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630건

  1. 건달과 식당주인과 그 아내와...'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2. 아이돌에 대한 몰입과 거리감 '도쿄 아이돌스'
  3.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4. 이상한 감독, 주연, 투자자, 리뷰어, '서던 리치'
  5. 위대하지도, 굴욕적이지도 않은 삶 '스토너'
  6.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더 포스트'
  7. 서사가 아니라 감각,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8. 전통과 초현대가 공존하는 그곳, '블랙 팬서'
  9. '스타트렉'과 소화가능한 윤리적 딜레마
  10. 메트로폴리스에서 청년이 방 한 칸을 가진다는 것, '프란시스 하' (2)
  11. 어처구니 없는 극우의 스케일,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12. 데이비드 밴의 악스트 인터뷰 중 발췌. 13살때 아버지가 자살한 작가의 이야기.
  13. 오래 살자, 살아서 말하자, '눈먼 암살자'
  14. 에이리언의 기원, '에이리언: 커버넌트'
  15. 예술의 상상력과 정치의 각론 사이의 북한
  16.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기, '특별시민'
  17. 민주주의를 위한 마음의 습관
  18. 영화는 영화다,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19. 조금 달콤, 많이 씁쓸한 '토니 에드만'
  20. 예뻐야 해 뭐든지 예쁜게 좋아
  21. 공주는 없다. '미녀와 야수'
  22. 캐릭터에 대한 존중과 애정, '로건'
  23. 성룡과 블랙리스트
  24. 나와 너의 연결고리, '컨택트'
  25. 검사 영화의 최종판? '더 킹'과 한재림 감독 인터뷰
  26. 사이다는 없다
  27. 질투는 나의 것? '여교사'
  28.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너의 이름은.'
  29. 기자와 작가, '헤밍웨이의 말'
  30. 삶은 고된가, 김훈의 '공터에서'


장강명 작가의 추천으로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민음사)를 읽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권'이니 '명작' 맞겠지? 그런데 내용은 정말 통속적이다. 어느 고속도로변 간이 식당에 우연히 흘러들어온 건달 프랭크가 식당 주인 여자 코라와 눈이 맞아 주인 남자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한다. 둘은 노련한 변호사의 변론으로 살인혐의를 벗고 남편이 들어놓은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낸다. 하지만 프랭크와 코라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둘은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서로에게 묶어둔다. 임신한 코라가 아파 프랭크가 서둘러 차를 몰고 돌아오는 중에 교통사고가 난다. 코라는 앞 유리창 너머로 튕겨나가 죽어버리고, 프랭크는 여자의 살인 누명을 쓴 채 교수대에 오른다. 끝. 

여자의 죽음은 남자가 의도하지 않았기에, 그 살인 혐의를 쓰는건 억울하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을 죽인데 대한 죄값을 치르지 않았으므로, 넓은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마찬가지. 억울해 가슴칠 일도 없고, 운좋다고 기뻐할 일도 없다. 죽으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이 책을 '통속적'이라고 했지만, 그건 비난이 아니다. 난 통속적인 걸 좋아하니까. 통속적인 것은 흔하다는 얘기인데, 어떤 이야기가 흔하게 들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세상의 이야기 패턴이라는 건 많지 않은 듯하다. (아마 문창과에 가면 금방 배울 것 같다) 몇 가지 이야기 패턴을 어떻게 변주하는지, 얼마나 잘 다루는지가 관건일 뿐이다. '마담 보바리'는 얼마나 통속적인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는? '안나 카레니나'도 빼놓을 수 없고. '안나 카레니나'에서 잘 읽히는 건 레빈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집요한 계몽성이 아니라, 안나의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불륜담 아닌가. 



잭 니콜슨, 제시카 랭이 주연한 영화. 영화를 보고 싶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는 대사다. 마치 시나리오처럼, 둘의 건조하고 짤막한 대화가 핑퐁핑퐁 오간다. 자세히 읽지 않으면 대사의 발화자를 놓치기 쉽다. 그런데 이야기를 쓸 때 이런 대사를 구사할 수 있는 건 축복받은 재능 같다. 머리 속의 생각을 50페이지에 걸쳐 풀어놓기는 잘해도, 두 세 줄 대사는 못쓰는 작가도 많다. 장강명 작가에 따르면 케인은 이 소설을 쓰면서 8만 단어였던 초고를 3만5000 단어로 압축했다고 한다. 짧은 글을 길게 늘리면 듬성듬성해지지만, 긴 글을 짧게 압축하면 쫄깃쫄깃하다는 건 글을 만져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레이먼드 카버의 신비로운 단편들도 편집자가 글을 엄청나게 쳐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건달 프랭크의 배경을 알려주지 않은 채 다자고짜 시작하는 도입부도 마음에 들었다. 프랭크는 소설이 시작한 지 불과 10줄만에 작품의 주된 배경인 '쌍둥이 떡갈나무 선술집'에 들어온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살해당하는 조연이, 그 다음 페이지에는 프랭크의 공범자가 되는 미녀가 등장한다. 빠르다. 난 이런 '다짜고짜'가 좋다. 







명성이 자자하던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감독 교코 미야케)를 보다. 소재가 눈길을 끌거니와, 그 소재를 다루는 태도가 좋다. 일본 지하 아이돌과 그들의 팬덤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적절한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소재를 장악하는 동시, 그에 대한 거리를 유지한다. 저널리즘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갖기 힘든 태도다. 

리오라는 지하 아이돌과 그의 팬덤이 중심이다. 팬덤은 주로 남성이다. 팬의 연령과 직업은 다양하다. 대체로 미혼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리오가 여는 소규모 콘서트에 빠짐없이 나오고, 씨디를 사고 또 사고, 악수회에 참여해 악수와 함께 1분 안팎의 대화를 한다. 리오의 인터넷 방송도 매번 시청한다. 한 팬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다 실패한 후,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아이돌을 위해 썼다고 말한다. 

팬은 후회가 없다. 40대에 접어든 한 팬은 생에 이러한 열정은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 10년 뒤쯤에는 여기 저기 아프고 병들텐데, 그 전까지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한다. 일본의 아이돌은 한국처럼 '완성형'으로 데뷔하기보다는, 춤이든 노래든 캐릭터든 어딘가 어색한 상태에서 데뷔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관례인데, '도쿄 아이돌스'의 아이돌들도 그렇다.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어설픈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데, 팬들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응원한다. 예전 '우정의 무대'에서 봤을법한 함성과 일사분란한 응원이 아이돌 무대 앞에서 재현된다. 

젊은 여성 하나를 둘러싸고 수많은 남성들이 소리지르며 응원한다. 무섭거나 기괴할 것 같은데, 막상 이 남자들과 대화하면 대체로 순박하고 쑥스러워한다. 아이돌들도 팬들이 아빠처럼, 오빠처럼 잘 대해준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신체 접촉이 일절 금지돼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악수회'라는 '회색지대'가 생겼다. 아이돌은 청순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팬은 최소한의 성적인 접촉을 할 수 있다. 상상의 연애, 유사 연애가 이뤄진다고 할 수 있는데, 팬들도 이것이 '유사'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아무리 아이돌과 친해져도, 설령 아이돌 팬클럽의 회장이라 하더라도, 아이돌과의 관계가 진짜 연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 



'도쿄 아이돌스'의 중심인물인 아이돌 히라기 리오

'도쿄 아이돌스'는 아이돌과 남성팬의 관계가 현실의 연애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남성팬들은 거추장스럽게 실제 여성과 연애하지 않는다. 현실 연애에서 관계는 천변만화한다. 내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내 호의가 상대에겐 적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연애에선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다반사다. 그 모든 모순과 어려움을 견뎌내야 연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돌과 팬은 그렇지 않다. 돈을 쓰고, 정성을 다하면, 아이돌은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아이돌은 팬이 정성을 쏟는만큼의 정확한 비례로 미소지어준다. 연애란 상대에 대한 독점욕을 동반하지만, 아이돌과의 가상 연애는 팬덤에 의해 공유된다. 팬은 연애의 독점욕을 포기하는 대신, 연애의 정직한 거래를 확보한다. 

연애같은 거 귀찮아서 안해. 대신 아이돌과 가상 연애할래. 사실 이해가는 태도다. 연애는 귀찮다.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론 돈도 든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나 인류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대해 한숨을 쉴 것 같다. 하지만 난 항상 '후세의 일은 후세가 걱정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이 팬들에게 인구 걱정, 인류 걱정을 하라는건 가혹하다. 다만, '도쿄 아이돌스'의 엔딩이 10대 초반 아이돌을 보여주면서 끝난다는 건 기묘하고 아슬아슬하다.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봐도, 이제 초등 고학년이나 됐을 법한 소녀들이 아저씨들과 악수하는 모습은 이상하다. 그런 점에서 '도쿄 아이돌스'의 태도는 이 팬덤에 대해 끝내 비판적으로 보인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다. 산호초는 비유하자면 바다의 숲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먹이를 얻고 생명을 낳는다. 그러므로 산호초가 사라지면 바다 생물도 타격을 입는다. 바다 생물이 줄어들면, 바다 생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죽는다. 영화 속의 한 생물학자는 '한 세대 이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섬찟한 경고를 남긴다. 

산호초가 죽는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기온 1~2도 높아지는게 대수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높아진 기온은 고스란히 해수로 흡수된다.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산호초 같은 생물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 해수의 온도는 비유하면 체온 같다. 36~37인 체온이 38~39도로 높아지면 그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산호초는 지구의 체온 변화 때문에 가장 먼저 아픈 생물인 셈이다.



'산호초를 따라서'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은 한 해상 레스토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자들은 이 레스토랑 사무실에 기지를 차리고 죽어가는 산호초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날 산호초 군락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광색으로 빛난다. 이유를 알아보니 뜨거워지는 해수를 견디다 못해 햇빛으로부터라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산호초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을 목격한 연구자는 충격을 받는다. 장비를 챙겨 해상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데, 손님들은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먹고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구자는 그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당황한다.  

'산호초를 따라서'는 목적에 충실한 영화다. 산호초의 생태와 존재 의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산호초에 빠진 '덕후'들을 보여준다. 런던의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전직한 수중 사진작가, 어렸을 때부터 산호초 분류에만 몰두한 덕후, 해양생물학자들이 나온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데도 미사여구를 쓰거나, 영화의 미학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 영화 내용을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서던 리치: 소멸의 땅'(원제 Annihilation)을 보다. 감독이 '엑스 마키나'의 알렉스 갈랜드라기에 영화가 이상할 줄은 알았는데, 역시 이상하다. 일단 이런 영화 만든 감독이 이상하고, 이 영화 주연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가 제일 이상하다. 찾아보니 제작비 추정치가 4000만 달러 정도 되던데, 설마 회수하겠다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 너무 멀쩡한, 그래서 심심한 영화들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땅을 칠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 아니니 알 바 아니다. 또다시 헛된 꿈을 꾸는 이상한 투자자들이 나타나길 바랄 뿐. 

미국의 한 국립공원 내 등대에 이상한 빛이 떨어진다. 이후 일대는 기묘한 빛으로 어른거리는 파장에 휩싸인다. 정부와 연구자들은 이 파장을 '쉬머'(the shimmer)라고 부른다. 쉬머가 점점 넓어지자 미국인들(아마 세계인들?)은 걱정에 빠진다. 그리고 쉬머 안으로 들어간 정찰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군복무 경험자인 생물학자 리나의 남편 역시 쉬머로 정찰나간 이였다. 1년이 흘러 남편이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온 뒤 곧 쓰러진다. 리나는 심리학자, 지리학자 등 또다른 4명의 정찰대(모두 여성)와 함께 쉬머 안으로 들어간다. 쉬머 안에서는 DNA가 '굴절'돼 동, 식물이 기형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리나 일행의 기억이나 지리 감각도 흐릿해지고, 정찰대는 하나 둘씩 죽거나 사라진다. 찾아보니 동명의 3부작 소설이 한국에서 출간돼있다.  

'지옥의 묵시록'처럼 시작해, '컨택트'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풍으로 해석하면서 끝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혹은 '서던 리치'의 속편이 '언더 더 스킨'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돌아보면 외계인이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지구를 공격해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는 생각은, 외계인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회고라 할만하다.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지난 세기(혹은 현재도 마찬가지) 제국주의 열강을 닮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정확히 예측 가능하고, 그 동기도 분명하다. 하지만 '컨택트'나 '서던 리치'에서 외계인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그마나 '컨택트' 속 외계인의 동기는 선의에 가깝게 해석되지만, '서든 리치'는 그마저도 모호하다. 인류의 입장에선 위협으로 느끼겠지만, 외계인은 인류를 위협하거나 보호할 의사가 없다. 비둘기가 돌을 위협하는가? 바람이 거미를 보호하는가? 의미 없는 질문이다. 비둘기와 돌, 바람과 거미는 다른 차원의 존재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에 대해 무심하고, 각자의 논리대로 존재할 뿐이다. 

감독의 취미인지, 대중적 고려인지 모르겠지만, 쉬머 안에 스릴러 혹은 호러 영화의 장치들이 조금 놓여있다. 그것 때문에 완전히 안심한 채 명상하고 사색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늑대(와 비슷한 생물)와 곰(과 비슷한 생물)이 정찰대를 공격한다. 특히 곰을 무섭게 그리는데 신경을 쓴 듯 보인다. '레버넌트'에서 디카프리오를 찢어발긴 바로 그 곰이 진화해서 '서던 리치'에 나오는 것 같다. 그저 흉포해서 무서운게 아니라, 이 곰이 인간의 목소리를 흡수해 들려준다. 방금 "살려줘!"라고 외치면서 죽은 사람의 "살려줘" 소리가 곰의 목에서 반복해서 들려온다면? 그것도 테이프가 조금 늘어진 듯 기괴하게 변형된 소리로 흘러나온다면? 

