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645건

  1.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2. 비 오는 밤의 꿈같은 인생, '나, 제왕의 생애'
  3. 트라우마와 킬러와 소녀, '너는 여기에 없었다'
  4. 앞선 문명으로부터 뒤처진 문명에게,'중력의 임무'
  5. 짓다만 성, '안시성'
  6. 스와핑, 섹스봇, 신경개조, 감옥실험...'심장은 마지막 순간에' (1)
  7. 인간관계의 총합 '검의 폭풍'
  8. 음악만 들어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9. SF? 로맨스! '스타터스'
  10. 난삽하지만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한, '유령퇴장'
  11. 지속가능하지 않은 승리와 열정 '보리 vs 매켄로'
  12. 투명성의 지옥 '아논'
  13. 커다란 농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14. 유령을 보는 혹은 보는 척 하는 형사 '리버'
  15. 식물도 죽이지 말라 '세계 종교의 역사'
  16. 건달과 식당주인과 그 아내와...'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17. 아이돌에 대한 몰입과 거리감 '도쿄 아이돌스'
  18.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19. 이상한 감독, 주연, 투자자, 리뷰어, '서던 리치'
  20. 위대하지도, 굴욕적이지도 않은 삶 '스토너'
  21.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더 포스트'
  22. 서사가 아니라 감각,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3. 전통과 초현대가 공존하는 그곳, '블랙 팬서'
  24. '스타트렉'과 소화가능한 윤리적 딜레마
  25. 메트로폴리스에서 청년이 방 한 칸을 가진다는 것, '프란시스 하' (2)
  26. 어처구니 없는 극우의 스케일,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27. 데이비드 밴의 악스트 인터뷰 중 발췌. 13살때 아버지가 자살한 작가의 이야기.
  28. 오래 살자, 살아서 말하자, '눈먼 암살자'
  29. 에이리언의 기원, '에이리언: 커버넌트'
  30. 예술의 상상력과 정치의 각론 사이의 북한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본 김에 내처 조너선 에임즈의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프시케의 숲)까지 읽었다. 소설이 나온 건 2013년인데 4년만에 영화화됐으니 상당히 빨리 진척된 셈이다. 영화가 89분으로 짧았는데, 소설 역시 152쪽으로 짧다. 분량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복잡한 미스터리를 감추어 두었거나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 일은 없다. 하드보일드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난다. 심지어 '이제 절정부로 가겠군' 하는 순간에 끝나버린다. 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구성인데, 실제 속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소설의 확장판이 2018년 나왔다고 하는데, 원판의 결말에서 더 나아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다른 부분은,


-주인공 조의 트라우마의 근원이 조금 더 드러난다. 그런데 이건 소설과 영화의 차이라고도 할 수 없긴 하다.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통상 생략과 축약을 거치니까. 그러니까 소설에선 조의 트라우마가 활자로 좀 더 구체화됐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영화에서의 짐작대로 조는 군인이었고, 이후 FBI에서 성매매전담 요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지독한 가정폭력범이었고, 아들 조를 떄리거나 아니면 아내를 때렸다. 

-영화 속 조가 시적인 킬러인 반면 소설의 조는 좀 더 실용적인 킬러다. 영화에서 조는 자신이 공격해 죽어가는 남자 옆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상당히 인상적인 장면), 어머니의 시신을 물에 떠내려보내기 위해 상복을 입고 강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소설에선 전자의 장면이 아예 없고, 어머니의 시신은 절벽 같은 곳에서 물에 던져버린다. 린 램지는 왜 조가 자기 총에 맞아 죽어가는 남자의 독백을 듣도록 했을까. 자기가 죽여놓고 종부성사를 하는 사제처럼 구는, 듣도보도 못한 살인자다. 

-무엇보다 피해자인 니나의 아버지 보토 상원의원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 소설 속 보토는 영화보다 훨씬 극악한 악당이다. 영화에선 딸의 성착취를 막아내지 못한 보토가 자살하지만, 소설에서 자살하는 것은 동료 상원의원이다. 오히려 보토는 정치적 야심을 위해 딸을 악당들에게 넘긴 것으로 드러난다. 아버지가 악당이었으면 더욱 극적이었을텐데, 굳이 제3의 악당을 설정한 램지의 선택의 이유는? 

-영화에서 니나는 악당의 목을 면도칼로 베어 스스로 죽인다. 경호원 몇몇을 처리한 뒤 도착한 조는 결국 이미 죽은 악당을 발견할 뿐이다. 그때까지 엄청난 액션을 선보인 주인공이 악당을 직접 처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 영화의 관습을 어긴다. 하지만 소설에서 악당을 죽이는 것은 당연히 조다. 

-영화에서 구출된 니나는 조와 함께 낯선 식당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둘은 어딘가로 잠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 속 조는 아직 니나(소설에선 리사란 이름)를 구출하지 못했다. 보토 의원의 이마에 망치를 박아넣은 조가 리사를 데려간 조직을 처단하려는 의지를 다지면서 소설은 끝난다. 마치 결말을 내지 않은 채 끝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선 소설의 결말이 비전형적이다. 결국 영화와 소설은 각기 다른 부분에서 전형성과 비전형성을 보이는 셈. 









오래 전부터 제목을 들었던데다가 얼마전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읽은터라 비교해보려 손에 들었는데, 독재자 소설은 빼고 이 책만 언급해도 되겠다 싶었다. 중국 작가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는 오랜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긴 책이다. 조금 더 집중했다면 한 자리에서 350여쪽을 읽어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

가상의 고대왕국 섭국이 배경이다. 왕이 승하한 뒤 여러 명의 왕자 중 열네살의 단백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장자 단문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 모두가 예상했던 터였기에, 단백의 왕위 계승은 본인조차 놀란 일이었다. 마음도, 자질도 준비되지 않은 단백은 서로 사이가 나쁜 할머니와 어머니의 수렴청정 아래 무기력한 제왕으로서의 나날을 보낸다. 어린 섭왕은 선왕의 후궁들의 혀를 자르거나, 충성스러웠던 패장을 활로 쏘아 죽이거나 하는 식의 포악한 짓도 하지만, 이 제왕은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였다. 무해한 궁녀나 신하나 군인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청년으로 자라난 섭왕은 유일하게 사랑했던 후궁과의 행복한 결혼도 이루지 못한 채, 쇠락하는 국가의 운명을 방관한다. 

3부에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방향을 튼다. 철지부심한 이복형제 단문이 군사를 몰고 돌아오자, 섭왕은 왕위에서 쫓겨난다. 새 섭왕 단문은 구 섭왕 단백을 죽이지 않고 평민으로 살아가도록 경성에서 쫓아낸다. 단백은 평소 동경하던 줄타기 광대의 길을 걷는다. 치국하고 평천하했으나 평화로운 사적인 삶을 누리지는 못한 늙은 제왕의 회고록을 생각하고 읽어나가던 나같은 독자는 어리벙벙했다. '왕이 광대가 됐다'는 급격한 전환이 어색하고 작위적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급커브 구간을 능숙하게 통과한 뒤 다시 액셀레이터를 밟는 레이서처럼, 광대로서의 삶도 흡입력있게 써나간다. 제왕의 옷이나 권력이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심 생각해왔던 단백은, 고공의 줄 위에서 구경꾼들을 내려다본 뒤에야 비로소 손에 딱 쥐어지는 권력을 향유한다. 단백의 재능은 국가 경영이나 정치적 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데에 있었다. 물론 잔학하게 꿈틀대는 세상은 단백이 행복한 외줄 광대의 삶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단백의 남은 반평생이 간략하게 정리된다. "나는 남은 절반의 생을 고죽산의 고죽사에서 지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논어'를 읽고 또 읽으며 무수한 밤을 보냈다. 나는 어떤 날은 이 성현의 책이 세상 만물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고 느꼈고, 또 어떤 날은 거기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느꼈다"로 끝난다. 연기처럼 무상한 삶이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요약된다. 단백은 로마의 현제가 아니어서, 인생이나 국가나 세계에 관한 어떤 지혜도 남기지 않지만, 그래서 어쩌면 '나, 제왕의 생애'는 "비 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같이 어지럽고 애처롭고 허무한 책이지만, 그런 몽환의 세계관에 빠졌다 나오는 것도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다. 난 더 보람있고 유익하고 능률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스포일러 있음

'케빈에 대하여'(2011)는 근 10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무섭다. 1시간 52분이면 긴 상영시간도 아닌데, 그 시간 내내 온몸이 굳어 있었다. 나중에는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봐도 무서웠다. 이 영화에서 '케빈' 역을 맡은 에즈라 밀라는 이후 어디서 봐도 무서워하게 됐다. 아무리 멀쩡한 역을 연기해도 무섭다. (하긴 멀쩡한 역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하다) 기자회견이나 팬미팅에서 활짝 웃고 있어도 무섭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린 램지가 '케빈에 대하여' 이후 6년만에 내놓은 영화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돼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받았다. '케빈에 대하여'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여전히 온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다. 

조(호아킨 피닉스)는 실종 혹은 납치된 사람을 구출하는 일을 하는 남자다. 물론 구출 과정에는 무지막지한 폭력이 수반되기에, 조는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노모와 함께 살아간다. 조에게 상원의원의 딸 니나를 구출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미성년자인 니나는 아마도 성적 착취를 당하는 곳에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 조는 (올드보이 최민식처럼) 망치 하나 들고 악당의 소굴에 잠입한다. 

소녀와 그를 지키는 킬러. 금세 '레옹'이나 '아저씨'가 떠오를만큼 대중영화에서 흔한 구도다. 램지는 킬러의 트라우마에 조금 더 접근한다. 물론 아저씨(원빈)나 레옹(장 르노)도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조는 그 양상이 조금 심각하다. 조는 일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 종종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친다. 짐작컨대 그는 어린 시절 심각한 가정폭력이 횡행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돼 군인으로 복무했으나 여전히 무언가 끔찍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도 여러 차례 목격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는 일을 할 때는 폭력적인 남자지만, 평상시엔 자기파괴적인 남자다.조는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종종 자살을 흉내낸다.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거나 칼을 입 안으로 넣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꽤 체중을 불린 호아킨 피닉스가 그 육중한 육체 안에 갇혀 자기 자신과 싸운다. 트라우마는 이 남자의 온몸을 병들게 한 것 같다. 


자기가 죽인 남자 옆에서 괴로워하는 조(왼쪽). 


