만 ‘왜곡된 과학 대 순수한 과학’ 식의 단순한 이분법, 용의자X를 찾으려는 노력으로는 복잡다단하고 광범위한 과학 논쟁의 판을 읽어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순수한 과학’이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생각이다. 






*약 스포일러


한국 소설을 나오자마자 읽은 것은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일지도 모른다). 정유정의 신작 <28>을 읽었다. 


그의 전작 <7년의 밤>을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모르겠다. 전문적인 평자라면 무엇이든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겐 그럴만한 꺼리가 없었다. 


<28>은 그보다는 할 말이 있다. 정유정은 책 출간을 전후한 인터뷰를 통해 구제역 파동에서 작품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언급했다. 살아있는 소, 돼지 등이 중장비에 매달린 채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던져지는 그 풍경 말이다. 실제로 <28>은 '빨간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창궐한 서울 인근의 가상 소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다. 개와 사람이 동시에 걸리는 이 병은 환자를 2~3일 내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살처분할 수는 없지만, 개는 그렇게 한다. 병에 걸렸든 안 걸렸든, 눈에 띄는 개는 일단 잡아 거대한 구덩이에 파묻어 버린다. 공무원 대신 착검한 소총을 든 군인이 구덩이를 지키고 섰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렇게 산 채로 흙속에 묻힌 개들의 울부짖음이 한참 후까지 들렸다고 작가는 전한다. 


작가는 말하지 않았지만, <28>이 연상시키는 풍경은 하나 더 있다. 아니, 난 구제역보다 이쪽이 더 강한 창작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5.18이다. 


'빨간 눈'의 원인도, 치료 방법도 밝혀지지 않자, 정부는 화양을 봉쇄한다. 작품에는 화양 바깥의 상황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빨간 눈'이 크게 확산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랬다면 화양을 그토록 삼엄하게 봉쇄할만한 병력조차 남아있을 수 없었을테니까. 쉽게 말해 '봉쇄'지만, 이것은 그저 너희들끼리 앓다가 죽으라는 이야기다. 다만 그 병을 바깥으로만 퍼트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화양시민들은 분개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시청 광장에 집결한다. 그리고 평화 시위를 통해 봉쇄선을 뚫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봉쇄중인 군경은 이렇다할 반응이 없다. 이럴 때는 무반응이 가장 무서운 거다. 


1980년 5월의 광주도 그랬을 것 같다. 군사 정권은 광주를 봉쇄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곳의 상황은 광주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외신의 드문 보도로, 전라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의 풍문으로 일부 실상이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주 바깥의 사람들은 모르거나, 모르는 척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과 흐느낌에 귀막고, 그저 자신의 살 길을 찾았다. 화양 바깥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물론 <28>은 광주의 진상을 전하려는 소설이 아니다. 광주 전후의 사회, 정치적 맥락을 알려주는 소설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고립된 도시, 폭력과 약탈과 강간과 죽음이 지배하는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구제역과 광주라는 이질적인 모티브는 <28>에서 서로에게 비교적 잘 녹아들었다. 


작가는 <28>을 쓰다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지리산 자락 해발 700m 암자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16km씩을 걸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편소설을 쓰는 건 체력전이에요. 내가 힘이 세야 이야기를 장악하고 내가 만든 세계에 인물을 풀어놓고 조절할 수 있거든요. 심신이 미약하면 편한 길로 가려 해요. 산을 뚫어야 하는 데 길을 돌아가는 거죠. 힘이 없으면 캐릭터가 제멋대로 돌아다녀요.”(중앙일보 인터뷰)


<28>은 그곳에 들어온 독자를 장악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세계, 인물을 '조절'한다고 했지만, 그 세계에 발딛고 인물의 행동을 따라가는 독자 또한 작가에게 '조절'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런 소설을 두고 '잘 읽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난 작가의 그토록 강력한 장악력이 조금 불편했다. 각자의 극한 상황에 빠진 사람, 동물을 정밀하게 보여준 뒤, "생생하지 않은가.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삶, 느끼지 못한 감정 아닌가"라고 외치는 것 같다. 이런 태도로 쓰여진 글을 읽다보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작가가 등 뒤에서 지시하는 방향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걸 그르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싫다고 중얼거릴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