'서던 리치' 같은 영화를 보고나면 인식의 틀이 확장됨을 느낀다. 아니, 금세 수정하겠다. 인간의 인식틀이라는 것이 갑자기 확장될리도 없고, 확장되어봐야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확인하는 것 아닐까 . 그렇다면 '서던 리치'를 보고 내가 재확인한 사실은? 인간은 우주의 먼지라는 것. 인간을 이루는 구성물은 언젠가 우주의 일부가 되고, 그때 '나'라는 경계는 무의미하다는 것. 그 사실에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할 일은 없다는 것. 우주의 견지에서 보면 모든 것이 똑같다는 것. 이 영화 보고 이런 생각하는 나도 이상한가요. 










'설레발은 필패'라는 옛 명언이 있지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의 첫 20페이지를 채 읽지 않았을 때, 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리라는 걸 알았다. '스토너'는 1965년 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나, 50년쯤 지난 뒤 재발견됐다. 물론 작가는 1994년 향년 72세로 죽은 뒤였다. 존 윌리엄스의 삶은 소설 속 윌리엄 스토너처럼, 영광스럽지도 그렇다고 굴욕스럽지도 않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한 문단 정도로 요약한 뒤 시작한다. 189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19세에 미주리 대학에 들어간 뒤 영문학을 전공해 그곳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1956년 사망하기 전까지 모교 강단에 섰다. 스토너는 평생 조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고, 학생이나 동료 교수에게 뚜렷하게 기억되지도 않았다. 마치 그가 정성을 다해 썼으나 많이 팔리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처럼, 스토너의 삶은 지구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망각될 것이다. 


그렇게 평범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스토너의 삶을, 작가는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운데다가 간결한 문장으로 담아낸다. 오며가며 10분씩 끊어서 독서를 하기도 했지만, 직전에 읽은 내용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평생 농부로 살줄 알았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결심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해 농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간 스토너를 사로잡은 것은 농사 짓기에 대한 심화된 기술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였다. 듣도보도 못한 소네트에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낀 스토너는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아들을 손에서 떠나보낸 아버지는 스토너의 선택을 무기력하거나 담담하거나 조금 당황스럽게 지켜볼 뿐이다. 


무기력, 담담함, 약간의 당황. 이것은 '스토너'를 지배하는 정조 중 하나다. 스토너의 삶은 마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한귀퉁이의 부품처럼 흘러가버린다. 물론 스토너는 살면서 몇 차례 선택하고 결단했다.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고, 아내 이디스에게 과감히 구혼했다. 친구들과 함께 참전하는 대신 학교에 남았고, 자신의 학생과 연애했다. 같은 과 교수 중 한 명과 숙적이 돼서 수십년간 반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토너 인생의 흐름을 높은 상공에서 살펴보면, 그리 굽이치지 않는 평탄한 시냇물 같을 것이다. 스토너는 그러한 삶을, 마치 지구 반대편 어느 평범한 서민의 삶에 대해 전해듣듯이 담담하게 살아냈다. 어쩌면, 참전해서 훈장을 받을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거나, 학계에 오래 남을 중요한 책을 썼거나, 세상이 떠들석한 연애를 했을지라도 마찬가지다. 높은 상공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도 스토너와 그리 다르지 않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누구나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거의) 대부분 사람의 삶은 스토너처럼, 위대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다. 스토너는 연애 상대인 캐서린의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작스럽게 이런 말로 위로한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그건 스토너 자신의 삶에 대한 요약이기도 했다. 


스토너는 정년연장 옵션을 사용해 학교에 더 남아있으려 하지만, 암에 걸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스토너는 절망하지도, 피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스토너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병상의 스토너는 자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나. 어떤 기대라도 우리 삶 속에서 충족되는 일은 거의 없고, 그래서 기대는 허망한 것이며, 그렇다고 우리 삶을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음을, '스토너'는 들려준다. 







오늘 밤에도 어느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될지 모르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명대사들이 많은데, 최근 발견한 건 이 대목이다. 세관 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빼돌린 압수품인 마약을 처분하기 위해 건너건너 아는 조폭 최형배(하정우)와 접촉한다. 거래를 위해 만나 몇 잔 술을 걸친 최익현은 최형배의 본관, 파, 돌림자 등을 묻더니 대뜸 자기가 최형배의 고조 할아버지뻘이라며, 할아버지를 봤으면 절을 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부하 조폭에게 끌려가 몇 대를 쳐맞는다(이 장면에선 '맞는다'기보단 '쳐맞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최형배는 부하를 제지시키고는 말한다. 


"어이 아저씨.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아버지를 찾아가 위세를 떨며 결국 최형배의 절을 받아내고, 이후 전직 공무원과 현직 조폭은 환상의 호흡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결국 사이가 벌어져 몰락의 길을 걷는다. 


난 얼마전 모 감독의 오디션 중 성희롱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최형배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일하러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오디션을 볼 땐 오디션 얘기만 하면 된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터이고, 좀 더 확장해 배우의 인생관에 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배우의 삶이란 카메라 앞과 뒤가 무 자르듯 나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영화계 현실'을 알려준답시고, 어느 여배우가 어느 감독과 잤다느니, 주연이 되기 위해선 남자를 유혹할줄 알아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오디션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소리'다. 


일하러 갔으면 일을 해야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면서도 난데없이 최형배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물먹은' 기자들 이야기다. 뉴욕타임즈가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베트남전 정책과 관련한 잘못을 폭로한다. 닉슨 행정부는 타임즈를 고소해 그들의 발을 묶는다. 타임즈에 물먹은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벤(톰 행크스)은 부들부들 떨면서 어떤 기사로든 낙종을 만회해보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포스트의 경영자인 캐서린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캐서린은 주식시장 상장, 정부와의 관계, 회사의 장기적인 생존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을 추동하는 최초의 힘은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도, 위험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도,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미국 청년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벤이 일하도록 몰아부치는 것은 라이벌 언론사에 대한 경쟁심이다. 벤은 타임즈의 에이스 기자가 몇 달 째 기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초조해한다. 해당 기자가 분명 엄청난 특종을 준비중이라고 예상하고, 그 기사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꼼수까지 쓴다. 마침내 타임즈가 '펜타곤 페이퍼' 특종을 내고 며칠 연속 관련 내용을 보도하자, 벤은 산하 기자들에게 히스테리를 폭발시킨다. 언론에 몸담은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유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손 쓸 방법이 없다. 해당 보고서를 입수하기 전까지는 별 수 없이 경쟁사의 단독 기사 행렬을 감수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자의 마인드로 볼 때, 이런 상태는 치욕이다. 벤은 보고서를 입수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고, 마침내 포스트에는 비행기 일등석을 탄 보고서 일부가 도착한다. 이제서야 포스트 기자들은 살맛을 느낀다.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것이 진짜 볼멘소리는 아님을 누구나 안다. 


캐서린은 고민한다. 포스트가 쓰려는 기사는 캐서린의 오랜 친구인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을 괴롭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언론사 사주로서의 입장과 인간적인 우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벤도 직업 윤리와 인간 관계 사이에서 갈등한 적이 있었다. 벤은 JFK 부부와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기자와 취재원이 아닌,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음을 결정적인 순간 깨닫는다. 



캐서린은 포스트의 이사, 변호사, 기자 사이에 둘러싸여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평생 직업을 가질 일이 없던 캐서린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포스트 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나, 진정한 리더가 되진 못한 상태였다. 모든 것을 내건 결정을 내리고서야 캐서린은 진짜 경영자가 된다. 



벤이 법정에 나란히 선 뉴욕 타임즈 관계자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라이벌 의식과 동업자 의식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결국 일은 일이다.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고 '더 포스트'는 말한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직업윤리'의 고귀함 정도가 되겠다. 기자가 기자 윤리에 충실하고, 공무원은 공무원 윤리에 충실하며, 정치인은 정치인 윤리에 충실하면 된다. (조폭의 윤리, 사기꾼의 윤리는 말하지 말자) 지난해의 영화 '택시 운전사'도 결국은 택시 기사로서의 윤리에 충실했던 한 남자를 영웅으로 삼은 영화다. 두말할 것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는 영화인으로서의 윤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스포일러 있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서사가 아니라 감각의 영화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해서 쉽게 요약된다. 말 못하는 청소부 엘라이자가 양서류 괴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끝.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이들의 사랑을 돕거나 방해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료 청소부 젤다와 이웃집 게이 화가 자일스가 엘라이자를 돕고, 실험실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를 방해한다. 과학자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 사이에 끼어있다. 여기에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추근대는, 약간의 변주를 넣었다. 그래서 엘라이자-괴물-스트릭랜드의 삼각 관계가 조성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기능적으로 보인다.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끌리는 과정이 매끈하지 않을 뿐더러(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섹스하며 아내의 입을 틀어막는 장면, 즉 조용한 여자를 좋아하는 스트릭랜드의 성적 취향이 유일한 단서인데, 좀 뜬금없다), 이 대목은 엘라이자와 스트릭랜드의 대립을 강화하는 '수단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느낌이다.



'괴물' 역의 더그 존스는 양서류를 닮은 피조물로 자주 등장한다. '헬보이'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등등. 


마이클 섀넌과 샐리 호킨스의 팽팽한 열연. 



대신 '셰이프 오브 워터'는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한다. 주인공 엘라이자가 듣기는 하지만 말하진 못하는 장애인이라는 설정이 도움된다. 물소리, 발소리, 차소리, 텔레비전 소리 등이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어도 꽤 즐거울 것 같다.) 영미권 작곡가와는 작곡의 결이 다른 알렉산드르 데스플라의 복고적인 음악도 이 소리의 향연에 한몫한다. 엘라이자는 내내 수어로 대화하다가, 종반부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의 방식으로, 벼르고 별러 찍은 느낌이다. '라라랜드'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런 뮤지컬 장면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싶다.    


'동화같은 영화'라고 쉽게 말하기엔 표현 수위가 조금 높다. (당연히 청소년관람불가다) 초반에는 엘라이자의 자위 장면, 후반에는 엘라이자와 '괴물' 사이의 이종 섹스 장면이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폭력의 수위도 높아진다. 스트릭랜드가 호프스테들러의 총에 맞은 볼 안쪽의 입으로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기는 장면은 기예르모 델 토로식 잔혹 취미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얼굴 찢는데 취미가 있는지, '판의 미로' 때는 스페인 파시스트 군인의 볼을 찢은 적이 있다)


엘라이자 역의 샐리 호킨스, 스트릭랜드 역의 마이클 섀넌이 좋은 배우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들의 연기는 한국 관객, 감독이 좋아하는 방식의 열연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섀넌은 박찬욱이 연출하는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에 캐스팅됐다. 아울러 샐리 호킨스는 물론 좋은 배우지만,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그를 주연으로 삼은건 모험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영화가 한국 언론 시점에는 블록버스터지만, 미국에선 20세기 폭스가 아니라 그 산하 스튜디오인 폭스 서치라이트가 제작한 1900만달러 제작비의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블랙 컬쳐는 쿨하다. ('흑인 문화'보다는 '블랙 컬쳐'가 쿨해 보여서 그렇게 표현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감수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블랙 컬쳐는 쿨하고 쉬크하고 모던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블랙 컬쳐는 미국 대중문화의 한 줄기임에는 분명했으나, '주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국에선 물론이다. 유색인종인 한국인들이 다른 유색인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밀도 아니니까. 


분위기가 바뀐 건 힙합의 인기와 맞물린 듯하다. 지금 힙합은 대중음악의 확고부동한 중심 장르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쇼 미 더 머니'다. 그 서브 컨텐츠인 '언프리티 랩스타'나 '고등래퍼'까지 인기 있으니, 반면 록을 중심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 '탑밴드'는 어땠나. KBS라는 공영방송의 형식적, 감성적 한계가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탑밴드'는 한 마디로 '구렸다'. 내가 수십년간 록을 좋아했지만, '탑밴드'를 보면서 구리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방송에서 재현되는 록에선 더 이상 신선하거나 세련되거나 쿨한 무언가를 느낄 수 없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인터뷰 방식, 옷매무새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조금 슬펐다)


연휴기간중 '블랙 팬서'를 봤다. 또 마블 영화다. 사실 영화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마블의 최근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재치,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각 효과적 도전이 없었다. 상영시간이 134분에 달하는데 이야기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 팬서'엔 다른 강점이 있다. 흑인 배우가 대부분의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그것도 미국 바깥 시장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는 배우들이다. 이건 블랙 컬쳐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쿨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자신감이다. 


배경은 서부 아프리카에 있다는 가상의 왕국 와칸다. 국제 사회에서는 '세게 최빈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와칸다는 우주에서 온 금속 비브라늄을 사용해 막대한 부와 첨단 기술을 축적한 국가다. 이곳의 생활수준과 이를 떠받치는 테크놀로지는 동시대 지구 어느 국가도 능가한다. 다만 와칸다는 국제 사회에 자신의 실체를 숨긴 채 자족적인 삶을 즐긴다. 외교적으로 일종의 '고립주의'다. 이들의 고립주의는 나중에 원로와 젊은 세대의 갈등 요소가 된다. 



전통과 초현대가 뒤섞인 '블랙 팬서'의 소품과 의상들. 저 망토를 펼치면 방패가 된다. 