장례식을 치르는 조. (어머니 시체를 검은 비닐로 싸서 강물에 유기하는, 장례식 맞습니다)


가정폭력으로부터 도피하는 어린 시절의 조


조와 그가 구한 소녀 니나. 최종 보스의 결말은 예상밖으로 이뤄진다. 


'트라우마 탐구'라는 영화의 '예술적' 주제가 '킬러와 소녀'라는 대중영화의 구도와 정확히 어울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 각본상을 주는 것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한 남자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홀로 버둥거리는 모습을 89분간 관찰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남자가 무언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을 하다가 자신의 과거에 발목잡히는 구도가 영화를 풀어가기에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남우주연상엔 이의가 전혀 없다. 실제로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70%는 호아킨 피닉스다. 피닉스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 크리스찬 베일과 함께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메소드 액팅 남우가 아닐까.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은퇴를 선언했으니, 이제 걷는 뒷모습만으로도 긴장감을 주는 배우는 많지 않다. 베일의 연기를 보면서도 가끔 느끼는 거지만, 이 영화에서 피닉스를 보면서 "저러다 죽는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니.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이른 은퇴를 선언한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무당이라도, 접신을 반복해 신체와 정신을 변환하다보면 원래의 자기 자신을 건강히 유지할 수 있을까. 게다가 피닉스 같은 배우가 맡는 역할이라는 것이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처럼 거대한 고통을 체내에서 삭혀야하는 일이고 보면, 괜한 걱정은 아닐 듯하다. 

피닉스가 70%라면 나머지 30%는 음악을 맡은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다. 도입부의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부터 압도적이어서,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초반부터 관객의 기선을 제압한다. 카메라에 무엇이 찍혔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을 배경에 깔면 일단 그 영상은 볼 수밖에 없다. 

물론 호아킨 피닉스와 조니 그린우드를 불러모은 감독의 역할을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할 클레멘트의 1954년작 '중력의 임무'는 하드SF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교과서'란 표현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학계 다수로부터 인정받은 주류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비관보다는 낙관에, 감성보다는 이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하다. 

적도 지름 7만7000km, 극 지름 3만km의 찌그러진 팬케이크 모양 외계 행성 메스클린이 배경이다. 자전 속도가 매우 빨라, 지구 시간으로 18분이면 하루가 지난다. 메스클린이 지구와 가장 다른 점은 중력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다. 이 행성의 중력은 적도에서는 지구의 3배, 극지방에서는 지구의 700배에 달한다. 메스클린 행성의 엄청난 중력이 이 하드SF가 보여주는 트릭의 원천이다. 

이 행성에는 납작한 애벌레 모양의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 중력이 너무 강해 인간처럼 직립한 생명체가 진화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메스클린인들이 이 행성 탐사에 나선 지구인(그들에게는 외계인)과 조우한다. 지구인은 반중력장치 개발을 위한 연구 도중 로켓을 메스클린의 극지방에서 잃어버렸다. 지구인은 메스클린인에게 로켓을 회수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몇 가지 반대 급부를 약속한다. 지구로 치면 15세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메스클린인 탐험대와 문명이 앞선 지구인과의 교감이 소설의 핵심이다. 

워낙 중력이 강한 행성이기에, 메스클린인의 가장 큰 공포는 높이다. 비행은 상상할 수 없고, 무언가를 던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불과 몇 cm에서만 떨어져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에 조금만 높은 곳에도 올라갈 수 없다. 메스클린인들은 머리 위에 무언가 있는데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낀다. 사실상 세계를 2차원으로 해석하던 메스클린인들이 지구인의 도움을 받아 3차원 세계에 적응해나간다. 물론 지구인은 선의가 아니라, 로켓 회수라는 큰 목적을 위해 메스클린인을 돕는다. 

작가 클레멘트는 공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복무했다. 퇴역한 뒤에는 대학 전공을 살려 메사추세츠주 작은 도시의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교사로 일했다는 배경을 들으니 정말 책이 교과서 같다) 책 뒤편의 저자 후기에는 클레멘트가 메스클린 행성을 설계해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실제로 관측된 백조자리 61 쌍성의 데이터를 근거로, 행성의 밀도, 중력, 질량, 자전속도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성에서 존재할만한 물질과 생명체의 가능성을 상상했다. 마치 건축가가 마천루를 설계하듯, 클레멘트는 천문학 데이터와 물리학 법칙을 근거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행성을 창조한 것이다. 클레멘트는 독자들에게 '게임의 규칙'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난 물론 그걸 찾을 능력이 없다)

작품이 탈고된 1954년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2차대전의 승리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소련과의 냉전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물질문명, 소비문명은 나날이 풍요를 구가한다. 과학은 한계없이 발전할 것처럼 보인다. 클레멘트는 세계의 과학적 원리에 호기심이 많고, 배우고 발전하고 싶어하는 메스클린 선장 발리넌의 캐릭터 구축에 가장 집중한다. 발리넌은 로켓을 회수한 직후 대담하게도 지구인에게 새로운 계약 조건을 내민다. 지구의 과학 문명을 전수해달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로켓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 지구인은 '쿨'하게 응한다. 매우 삐딱하게 생각하면, 아마존의 원주민에게 수학이나 철자법을 가르치려는 선교사의 겉으로는 너그러운 사실은 오만한 자세처럼 보인다. 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소설에서 지구인은 결코 악당처럼 행동하지 않고, 자신들보다 낮은 수준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을 내리깔아 보지도 않지만, 과연 물질문명의 최강대국 미국의 작가가 아니라면 이런 시선의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작가의 그러한 태도가 은연중 비친다고 해서, '중력의 임무'를 나쁘게 평하고 싶지는 않다. 이 시선은 64년전의 것이니까.   





***스포일러 있음. 

추석 영화 중 '안시성'을 보았다. 관람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투 장면의 표현 수위가 '12세 관람가'에 맞춰졌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전투 장면에선 인체가 크게 훼손됐다. 피가 낭자하진 않았지만, 신체는 여러번 절단됐다. 오히려 '12세 관람가'가 다소 후하게 받은 등급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본의 방향성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 세계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영화가 민족주의 색채를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연개소문과의 갈등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공성전이나 백병전도 잘 연출됐다고 생각한다. 과시적이면서도 흔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병사들의 동선이나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연출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9시간에 가까운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몇 차례의 대규모 공성전 뿐 아니라, 프로도의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빛, 골룸의 사악한 개성 같은 것들이다. '타이타닉'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배가 절반으로 쪼개지는 장면 뿐 아니라 잭과 로즈의 갑판 위 데이트 같은 장면이다. 전쟁영화는 전투장면의 연속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쟁영화는 고대 무기의 위력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역사 속 인물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사학도 아니다.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지 탐구해야 한다. 

'안시성'에는 40배 많은 20만 당 대군을 맞이하는 안시성 사람들의 '두려움'이 빠져있다. 고구려 본진으로부터의 지원도 요원한 가운데, 안시성주 양만춘과 군인들은 중과부적의 외적에 맞서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양만춘은 물론, 군인이나 백성 누구도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이란 갖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적을 맞이한다. 마치 '300'의 스파르탄 전사 같다. 하지만 '300'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300'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그래픽 노블 원작의 영화다. 나고 자라면서 약육강식의 혹독한 세계관을 습득하는 스파르타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명한다. 무엇보다 '300'은 전쟁에 대한 현실적인 감정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 군인들의 근육과 페르시아 군인들의 기괴함을 비교하는데서 쾌감을 주는 영화다. '안시성'은 '300'과 같은 방향의 영화가 아니다. 강대국에 맞선 약소민족의 용기를 기리고, 온정적이면서도 결단력있는 지휘자의 리더십을 칭송하며, 전쟁과 무관한 민초의 소박한 감정을 담아내려 한 영화다. '안시성'이 '300'처럼 되려 했다면, 앞에 말한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조금 더 과감하게 내질렀어야 한다. 하지만 '안시성'은 어정쩡한 태도를 135분간 꾸역꾸역 밀고 간다. 



배역 구성에도 문제가 있다. '안시성'에는 몇 가지 짝패가 있다. 성주 양만춘(조인성)과 그의 충실한 부관 추수지(배성우), 양만춘의 동생 백하(김설현)와 그의 연인 파소(엄태구), 용맹한 군인으로서 라이벌이자 친구인 풍(박병은)과 활보(오대환)다. 이 중 두번째 짝패는 거의 불필요하고, 세번째 짝패는 활용 방식이 어정쩡하다. 다수 관객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200억원대 대작 특성상, 젊은 남녀의 로맨스와 티격태격하는 두 남성의 코미디를 모두 담으려 한 것 같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차라리 신녀(정은채) 캐릭터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채 낭비되서 아쉽다. 짧고 어설픈 에피소드와 몇 차례 애절하지도 않은 눈빛 교환으로 끝난 로맨스 같은 것은 없애버리고, 불길한 예언자인 동시 현실적인 조언자인 신녀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을 확장시켰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제작진은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신녀의 목을 딴다. 

게다가 냉정하게 말해,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케미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영화에서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2015년작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원제 The Heart Goes Last, 위즈덤하우스)를 읽다. 전에 읽은 애트우드의 대표작 '눈먼 암살자'는 무언가 굉장히 복잡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소설이었는데,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속도가 났다. 읽으면서 뭔가 빠트린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경제 위기로 미국 사회가 '카드로 지은 집'처럼 붕괴한 근미래,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집도 직장도 없이 자동차에 의탁해 떠돌며 살아간다. 그런 부부가 흥미로운 광고를 접한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포지트론 프로젝트 광고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됐다. 사람들은 한 달은 감옥에서, 한 달은 주민으로 살아간다. 한 사람이 한 집을 공유하며,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날 입소하고 출소해 엇갈리게 살아간다. 

젊은 부부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일로 몰락해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모습은 굉장히 개연성있게 그려졌다. SF라고 할 것도 없이, 경제위기를 겪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벌어질만한 일들이다. 부부가 포지트론 프로젝트에 자원한 이후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 듯, 판타지적인 구성이다. 여기부터는 사실성보다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추구한다. 