재밌는 건 와칸다가 미래의 테크놀로지를 선취한 나라이면서도, 아프리카의 전통적 이미지(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여전히 간직한 나라라는 점이다. 와칸다는 왕정 국가이며, 왕위는 부계의 장자가 세습한다. 왕이 되기 위해선 와칸다의 주요한 여러 부족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대일 결투로 완력을 증명해야할 때도 있다. 도전자와의 결투에서 이기면 정당하게 왕위를 이어받는다. 부족의 원로들은 아프리카의 전통 의상을 입고 회의에 참여한다. 와칸다 국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창을 든 민머리 여인들인데, 이들 역시 전통에 기반한 의상을 입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총을 미개한 무기라고 여긴다. 왕은 신비한 허브로 만든 약을 마시고 '블랙 팬서'의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이 허브의 성분은 물론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과 초현대, 첨단 정보통신 기술과 고래로부터 내려온 신비의 영약이 공존하는 곳이 와칸다 왕국이다. 


과거였으면 아시아의 어느 국가에 이런 설정을 넣었을 것이다. 사실 '닥터 스트레인지'나 '배트맨 비긴즈'가 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그리긴 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한 나라 전체가 이렇게 묘사된 적은 없었다. 그건 이미 20세기 초 세계 열강에 든 일본은 물론,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과 중국이 더 이상 '신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에 '신비의 영약'이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꽁꽁 숨어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블랙 팬서'는 블랙 컬쳐의 근원인 아프리카의 전통을 '쿨'하게 그리면서도, 아프리카가 처한 저개발의 현실에서 나온 이미지를 교묘히 활용하는 영화다. 그래서 '블랙 팬서'의 시선은 어딘지 이중적이다. 아울러 아직 아시아계 슈퍼히어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블랙 컬쳐가 아시안 컬쳐보단 주류가 되었거나 주류에 거의 근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스타워즈'는 신화적이고 '스타트렉'은 철학적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금 유보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두 시리즈에 대한 팬덤이 너무나 강력해 뭐라고 함부로 말을 보태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조셉 캠벨이 잘 지적했듯 '스타워즈'는 신화에서 볼법한 오랜 영웅 서사를 담았다.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소명을 깨닫고 머나먼 여정에 나서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난을 당했다가, 결국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베이더 부자의 오이디푸스 궤적도 엮여있다. 요즘 나오고 있는 시퀄 시리즈에선 고아 소녀 레이에게 루크의 궤적을 따르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조금의 뒤틀림을 줬는데, 이 때문에 팬덤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다고도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구조에 기반한 '스타워즈'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왕, 귀족, 기사, 유목민의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스타트렉'의 등장인물은 기본적으로 군인, 과학자, 탐험가다. 행성연방 소속의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 대원들은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는데, 그 과정에서 연방에 대항하는 적들을 만나 전투를 벌이거나, 미지의 행성 종족들의 낯선 풍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함선의 명칭과 대원들을 달리 하며 몇 차례의 시리즈가 이어져온데서 알 수 있듯, '스타트렉'에는 '스타워즈'에서 보이는 '중심 서사'랄 것이 없다. '스타트렉'은 기본적으로 단막극에 가깝고, 각 에피소드에서 각자 사건을 해결하고 윤리적 교훈을 주곤 한다. '스타워즈'는 전편을 보지 않으면 다음편에 정붙이기 어렵지만, '스타트렉'은 그 연계성이 희미하다. 


새로운 '스타트렉' 텔레비전 시리즈인 '스타트렉: 디스커버리'가 15개의 에피소드로 최근 끝났다. 두번째 시즌도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디스커버리'에는 몇 가지 새로운 설정이 있었다. 시리즈 최초로 선장이 아닌, 대원이 주인공이다. 게다가 그 대원은 반역죄를 저질렀다가 일시적으로 사면된 흑인 여성이다. 이 여성의 이름은 남성적인 마이클 버넘이다. 마이클이 보필하던 선장 필리파 조지우도 여성(양자경)이다. 조지우의 상급자인 제독도 여성이다. 남성은 악당이거나, 조력자 정도다. 중요한 또다른 남성 캐릭터가 있는데, 암시적이었던 예전 시리즈와 달리 동성애자임을 확실히 드러낸다. (동성 간의 키스신이 있다)


'디스커버리'는 9편까지 잇달아 방영되었다가 잠시 휴방후 10편부터 다시 방영되었다. 그리고 10~15편은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9편 마지막에 디스커버리호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기 위해 스포어 점프를 시도하는데, 이후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한다. 디스커버리호가 도착한 곳은 일종의 평행우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디스커버리호가 위치했던 우주와 정확히 같은 인물들이 살고 있지만, 역사는 전혀 달리 진행된 곳이다. 현우주의 인간이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연방제를 추구한다면, 평행우주의 인간은 무력에 근간한 독재, 제국을 구성하고 있다. 현우주에서 민주적인 리더십의 선장 필리파가, 평행우주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의 황제다. 디스커버리호는 우여곡절 끝에 현우주로 돌아오지만, 그 사이 연방은 숙적 클링온의 기세에 밀려 전쟁에 거의 진 상태였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마이클이 현우주로 충동적으로 데려온 평행우주의 황제가 유용해진다. 연방은 평행우주의 독재자 필리파의 리더십을 빌리려 한다. 필리파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포로에 대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다. 승리,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상과 원칙에 어긋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 미국이 좀 더 효율적인 대테러전을 수행하기 위해 도입한 '강화된 심문기술' 같은 것. 


물론 '디스커버리'는 청소년도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시리즈. 파국적이고 암울한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건 '스타트렉' 시리즈의 이상적이고 희망차고 낙관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으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은 정당화되는가'라는 윤리학의 오랜 딜레마를 슬쩍 던졌다가 회수하는 솜씨는 미국의 텔레비전 시리즈가 허용하는 적절한 수준이다. 시즌 2를 보고 싶다.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의 주인공 마이클 버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역력하다. 

현우주에선 자애로웠던 필리파 조지우 선장이 평행우주에선 무자비한 황제로 등장한다. 양자경이 상반된 역할을 잘해냈다. 솔직히 황제 역은 최고였다. 


뒤늦게 노아 바움벡의 '프란시스 하'(2012)를 보다. 감독 바움벡과 주연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 이후 좋은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바움벡의 최근작 '마이로위츠 스토리'는 지난해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거윅의 연출 데뷔작 '레이디 버드'는 지난해 각종 시상식에서 가장 각광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바움벡하고 거윅은 지금 사귀고 있대나 어쨌대나. 


'프란시스 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흑백영화다. 20대 후반의 프란시스는 현대무용가, 그의 절친인 소피는 출판 편집자다. 하지만 아직 입지가 확고하지는 않다. 프란시스는 일종의 연습단원으로 겨우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상태다. 생활비 비싼 뉴욕에서의 생활은 당연히도 쉽지 않다. '프란시스 하'는 그래서 현대 대도시 청년 1인 가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프란시스는 소피와 함께 살기 위해 남자친구의 동거제안을 거부한다. 이를 계기로 프란시스와 남자친구는 헤어진다. 하지만 소피는 임대 계약이 끝나자 평소 동경하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 한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프란시스는 꽤 부유한 두 남자 사람 친구의 집의 방 한 칸에 자리잡지만, 그마저도 일시적이다. 무용가로서의 프란시스의 커리어는 피어날 기색이 없고, 그에 따라 프란시스의 주거 환경도 점점 열악해진다. 결국 프란시스는 오래전 떠난 대학의 기숙사로 돌아가는 신세가 된다. 이곳에서 프란시스는 행사 알바로 연명한다.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의 패러디.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배경음악으로 깔릴 때, 프란시스가 도심을 달려간다. '나쁜 피'에서 드니 라방은 오른쪽으로 달려가지만, 프란시스는 왼쪽으로 달려간다는 점이 다를뿐. 바움벡은 이 영화에서 '프랑스빠'임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영화 포스터로 쓰인 장면. 사실 영화에선 정말 짧게 스쳐간다. 


랜덤하우스 편집자는 왼쪽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제목인 '프란시스 하'란 프란시스가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뉴욕에서 얻어낸 자기 집 우편함에 끼워 넣은 이름이다. 풀 네임은 '프란시스 할러데이'인데, 우편함의 이름 적는 곳이 부족해 종이를 접다보니 '프란시스 하'로 끝났다. 이 이름이 보여주듯 부족한 것 많은 집이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차지한 프란시스의 표정은 뿌듯하다. 다 적히지 않은 이름을 보여주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간다. 귀엽고 적절하고 재치있는 엔딩이다. 


그래서 이 엔딩은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청년이 집값 비싼 도심에서 자기만의 번듯한 공간을 얻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 청년이 몸담고 있는 분야가 그 어느 곳보다 성공 가능성이 적은 예술 분야라면. 프란시스가 무용단의 행정직으로 일하며 틈틈이 만든 안무작을 작은 무대에 올리고, 그 공연으로 주변 사람에게 격려받는 엔딩은 소박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난 비슷하게 해피엔딩이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호하게 처리된 한국영화 '4등'의 결말부가 좀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프란시스 하'가 현실과 무관한, 억지스러운 가짜 엔딩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난 '프란시스 하'가 좋았고, 때로 자기 자리에서 분투하는, 집정리를 안하고 얼렁뚱땅하고 철부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어깨를 토닥이는 연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태도가 정말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열린책들에서 야심차게 콜렉션을 내놓은, 하지만 판매실적은 신통치 않다는 풍문을 전해들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유문화사)을 읽다. 볼라뇨는 "스탈린과 딜런 토머스가 죽은 해"인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났고 2003년 대작 '2666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1996년 발간됐는데, 비평계에서는 찬사를, 독자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일 때문에 접촉한 모 소설가의 추천으로 손에 들게 되었다. 그 소설가는 연재를 타진하기 위해 샘플 원고를 보내왔고 나는 그 원고가 좋았으나, 여러가지 사정상 게재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매체에서라도 소설가의 후속 작업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북미, 남미에서 20세기 이후 활동했던 극우 작가의 인명 사전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물론 이 작가들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 인물이지만, 이들의 삶과 문학은 실제의 역사, 문학과 교묘하게 교차되어 있다. 볼라뇨는 '극우'의 스펙트럼을 폭넓게 사용한다. 한국적 관점에서 '극우'라 보기 어려운 이들도 이 사전에 포함시킨다. 예를 들어 에델미라 톰슨 데 멘딜루세(1894~1993)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사회의 귀부인으로 목가적이며 종교적인 시와 에세이를 쓰는 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글을 쓴 적은 드물었으나 오히려 정치적으로 공허하고 무뇌의 글을 썼다는 점에서 영예의 극우 문학인 사전에 등재된다. 이탈로 스키피아노와 아르헨티노 스키피아노 형제는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극렬한 서포터였는데, 평생 축구장과 관련한 폭력, 그리고 이를 선동하는 글을 발표하며 살고 죽어 이 기묘한 사전에 올랐다. 


전체적으로는 풍자적이고 블랙코미디적인 서술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접근하는 척 하면서도 결국은 엉뚱하고 통렬하다. 예를 들어 '작가는 평생을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으나 돌아온 반응은 거의 없었고, 그의 수천페이지짜리 소설은 결국 허풍이거나 허섭쓰레기였다'는 투의 서술이다. 어처구니 없는 작가들의 삶이 간략하게 나열돼 있지만, 바로 그 어처구니 없음의 스케일 때문에 키득거리며 읽게 되는 것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다. 



1966년 미국 알래스카주 아다크 섬에서 태어난 작가 데이비드 밴의 인터뷰 중 발췌.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 15호에 실림. 작가가 13살 때 아버지가 자살. 국내에는 '자살의 전설' '고트 마운틴' '아쿠아리움' 등이 출간.



"대부분의 작가는 (적어도 초기작에서는) 개인사와 가족 이야기를 끌어다 쓴다. 그 소재에는 무게와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 나는 학생들에게 "가족을 제단에 올려놓고 도끼를 휘두르라"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쓰는데, 그리스인들은 가족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현대의 치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망가졌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


"역경은 품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일부러 역경을 선택하는 것은 피학적일 것이다. 차라리 품성을 덜 발달시키고 편하게 사는 편을 택하겠다."


"(소설의 소재를 어디서 찾는지 질문에)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소재를 찾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저절로 떠오르거나 안 떠오르거나 둘 중 하나다."


"미국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며 바보들의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 발행인, 에이전트, 서평가, 사서 등 문학을 홍보하는게 일인 사람들조차 새로운 문학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저 행운을 빈다. 번역 시장도 민망한 수준이다. 미국인들은 바깥 세상에 관심이 없으며 다른 나라의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비극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말은 옳다. 어느 정도는 고통이 우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관점을 바꾸는데, 관점이야말로 문학의 핵심이다. 경험을 통해 인물의 관점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문학의 본질이다."


"글쓰기를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다른 무엇도 글쓰기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누이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당신과 엄마, 내 아내를 사랑하지만 -당시는 이혼하기 전이었다- 글쓰기를 더 좋아하며 나 자신보다 글쓰기가 더 좋다고 말이다.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었다. 글쓰기는 내게 종교의 대체물이 되었다."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2000년작 '눈먼 암살자'(민음사)를 읽다. 작가가 61세에 집필한 작품이다. 한국 번역본으로 두 권, 900쪽에 육박하는 묵직한 분량이다. (덕분에 추석 연휴 전에 시작해 지금까지 읽었다) 분량만으로만 봐도 작가 후반부의 역량이 집대성된 작품이라 여겨진다.  