상황에 따라 쉽게 발현되는 인간의 가학 심리를 보여주는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연상케하는 설정이지만, 전개는 전혀 다르다.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의외로 제도적으로 구속된 부부의 마음 속 갈등과 욕망에 천착한다. 그리고 그 전개는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같은 집을 공유하는 다른 부부와 함께 일종의 스와핑 관계를 형성한다. 샤메인이 자발적이었다면, 스탠은 상대 여성에게 사실상 강간을 당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스탠이 기계공학 엔지니어, 샤메인이 의료계종사자라는 점도 이야기의 전개에 한 발단이 된다. 스탠의 기계공학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는 섹스봇과 관련 있고, 샤메인의 의술은 장기밀매 혹은 임의의 사형집행으로 이어진다. 한 남자는 갓 주문한 섹스봇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흥분해 목을 물어뜯는 바람에, 로봇이 합선되어 섹스 자세 그대로 끼어있다가 겨우 구출된 뒤 남은 생을 불구로 살아갈 처지다. 뇌신경을 개조해, 수술 뒤 처음 마주친 사람과 무조건 사랑에 빠지게 하는 기술도 등장한다. 수술당한 한 여성은 남성이 적당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그만 옆에 놓여있던 테디베어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고 살아간다(상당히 기괴한 유머다). 디스토피아 SF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자극적인 소재들이 급박하게, 차례차례 등장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애트우드가 자기가 쓰면서도 재미있을 정도의 통속적인 활극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시리즈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시녀 이야기'를 읽어볼까.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제3부인 '검의 폭풍'(A Storm of Swords)을 읽다. 과거에 번역이 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요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나오고 있다. 4부는 2019년, 5부는 2020년 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미드 제목인 '왕좌의 게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는 소설의 진도를 이미 앞지른 상태이며, 내년에 마지막 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다. 작가가 쓰지 않은 내용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마 드라마 제작진이 전개에 대해 작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쳤을 것이다. 나는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팬이기에 이번에 읽은 '검의 폭풍'의 내용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검의 폭풍'에는 드라마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던 몇 가지 이벤트들이 담겨 있다. 드라마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피의 결혼식', 뜬금 없었던 조프리의 죽음, 역시 예상치 못했던 타이윈 라니스터의 죽음 등이 '검의 폭풍'에 담겼다. 이 이벤트들은 지금까지 7번에 걸친 '왕좌의 게임' 시즌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강렬했으니, 서사의 급격한 굴곡만으로도 '검의 폭풍'은 재미있다.  

하지만 '검의 폭풍'의 독서가 즐거웠던 건 충격적 사건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줄거리는 알고 있다. 이미 본 영화, 드라마의 원작을 읽는 재미란, 영상으로는 간략하게 다뤄진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을 매우 천천히 되새기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챕터 별로 특정한 인물이 중심이 돼 서술된다. 예를 들어 제이미 라니스터는 때로 주인공이 되지만, 그의 쌍둥이 남매이자 제이미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인 세르세이는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르세이의 행동이나 생각 등은 제이미나 그외 주변 사람들의 서술로만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어떤 인물을 택해 서술했는지에 따라 그 인물 주변의 관계도가 그려진다. 감정과 사건의 허브가 되는 인물을 배치한 후, 그 주변 은하계가 형성된다. 유장한 서사를 이끌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데 유용한 방식이라고, 사후적이고 결과론적으로 생각한다.  

'검의 폭풍'의 특징 중 하나는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나긴 여정과 그 사이 싹트는 기묘한 우정, 사랑 등을 그린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제이미와 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는 브리엔느의 관계. 브리엔느는 여러번 그 외모가 묘사될 정도로 인상적으로 추한 외형의 키 큰 여성이다. 브리엔느는 '아가씨'로 남아야 하는 그 시대의 관습을 벗어나 기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아무도 이 거대한 추녀를 '기사'라고 인정하지 않지만, 브리엔느는 고집스럽게 기사의 행동수칙을 지킨다. 브리엔느는 주군인 캐틀린으로부터 포로 제이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고 그 대신 캐틀린의 딸인 산사와 아리아를 데려오라는 명을 받는다. 캐틀린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명이지만, 브리엔느는 주군이 지시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고 그 명을 따르려 한다. 이죽대던 제이미는 차츰 브리엔느의 고집스러운 기사도에 감화된다. '얼음와 불의 노래'의 그 많은 기사들 중에서 가장 기사같은 인물은 기사도, 남성도 아닌 브리엔느다. 어쩌면 제이미는 브리엔느에게서 한때 자신이 가졌을지 모르는, 그러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왕가의 역학 관계에 휘말려 잊어버렸던 충성, 정직, 희생 등의 가치를 다시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또 아리아와 '사냥개' 산도르 클리게인의 관계. 킹스가드의 일원이었던 사냥개는 정치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탈영한다. 아리아는 밤마다 외는 살생부에 산도르의 이름을 넣어두었다. 산도르가 아리아의 친구를 죽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아리아를 붙잡은 사냥개는 그를 엄마 캐틀린 혹은 이모 라이사에게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려 한다. 살인을 일삼는데다가 술고래이며 돈만 아는 남자와 그를 죽이려는 귀족 소녀가 예기치 않게 동행한다. 아리아는 처음엔 몇 차례 탈출 기회를 노리지만, 후엔 포기한다. 어찌된 일인지 아리아는 동행 시간이 길어질수록 산도르를 이해하는듯 보인다. 산도르로부터 도망치려는 생각도, 그를 죽이려는 생각도 사라진다.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것이 아니라, 아리아는 어느덧 산도르를 그냥 하나의 가여운 인간으로서 보게 된다. 산도르가 큰 부상을 입고 죽음에 근접했을 때, 아리아는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떠난다. 그 상황에서의 살인은 아리아에겐 복수가, 산도르에겐 자비가 될 것이었지만, 아리아는 그냥 말 없이 짐을 챙긴다.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못하는, 혹은 사랑하면서 증오하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된다. 

혹은 드라마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인 티리온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 티리온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때 모친은 죽었고 티리온은 난쟁이로 자랄 운명이 되었다. 아버지 타이윈은 아내를 '죽인',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도 말썽만 피우는 티리온을 인정하지 않는다. 티리온이 지독한 외모 컴플렉스와 그에 따른 방탕한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티리온은 라니스터 형제 중 누구보다 영리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심지어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여성에 대한 관점도 결과적으론 로맨틱하다. 티리온이 냉철한 아버지, 사악한 누나, 그래도 인간적인 형, 정의와 돈을 저울질하는 용병,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는 아내, 헌신적으로 보이는 잠자리 파트너와 맺는 관계들은 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여러 인간 관계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4부 언제 나옵니까.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봤다. 이 영화가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감독 교체(드니 빌뇌브->스테파노 솔리마)보다는 에밀리 블런트의 부재가 더 큰 이유라고 꼽고 싶다. 에밀리 블런트는 전편에서 멕시코 마약 조직 소탕을 위해 투입된 FBI 요원 케이트 역을 맡았다. 케이트는 FBI로는 베테랑일지언정,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는 신참이다. 카르텔은 잔인무도하기가 세상에 이를데 없다. 이 카르텔에 비하면 '대부'의 마피아는 신사라고 느껴질 정도. 잔인무도한 조직에 맞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점잖을리 없다. 작전의 책임자인 CIA 요원 맷(조쉬 브롤린)과 '컨설턴트'라고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역시 알고보면 잔인무도한 사람들이다. 알레한드로가 조직원을 취조하기 위해 커다란 생수통을 들고 조사실로 들어오는 장면의 위압감은 압도적이다. 알레한드로가 어떤 방법으로 취조하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섬뜩하다. (그래서인지 '데이 오브 솔다도'에도 생수통 몇 통을 비치해둔 장면이 있다. 전편의 패러디로 보인다.)

케이트는 카르텔과의 전쟁의 초심자로서 작전의 관찰자 역할을 수행했다. 맷이 주도하는 불법적이고 사악한 방법에 겉으로는 반발하면서도, 카르텔을 잡기 위해선 손에 피와 똥을 묻혀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는 안다. 케이트도 소극적으로만 반발함으로써 결국 이 작전을 승인하게 된다. 케이트는 사법기관의 윤리적 모호함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에밀리 블런트가 그 역을 잘 소화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데이 오브 솔다도'엔 케이트가 없다. 그래서 윤리적인 갈등 같은 것도 없다. '데이 오브 솔다도'는 먼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현재는 죽이 착착 맞는 두 남자 맷과 알레한드로의 건조한 버디 무비에 가깝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엔 유머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장면이 없다. 미국 영화에서 드문 경우다.) 멕시코-미국 국경을 통해 극단적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밀입국해 들어오자, 미국 정부는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주를 막으려 한다. 카르텔에게 멕시코발 불법 이주는 마약 밀수보다도 이윤이 남는 일이다. 맷과 알레한드로가 이 작전에 투입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 정부의 얕은 수는 몇 차례 스텝 끝에 꼬인다. 미국 정부는 꼬리를 자르고 발을 빼려하고, 말단들은 희생돼야 한다. 알레한드로는 그 말단이다. 


손가락 한 번 튕겨서 우주의 생명체 절반을 죽인다는 타노스, 조쉬 브롤린

'데이 오브 솔다도' 예고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델 토로는 멋진 배우다. 

카르텔과의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국 정부의 비열함이란 구도는 좀 흔하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정의로우려하나 끝내 심하게 흔들리고 마는 케이트의 존재 덕에 전편에서 독특한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데이 오브 솔다도'는 좀 더 흔한 액션, 스릴러 영화가 됐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꽤 즐겼다고 해야겠다. 전편이 조성한 사막같이 건조한 분위기를 잘 계승했고, 맷과 알레한드로 캐릭터의 매력도 잘 살렸다. 몇 차례 액션 장면도 잘 찍었다. 전편에서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의 평화로운 저녁 식사 자리에 난입한 장면 같은 숨막히는 긴장감은 없지만, 액션 자체는 전편보다 호쾌한 편이다. 

전편보다 확실히 기억에 남는 건 음악. '배트맨 VS 슈퍼맨'을 보고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원더우먼 테마 음악이듯,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본 뒤에도 테마 음악이 오랫동안 귀에 맴돈다. 작곡자는 Hildur Guðnadóttir라는, '힐두르 구드나도티르'라고 읽어야할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이다. 찾아보니 아이슬란드 출신 첼리스트이자 작곡자다. 솔로 앨범을 몇 장 내놓았고, 영화 음악에도 참여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없는 것 같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의 음악은 긴박감 넘치면서도 음산하고 음울하고 신비롭다. 이런 음악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아이슬란드 사람(들)인 시규어 로스다. 그 나라에 살면 다들 이런 감성을 갖는 건가. 아무튼 앞으로 이 작곡가의 음악을 더 많은 영화에서 듣게 될 것 같다. 