액자 안 액자 소설 구조다. 82세의 아이리스 체이스 그리픈이 말한다. 아이리스는 유복한 단추공장 사장의 손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참전군인이었던 아버지대에 이르러 사업은 조금씩 쇠락기에 접어든다. 아이리스는 결국 10대 후반의 나이에 신흥 사업가인 리처드와 일종의 정략 결혼을 했다. 부와 함께 명예를 중시하던 아버지와 달리, 리처드와 그의 여동생 위니프리드는 속물적인 졸부였다. (애트우드는 이 남매의 한심한 행각을 신나게 놀린다) 타협적인 아이리스와 달리, 동생 로라는 리처드의 속물성에 반항한다. 스페인 내전, 2차대전 등을 거치며 사업은 부침을 겪고, 아이리스와 로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정 안팎의 파고에 맞서 나간다. 이 이야기 안에는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로라가 남긴 소설 '눈먼 암살자'가 포함돼 있다. 로라는 이 소설 한 편으로 당대에는 논란이 됐고, 후대에는 불멸의 작가가 됐다. '눈먼 암살자'는 부유층 여성이 노동운동가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내용이다. 노동운동가는 여성에게 우주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SF를 들려준다. 여성은 때로 이 SF의 이야기를 이어 자신만의 이야기로 꾸며낸다. 이것이 액자 안 액자 소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1939~)



이 복잡한 구조는 매우 지적이고 정교하다. 액자와 액자의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고, 간혹 삽입되는 가상의 신문 기사는 사건의 전후맥락을 건조하게 안내한다. 신흥부자이자 속물적 허영을 가진 남편과 전통부자이자 귀족적 정신을 가진 아내의 불화로 가득찬 결혼생활 묘사는 익숙해서 새롭지는 않다. '눈먼 암살자'가 나온지 17년밖에 안된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액자 가장 바깥의 이야기는 상당히 고풍스럽게 읽힌다. 


20대에 요절한 로라는 물론, 숙적 같던 리처드와 위니프리드가 모두 죽은 뒤, 노년의 아이리스는 차분히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제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에겐 입이 없기에, 역사의 주도권은 아이리스에게 있다. 소설은 노년의 아이리스가 걷거나 먹거나 하는 일상생활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몇 차례나 묘사하지만, 기억하고 말하는 능력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일생을 힘겹게 살아왔을지언정, 적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아이리스는 승자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권력이나 돈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아이리스의 특권이기에, 아이리스는 그것을 마음껏 누린다. 


물론 특권은 남용되선 안된다. 그리고 내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끝없이 하는, 그러면서 그 말에 과도한 확신을 담은 노인들이 자꾸 떠오른다. '눈먼 암살자'도 그런 소설일까. 아이리스는 불특정다수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종반부에 가면 청자가 특정돼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래서 '눈먼 암살자'의 이야기는 한껏 부풀었다가 겸손하게 수그러든다. 난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청자, 넓게는 후속세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나지막한 조언도 좋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성자, 수십 개의 출신 국가, 수십 개의 취소된 지도, 수백 개의 파괴된 마을들, 네 마음대로 고르렴. 그로부터 네가 물려받은 유산은 무한한 추론의 영역이다. 너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단다



재미 없지는 않지만, 기대만큼 좋지도 않은 '에이리언: 커버넌트'. 


여섯 번째 ‘에이리언’ 시리즈인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갓 깨어난 인공지능(AI)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와 그의 창조자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의 대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피아노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고, 차도 만들 줄 아는 데이비드는 자신의 창조주에게 문득 묻는다. “누가 당신을 창조했습니까?” 

42세에 전설적인 SF호러영화 <에이리언>(1979)을 만든 감독 리들리 스콧(80)은 30여년이 흐른 뒤 <에이리언>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2012)로 돌아왔다.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 이후의 상황을 그린다. 우주 식민지 개척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머나먼 목적지로 향하던 커버넌트호는 비행 도중 사고를 당한다. 예상보다 일찍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승무원들은 목적지 대신 인간이 살기에 적합해 보이는 근처의 또 다른 행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공포를 경험한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시도했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초기 시리즈로 돌아간 듯 에이리언과 인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과 살육전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스콧은 순수한 추격전과 폭력의 쾌감을 전시하는데서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1편 이후 3편의 후속작 <에이리언 2>(제임스 카메론·1986), <에이리언 3>(데이비드 핀처·1992), <에이리언 4>(장 피에르 주네·1997)가 더 제작됐지만, 그 어떤 영화도 내가 1편에서 던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데이비드가 인간의 기원에 대해 묻듯, 스콧 역시 자신이 창조한 에이리언 세계의 시발점을 궁금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악당이 기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성장 배경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지만, 철창 뒤의 한니발이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에게 몇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무서웠다. 1편 제작 당시 <에이리언>을 소개하는 마케팅적 설명은 ‘우주의 죠스’였다. 밀폐된 우주선 안에서 에이리언과 인간은 숨막히는 생존게임을 벌였다. 그때 에이리언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있었을까. 죠스가 왜 사람을 공격하는지, 죠스의 어미는 누구인지, 혹시 죠스가 핵실험에 의해 생긴 돌연변이는 아닌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AI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간적 감정까지 표현하는 AI 데이비드, 좀 더 이성적인 AI 월터로 1인 2역을 하는 마이클 패스벤더의 이름이 배우 중 제일 처음 등장한다. 인류 최고 과학기술의 결집인 AI와 인류의 힘을 능가하는 괴생명체인 에이리언이 만나는 셈이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과 미묘하게 다른 AI 패스벤더의 연기는 소름이 끼친다. 에이리언들이 인간의 육체를 갈가리 찢고, 피와 살과 뼈를 분리하는 풍경은 이 시리즈의 시각적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끔찍한 풍경이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충분히 즐길 만한 수위를 유지하는 데서는 스콧의 노련함이 느껴진다. 9일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결말 보고 당황한 '길소뜸', 영화화 생각하면서 읽은 '우리의 소원은 전쟁'. 실제로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영화제작중이라고. 


통일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초등학교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정작 소원 빌 일이 있을 때 ‘통일’이라고 말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애니메이션 <똘이장군>을 본 기억도 어렴풋이 나는데, 북한의 공산주의자가 사실 알고 봤더니 돼지나 늑대였다는 내용은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유치했다. 텔레비전에 북한 관련 소식과 북한 방송 내용을 전해주는 <통일전망대>란 제목의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같다. 제작진께는 죄송하지만, 요즘도 이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야 알았다. ‘일요일 오전 6시10분’이라는, 평범한 의지의 인간이라면 시청을 장담할 수 없는 방영시간만 탓해본다. 대학 시절엔 통일 문제에 특히 관심 많은 학우들이 있긴 했으나, 그 수가 줄어드는 추세였을뿐더러 친해질 기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화석화한 인식의 틀을 사정 없이 부수곤 한다. 지난달 26일부터 오는 6일까지 열리는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그중 <길소뜸>(1985)은 송길한과 명콤비였던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흔히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막상 보면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화영(김지미)은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을 보며 전쟁 중 헤어진 연인 동진(신성일)을 생각한다. 화영은 임신해 아이를 낳지만, 전쟁 중 동진과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다.




화영과 동진은 ‘이산가족 찾기’ 이벤트 덕에 재회한다. 둘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나서고, 유력한 남자를 만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거지떼를 따라다닌 남자는 화영, 동진같이 안온한 중산층 남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혈액검사 결과 남자는 둘의 아들임이 거의 확실해지지만, 화영은 “100%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동진이 아들일 게 뻔한 남자에게 “가끔 연락이나 하고 지내자”고 하자, 남자는 “하루 벌어 먹고살기 힘든데 그럴 시간이 어딨냐”며 가버린다. 동진 역시 화영의 연락처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생이별했던 가족이 30여년 만에 만나는 모습에는 목석 같은 사람도 눈물을 참기 어렵지만, 송길한과 임권택은 대담한 상상을 시작한다. 그 만남은 결국 행복할까. 30여년이란 세월은 사람의 마음, 생각, 습관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었을까. 피만 섞였을 뿐,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산 사람은 사실상 남이 아닐까. 같은 나라 안에서 떨어져 살던 사람의 결합도 이렇게 힘든데, 두 나라의 결합이 가능하긴 할까. 옳든 그르든, 이 질문은 필요하다.

장강명은 최근 가장 각광받는 한국의 젊은 소설가다. 신문기자 신분으로 뒤늦게 장편 데뷔작을 낸 그는 아예 언론사를 떠난 뒤 1년에 2~3편의 장편을 써내는 괴력을 보이고 있다. 그가 지난해 펴낸 <우리의 소원은 전쟁> 역시 통일 문제를 다룬다. ‘김씨 왕조’ 체제가 붕괴하자, 북한에는 통일과도정부가 들어선다. 통일과도정부는 즉각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핵사찰을 받아들인다. 미국은 휴전선 이북으로, 중국은 압록강 이남으로 내려가지 않기로 상호 합의한다. 북한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된다. ‘조선인민군’은 ‘조선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꾼 뒤, 김씨 왕조 체제의 최대 수출품이었던 마약을 독점 공급하는 범죄조직이 된다. 이들은 넘쳐나는 마약을 새로운 시장인 한국에서 판매하려 한다.

이 소설 속 북한은 마약 조직의 힘이 군대 또는 경찰보다 더 센 중남미의 어느 국가처럼 보인다. 중남미 사람들이 미국 국경을 넘어 영주권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하듯, 초토화된 북한의 주민들은 자본주의 한국으로의 이주를 꿈꾼다. 한국에는 북한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인종주의가 발흥한다.

앞에서 통일이든 북한이든 남의 일처럼 얘기했지만,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으로, 미국은 막강한 무기를 한반도 안팎에 배치하는 것으로 불안감을 조성한다. 소셜미디어에는 수시로 “곧 전쟁이 난다”는 풍문이 떠돈다. 실제 북한의 성명이나 미국 정치인의 말만 들으면 곧 전쟁이 터질 것 같다. 그 무서운 말들이 모두 ‘협상용 허풍’일 가능성도 없지 않겠지만, 그 허풍은 우리의 불안감에 젖줄을 대고 또 부풀린다.

19대 대선이 1주일도 안 남았다. 사드를 배치하자 말자, 북한과 대화를 하자 말자, 한국에 전술핵을 들이자 말자 후보 사이에 논쟁이 오간다. 하나같이 중요한 논쟁거리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엔 각론을 넘어선 비전이 필요하다. 사드를 배치하는 궁극적 목적, 북한과 대화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정치인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대선후보들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가.




아이디어라든가, 개봉시점이라든가, 괜찮았으나, 결과적으로 흥행은 미적지근.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표현하지만, 막상 선거를 치르는 후보와 참모들은 ‘꽃길’을 걷지 못한다. 선거전(選擧戰)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오늘날의 선거는 ‘전쟁’에 가깝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각 개인의 목소리가 증폭되는 요즘 세상에선 선거 캠프 바깥의 유권자까지도 이 전쟁에 뛰어들곤 한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특별시민>에선 더 원색적이고 색다른 표현을 쓴다.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는 거야. 손에 똥 안 묻히고 진주 꺼낼 수 있겠어?”(변종구 캠프 선거대책본부장 심혁수)

박인제 감독은 3년 전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촬영 기간은 지난해 4~8월이었다. 그땐 천하의 용한 점쟁이라도 19대 대선이 2017년 5월 치러질 것이라고 예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새자유당 소속 변종구(최민식)는 민선 3선에 도전하는 서울시장이다. 3선에 성공하면 청와대까지 노릴 기세다. 변종구는 정치공작의 달인 심혁수(곽도원)를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영입해 우세를 이어나간다. 젊고 패기 있는 광고인 박경(심은경)도 기발한 캠페인으로 변종구 캠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판세는 혼란에 빠진다. 상대 후보인 인권변호사 출신의 다함께미래당 양진주(라미란)는 미국 유학파 ‘엄친아’인 아들 스티브 홍(이기홍)까지 불러들여 치열한 추격전을 벌인다.

이념, 돈, 복수심, 승부욕, 권력, 열정, 미신이 뒤섞인 선거전 자체가 상업영화의 소재로 사용되는 건 자연스럽다. <특별시민>을 보면, 선거 열기가 유독 뜨거운 한국에서 왜 지금까지 ‘선거영화’가 안 나왔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특별시민>은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는 데서 시작해, 선거 결과가 나오는 데서 끝난다. 선거 이전과 이후를 거두절미한 선택은, 선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인다.




과연 <특별시민>은 선거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변수들을 재현한다. 지하철 공사장 인근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각 후보 진영은 그 책임 소재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가족 문제도 불거진다. 변종구의 부인은 고가의 미술품을 샀다는 의혹을 받는다. 미술품 구입 자체가 범죄는 아니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은 후보자는 물론 그 주변 인물에게도 고결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양진주 진영도 마찬가지다. 양진주의 아들은 미국 변호사이자 자전적 에세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유명인이지만, 그를 유세에 활용하면 후보자의 이혼 문제, 아들의 국적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자신의 장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선거전에서 “어떤 서울을 만들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라진다. 변종구와 양진주는 모두 ‘승리를 위한 승리’를 추구하는 검투사들처럼 보인다. “일단 이기자”고 생각하는 이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은 공식적인 캠페인을 넘어, 도청하고 협박하고 증거를 인멸하고 검은돈을 쓴다.