구드나도티르의 음악은 이런 느낌. https://www.youtube.com/watch?v=NmZ2pAFbXsE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황금가지)를 읽다. SF라고 알고 읽었는데 사실은 로맨스다. 사실 '스타터스'가 SF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저 내가 잘못 알았을 뿐이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의 일환으로 나왔다. 그러니 'SF가 아니라 SF적 설정이 있는 로맨스였다'고 통탄해봐야 내 잘못이다. 

미래 어느 시기, 태평양 양쪽 국가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 생물학 무기가 투하된다. 그 때문에 미국에는 '엔더스'라 불리는 노인들과 '스타터스'라 불리는 청소년, 어린이만 살아남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과학적 설명은 생략돼있다) 엔더스는 부유하고, 부모가 없는 스타터스는 가난하다. '스타터스'인 '나' 켈리는 큰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위험한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이 아르바이트는 젊은 몸을 갖고 싶은 엔더스에게 일정 기간 동안 몸을 빌려주는 일이다. 엔더스의 의식이 스타터스의 몸으로 들어간 사이, 원래 스타터스의 의식은 어딘가에서 쉬고 있다. 물론 스타터스의 몸을 렌트한 엔더스는 기간 동안 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얼마간 몸을 렌트해준 스타터스는 목돈을 만질 수 있다. 

'청년을 착취하는 노년'이란 알레고리가 너무나 확연하다. 확연한 것은 재미가 없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제몫을 인정받지 못하고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의 청년들이 읽으면 더욱 실감을 느낄텐데, '스타터스'의 목적은 세대간 착취의 폭로가 아니라 로맨스다. 

켈리를 둘러싸고 두 남자가 경쟁한다. 물론 둘 다 멋지다. 거리에서 생활할 때 만난 마이클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데 다정다감하고 생활력이 강하다. 켈리의 몸이 렌트된 뒤 만난 블레이크는 부유하고 로맨틱하다. 블레이크 앞에서 켈리는 '신데렐라'가 된다. 심지어 '신데렐라'처럼 벗겨진 구두를 블레이크가 줍는 에피소드까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안해도 신데렐라인줄 아는데) 그리고 블레이크의 정체에는 한 가지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 켈리와의 로맨스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든다. 성실한 남자와 로맨틱한 남자. 그 사이의 순진무구한 소녀. '엑스맨'의 울버린과 사이클롭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처럼, 작은 디테일만 바뀌는 굵직한 로맨스의 구도다. 

이 세상에서 엔더스는 대체로 막대한 부를 누린다. 그 부에 따른 물질세계의 묘사가 또 한 축이다. 켈리가 입는 아름답고 비싼 옷들, 착용하는 장신구들, 입안에서 녹는 음식들이 자주 묘사된다. 켈리를 씩씩하고 보호본능강하며 정의로운 소녀로 묘사한 것도 이 책의 독자층을 위한 설정이다. '헝거 게임'의 캣니스 에버딘들이 여기저기 출몰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핵심은 켈리와 블레이크의 로맨스. 아래와 같은 대목은 '스타터스'의 인장과도 같다. 


"블레이크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는, 나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또 키스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 이상 좋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도 그랬다. 나는 그 애의 목을 감싸 쥐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애가 내 허리 부근을 안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이 막힐 듯한 기분과 약간의 아찔함을 느끼면서 그 애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애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아니면 이런 부분. 


"말 위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힐끗 바라보다가 그 애를 향해 미소 지었다. 블레이크 역시 미소로 답했다. 석양에 물들어 한쪽 얼굴이 붉어진 채 그 애는 그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블레이크로부터 나에게로 보이지 않는 따뜻한 광선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만약 이게 에어스크린 게임이었다면, 우리 사이에 조잡한 하트 아이콘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베껴쓰면서 손을 조금 떨었다. 요즘 초콜렛을 너무 많이 먹었나. 로맨스는 이렇게 쓰는 것이었군. 나는 3번쯤 환생해도 쓸 수 없는 문장이다. 



 


타계를 추모하는 혼자만의 의식으로 필립 로스의 2007년작 <유령 퇴장>(문학동네)을 뒤늦게 읽다. 국내에는 2014년 출간됐는데, 언젠가 입수했다가 회사 책상 앞 책꽂이에 꽂아놓은 뒤 읽지 않고 두었다. 알다시피, 책은 한 번 읽을 시기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로스의 책을 몇 권 읽어나갔을 때 <유령 퇴장>은 제 순서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난 로스의 책에 조금 지쳤고, 그렇게 <유령 퇴장>을 방치했다. 그래도 책을 치워버리지는 않아서 몇 번 자리를 옮기면서도 줄곧 눈에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 사이 <유령 퇴장>은 100년전부터 거기 있었던 정물처럼 놓여있었다.


'나'는 70대의 유대계 미국 소설가 네이선 주커먼이다. 주커먼은 1974년 로스의 책에 처음 나온 뒤, <유령 퇴장>까지 모두 9번 등장했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등 로스의 대표작이 그 9편에 속한다. <유령 퇴장>은 주커먼이 등장한 마지막 책이다.  주커먼은 로스의 '소설적 자아'라 할 수 있다. 


필립 로스(1933~2018)


<유령 퇴장>에서 주커먼은 11년간 은둔해있던 버크셔 산골을 떠나 뉴욕으로 온다. 전립선암의 후유증인 요실금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로스의 다른 책을 읽었다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병이 깨끗이 낫고 오랜만의 도시 나들이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시골로 평화롭게 돌아가 다시 멋진 소설을 쓰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진 않는다. 의사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오줌은 계속 새어나와 안전 팬티 속을 가득 채운다. 늙은 주커먼을 괴롭게하는 건 육체의 쇠락만이 아니다. 주커먼은 여러가지 혼란한 사건과 맞딱드린다. 존경하는 선배 작가 로노프의 연인으로 한때 자신도 마음에 두었던 에이미가 뇌종양 수술을 받아 머리카락이 절반은 없는 가난한 노파가 된 모습을 목격한다. 주커먼은 충동적으로 1년간 집을 바꿔 살기로 한 작가 지망생 부부를 만나는데, 그중 아내 제이미에게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주커먼은 이미 여성과의 육체적 사랑을 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말이다. 가장 큰 난관은 로노프의 전기를 쓰겠다고 달려드는 젊은 저널리스트 클리먼이다. 클리먼은 에너지가 넘치는, 하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야심만만한, 하지만 야심을 점잖치 않게 발산하는 남자다. 클리먼은 거의 잊혀진 로노프의 삶과 문학을 다시 미국인의 정신사적 궤적 속으로 돌려놓겠다는 포부를 밝히지만, 이를 위해선 죽은 로노프의 명예가 훼손되고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주커먼은 클리먼을 막기 위해 모든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미 주커먼에겐 그럴만한 기력이 없다. 

주커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유대적인 협박 메시지 때문에 시골로 도피한 것으로 되어있다. 협박이 멈추었다면 뉴욕으로 돌아와야겠지만, 주커먼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철저한 은둔과 사회로부터의 망각을 택했다. 아니, 주커먼이 먼저 사회를 망각했다. 대중은 빠른 사회의 변화에 일희일비하겠지만, 오랜 세월 미국을 지켜본 주커먼은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견딜 수도 없고 바꿀 힘도 없는 모든 일에 대해 아예 귀를 닫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달리 무슨 이유로 내가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는 걸 포기했겠는가? 나는 더는 실망으로 곤두박칠 일이 없는 곳에서 살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겪는다. 어제의 뉴스가 오늘의 뉴스로 잊혀지고, 오늘의 뉴스는 또 내일 잊혀진다. 처음 들었을 땐 충격적인데, 하루 지나면 최초의 충격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결국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제이미 부부는 아들 부시의 당선에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주커먼은 그러지 않는다. 그의 지친 눈빛은 모든 일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예전 같으면 그런 파당 정치의 대립을 지켜보면서 초연할 수 없었겠지만, 거의 한 세기의 4분의 3에 이르는 세월을 미국이라는 나라에 홀린 채 살고 나니, 더는 사 년마다 어린애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다. 어린애 같은 감정과 어른의 고통에 말이다."

역시 신랄한 대목은 쇠락한 육체에 대한 묘사다. 로스는 74세에 집필한 이 소설에서 한때 쓸만했을 듯한, 하지만 지금은 볼품없어진 주커먼의 성기를 아래처럼 묘사한다. 주커먼은 40세 연하의 여성 제이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마 에너지가 정신과 육체에 두루 뻗쳐있던 시절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런 실망감을 표현할 수 있겠지. 

"한때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던, 방광조임근도 완벽하게 제어되고 충분히 제 기능을 다하던 성기가 달려 있던 두 다리 사이에 이제는 쭈글거리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수도꼭지를 달고 있는 남자에게는 결코 무해할 리 없는 절망적인 사랑이 열병이 휘두르는 무자비함에 즉시 굴복한 채. 한때는 단단한 생식기였던 그것은 이제, 저 어딘가에 삐죽 튀어나와 우리 눈에 띄는 파이프의 끄트머리, 어느날 누가 밸브를 한 바퀴 더 조여 빌어먹을 물줄기를 완전히 잠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낼 때까지 물을 질질 흘리는, 종종 왈칵 뿜기도 하고 콸콸 쏟아내기도 하는 아무 의미 없는 파이프 한 토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령 퇴장>은 <에브리맨> <휴먼 스테인> <울분>처럼 서사에 몰입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실험적인 기법과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커먼의 생각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어 난삽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책이다. 물론 그 난삽함이란 '노인의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듯한, 오히려 '노인의 자기혐오'라 부르는 편이 좋을 듯한, 하지만 정말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해서 책을 읽어나가기 아슬아슬해지는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의 모음이다. 로스의 명복을 빈다. 







야구 영화 본 뒤 야구하고 싶은 적은 없다. 축구 영화 본 뒤 축구하고 싶은 적도 없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를 보고 테니스를 치고 싶어졌다. 파란 잔디가 깔린 윔블던 센터 코트를 부감으로 잡은 초반부부터 그런 생각이 든다. 파란 잔디, 하얀 유니폼, 두 코트를 빠르게 오가는 작고 노란 공... 관중들이 숨죽인 사이, 코트를 때리고 튕겨나가는 공 소리가 경쾌하다. 두 플레이어의 재빠른 발소리와 힘겨운 신음 소리. 나도 잔디 코트에 공을 튀겨보고 싶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운동에 소질있는 편이 아니라 실력이 쑥쑥 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제일 통쾌했던 순간은 역시 서브였다. 포핸드, 백핸드로 공을 제대로 맞혔을 때도 즐거웠지만, 높게 띄운 공을 상대편 코트로 순식간에 꽂아넣었을 때의 쾌감은 대단했다. 네트에 걸리지 않고 금에 걸치지도 않은 공이 코트를 때린 뒤 재빠르게 튕겨나가는 순간의 쾌감에 대해선,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클리셰를 쓸 수밖에 없다.