다만, 선거의 다양한 변곡점들이 차곡차곡 쌓여 절정에 오르기보다, 평평하게 나열된다는 점은 문제다.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가 해결되고, 다음 변수가 발생했다가 또 해결되는 식이다. 매회 다른 에피소드를 다루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였다면 이런 방식이 어울렸겠지만, 상영시간 130분짜리 상업영화의 호흡으로서는 능란하지 않다. 각 에피소드의 성긴 틈새를 잇는 것은 최민식, 곽도원, 문소리(정치부 기자 정제이 역) 같은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다. 정치인을 ‘악마화’하거나, 설익은 계몽주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도 <특별시민>의 장점이다.

최민식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엔딩은 혐오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다. 18일 서울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최민식은 “ ‘정치 현실도 징글징글한데 이런 시국에 또 정치영화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라며 “이 작품은 그 지겨운 데로 들어가서 끝을 보고 결론을 내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박인제 감독은 “권력욕의 상징인 정치인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의 꽃이 선거라고 생각했다”며 “영화가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두렵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아이가 'DOC와 춤을' 노래하는 것 듣고 쓴 칼럼. 그나저나 김대중 후보의 'DJ와 춤을' 뮤직비디오 찾아보다가 김종필, 박태준도 나와서 깜놀. 김대중이 집권하기 위해선 그 정도로 상상치 못할 '대연정'이 필요했던 것. 


언젠가부터 초등학생인 아이가 ‘DOC와 춤을’이란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이가 태어나기 십수년 전의 노래다. 어쩐 일인가 살펴보니 학교에서 이 노래에 맞춰 체조를 한 모양이다. 1990년대 그룹인 DJ DOC의 경쾌하고 흥겨운 멜로디가 요즘 초등학생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한 셈이다. 그런데 무심코 노래를 듣다 가사를 깨닫고 멍해졌다. 몇 구절 인용해보자.

“옆집 아저씨와 밥을 먹었지. 그 아저씨 내 젓가락질 보고 뭐라 그래. 하지만 난 이게 좋아 편해 밥만 잘 먹지. 나는 나예요 상관 말아 요요요.”


DOC와 춤을’이 나온 건 1997년 4월, 외환위기 이전이었다. 그때 한국은 번영의 약속을 믿는 나라였다. 경제만이 아니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는 물러나고,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었다. 많은 예술가와 활동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표현의 자유가 조금 더 확보됐다.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이 데뷔했고, 서태지가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꿨다. 이 시대에 20대를 보낸 1970년대생, 이른바 ‘엑스세대’는 풍요로운 물질과 문화의 수혜자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남았다. 지난해 12월 통계청이 내놓은 ‘한국의 사회동향’을 보면, 1970년대생은 앞선 세대는 물론 1980년대 이후 세대보다도 진보적이었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강했고, 외환위기를 초래한 기성세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젓가락질 이상하다고 나무라는 옆집 아저씨에게 반박하는 세대다.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텐데”,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라고 상상하는 세대다.

“옆집 아저씨 반짝 대머리 옆 머리로 속알머리 감추려고 애써요. 억지로 빗어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감추지 마요 빡빡 밀어 요요요.”

모든 권위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의 획일적 기준 같은 것, 서울 지하철 압구정역 성형광고판의 똑같은 얼굴 같은 것. 젊은이들의 옷차림을 취재한 1994년도 방송 뉴스가 지난해 소셜미디어에서 별안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촌, 강남 등지를 오가는 젊은이들은 미니스커트에 군화를 신거나, 모자를 거꾸로 쓰거나, 자동차 열쇠를 목에 걸고 다녔다. 어딘지 이상해 보이지만, 정작 이런 차림을 한 사람들은 즐거운 것 같다.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은 이는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입고 싶은 대로 입어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고 답한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인터뷰이의 말을 따서 ‘#이렇게입으면기분이조크든요’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헬조선’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사회 속 주눅든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1990년대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충격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는 대머리를 감추려고 애쓸 바에는 아예 삭발을 하는 것이 어떤가. “뒤통수가 안 예뻐도 빡빡 밀어요”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타인의 시선, 사회의 기준 같은 것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DJ DOC의 노래에 녹아 있었다.

물론 DJ DOC가 노래한 세상은 1990년대에도 실현되지 않은 꿈이었지만 곧 다가올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어떤가. 올해 경향신문 ‘민주주의는 목소리다’ 기획팀은 다양한 세대·지역의 시민 1000명을 만났다. 이들에게 평소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지 물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질문할 때 눈치를 본다”, “윗사람이 나의 평소 생각과 다른 말을 할 경우 일단 내가 틀렸는지부터 살펴본다”는 답변이 60%를 상회했다. 지금 한국은 교수가 강의시간에 질문한 학생에게 “독해능력이 떨어진다”고, 디자인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말한 신입사원에게 “어려서 뭘 모른다”고 면박주는 사회다. 회식을 앞두고 ‘삼겹살 아니라 돈가스 먹고 싶다’고 속으로만 삼켜야 하는 사회다.

한 달 뒤면 새 대통령이 뽑힌다. 새 대통령은 새 세상을 열 수 있을까. 캐서린 문 미국 웰즐리대 교수는 “한국인들은 공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공적 시위에는 능하지만 여전히 직장, 학교, 가정 등에서의 극단적인 위계를 통한 가혹 행위나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누구인가는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하진 않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사회의 다양성이 주는 긴장을 즐기고,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는 민주주의에서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마음의 습관’이 없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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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판 '공각기동대'를 영원히 기억할 걸작으로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원작'에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풍조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새로운 필드로 들어온 한, 새로운 평가 기준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1989년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만화, 1995년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얻은 <공각기동대>는 이후 나온 많은 SF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설정은 <매트릭스>(1999) <아바타>(2009) 등에서 만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기획 단계부터 여러모로 기대와 우려를 받았다. 복잡하고 기묘한 원작의 세계관을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어떻게 소화할지 관건이었다. 주인공 ‘메이저’ 역에 스타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됐다는 소식도 원작의 유색인 역할을 백인 배우로 대체하는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논란을 불렀다.

인간의 영혼과 기계의 신체를 결합하는 방식이 일반화된 미래 사회. 메이저(스칼렛 요한슨)는 강력 범죄를 담당하는 특수부대 섹션 9을 이끈다. 섹션 9은 첨단 로봇 기술기업 한카 로보틱스를 파괴하려는 범죄 조직을 추적한다. 메이저는 사건의 실체에 근접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원작으로부터 30여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묻는 질문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프고 병든 사람들은 이미 신체의 많은 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인체의 확장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충격 이후, 인간은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 <공각기동대>는 원작의 정체성 질문을 주제적으로 확장하는 대신, 시각적으로 정교화했다. ‘잘하는 것을 잘하겠다’는 태도다. 빼어난 시각효과 기술력으로 인간과 기계의 기묘한 접점을 보여준다. 덕분에 주인공 메이저에게서는 ‘인간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다 상처를 입으면 ‘부상’이 아니라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요한슨의 아름다운 얼굴 역시 인조 피부가 벗겨질 때 섬뜩한 느낌을 안긴다. 걸음걸이도 조금 부자연스럽고, 대사엔 웃음기가 말라있다. 크고 작게 이같은 ‘의체’를 받아들인 인물들이 많다보니, 온전한 인간으로 남은 인물들이 오히려 어색하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로봇에게 느끼는 불쾌감을 뜻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 정도는 아닐지언정, 음산하고 기괴한 시각효과와 음악으로 인해 <공각기동대>의 미래도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쪽에 가깝다. 

로봇끼리 싸우는 모습은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신물나게 봤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 기계를 이식한 인간, 기계가 얽혀 싸운다. 액션 설계가 독특하기보다는 분위기가 독특해 인상을 남긴다. 스칼렛 요한슨의 ‘백인 메이저’는 후반부에 나오는 설정 덕에 ‘화이트워싱’ 논란을 교묘히 피했다. 다만 여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요한슨이 중성적이고 기계적인 메이저 역에 잘 어울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정도 규모의 액션영화를 홀로 이끌 여배우가 요한슨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29일 개봉했다.




웃긴 것 같으면서도 우울하고, 해피엔딩 같으면서도 슬픈 '토니 에드만'. 


딸은 가족 모임에서도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일중독자다. 반려견이 죽은 뒤 적적함을 느낀 아버지는 예고 없이 딸이 일하는 루마니아로 찾아간다. 

새로운 계약 체결에 사력을 다하는 중인 딸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부담스럽다. 약간의 다툼 끝에 아버지는 독일로 돌아가는 척하지만, 얼마 뒤 ‘토니 에드만’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자아로 분해 딸의 친구 모임이나 직장 주변을 배회한다. 우스꽝스러운 틀니와 검은 더벅머리 가발을 쓴 토니 에드만은 매번 황당한 상황을 연출하며 딸을 당황스럽게 한다.

<토니 에드만>의 줄거리를 읽으면 일에 쫓겨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고, 부녀 간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는 가슴 따뜻한 가족극이 연상된다. 아버지의 또 다른 자아 토니 에드만의 황당한 언행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다. 

<토니 에드만>은 뭉클한 가족애와 유쾌한 코미디를 통해 현대인이 되새길 만한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끌 만한 영화다. 할리우드가 2010년 <에브리씽 유브 갓> 이후 사실상 은퇴 상태였던 잭 니컬슨을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으로 컴백시키기로 한 이유도 <토니 에드만>의 보편성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꺼풀 들춰보면 <토니 에드만>은 보기보단 조금 복잡하고 비전형적인 영화다. 영화는 택배 배달부 앞에서 아버지가 벌이는 기행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배달부를 맞이한 아버지는 집 안에 동생이 있는 척하며 퇴장하고, 곧이어 토니 에드만으로 분한 아버지가 나와 택배를 받는다. 코믹하게 묘사되지 않았으면 다중인격자의 섬뜩한 기행처럼 보일 법한 상황이다.






아버지가 딸 앞에서 꾸미는 상황들도 심상치 않다. 아버지는 딸의 푸대접에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말했다가 금세 “농담이다”라고 정정하거나, 딸의 주요 거래처 사람들 앞에서 “딸 노릇을 대신 해줄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다”고 진지하게 말한다. 이런 ‘과격한’ 농담들은 토니 에드만으로 변신한 뒤 정도가 심해진다. 스스로 독일대사라고 거짓말을 늘어놓는가 하면, 딸의 직장 상사에게 접근해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은 착한 창녀 셴테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한 사촌 슈이타로 1인 2역을 한다는 내용의 희곡이었다. 

<토니 에드만>의 딸은 혹독한 경쟁에 내몰리다 못해 스스로를 착취하기에 이르고, 아버지는 맨정신으론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생각에 토니 에드만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불러낸다. 토니 에드만은 서구 상류층 기업인의 관습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언행으로 조금씩 상황을 반전시킨다. 

조금씩 코너로 몰리던 딸이 즉흥적으로 꾸민 누드 파티는 영화 결말부 하이라이트다. 모두를 당황시키는 이 해프닝은 딸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목표의 파괴와 새로운 출발을 암시한다.

딸이 아버지의 기행을 이해하는 걸 넘어 심지어 그를 뛰어넘는 일을 벌였다는 점에서 <토니 에드만>은 해피엔딩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채 허탈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기다리는 딸의 표정은 여러 가지 뉘앙스를 안기는 결말이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며, 서구의 각종 언론들에게서 ‘올해의 영화’로 선정됐다. 여성 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했다. 16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좀 기괴한 해프닝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라라랜드'와 '문라이트'가 상을 받은 올해 아카데미가 '스포트라이트'와 '레버넌트'가 상 받은 지난해보단 재밌었던 것 같다. 



워런 비티가 더듬거리며 봉투를 만질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티는 또 다른 쪽지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봉투를 한 번 더 살펴봤는데, 그때 이미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그 순간 올해 80대가 된 비티의 총기를 염려했을 것이다.


지난주 아카데미 시상식은 89회 역사상 가장 황당한 촌극과 함께 막을 내렸다. 최고 영예인 작품상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에게 직전 시상된 여우주연상(<라라랜드>의 에마 스톤) 봉투가 잘못 전달된 것이다. 작품상 수상작으로 호명된 <라라랜드> 제작진이 감격에 겨운 수상소감을 말하는 사이, 무대 뒤에선 난리가 났다. 결국 수상작은 <문라이트>로 정정됐고, 두 영화 관계자들, 객석의 스타들, 시청자들은 경악했다.

당황스럽고 어색한 전개를 거치긴 했지만, 결말은 결국 해피엔딩이었다. 작품상을 놓친 <라라랜드>조차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6개를 거머쥐었다. 고수는 고수끼리 통한다. 발표 번복 이후 <라라랜드> 제작진의 반응은 ‘패자의 품격’을 보여줬다. 수상소감을 마친 뒤 시상식 스태프로부터 발표가 잘못됐다는 말을 들은 <라라랜드>의 프로듀서 조던 호로위츠는 동료들을 진정시켰고 곧 <문라이트>가 수상작이라고 직접 정정했다. 호로위츠는 어리둥절한 <문라이트> 제작진에게 트로피를 건네주고 서둘러 무대를 내려갔다.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위로부터)



엇갈린 운명만큼 두 영화의 모양새는 다르다. <문라이트>는 근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중 가장 비주류적인 색채의 작품이었다. 세 명의 배우가 소년, 청소년, 성인 시절을 각각 연기한 주인공은 빈민이자 흑인이며 성소수자다. 마약중독자인 홀어머니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소년은 자상한 마약상을 멘토로 삼아 학교와 거리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친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단돈’ 17억원.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중 최저 제작비이자, 아카데미 시상식에 삽입된 30초 광고 비용에도 못미치는 금액이다. <문라이트>는 흑인 감독·작가 최초의 작품상, 성소수자를 소재로 한 최초의 작품상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시상식 사회자 지미 키멜의 농담처럼, <라라랜드>는 “백인이 재즈를 구한다”는 내용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화려한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꿈을 찾는 배우 지망생과 재즈 연주자의 사랑이야기다. 스타 배우 라이언 고슬링, 에마 스톤이 춤과 노래로 절정의 매력을 뽐낸다. 두 남녀가 보이지 않는 미래의 전망, 희미해지는 사랑의 감정에 지쳐가는 과정이 나오기도 하지만, <라라랜드>의 주된 정조는 결국 낭만과 긍정이다. 흑인 감독, 배우가 만든 <문라이트>가 현실의 질곡에 발 딛고 있다면, 백인 감독, 배우가 만든 <라라랜드>는 찬란한 꿈을 노래했다.

하지만 두 영화는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감독은 같은 세대와 경력의 영화인 무리에 속해 있다.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는 올해 38세로, 이번 작품을 포함해 2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라라랜드>의 데이미언 셔젤은 32세이며, 3편의 장편 연출 경력이 있다. 지난해 최고의 미국영화를 만든 둘은 미국 내 시상식과 해외 영화제에서 수차례 마주쳤고, 서로의 작품을 관람했다. ‘버라이어티’ 인터뷰에서 젠킨스는 “<라라랜드>를 본 순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고 했고, 셔젤 역시 젠킨스의 데뷔작까지 챙겨본 팬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두 영화는 아름답다. <문라이트>는 마약과 가난에 찌든 흑인 빈민층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소년이 달빛에 물든 해변에서 하나뿐인 친구와 이야기할 때, 십수년이 흘러 근육질의 마약상이 된 소년이 친구의 조촐한 식당을 찾아와 그간의 회한을 털어놓을 때, 그 고요와 서정은 보는 이의 숨을 앗아간다. <라라랜드> 첫 장면, 꽉 막힌 고속도로 위 운전자들이 갑자기 자동차 사이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대목은 인간의 움직임과 이를 다듬는 연출력이 얼마나 큰 경탄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3월이 되었지만 아침 나절의 바람은 여전히 거세다. 날은 춥고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생떼를 쓰고 독기를 품은 사람들이 곳곳에 도사렸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냐 묻는다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아름다워야 한다고 답하겠다. 예술은 때로 정치적이지만 정치 그 자체일 수는 없으며, 때로 폭탄처럼 강력한 충격을 안기지만, 폭탄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정치가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사이, 예술은 과정의 완결성에 눈돌린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처절한 복수를 꿈꾸는 금자는 과한 장식으로 꾸며진 총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예뻐야 해. 뭐든지. 예쁜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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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왓슨은 지금보단 연기를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미녀와 야수'는 흥행했지만. 


‘미녀와 야수’의 모티브는 18세기 프랑스 동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흉측한 외모의 야수와 용기 있는 미녀가 차이와 편견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다는 줄거리에는 세월을 뛰어넘는 호소력이 있다.

오는 16일 개봉하는 영화 <미녀와 야수>는 1991년 선보인 동명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리메이크다. ‘미녀와 야수’ 모티브는 수차례 영화, 드라마로 제작됐지만, 이 디즈니 애니메이션만큼 광범위한 인기를 끈 작품은 없었다. 영화 <미녀와 야수>는 원작의 인기를 계승하는 동시에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줄거리는 익히 알려져 있다. 프랑스 어느 고성의 왕자(댄 스티븐스)는 오만한 언행 때문에 저주를 받아 야수의 외모를 갖는다. 진정한 사랑을 얻는다면 저주가 풀리지만, 문제는 무서운 외모의 야수를 사랑할 여성이 없다는 점이다. 인근 마을의 젊은 여성 벨(에마 왓슨)은 야수의 성에서 꽃을 꺾으려다 붙잡힌 아버지를 대신해 야수의 포로가 된다. 벨은 차츰 야수 내면의 다정함과 지성에 끌린다.






<겨울왕국>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21세기 디즈니 영화 속 여성은 더 이상 왕자의 키스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다. <미녀와 야수>에서도 그렇다. 벨은 마을에 얼마 되지 않는 책을 빌리고 또 빌려 읽는 책벌레이며, 당나귀를 이용한 ‘세탁기’를 만든 발명가다. 벨이 야수에게 처음 반하는 계기 역시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야수의 지성이었다. 벨은 핍박받는 야수를 구하기 위해 성으로 말을 달릴 때 아름다운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마을의 모든 여성이 선망하는 전쟁영웅 개스톤(루크 에반스)의 구애를 간단히 물리치는 당찬 성격도 가졌다. 개스톤이 겉으론 용맹하지만 사실 무례하고 소유욕에 사로잡힌 ‘옛날 남자’라면, 야수는 내면이 따뜻하고 지적인 현대적인 남성상을 구현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똑똑한 헤르미온이자, 스크린 밖에서는 페미니즘 관련 이슈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에마 왓슨은 ‘벨’이 되기 위한 여러 요소를 두루 갖췄다. 6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영상을 통해 한국 기자들과 만난 왓슨은 “영화는 사회적·문화적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며 “여성이 동등한 사회의 일원임을 상상하면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개스톤의 친구인 르푸(조시 게드)가 성소수자처럼 보인다는 점도 <미녀와 야수>의 새로운 요소다. 이 때문에 미국의 일부 보수적인 지역 극장에서는 <미녀와 야수>를 상영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빌 콘돈 감독은 “<미녀와 야수>의 주제는 포용”이라고 말했다.게드 역시 “사람들은 모르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개스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야수가 마을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해 공격하려 하는데, 이런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녀와 야수>는 한동안 거의 만들어지지 않다가 <라라 랜드>로 재조명된 뮤지컬 장르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미녀와 야수>의 전반부는 <라라 랜드>의 성취가 특수한 사례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은 분명 판타지이지만, 한동안 관객은 이 판타지적 관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어두운 방에 들어갔을 때처럼,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영화는 벨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장르를 가동하지만, 왓슨과 여러 배우들의 노래와 춤은 마치 현실을 모방한 애니메이션을 다시 따라 연기한 것처럼 어색해 보인다. 벨과 야수의 본격적인 감정선이 드러나 관객을 몰입시키기까지는 그 어색함을 참아내야 한다.





'로건'은 한동안은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로 기억될 듯. 캐릭터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해석이다. 그 캐릭터는 창조된 것이지만, 관객이 좋아하는 한 살아있는 생명체나 마찬가지기 때문. 






늙고 지친 표정의 사내가 있다. 주름진 피부와 희끗한 머리의 남자는 한쪽 다리를 전다. 리무진 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는 어디서든 술을 찾는다. 그는 퇴행성 뇌질환에 걸린 채 휠채어에 앉아있는 90대 노인을 봉양중이다. 근사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는 노년의 남자들이다. 


이들은 한때 슈퍼히어로였다. 다리 저는 사내는 ‘울버린’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로건(휴 잭맨), 90대 노인은 ‘프로페서X’였던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다. 2000년 처음 나온 <엑스맨> 시리즈에서부터 이들 돌연변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서도 묵묵히 제 길을 걸어왔다. 프로페서X는 박해받는 돌연변이들을 위한 영재학교의 교장으로 세상의 평화와 공존을 추구했고, 울버린은 두려움 없이 거친 세상을 떠도는 터프가이였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자>가 ‘수정주의 서부극’인것처럼, 28일 개봉하는 <로건> 역시 ‘수정주의 슈퍼히어로영화’라 불릴만하다. <용서받지 못한자> 속 늙은 총잡이는 젊은날의 살육과 무모함을 되새기며 쓸쓸한 삶을 살아갔다. <로건>의 로건과 자비에 역시 늙고 병든 채 ‘살인의 추억’에 괴로워한다. 

로건은 돈을 모아 요트를 사서 자비에와 함께 바다로 나가 말년을 보내려 한다. 한때 강력한 두뇌를 소유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비에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쫓기는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로건에게 맡겨진다. 로건은 자신을 닮은 로라를 살리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영화 '로건'




<로건>의 공간적 배경은 멕시코 접경 지대다. 시대 배경은 2029년이라지만, <로건>이 떠올리는 장르는 고전 서부극이다.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땅, 국가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는 총 든 사내들이 득실댄다. 영화 속에 직접 인용되는 서부극 <셰인>의 마지막 대사는 <로건>의 주제를 함축한다. 셰인은 다시 황야로 떠나기전 소년에게 말한다. “사람은 생긴대로 살아야해. 어쩔 수 없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더군. (…) 여기선 살인을 저지른 뒤 살 수 없어. 옳든 그르든, 그건 낙인이야. 돌이킬 수 없어. 이제 가서 엄마에게 말하렴. 모든게 잘될 거라고. 이제 이 계곡에 총은 더이상 없다고.” 

셰인처럼, 홀로 거칠게 살아온 로건 역시 지나간 시대의 죄업을 짊어지기로 한다.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피에 물든 손으로 평화롭게 은퇴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로건>은 그만큼 잔혹한 액션을 보여준다. 신체훼손의 수위가 높다. 격렬하고 육중하게 설계된 액션장면 사이로 늙은 로건의 고단함과 슬픔이 묻어난다. 

휴 잭맨은 <로건>을 마지막으로 17년간 9번 연기한 울버린 역을 떠난다. 휴 잭맨 울버린의 마지막으로서는 처연하지만, 이런 결말이야말로 처음부터 울버린에게 준비된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아이낳고 저녁마다 텔레비전을 보는 울버린을 상상하기는 어려우니까. 

어떤 사내는 예정된 고난을 담담히 맞이한다. 운명을 피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진짜 슈퍼히어로다. <앙코르> <3:10 투 유마>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연출했다.


한때 영화 담당이었던 본사 베이징 특파원의 칼럼에 영감 받아 씀. 


10년을 넘게 썼지만 ‘청룽’(成龍)이란 표기는 여전히 낯설다. 우리에게 청룽은 언제나 ‘성룡’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조금 앞 세대인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 속 청춘들은 비장한 리샤오룽의 시대에서 코믹한 청룽의 시대로 옮겨가면서 성장했다. 아마 그 시대 청룽의 대표작은 <취권>이었을 것이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무술 동작은 영화 속 적과 관객을 모두 무장해제시켰다. 


내게 청룽의 대표작은 <폴리스 스토리>다. 이 영화에서 청룽은 마약왕을 잡으려는 홍콩 경찰이었다. 가끔 실수를 하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무리한 수사도 벌이지만, 그래도 청룽은 좋은 경찰이었다. 악을 응징하겠다는 정의감, 약자를 돕겠다는 의협심, 맡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승진이나 출세에 목을 매지 않으며, 강자에게 아부하지도 않았다. 

경찰은 국가라는 초거대 기구의 치안을 맡아 공인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지만, 그 시절 청룽에게서 ‘국가’의 위압감을 느끼긴 어려웠다. 청룽은 누가 봐도 나쁜 녀석을 혼내주는 듬직한 동네 형 같은 남자였다.

지난해 개봉작 <스킵 트레이스: 합동수사>에서도 청룽은 경찰이었다. 청룽은 언제나 그랬듯 100% 직접 액션 연기를 소화했다. 엔딩 크레디트가 나올 때 다치고 넘어지고 대사가 꼬여 엔지가 난 장면을 모아 보여주는 팬서비스도 여전했다. 영화 속 청룽은 러시아 마피아에게 잡혀간 사기꾼을 구출해 홍콩으로 데려온다. 마피아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청룽은 고물차를 타고 중국 대륙을 가로지른다. 청룽은 고비사막에선 모래언덕을 넘고, 황하에선 급류를 탄다. 내몽골 전사와 씨름 대결을 하고, 광시성의 소수민족 동족(동族) 여성과 춤을 춘다.

영화는 코믹하고 무해하지만, 결국엔 공허했다. 청룽이 60대에 이르러 움직임이 둔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킵 트레이스: 합동수사>는 마치 중국의 유명 관광지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듯한 영화였다. 특히 중국 소수민족 전통에 대한 묘사는 얄팍했다. 이 영화 속 소수민족은 관광 엽서처럼 박제된 전통을 전시하고 있었고, 청룽은 이들을 중국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청룽의 ‘친중국’ 행보는 유명하다. 올해도 청룽은 춘제(설) 전날 저녁 방송되는 유명 프로그램인 CCTV <춘완>에 출연했다. 전통의상을 입은 청룽은 소수민족 대학생 대표들과 함께 ‘국가’라는 노래를 불렀다. 무대 뒤 배경에는 오성홍기와 만리장성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누가 착한 애고 나쁜 앤지 아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관객도 용하게 알아챈다. 청룽은 ‘국가대표 연예인’이 됐지만, 잃은 건 대중의 사랑이었다. <스킵 트레이스: 합동수사>의 국내 관객수는 2만2000여명. 한때 ‘명절엔 성룡’이란 극장가 법칙이 무색한 흥행성적이었다. <춘완> 역시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화제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무국적 예술가’는 없다. 국가가 제공하는 편의를 누리는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예술가는 법적·도적적 의무가 있다. 예술가도 때로 국가와 협력한다. 이름 자체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할리우드의 마스터 앨프리드 히치콕은 2차대전 당시 정부 지원으로 홍보 영화를 찍었다. 장이머우는 베이징 올림픽, 대니 보일은 런던 올림픽 개막식 총연출을 맡아 전 세계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탁월한 기예를 가진 예술가가 국가의 지원을 얻어 자신의 성장 기반이 된 공동체를 위해 재능을 펼친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술가가 국가 권위에 포박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가 예술가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국가는 강하지만, 한 예술가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소유할 만큼 강해서는 안된다. 가장 예민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를 쥐고 흔드는 정부는 그 어떤 시민도 통제할 수 있다. 예술에는 국가 아니라 그 어떤 강력한 권위에도 복속되지 않을 자율적 영역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의 조건이다.