스포츠 영화에 스포츠 장면을 잘 잡는건 필수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는 테니스 경기만 박진감 넘치게 촬영한 영화는 아니다. 윔블던을 4번 연속 우승한 뒤 다섯 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스웨덴의 스타 선수 비외른 보리와, 그에 도전하는 신성 존 매켄로의 1980년 윔블던 결승을 보여주는 동시, 두 선수의 성장기와 개인사를 조금씩 드러낸다. 영화는 두 선수의 극명한 스타일 차이를 대비해 보여준다. 매켄로는 알려져있다시피 '악동'이다. 판정에 납득할 수 없으면 심판에게 막말을 하며 대들고, 때로 관중하고도 싸운다. 관중은 그런 매켄로에게 야유를 퍼붓지만, 매켄로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반대로 보리는 '미스터 아이스'다. 경기 중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인터뷰로 대중과 만날 기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인 답변을 하고, 상대 선수를 칭찬한다. 보리는 록스타같은 인기를 누린다. 



달라 보이지만, 사실 둘은 비슷하기도 하다. 둘 모두 강박적으로 이기고 싶어하고, 이기지 못했을 때는 터져나갈 듯 분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리 역시 청소년기에는 매켄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사적인 스포츠'임을 자부하는 테니스계는 보리의 불같은 성격을 용납하지 않았고, 보리는 이기기 위해선 분노를 감춰야 한다는 사실을 꺠달았다. 물론 보리의 화는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코트 위에서, 대중 앞에서 차갑게 감추었을 뿐, 보리는 내면에선 여전히 불같은 사람이다. 가끔 바깥으로 넘실거리는 보리의 불꽃은 주변 사람을 괴롭게 한다. 약혼자에게 상처를 주고, 오랜 기간 함께한 코치를 갑작스럽게 해고하게 만든다. 

이기는 걸 너무나 좋아하고, 이기지 못하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성과를 낸다. 스포츠에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 스포츠 선수의 팬 서비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지만, 최고의 팬서비스는 역시 승리다. 그런 점에서 보리와 매켄로는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팬서비스를 제공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래서 선수들 본인이 행복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 상영후 나오는 자막에 따르면, 보리는 영화 배경으로부터 1년 뒤인 81년 윔블던 결승에서 매켄로에 패배했다. 그리고 얼마뒤 은퇴했다. 불과 26세의 나이였다.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승리를 추구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스포츠 영화, 만화에 나온 주인공처럼, 보리는 짧은 순간 모든 걸 불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일의 조' 식의 '완전연소'. 

보리 역의 스웨덴 배우 스베리르 구드나슨과 매켄로 역의 샤이어 라보프는 모두 잘한다. 구드나슨은 1978년생 배우인데, 이번에 처음 알아봤다. 스웨덴 배우가 비외른 보리 역을 연기한다는 건, 한국 여배우가 수십년 뒤 김연아를 연기하는 것 비슷한 심정일까. 라보프는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역시 이상한 사람 연기를 잘한다. 그에게 계속 이상한 역을 맡겨줬으면 좋겠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앤드류 니콜의 '아논'(Anon)을 보다. '아논'이란 '익명'(anonymous)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니콜은 '가타카'(1997)의 작가, 연출답게 비주얼은 유토피아지만 사는 모양은 디스토피아인 미래 사회를 '아논'에서 그린다. '가타카'가 유전자에 의해 계급이 사실상 결정되는 사회를 그렸다면, '아논'은 보는 모든 것이 기록돼 사생활과 익명성을 보장받기 힘든 사회를 그린다. '아논' 속 사람들은 한때 유행하려다 말았던 구글 글래스를 쓴 듯한 인터페이스 속에서 살아간다.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이름, 직업 등이 자막으로 나타나고, 노점상의 핫도그를 보면 각각의 이름과 성분이 나타난다. 이런 시각 이미지들은 모두 기록돼, 범죄 수사에 활용되거나 심지어 연인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너 어젯밤 누구하고 있었어? 어젯밤 기록 보여줘"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살(클라이브 오웬)은 형사다. 이 사회에서 경찰 노릇 하기란 2018년보다 쉬워보인다. 범죄가 일어났을 당시의 시각 기록을 확인하면 되니까.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면, 피해자의 시각 기록이 끊기기 전까지를 재생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서 흔히 그러하듯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범인을 잡기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의 마지막 시각 기록이 해킹됐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마지막 순간 살인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즉 일부 기록이 삭제되고, 불필요한 기록이 삽입된 채 남겨진 것이다. 살은 사건 배후에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삭제해주는 해커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언더커버에 착수한다. 살은 연인을 두고 매춘부를 부른 증권거래인인 척 해, 해커에게 자신이 매춘부와 접촉한 기록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한다. 살에게 익명의 해커(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접촉한다. 

'가타카'는 지금까지도 유전자 조작에 의한 사회 변화를 설명할 때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유전자 가위' 같은 기술이 키워드가 되면서 '가타카'의 혜안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가타카'는 컨셉을 잘 잡은 영화지, 잘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컨셉을 잘 잡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영화로서의 역량이 충분히 드러나진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 '가타카'의 시나리오와 미술을 사용해 다른 감독이 연출했다면 더 그럴싸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아논'도 비슷한 느낌이다. '아논'은 제목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듯, 현대사회의 빅데이터 축적과 투명성, 그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알 수 있다. 경찰은 간단한 접속 해제 코드로 많은 이들이 본 것을 고스란히 데이터화할 수 있다. 별다른 장치도 필요 없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현대 혹은 근미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유용한 설정이지만, '아논'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이후의 전개를 예측가능하게 만든다. 클라이브 오웬, 아만다 사이프리드 같은 배우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은밀하게 만나 쿨하게 일만 하고 헤어질리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기술을 악용하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등장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팜므 파탈은 궁극의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100년은 된 클리셰다. '블랙 미러'의 몇몇 에피소드들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와 반전이 '아논'에는 없다. 배우들은 의도적으로 무표정, 무감정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보여주기보다는 배우의 역량을 제한한다.  

결국 '가타카'처럼, 아논'은 잘만든 영화는 아니면서도 만듦새와 무관하게 종종 언급되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영화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사회학자나 IT 칼럼니스트가 더 언급하기 좋은 종류에 속한다. 




***스포일러 있음.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다. 자기도취에 빠진 백만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착해지는 기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헐크'도 좋다. 사실 마크 러팔로의 헐크보다는, 에릭 바나의 헐크가 좋다. 리안의 그 기나긴 헐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좋아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엔 그 진지함이 지루했는데, 갈수록 진지함이 꼴통스럽게 변하면서 재밌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근래 나온 슈퍼히어로물 중 최고 수작이라 생각한다. '토르' 시리즈는 영화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의 캐릭터는 잘 구축됐다. 토르는 아이언맨과 다른 차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캐릭터다. 좀 얄미운 아이언맨과 달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뒤 잔을 깨트려버리는 단순무식함이 재미있다. '스파이더맨'은 좋은 성장영화다. 역시 핵심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메리제인과의 풋사랑이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좀 더 봐야 알겠는데, 공간을 쥐락펴락하는 시각적 트릭은 뛰어나다. 그건 정말 영화적인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어벤져스' 시리즈를 좋아한 적은 없다. 지난 두 번의 어벤져스 시리즈는 반쯤은 의무적인 기분으로 봤다. 사실 뭘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러 영웅들이 나왔고, 악당이 시시했다는 것 정도. 헐크가 로키를 패대기치는 장면의 유머도 기억은 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오늘 봤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 '독과점'을 말하는 건 진부하고 어색하다. 동시기 개봉작 중 이 영화와 상영관을 나눠가질 만한 상업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0분 표를 끊었는데, 사실상 매진이었다. 



악당 타노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사실상 주인공.


난 '인피니티 워'를 커다란 농담처럼 여긴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저 이 영화의 '밖'에서는 할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시빌 워'에 나타난 히어로들의 대립구도나, 아이언맨이 미국의 군산복합 슈퍼리치를 그리는 방식이나, 헐크의 심리적 여정에 대해선 뭔가 말할 수 있다. 블랙 팬서와 흑인문화의 '쿨'과 '쉬크함'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피니티 워'는 영화 바깥으로 나가면 할 이야기가 없다. 이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주 창조 설화니, 다 모으면 손가락을 튕겨서 우주를 절멸시킬 수 있는 인피니티 스톤 같은 것을, 난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할 뜻이 없다. 일각에선 이 영화의 악당 타노스가 '이유 있는 악당'이라며 '인피니티 워'에 깊이를 부여하려 한다. 다짜고짜 '죽이겠다'고 하는 악당보다야 깊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의 자원이 부족하니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야한다는 논리는 18세기 '인구론'의 조야한 확장판에 불과하다.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피니티 스톤이라면, 생명체를 줄여 자원을 아끼기보단 자원을 늘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더 경제적이고 마음도 편할텐데. 차라리 비슷한 논리로 다수 인류를 죽이려한 '환경주의자' 발렌타인('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 타노스보다 그럴듯했다. (정말 발렌타인처럼 제정신이 아닌 IT 거물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반면 타노스의 존재나 행동 동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요즘 인기 있는 '이유 있는 악당'이 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차라리 로키처럼 그냥 천성이 비뚤어져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 있을 것 같다.

사실 '인피니티 워'는 웃긴다. 조금 진지해지려는 순간마다 농담을 배치한다. 그루트의 사춘기 유머, 드랙스의 부동자세 유머, 스타로드의 지방과 근육 유머 모두 웃긴다. 자아가 뾰족한 아이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브루스가 브루스 자신(헐크)과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토르: 라그나로크' 때부터 본격 유머를 보여준 토르도 여전히 웃긴다. 와칸다의 '스타벅스' 유머에도 피식했다.  

그러므로 나는 '인피니티 워'를 2시간 40분짜리 유머이자 팬서비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많은 히어로와 빌런을 등장시키고도 균형을 유지한 점도 높이 사야겠다. 그외엔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영국의 6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리버'를 보다. 영국, 경찰, 티비 시리즈라 했을 때 떠올릴법한 정서는 '우울'이다. '리버'도 다르지 않다. 6부작, 6시간에 걸친 시간동안 내내 우울하다. 주인공이 70년대 디스코 'I love to love'에 맞춰 2인무를 추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우울하다. 