정부를 비판하고 국가 권위를 조롱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국가는 직접 나서 작품을 단죄할 수 없다. 대통령을 쥐에 비유한 그래피티도, 누드화에 합성한 회화도 작품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별다른 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그 비판은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몫이다.

이른바 ‘블랙리스트’는 국가가 직접 나서 예술가를 통제하려 한 사건이다. 돈에 꼬리표를 붙여 지원받은 예술가를 제 맘대로 부리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원을 끊은 비열한 행태였다. 단지 돈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등 뒤에 시커먼 딱지를 붙여놓고, “저 사람을 괴롭히라”고 정부 조직 사람들을 윽박지른 사건이다. 그 돈이 대통령 돈인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어디 갔나. 이 정부가 내건 ‘문화융성’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예술을 뭘로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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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화를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차기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다는 단점이 생긴다. 



타자와의 접촉은 위협인 동시에 축복이다. ‘나’의 경계가 무너지는 동시, 그 경계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2일 개봉한 SF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는 세로로 선 거대한 조개 모양의 괴비행체(쉘)가 전세계 12개 지역에 동시에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쉘은 18시간마다 한 번씩 열리고, 각국의 과학자, 군인들은 이때 쉘 안으로 들어가 다리가 7개 달린 거대한 문어 모양의 외계인 헵타포드와 접촉한다.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외계인의 언어를 알아내기 위해 나선다. 정부는 외계인이 왜 지구에 왔는지, 지구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외계인의 의도 파악이 늦어지면서, 인류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컨택트>의 원작은 최근 가장 명망있는 SF 작가로 꼽히는 테드 창의 중편 <네 인생의 이야기>다. 테드 창은 지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소설들로 유명하다. 영화 역시 원작의 사색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접촉에서 예상되는 영화 줄거리, 즉 지구 자원을 둘러싼 전투라든가 환상적인 모험은 찾기 어렵다. 영화 전반부는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음성·문자 언어를 알아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특히 뿌연 유리벽에 먹물을 원형으로 뿌린 듯한 헵타포드의 문자 언어는 요령부득이다. 헵타포드의 문자가 단지 이상한 모양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헵타포드의 낯선 사유 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외국어에 몰입하면 사고의 방식도 그 언어를 따라 바뀐다”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은 영화 후반부 중요한 반전을 예비한다. 




그러나 지성만으로 영화를 만들 순 없다. <컨택트>의 장점은 영화의 지적 논리들로 결국 감성을 자극한다는데 있다. 루이스는 헵타포드 언어의 비밀을 알아낸 후 큰 혼란에 빠진다. 이 언어는 인류의 사유 체계는 물론, 루이스의 삶조차 통째로 뒤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루이스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으로 파악하면, 이는 커다란 행운일수도 불행일수도 있다. 루이스는 이 모든 감정과 사건들을 받아들인다. 그걸 ‘운명’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사유와 논리의 도래 앞에서 ‘운명’이란 전통적인 어휘는 어딘지 낯설다. 그저 기존의 루이스가 파괴되고 새로운 루이스가 태어났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광폭한 맹수나 자연 재해 아래 살아남으려 애쓰던 선사시대부터 그랬다. 새 사유 체계의 도래 앞에서 어떤 인간들은 어리석은 짓을 한다. 극중 중국 정부는 가장 먼저 외계인에 대한 공격을 결정한다. <컨택트> 후반부는 이 어리석은 결정을 막아내기 위한 루이스의 노력을 따라간다. 익숙하지만 낡은 사유를 고집할 것인가, 낯설지만 새로운 사유를 받아들일 것인가. <컨택트>는 그런 선택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사유 체계의 가능성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컨택트>는 가족애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감정을 그린 <인터스텔라>보다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경외감을 그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닮았다. 

에이미 아담스가 루이스 역을 맡아 거대한 경이를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어려운 연기를 해냈다. 제레미 레너가 그를 돕는 물리학자 이안 역을 맡았다. <그을린 사랑>(2010),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2015)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했다. 빌뇌브는 올 하반기 최고 기대작중 하나인 <블레이드 러너 2049>도 준비하고 있다.



'더 킹' 시사 끝나자마자 극장 아래 스타벅스에 가서 후다닥 쓴 리뷰. 사실 이 리뷰 이후에도 '더 킹'에 대해 언급한 기획 기사를 몇 번 썼다.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예전에 자주 쓰던 말로) '징후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태수(조인성)는 목포의 시시한 건달의 아들이다. 양아치로 고교 시절을 보내던 태수는 아버지가 검사 앞에 굽실대는 모습을 본 뒤, 검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태수는 ‘서울 법대 입학→시위에 휘말려 군입대→사법시험 합격→검사 임명→마담뚜 소개로 부유한 집안의 아나운서 임상희(김아중)와 결혼’의 코스를 밟지만, 여전히 지방에서 하루 30건씩 시시한 범죄를 처리한다. 지역 유지의 아들을 성폭행범으로 잡아넣으려던 태수는 대학 선배 검사 양동철(배성우)의 제안을 받는다. 사건을 덮으면 검찰 핵심 부서로 끌어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서에는 굵직한 사건만을 맡아 처리하며 나라를 쥐고 흔드는 부장검사 한강식(정우성)이 있었다. 태수는 양심에 눈감고 강식의 수하가 된다. 아울러 고향 친구이자 ‘들개파’ 2인자인 조폭 최두일(류준열)과도 친분을 쌓아간다.

설날 전주인 18일 개봉하는 <더 킹>(감독 한재림)은 검사가 주인공이자 악당인 영화다. ‘조폭 같은 검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 킹>은 <내부자들>(2015), <검사외전>(2015) 같은 흥행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범죄영화의 주인공이 경찰이 아니라 검찰이라는 점은 최근 한국영화의 특성이기도 한데, 이는 한국의 영화 창작자들이 비대한 검찰 권력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줄거리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줄곧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어조를 유지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태수, 강식, 동철은 안동 하회탈이 대마초에 취해 웃고 있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차를 타고 가다가 큰 교통사고가 난다. 세 배우의 얼굴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는 와중에도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심각한 사회비판 드라마보다는, 좀 더 코믹하고 대중적인 해학극의 위치를 점유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최고 수준의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조인성, 정우성 두 배우는 늘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일한다. 두 배우는 일부 관객이 불편을 느낄 법한 욕설, 폭력을 직접 보이지도 않는다. 조인성이 간혹 내뱉는 욕설조차 살기가 있다기보다는 귀엽게 들린다. <아수라>의 일그러진 정우성이나, <내부자들>의 성적 묘사가 못마땅했던 관객이라면 안심해도 좋다. <더 킹>은 15세 관람가다.

‘진짜 힘’을 갖고 싶었던 태수는 강식을 자신의 멘토로 삼는다. 아직 일말의 양심을 버리지 못해 쭈뼛거리는 태수의 뺨을 후려치며 강식은 말한다.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역사 앞에서 인상 쓰지마.” 이에 대한 태수의 답, “부장님, 씨X. … 러브샷 한잔 하겠습니다!”는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는 명대사 후보다.

<더 킹>은 조폭, 언론과 유착한다든지,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든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인들과 정보를 거래한다든지 하는 검찰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이미지를 재현한다. 검찰 개혁을 화두로 내세운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게 굿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있다. 물론 영화는 이렇게 타락한 검찰이 ‘1%’라고 강조하긴 하지만, 여느 평범한 검찰 관계자가 이 영화를 본다면 말문이 막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총제작비 134억원대의 상업영화가 이런 내용을 당당하게 담고 있다는 건 검찰에 대해 가진 대중의 인상을 보여줄 뿐이다.



한재림 감독(42)의 <더 킹> 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평소 늦게 잠드는 습관이 있는 그는 아침 일찍 전해진 노무현의 서거 소식을 비몽사몽간에 전해 들으며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하루 종일 소파에 파묻혀 울었고, 이후 1주일간 우울의 늪에 빠졌다. “속 시원하게 정의를 이야기한 사람이 그들(주류 기득권층) 권력의 단단함 앞에 패배하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영화 속 잘나가는 검사 한강식(정우성)의 말이 ‘그들’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역사 앞에서 인상 쓰지 마.”

<더 킹>은 설날 연휴를 앞두고 개봉해 <공조>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개봉 13일 만에 426만 관객을 모으며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한 순진한 검사가 권력의 단맛에 빠져 ‘왕’이 되려다가 좌절하는 이야기인 <더 킹>의 한재림 감독을 만났다. 

- <더 킹>은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다.

“기존 한국영화들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피해자 입장에서 봤다. 답답하고 힘들고, 영화가 끝나도 감정적 해소가 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무너지지 않는 권력의 성벽이 궁금해졌다. 노무현 당선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을까.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시스템을 이해하자’고 생각했다. 분노가 아니라 이성으로 그들의 시스템에 대응하자는 생각이었다.”

- 수양대군과 김종서 이야기를 다룬 전작 <관상>도 그렇고, 권력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조선시대부터 권력을 숭상하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 그런 것들이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낳고 있다. 반면 그런 인식을 비트는 쾌감도 있다. 대단하면서도 하찮은 권력의 양면성에 관심이 있다.” 

- 권력을 이야기하려면 재벌, 대통령도 있을 텐데 왜 검사였나. 

“관객이 스스로 권력에 다가서는 것처럼 느끼게 하려 했다. 검사는 사법고시라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순식간에 권력에 들어간다. 반면 평범한 관객이 재벌,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다.”

<더 킹>의 핵심 장면은 펜트하우스에서의 파티다. 초임 검사 박태수(조인성)는 한강식이 주관하는 이 화려한 파티에서 초심을 버리고 권력에 투항한다. 아름다운 여자들과 잘 차려입은 남자들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태도로 순간을 즐긴다. 파티가 끝날 무렵엔 어디선가 불어온 깃털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 영화 분위기는 의외로 무겁다기보다는 코믹하다. 

“펜트하우스냐 룸살롱이냐 선택해야 했다. 후자는 혐오스럽고 거리감이 느껴지니, 전자로 가서 재미있고 경쾌하게 만들려 했다. 깃털처럼 화려하지만 금세 가라앉고 이후엔 쓰레기가 되는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 정우성, 조인성이 검사라니, 외모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 

“조인성에게 역할을 제안하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 있어 안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흔쾌히 응했다. 박태수는 한강식처럼 되고 싶어 한다. 한강식은 누가 봐도 ‘폼’이 나야 했다. 이런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며 천박하게 놀 때 그 아이러니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정우성이 ‘딱’이었다.”

- 박태수의 삶은 노무현과 겹친다. 별 볼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한때 권력의 맛을 본다. 그러다깨달은 바 있어 정치에 투신한다. 노무현이 서거한 날 박태수가 무너지고, 노무현 지역구였던 종로에 박태수도 출마한다. 

“노무현을 생각하면서 박태수 캐릭터를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유다.”

- 관객에게 말을 걸면서 끝나는 결말이 ‘낯간지럽다’는 말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바로 ‘우리한테 힘이 있다’는 그 말이다. ‘닭살’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다.”

'우회도로'란 문패를 걸고 쓴 첫 칼럼. '우회도로'란 문화의 속성을 은유한다. 첫회부터 제목과 비슷한 소재의 글을 썼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의 국정 개입을 인정한 뒤 국회에서 탄핵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6일이었다. 분노한 1000만 촛불이 광화문광장과 전국을 가득 채웠다. 최근 ‘박근혜 결사 옹위’를 주장하는 ‘맞불 시위’가 등장하긴 했지만, 거센 분노의 흐름을 되돌리긴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 현대사에서 유례없이 짧은 기간에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고 부패한 지도자를 거의 축출한 작금의 상황은 시쳇말로 ‘사이다’이다. 이제 시민들은 저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있다. 계기가 마련됐으니, 그런 날이 오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하다. 정말 그럴까.


12일 개봉하는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은 이명박 정권 당시 YTNMBC 등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낙하산 사장을 반대하거나, 편향적인 보도와 인사에 항의하거나, 그도 아니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해직된 기자와 PD들이 이후 7년간 겪었던 일들을 다뤘다. 해직된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두 달 후면 복직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1심에서 복직 판정을 받아냈지만, 회사는 끈질기게 소송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복직된 이도 있지만, 몇몇은 끝내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직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이 거대 언론사들은 기나긴 송사를 통해 해고의 정당성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해직자들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7년 세월 동안 언론사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왔다. 초기엔 해직 언론인들의 처지에 관심을 가지던 여론도 조금씩 식어갔다. 심지어 해직 언론인들이 모두 복직된 줄 아는 사람들도 많다.

잊혀진다는 건 힘들고 서글픈 일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조금씩 파괴된다. 평소 온화한 가장이었던 조승호 YTN 기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괜한 일로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용마 MBC 기자는 암과 싸우고 있다. 버티고 살아남아야 했다. 조승호 기자는 무박 2일로 100㎞를 뛰는 울트라 마라톤을 시작했다. 박성제 MBC 기자는 취미였던 스피커 제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은 해결된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도 아닌 문제들 때문에 조금씩 지쳐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고 있다.