형사 존 리버와 파트너 스티비 스티븐슨이 함께 차를 타고 순찰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곧 스티비는 이미 죽은 사람임이 밝혀진다. 말하자면 리버는 죽은 이를 본다. '식스 센스'의 성인 버전이다. 하지만 '리버'는 '식스 센스'의 아이처럼 유령을 두려워하기보단 주로 짜증과 화를 낸다. 가끔 유령의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기도 한다. 다른 사람 눈에는 허공에 주먹질 하는 걸로 비춰지는게 문제긴 하다.  

이쯤되면 형사와 유령 형사의 버디물이라고 짐작할 법하다. 유령의 직관과 인간의 행동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구도가 그럴듯하다. 하지만 '리버'는 다른 길을 걷는다. 유령이 자주 나타나 무언가 말을 건네기는 하는데, 대부분 사건 해결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파트너 스티비의 유령 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어간 사건 관계자들의 유령도 종종 나타나는데 대부분 사건 해결의 단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사건을 헛짚는 리버를 빈정댈 뿐이다. 가장 특이한 유령은 옛날 내복을 입은 채 나타나는 남자다. 이 유령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 리버의 속을 긁는 이야기를 한다. 리버는 매번 광분한다. 


'리버'의 등장인물들. 가운데가 리버, 가장 왼쪽이 옛 경찰 파트너이자 지금은 죽은 스티비

그러니 회차가 거듭될수록 의심이 생긴다. 리버가 유령을 보긴 보는건가. 유령은 뭔가 얘기를 하긴 하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리버가 이미 아는 얘기들이다. 리버의 성질을 돋우는 말들도 결국 리버의 성격적 약점을 공략한다. 그러니, 유령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리버의 직관 혹은 무의식 아닌가. 리버는 유령의 도움을 받는 척 하며 이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을 해결하는 것 아닌가. 어찌된 일인지 경찰 조직은 제정신이 아닌 듯 혼잣말을 하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리버를 눈감아준다. 리버는 유령 혹은 자신의 죄의식과 싸우며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시즌2는 소식이 없다. 유령하고 이야기하는 이상한 형사 얘기를 또 보고 싶은 시청자들이 많지 않았나보다. 

스웨덴 배우 스텔란 스카스카드가 리버 역을 맡았다. 스카스가드는 사건 해결에 출중한, 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형사 역을 너무나 훌륭히 소화했다. 배우의 존재감이 작품의 50% 이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시 '토르'의 작은 역할에 그칠 배우는 아니다. 




'세계 종교의 역사'(소소의 책)를 읽다. 원제는 'A Little History of Religion'이다. '리틀 히스토리'라 한 것은 책 분량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 각 종교를 간략하게 설명한다는 뜻인 듯하다. '세계 종교의 이해'같은 타이틀의 대학 교양 시간에 교재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학교수인 역자가 이 책을 그러한 용도로 추천하고 있다. 역자니까 당연히 자신의 책이 좋다고 하겠지만, '옮긴이의 말'의 찬사는 의례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 '탁월' '두려움' '질투' '감사' 같은 어휘가 사용된다. 난 해당분야 전공자가 아니니까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찬사에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저자 리처드 할러웨이는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에딘버러 주교를 역임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책이 '기독교와 그외 세계종교 해설'에 그치진 않는다. 모세에서 시작해 동서양을 아우르며 종교의 흐름과 관습들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각 종교의 방대한 때로 난삽한 교리를 단정한 언어로 정리했다. 물론 '너무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간략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정리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400여쪽 한 권이 아니라 수십 권의 시리즈로 나와야 했겠지.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불교의 흐름이야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만, 덜 알려진, 그래서 이상하거나 때로 감동적인 작은 종교들도 소개한다. 내게 흥미로운 건 그런 '작은' 종교들이었다. 몇 가지 예로 들면


-자이나교 : 영혼이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길을 선택한다. 자이나교의 최고 이상은 수행자들이 굶어죽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죽이거나 해치지 말고, 어떤 것도 탐내거나 갈망하지 말라. 비폭력의 계율은 자이나교에서 절대적이다. 육식은 물론이고, 사냥, 낚시도 안된다. 모기가 뺨을 물어도, 벌이 목을 쏘아도 죽이면 안된다. 집 안에 거미가 줄을 치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잡아 집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길을 걸을 때 벌레를 밟지 않도록 가벼운 깃털로 만든 빗자루로 길을 쓸면서 걷는다. 혹시 숨을 들이쉴 때 입 안으로 곤충이 들어오지 않게 마스크를 쓰는 이도 있다. 식물도 죽이면 안된다. 오직 떨어진 과일만 먹어야 한다. 물론 수행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자이나교는 정신적 영역에서도 비폭력을 추구한다. 인간은 누구든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사물을 보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해야 한다. 자이나교의 '정신적 겸손함'은 종교 역사에서 매우 보기 드물다. 


-시크교 : 1469년 태어나 1539년 죽은 구루 나나크가 창시했다. 시크교는 믿음을 감독하는 사제, 중재자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도 종교의 개신교'라 할만하다. 나나크는 '함께 먹기'를 중시했다. 대부분의 종교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계층을 구분하거나 여러 개의 식사 금기를 두지만, 시크 공동체는 공동 식사의 관습을 도입했다. 시크교 사원에는 부엌이 건물의 다른 부분만큼 신성하다. 시크교 사원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다. 이는 모든 방문자에게 열려있음을 뜻한다. 시크교도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터번을 쓴다. 시크교는 인종적 정체성을 중시하고, 포교에 힘쓰지 않는다. 다만 그들 종교에 합류하길 원하는 사람은 기쁘게 받아들인다. 


-퀘이커교 : 17세기 영국인 조지 폭스에서 유래했다. 구두제작자의 도제였던 폭스는 신부, 설교자, 의례, 예복, 교회같은 공간이 필요없다고 여겼다. 조용히 앉아서 성령이 마음 속에서 말걸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신의 빛은 이미 그들 각자 안에서 불타고 있었다'. 여자, 남자, 노예, 자유인 등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고 여겼다. 성서는 쓰여진 당대의 문화를 반영하기에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퀘이커교는 놀랍게도 이같은 성서의 해석에 도전했다. 심지어 도망 노예들을 돕는 단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퀘이커교는 역사적, 비판적 성서 연구의 초석을 닦았다. 성서에 끼친 신의 영향력을 인정하되, 성서의 인간적인 요소를 구분한다. '퀘이커'(quaker)란 폭스가 '내가 유일하게 몸을 떨면서 겁내는 권위를 가진 분은 오직 신'이라고 밝힌데서 유래한다.  


-모르몬교 :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일명 모르몬교는 1805년 미국 버몬트 소농의 아들인 조셉 스미스에게서 유래했다. 스미스는 25살이 되었을 때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 4세기쯤 모르몬이라는 사람이 경전을 새긴 황금판을 뉴욕주 팔미라 산에 묻었다는 것이었다. 스미스는 황금판을 파내 영어로 번역하고 이를 '모르몬경'이라고 불렀다. 기독교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듯, 모르몬교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모르몬교는 예수가 부활한 지 몇 달 후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해 당시 북미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보살폈다고 믿는다. 스미스는 고대 이스라엘식 믿음의 회복을 주장했기에, 일부다처라는 성서적 관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스미스는 40명에 이르는 아내를 얻었다. 스미스는 감옥에서 살해당했지만, 그를 이은 브리검 영이 조직을 재정비했다. 영은 수천 명의 신도와 함께 서부의 인적 드문 유타에 자리잡았다. 영은 훗날 유타 초대 주지사가 됐고, 모르몬교는 유타에서 안전을 확보했다. 다만 국가제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일부다처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몬교 남성 교인은 국내 또는 국외에서 2년간 선교 활동을 해야 한다. 담배, 약물, 술, 차, 커피, 도박, 문신, 피어싱은 허용되지 않는다. 가족생활을 중시해 많은 자녀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기에 부를 쌓은 이들이 많다.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 : 종교는 많은 결함이 있지만, 미덕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종교라 하기 어렵지만, 종교의 좋은 아이디어를 빌려 왔다.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종교가 부과한 원칙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든 원칙으로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종교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기념하는 의식의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결혼식, 장례식, 신생아 명명식 등 주요 의식을 집전하도록 돕는다. 아울러 세속 영성(secular sprituality)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종교의 예배가 만남과 교류의 장이 됨을 알아채고, 자신들만의 일요 집회를 만들었다. 





 


장강명 작가의 추천으로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민음사)를 읽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권'이니 '명작' 맞겠지? 그런데 내용은 정말 통속적이다. 어느 고속도로변 간이 식당에 우연히 흘러들어온 건달 프랭크가 식당 주인 여자 코라와 눈이 맞아 주인 남자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한다. 둘은 노련한 변호사의 변론으로 살인혐의를 벗고 남편이 들어놓은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낸다. 하지만 프랭크와 코라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둘은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서로에게 묶어둔다. 임신한 코라가 아파 프랭크가 서둘러 차를 몰고 돌아오는 중에 교통사고가 난다. 코라는 앞 유리창 너머로 튕겨나가 죽어버리고, 프랭크는 여자의 살인 누명을 쓴 채 교수대에 오른다. 끝. 

여자의 죽음은 남자가 의도하지 않았기에, 그 살인 혐의를 쓰는건 억울하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을 죽인데 대한 죄값을 치르지 않았으므로, 넓은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마찬가지. 억울해 가슴칠 일도 없고, 운좋다고 기뻐할 일도 없다. 죽으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이 책을 '통속적'이라고 했지만, 그건 비난이 아니다. 난 통속적인 걸 좋아하니까. 통속적인 것은 흔하다는 얘기인데, 어떤 이야기가 흔하게 들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세상의 이야기 패턴이라는 건 많지 않은 듯하다. (아마 문창과에 가면 금방 배울 것 같다) 몇 가지 이야기 패턴을 어떻게 변주하는지, 얼마나 잘 다루는지가 관건일 뿐이다. '마담 보바리'는 얼마나 통속적인가. 나보코프의 '어둠 속의 웃음소리'는? '안나 카레니나'도 빼놓을 수 없고. '안나 카레니나'에서 잘 읽히는 건 레빈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집요한 계몽성이 아니라, 안나의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불륜담 아닌가. 



잭 니콜슨, 제시카 랭이 주연한 영화. 영화를 보고 싶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는 대사다. 마치 시나리오처럼, 둘의 건조하고 짤막한 대화가 핑퐁핑퐁 오간다. 자세히 읽지 않으면 대사의 발화자를 놓치기 쉽다. 그런데 이야기를 쓸 때 이런 대사를 구사할 수 있는 건 축복받은 재능 같다. 머리 속의 생각을 50페이지에 걸쳐 풀어놓기는 잘해도, 두 세 줄 대사는 못쓰는 작가도 많다. 장강명 작가에 따르면 케인은 이 소설을 쓰면서 8만 단어였던 초고를 3만5000 단어로 압축했다고 한다. 짧은 글을 길게 늘리면 듬성듬성해지지만, 긴 글을 짧게 압축하면 쫄깃쫄깃하다는 건 글을 만져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레이먼드 카버의 신비로운 단편들도 편집자가 글을 엄청나게 쳐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건달 프랭크의 배경을 알려주지 않은 채 다자고짜 시작하는 도입부도 마음에 들었다. 프랭크는 소설이 시작한 지 불과 10줄만에 작품의 주된 배경인 '쌍둥이 떡갈나무 선술집'에 들어온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살해당하는 조연이, 그 다음 페이지에는 프랭크의 공범자가 되는 미녀가 등장한다. 빠르다. 난 이런 '다짜고짜'가 좋다. 







명성이 자자하던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감독 교코 미야케)를 보다. 소재가 눈길을 끌거니와, 그 소재를 다루는 태도가 좋다. 일본 지하 아이돌과 그들의 팬덤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적절한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소재를 장악하는 동시, 그에 대한 거리를 유지한다. 저널리즘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갖기 힘든 태도다. 

리오라는 지하 아이돌과 그의 팬덤이 중심이다. 팬덤은 주로 남성이다. 팬의 연령과 직업은 다양하다. 대체로 미혼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리오가 여는 소규모 콘서트에 빠짐없이 나오고, 씨디를 사고 또 사고, 악수회에 참여해 악수와 함께 1분 안팎의 대화를 한다. 리오의 인터넷 방송도 매번 시청한다. 한 팬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다 실패한 후,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아이돌을 위해 썼다고 말한다. 

팬은 후회가 없다. 40대에 접어든 한 팬은 생에 이러한 열정은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 10년 뒤쯤에는 여기 저기 아프고 병들텐데, 그 전까지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한다. 일본의 아이돌은 한국처럼 '완성형'으로 데뷔하기보다는, 춤이든 노래든 캐릭터든 어딘가 어색한 상태에서 데뷔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관례인데, '도쿄 아이돌스'의 아이돌들도 그렇다.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어설픈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데, 팬들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응원한다. 예전 '우정의 무대'에서 봤을법한 함성과 일사분란한 응원이 아이돌 무대 앞에서 재현된다. 

젊은 여성 하나를 둘러싸고 수많은 남성들이 소리지르며 응원한다. 무섭거나 기괴할 것 같은데, 막상 이 남자들과 대화하면 대체로 순박하고 쑥스러워한다. 아이돌들도 팬들이 아빠처럼, 오빠처럼 잘 대해준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신체 접촉이 일절 금지돼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악수회'라는 '회색지대'가 생겼다. 아이돌은 청순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팬은 최소한의 성적인 접촉을 할 수 있다. 상상의 연애, 유사 연애가 이뤄진다고 할 수 있는데, 팬들도 이것이 '유사'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아무리 아이돌과 친해져도, 설령 아이돌 팬클럽의 회장이라 하더라도, 아이돌과의 관계가 진짜 연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 



'도쿄 아이돌스'의 중심인물인 아이돌 히라기 리오

'도쿄 아이돌스'는 아이돌과 남성팬의 관계가 현실의 연애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남성팬들은 거추장스럽게 실제 여성과 연애하지 않는다. 현실 연애에서 관계는 천변만화한다. 내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내 호의가 상대에겐 적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연애에선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다반사다. 그 모든 모순과 어려움을 견뎌내야 연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돌과 팬은 그렇지 않다. 돈을 쓰고, 정성을 다하면, 아이돌은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아이돌은 팬이 정성을 쏟는만큼의 정확한 비례로 미소지어준다. 연애란 상대에 대한 독점욕을 동반하지만, 아이돌과의 가상 연애는 팬덤에 의해 공유된다. 팬은 연애의 독점욕을 포기하는 대신, 연애의 정직한 거래를 확보한다. 

연애같은 거 귀찮아서 안해. 대신 아이돌과 가상 연애할래. 사실 이해가는 태도다. 연애는 귀찮다.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론 돈도 든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나 인류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대해 한숨을 쉴 것 같다. 하지만 난 항상 '후세의 일은 후세가 걱정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이 팬들에게 인구 걱정, 인류 걱정을 하라는건 가혹하다. 다만, '도쿄 아이돌스'의 엔딩이 10대 초반 아이돌을 보여주면서 끝난다는 건 기묘하고 아슬아슬하다.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봐도, 이제 초등 고학년이나 됐을 법한 소녀들이 아저씨들과 악수하는 모습은 이상하다. 그런 점에서 '도쿄 아이돌스'의 태도는 이 팬덤에 대해 끝내 비판적으로 보인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다. 산호초는 비유하자면 바다의 숲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먹이를 얻고 생명을 낳는다. 그러므로 산호초가 사라지면 바다 생물도 타격을 입는다. 바다 생물이 줄어들면, 바다 생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죽는다. 영화 속의 한 생물학자는 '한 세대 이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섬찟한 경고를 남긴다. 

산호초가 죽는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기온 1~2도 높아지는게 대수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높아진 기온은 고스란히 해수로 흡수된다.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산호초 같은 생물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 해수의 온도는 비유하면 체온 같다. 36~37인 체온이 38~39도로 높아지면 그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산호초는 지구의 체온 변화 때문에 가장 먼저 아픈 생물인 셈이다.



'산호초를 따라서'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은 한 해상 레스토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자들은 이 레스토랑 사무실에 기지를 차리고 죽어가는 산호초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날 산호초 군락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광색으로 빛난다. 이유를 알아보니 뜨거워지는 해수를 견디다 못해 햇빛으로부터라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산호초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을 목격한 연구자는 충격을 받는다. 장비를 챙겨 해상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데, 손님들은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먹고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구자는 그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당황한다.  

'산호초를 따라서'는 목적에 충실한 영화다. 산호초의 생태와 존재 의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산호초에 빠진 '덕후'들을 보여준다. 런던의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전직한 수중 사진작가, 어렸을 때부터 산호초 분류에만 몰두한 덕후, 해양생물학자들이 나온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데도 미사여구를 쓰거나, 영화의 미학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 영화 내용을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서던 리치: 소멸의 땅'(원제 Annihilation)을 보다. 감독이 '엑스 마키나'의 알렉스 갈랜드라기에 영화가 이상할 줄은 알았는데, 역시 이상하다. 일단 이런 영화 만든 감독이 이상하고, 이 영화 주연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가 제일 이상하다. 찾아보니 제작비 추정치가 4000만 달러 정도 되던데, 설마 회수하겠다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 너무 멀쩡한, 그래서 심심한 영화들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땅을 칠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 아니니 알 바 아니다. 또다시 헛된 꿈을 꾸는 이상한 투자자들이 나타나길 바랄 뿐. 

미국의 한 국립공원 내 등대에 이상한 빛이 떨어진다. 이후 일대는 기묘한 빛으로 어른거리는 파장에 휩싸인다. 정부와 연구자들은 이 파장을 '쉬머'(the shimmer)라고 부른다. 쉬머가 점점 넓어지자 미국인들(아마 세계인들?)은 걱정에 빠진다. 그리고 쉬머 안으로 들어간 정찰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군복무 경험자인 생물학자 리나의 남편 역시 쉬머로 정찰나간 이였다. 1년이 흘러 남편이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온 뒤 곧 쓰러진다. 리나는 심리학자, 지리학자 등 또다른 4명의 정찰대(모두 여성)와 함께 쉬머 안으로 들어간다. 쉬머 안에서는 DNA가 '굴절'돼 동, 식물이 기형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리나 일행의 기억이나 지리 감각도 흐릿해지고, 정찰대는 하나 둘씩 죽거나 사라진다. 찾아보니 동명의 3부작 소설이 한국에서 출간돼있다.  

'지옥의 묵시록'처럼 시작해, '컨택트'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풍으로 해석하면서 끝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혹은 '서던 리치'의 속편이 '언더 더 스킨'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돌아보면 외계인이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지구를 공격해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는 생각은, 외계인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회고라 할만하다.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지난 세기(혹은 현재도 마찬가지) 제국주의 열강을 닮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정확히 예측 가능하고, 그 동기도 분명하다. 하지만 '컨택트'나 '서던 리치'에서 외계인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그마나 '컨택트' 속 외계인의 동기는 선의에 가깝게 해석되지만, '서든 리치'는 그마저도 모호하다. 인류의 입장에선 위협으로 느끼겠지만, 외계인은 인류를 위협하거나 보호할 의사가 없다. 비둘기가 돌을 위협하는가? 바람이 거미를 보호하는가? 의미 없는 질문이다. 비둘기와 돌, 바람과 거미는 다른 차원의 존재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에 대해 무심하고, 각자의 논리대로 존재할 뿐이다. 

감독의 취미인지, 대중적 고려인지 모르겠지만, 쉬머 안에 스릴러 혹은 호러 영화의 장치들이 조금 놓여있다. 그것 때문에 완전히 안심한 채 명상하고 사색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늑대(와 비슷한 생물)와 곰(과 비슷한 생물)이 정찰대를 공격한다. 특히 곰을 무섭게 그리는데 신경을 쓴 듯 보인다. '레버넌트'에서 디카프리오를 찢어발긴 바로 그 곰이 진화해서 '서던 리치'에 나오는 것 같다. 그저 흉포해서 무서운게 아니라, 이 곰이 인간의 목소리를 흡수해 들려준다. 방금 "살려줘!"라고 외치면서 죽은 사람의 "살려줘" 소리가 곰의 목에서 반복해서 들려온다면? 그것도 테이프가 조금 늘어진 듯 기괴하게 변형된 소리로 흘러나온다면? 