탄핵 정국은 저널리즘의 승리라는 분석이 있다. 많은 언론사들이 대통령과 측근, 비선 인사들의 비리를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단독’이란 말머리를 붙인 기사들이 각 언론사에서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을 제작한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저널리즘에 대한 최근의 상찬이 “불편하다”고 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앞서 권력을 비판했던 해직 언론인들은 복직되지 않았고, 이들을 거리로 내쫓은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지난 정권의 피해자들에게 아직 ‘사이다’는 돌아가지 않았다.




어지러운 판국일수록 쾌도난마의 언변, 일도양단의 해결책이 환호를 받는다. 대선을 앞두고도 그런 정치인, 논객이 인기를 끈다. 돌아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야말로 ‘사이다’의 원조였다. 지난해 개봉해 인기를 끈 다큐멘터리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2000년 제16대 총선 당시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부산에 출마한 노무현을 담아냈다. 당시 유세 장면을 보면 노무현은 근래 보기 드문 탁월한 대중연설가였음을 알 수 있다. 대규모 군중 앞에서도, 골목길의 소규모 유세에서도 그는 두루 강점을 보였다. 그의 말은 논리와 감정을 동시에 자극했으며, 인간적인 매력까지 담아냈다.

그런 노무현조차 집권 이후엔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딪혀 뜻한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다. 서거 5개월 전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와 가진 마지막 인터뷰가 최근 뒤늦게 공개됐다. 자신의 임기를 솔직하고 냉정하게 평가한 그는 “(역사에)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확고한 비전과 추진력, 의지를 가진 정치인에게조차 개혁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마스터>는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을 모델로 한 영화다. 현실의 조희팔은 수조원의 피해액을 남긴 채 죽었지만(혹은 사라졌지만), 영화 속 진현필(이병헌)은 시원하게 응징당한다. 진현필의 정·관계 로비 장부를 입수한 강직한 경찰 김재명(강동원)은 대규모 수사팀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쪽으로 향한다. 개봉 이후 3주 만에 650만 관객이 이 속 시원한 엔딩에 박수를 보냈다. 현실이 <마스터> 같다면 좋겠지만, 실제론 <7년-그들이 없는 언론>에 가까울 것이다. 지루하고 지지부진하고 답답하다.

개혁이란 살림살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살림을 살아본 사람은 안다. 해도해도 끝이 없다.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난다. 안 하기 시작하면 집안꼴이 엉망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 지겨운 살림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이제 지겨운 일을 꾸준히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꾸역꾸역 고구마를 먹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영화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난 이 영화가 좋았다. 



새해 벽두부터 <여교사>를 본다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할 만하다. 건조하고 단순한 영화 제목은 격렬하고 음험한 감정, 사건을 숨기고 있다.

효주(김하늘)는 사립고등학교의 계약직 과학 교사다. 불안정한 일자리, 무능하고 뻔뻔한 남자친구(이희준) 때문에 효주는 늘 피로하고 짜증이 난 상태다. 어느 날 이사장의 딸인 혜영(유인영)이 과학 정교사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다. 효주는 학교 후배였다면서 살갑게 구는 혜영이 못마땅해 쌀쌀맞게 대한다. 효주는 임시 담임을 맡은 반의 무용 특기생 재하(이원근)와 혜영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를 빌미로 효주는 혜영을 위협한다. 효주 역시 재하에게 조금씩 끌린다.


영화 대부분은 사립고등학교라는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공간에서 진행된다. 효주는 학생들에게 위압적으로 구는 교사지만, 임신·출산을 하거나 교장·교감의 지시에 싫은 기색을 보이면 언제라도 교사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는 처지다. 그런 효주에게 정교사 자리는 삶의 불안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만, 그 자리는 혜영에게 간단히 돌아간다.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고 어딘가 화난 표정의 효주는 애초 젊고 예쁘고 상냥하고 부유한 혜영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아마 혜영은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은 사람이 아니겠지만, 효주에겐 혜영의 존재 자체가 악의다. 세상이, 그리고 그런 세상을 반영한 <여교사>가 잔인한 이유는 효주가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과 질투심에 잠겨드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효주가 마음을 다스려 조직과 자신 중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결과를 이끌어낸다거나, 불평등한 사회에 통쾌하게 복수하거나, 그도 아니면 숭고하게 희생해 사회의 모순을 드러냈다면 차라리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교사>는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여교사>는 매우 극적이되 많은 관객이 기대하거나 원치도 않은 방식의 파국을 연출한다. 마치 ‘이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인물의 감정과 사건을 그곳으로 몰고 간다. 

김태용 감독은 2014년 <거인>으로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 등을 수상한 신예다. <여교사>는 인간의 감정을 탐구할 때, 여느 창작자라면 멈출 법한 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영화다. 이는 즐겁지만 또 괴로운 일이기에, <여교사>를 기꺼운 마음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하늘은 여러 영화, 드라마에서 달콤 쌉싸래한 멜로 주인공으로서의 강점을 보여온 배우지만, <여교사>에선 이전에 본 적 없는 서늘하고 냉소적인 표정을 보여준다. 김하늘 이미지의 대비가 <여교사>를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든다. <베테랑> <부당거래> 등 대규모 흥행작을 만들어온 강혜정·류승완 부부의 제작사 외유내강이 제작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4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얼마전 방한한 '너의 이름은.'의 프로듀서 가와무라 겐키에 따르면, 신카이 마코토는 지브리 같은 대형 스튜디오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작업해온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에 가깝다고 함.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에서도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기대는 꾸준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에도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작품성이나 대중성의 어느 한 측면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을 보이며 후보군에서 탈락하곤 했다. 

신카이 마코토(43)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과 이를 감싸는 서정성으로 인정받아왔다. <초속 5센티미터> <별을 쫓는 아이> 등은 각종 애니메이션 상을 휩쓸며 신카이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그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 불릴 만큼 많은 관객을 불러모으진 못한 상태였다. 

최근작 <너의 이름은.>은 다르다. 일본에서 지난 8월 개봉해 지난주까지 관객 1640만명, 흥행수익 213억엔(약 2189억원)을 돌파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은 역대 일본 영화 흥행 2위 기록이다. 

미츠하는 카페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의 여고생이다. 따분한 마을 분위기, 일본 전통의 신사 의식을 치러야 하는 가업 때문에 늘 답답한 상태다. 어느 날 미츠하는 도쿄의 남고생 다키가 된 꿈을 꾼다. 다키 역시 난생처음 본 시골 마을의 여고생 미츠하가 된 꿈을 꾼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둘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 일주일에 2~3일 정도 몸이 뒤바뀌는 현상임을 알게 된다. 둘은 스마트폰의 일기를 통해 서로에게 전할 말들을 남긴다. 1000년 만에 한 번 나타나는 혜성이 점차 지구로 다가오고, 몸이 뒤바뀌는 현상은 갑자기 멈춘다. 다키는 미츠하를 직접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너의 이름은.>의 초반부는 전형적인 일본 청춘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띤다. 밝고 명랑하고 코믹하다. 그러면서도 전통의 무게에 짓눌린 청춘, 자유로워 보이지만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한 청춘의 고민도 살핀다. 미츠하의 몸에 들어온 다키는 활발한 체육 활동을 통해 남성성을 드러내고, 또래 아이들은 이에 반한다. 다키의 몸에 들어간 미츠하는 함께 일하는 여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 상대의 환심을 산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로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러한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드러낸다. 

그러나 중반부 이후 <너의 이름은.>은 급격히 얼굴을 바꾼다. 예기치 못한 설정상의 반전이 일어나고, 분위기는 어둡고 급박해진다. 임박한 재난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작은 희망을 찾으려는 인물들의 모습에선 동일본 대지진의 트라우마가 읽힌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은 사건들을 겪은 한국 관객들도 <너의 이름은.>의 후반부 전개에 무감할 수 없다. 

<너의 이름은.>은 대중성에 더해, 그 안에 담긴 생각의 깊이와 상상력, 표현력 역시 만만치 않다. 신카이 마코토는 “지금까지의 작품은 제 생각을 어떻게든 성립시키기 바빴다”며 “(<너의 이름은.>은) 우선은 ‘재미’를 위해 여러 요소를 쌓아 올리고 겹친 작품”이라고 말했다. 오랜 수련 끝에 세상에 나온 고수를 본 느낌이다.





어니스트 헤밍뭬이 말년의 인터뷰들을 묶은 '헤밍웨이의 말'(마음산책)을 읽다. 소문난 플레이보이이자 낚시광, 사냥꾼, 투우애호가, 기자, 작가였던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쿠바의 거처에서 글을 썼는데, 좀처럼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1954년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중의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의 건강은 이후 쇠퇴일로였다. '헤밍웨이의 말'에 실린 인터뷰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헤밍웨이가 나이보다 늙어보인다는 점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인한 부상 때문에 그럴 것이고, 에너지를 젊은 시절에 모두 쏟아부어버렸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7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2시간 공연을 거뜬히 소화하는 믹 재거 같은 괴물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한평생 쓸 수 있는 정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말년의 헤밍웨이는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글쓰는데 쏟기로 한 뒤,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친교는 자제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사람들은 헤밍웨이를 가만 두지 않았다. 4편의 인터뷰 중 2편이 허락 없이 불쑥 찾아가 얻어낸 것들이다. 나도 기자지만, 어휴, 기자놈들. 그래도 이런 기자들 덕분에 헤밍웨이 말년의 생각과 태도들을 전해들을 수 있으니 기쁜 반면, 원치 않은 유명세에 시달렸을 헤밍웨이가 가엽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헤밍웨이가 유명세를 지겹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유명세 덕에 누린 이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 기자로 일했는데,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이 안되는 명사의 사생활을 캐물어야 하는 인터뷰가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말에서 내가 인터뷰 기사를 늘 힘들어하는 근거를 대려고 애썼다. 하지만 난 헤밍웨이도 아니고 어찌 됐든 일을 해야 하니 명사 인터뷰 거리가 있으면 한다. 마침 오늘 그런 기자회견이 있는데, 지독히도 가기 싫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직업상 책무에 속하니 간다.   


'헤밍웨이의 말'에 대해 쓰려다가 딴 얘기만 썼다. 





김훈의 신작 '공터에서'(해냄)를 읽다. 작가는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의 인상과 파편들을 엮은 글"이라며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 달래면서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뒤고 쓸 수밖에 없었다"고 후기에 썼다. 소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차세의 삶은 실제 작가의 삶과 많은 부분 겹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마동수 일가 4인의 삶이 각 장마다 시점을 달리하며 제시돼있다. 일제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마동수는 중국,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해방후 귀국했다. 피난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마장세, 마차세 2남을 두었으나, 집에 발붙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았다. 간혹 집에 들어올 때 고등어나 쌀을 가져와 며칠 쉰 뒤 다시 사라지는 식이었다.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은 함흥 철수 때 남편, 그가 안고 있던 젖먹이 딸과 헤어졌다. 피난지 부산에서 만난 마동수와 살림을 차렸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도순의 삶은 여전히 신산했다. 이도순의 말년은 요양원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과 싸우면서 사그러졌다. 마장세는 월남전에 파병됐다가 현지에서 전역한 뒤 귀국하지 않고 미크로네시아 일대에서 고철 사업체를 차렸다. 서울에 며칠 돌아온다 해도 가족과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마차세는 형이나 아버지에 비해선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 전역후 복학하지 않고 바로 취직을 했으며, 미대를 나온 여성과 결혼했고, 병이 깊어가는 노부모를 돌봤다. 밥벌이가 끊긴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아내가 학원 강사일을 해 돈을 벌었다. 마차세는 앞으로도 그렇게 한국의 가장으로 살아갈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마차세의 처 박상희의 이야기가 살짝 끼어든다. 


'공터에서'를 "소설판 '국제시장'" 혹은 "거꾸로선 '국제시장'"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지근거리에서 보며 자랐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세대), 그래도 마침내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세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제시장'에서 코믹한 기운을 모조리 뺀 뒤, 김훈 특유의 비장미가 섞였다고 하겠다. 거기에 '국제시장'에 비해서는 아버지 세대와 조금 더 거리를 두려는 의식이 강하다고 하겠다.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연고지 없는 열대의 섬을 떠도는 마장세처럼. 그러나 마장세조차 기이한 우연과 그 자신의 과오로 인해, 결국 한국땅으로 소환되고 만다. 우리는 아버지 세대, 우리가 발 딛고 선 문화적 터전, 과거로부터 온전히 놓여날 수는 없다고 결국 작가는 수긍하고 있다. 마차세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 평생 치러보지 않은 부모 제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그의 아내 박상희다. 소설에서 박상희는 이상적인 아내, 좀 더 과감히 말해 구원의 여신처럼 그려진다.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는 문장은 책 뒤 표지, 그리고 신문의 책 광고에도 나온다. 세상살이의 엄혹함, 밥벌이의 고단함은 김훈 소설의 주된 정조이기도 하다. '국제시장'을 봐도, '공터에서'를 읽어도 아버지 세대에게 그런 정조는 뿌리 깊은 것 같다. 광복 이전부터 전쟁 이후까지 마동수의 삶, 베트남전에 참전한 마장세의 삶이야 당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성장기의 한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아간 마차세의 삶도 무척이나 고되다. 입사 3개월만에 문 닫은 경제잡지에서 나온 마차세는 수차례의 면접에서 떨어진 뒤 오토바이 수송일을 하는데, 육중한 트럭 사이, 여름철 녹아내려 달라붙는 아스팔트 자국을 끌며 배달을 하는 묘사가 그럴싸하다. 단지 나의 성장배경이나 현재의 생활환경은, 이렇게 고단한 삶의 묘사에 대해, 적자생존의 잔혹함을 다룬 잘찍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이상의 이입을 허락하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고단함을 강조하는 작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