'서던 리치' 같은 영화를 보고나면 인식의 틀이 확장됨을 느낀다. 아니, 금세 수정하겠다. 인간의 인식틀이라는 것이 갑자기 확장될리도 없고, 확장되어봐야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확인하는 것 아닐까 . 그렇다면 '서던 리치'를 보고 내가 재확인한 사실은? 인간은 우주의 먼지라는 것. 인간을 이루는 구성물은 언젠가 우주의 일부가 되고, 그때 '나'라는 경계는 무의미하다는 것. 그 사실에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할 일은 없다는 것. 우주의 견지에서 보면 모든 것이 똑같다는 것. 이 영화 보고 이런 생각하는 나도 이상한가요. 










'설레발은 필패'라는 옛 명언이 있지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의 첫 20페이지를 채 읽지 않았을 때, 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리라는 걸 알았다. '스토너'는 1965년 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나, 50년쯤 지난 뒤 재발견됐다. 물론 작가는 1994년 향년 72세로 죽은 뒤였다. 존 윌리엄스의 삶은 소설 속 윌리엄 스토너처럼, 영광스럽지도 그렇다고 굴욕스럽지도 않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한 문단 정도로 요약한 뒤 시작한다. 189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19세에 미주리 대학에 들어간 뒤 영문학을 전공해 그곳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1956년 사망하기 전까지 모교 강단에 섰다. 스토너는 평생 조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고, 학생이나 동료 교수에게 뚜렷하게 기억되지도 않았다. 마치 그가 정성을 다해 썼으나 많이 팔리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처럼, 스토너의 삶은 지구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망각될 것이다. 


그렇게 평범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스토너의 삶을, 작가는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운데다가 간결한 문장으로 담아낸다. 오며가며 10분씩 끊어서 독서를 하기도 했지만, 직전에 읽은 내용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평생 농부로 살줄 알았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결심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해 농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간 스토너를 사로잡은 것은 농사 짓기에 대한 심화된 기술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였다. 듣도보도 못한 소네트에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낀 스토너는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아들을 손에서 떠나보낸 아버지는 스토너의 선택을 무기력하거나 담담하거나 조금 당황스럽게 지켜볼 뿐이다. 


무기력, 담담함, 약간의 당황. 이것은 '스토너'를 지배하는 정조 중 하나다. 스토너의 삶은 마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한귀퉁이의 부품처럼 흘러가버린다. 물론 스토너는 살면서 몇 차례 선택하고 결단했다.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고, 아내 이디스에게 과감히 구혼했다. 친구들과 함께 참전하는 대신 학교에 남았고, 자신의 학생과 연애했다. 같은 과 교수 중 한 명과 숙적이 돼서 수십년간 반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토너 인생의 흐름을 높은 상공에서 살펴보면, 그리 굽이치지 않는 평탄한 시냇물 같을 것이다. 스토너는 그러한 삶을, 마치 지구 반대편 어느 평범한 서민의 삶에 대해 전해듣듯이 담담하게 살아냈다. 어쩌면, 참전해서 훈장을 받을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거나, 학계에 오래 남을 중요한 책을 썼거나, 세상이 떠들석한 연애를 했을지라도 마찬가지다. 높은 상공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도 스토너와 그리 다르지 않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누구나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거의) 대부분 사람의 삶은 스토너처럼, 위대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다. 스토너는 연애 상대인 캐서린의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작스럽게 이런 말로 위로한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그건 스토너 자신의 삶에 대한 요약이기도 했다. 


스토너는 정년연장 옵션을 사용해 학교에 더 남아있으려 하지만, 암에 걸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스토너는 절망하지도, 피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스토너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병상의 스토너는 자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나. 어떤 기대라도 우리 삶 속에서 충족되는 일은 거의 없고, 그래서 기대는 허망한 것이며, 그렇다고 우리 삶을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음을, '스토너'는 들려준다. 







오늘 밤에도 어느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될지 모르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명대사들이 많은데, 최근 발견한 건 이 대목이다. 세관 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빼돌린 압수품인 마약을 처분하기 위해 건너건너 아는 조폭 최형배(하정우)와 접촉한다. 거래를 위해 만나 몇 잔 술을 걸친 최익현은 최형배의 본관, 파, 돌림자 등을 묻더니 대뜸 자기가 최형배의 고조 할아버지뻘이라며, 할아버지를 봤으면 절을 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부하 조폭에게 끌려가 몇 대를 쳐맞는다(이 장면에선 '맞는다'기보단 '쳐맞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최형배는 부하를 제지시키고는 말한다. 


"어이 아저씨.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아버지를 찾아가 위세를 떨며 결국 최형배의 절을 받아내고, 이후 전직 공무원과 현직 조폭은 환상의 호흡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결국 사이가 벌어져 몰락의 길을 걷는다. 


난 얼마전 모 감독의 오디션 중 성희롱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최형배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일하러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오디션을 볼 땐 오디션 얘기만 하면 된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터이고, 좀 더 확장해 배우의 인생관에 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배우의 삶이란 카메라 앞과 뒤가 무 자르듯 나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영화계 현실'을 알려준답시고, 어느 여배우가 어느 감독과 잤다느니, 주연이 되기 위해선 남자를 유혹할줄 알아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오디션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소리'다. 


일하러 갔으면 일을 해야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면서도 난데없이 최형배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물먹은' 기자들 이야기다. 뉴욕타임즈가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베트남전 정책과 관련한 잘못을 폭로한다. 닉슨 행정부는 타임즈를 고소해 그들의 발을 묶는다. 타임즈에 물먹은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벤(톰 행크스)은 부들부들 떨면서 어떤 기사로든 낙종을 만회해보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포스트의 경영자인 캐서린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캐서린은 주식시장 상장, 정부와의 관계, 회사의 장기적인 생존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을 추동하는 최초의 힘은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도, 위험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도,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미국 청년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벤이 일하도록 몰아부치는 것은 라이벌 언론사에 대한 경쟁심이다. 벤은 타임즈의 에이스 기자가 몇 달 째 기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초조해한다. 해당 기자가 분명 엄청난 특종을 준비중이라고 예상하고, 그 기사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꼼수까지 쓴다. 마침내 타임즈가 '펜타곤 페이퍼' 특종을 내고 며칠 연속 관련 내용을 보도하자, 벤은 산하 기자들에게 히스테리를 폭발시킨다. 언론에 몸담은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유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손 쓸 방법이 없다. 해당 보고서를 입수하기 전까지는 별 수 없이 경쟁사의 단독 기사 행렬을 감수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자의 마인드로 볼 때, 이런 상태는 치욕이다. 벤은 보고서를 입수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고, 마침내 포스트에는 비행기 일등석을 탄 보고서 일부가 도착한다. 이제서야 포스트 기자들은 살맛을 느낀다.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것이 진짜 볼멘소리는 아님을 누구나 안다. 


캐서린은 고민한다. 포스트가 쓰려는 기사는 캐서린의 오랜 친구인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을 괴롭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언론사 사주로서의 입장과 인간적인 우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벤도 직업 윤리와 인간 관계 사이에서 갈등한 적이 있었다. 벤은 JFK 부부와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기자와 취재원이 아닌,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음을 결정적인 순간 깨닫는다. 



캐서린은 포스트의 이사, 변호사, 기자 사이에 둘러싸여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평생 직업을 가질 일이 없던 캐서린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포스트 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나, 진정한 리더가 되진 못한 상태였다. 모든 것을 내건 결정을 내리고서야 캐서린은 진짜 경영자가 된다. 



벤이 법정에 나란히 선 뉴욕 타임즈 관계자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라이벌 의식과 동업자 의식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결국 일은 일이다.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고 '더 포스트'는 말한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직업윤리'의 고귀함 정도가 되겠다. 기자가 기자 윤리에 충실하고, 공무원은 공무원 윤리에 충실하며, 정치인은 정치인 윤리에 충실하면 된다. (조폭의 윤리, 사기꾼의 윤리는 말하지 말자) 지난해의 영화 '택시 운전사'도 결국은 택시 기사로서의 윤리에 충실했던 한 남자를 영웅으로 삼은 영화다. 두말할 것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는 영화인으로서의 윤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스포일러 있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서사가 아니라 감각의 영화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해서 쉽게 요약된다. 말 못하는 청소부 엘라이자가 양서류 괴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끝.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이들의 사랑을 돕거나 방해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료 청소부 젤다와 이웃집 게이 화가 자일스가 엘라이자를 돕고, 실험실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를 방해한다. 과학자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 사이에 끼어있다. 여기에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추근대는, 약간의 변주를 넣었다. 그래서 엘라이자-괴물-스트릭랜드의 삼각 관계가 조성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기능적으로 보인다.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끌리는 과정이 매끈하지 않을 뿐더러(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섹스하며 아내의 입을 틀어막는 장면, 즉 조용한 여자를 좋아하는 스트릭랜드의 성적 취향이 유일한 단서인데, 좀 뜬금없다), 이 대목은 엘라이자와 스트릭랜드의 대립을 강화하는 '수단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느낌이다.



'괴물' 역의 더그 존스는 양서류를 닮은 피조물로 자주 등장한다. '헬보이'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등등. 


마이클 섀넌과 샐리 호킨스의 팽팽한 열연. 



대신 '셰이프 오브 워터'는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한다. 주인공 엘라이자가 듣기는 하지만 말하진 못하는 장애인이라는 설정이 도움된다. 물소리, 발소리, 차소리, 텔레비전 소리 등이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어도 꽤 즐거울 것 같다.) 영미권 작곡가와는 작곡의 결이 다른 알렉산드르 데스플라의 복고적인 음악도 이 소리의 향연에 한몫한다. 엘라이자는 내내 수어로 대화하다가, 종반부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의 방식으로, 벼르고 별러 찍은 느낌이다. '라라랜드'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런 뮤지컬 장면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싶다.    


'동화같은 영화'라고 쉽게 말하기엔 표현 수위가 조금 높다. (당연히 청소년관람불가다) 초반에는 엘라이자의 자위 장면, 후반에는 엘라이자와 '괴물' 사이의 이종 섹스 장면이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폭력의 수위도 높아진다. 스트릭랜드가 호프스테들러의 총에 맞은 볼 안쪽의 입으로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기는 장면은 기예르모 델 토로식 잔혹 취미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얼굴 찢는데 취미가 있는지, '판의 미로' 때는 스페인 파시스트 군인의 볼을 찢은 적이 있다)


엘라이자 역의 샐리 호킨스, 스트릭랜드 역의 마이클 섀넌이 좋은 배우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들의 연기는 한국 관객, 감독이 좋아하는 방식의 열연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섀넌은 박찬욱이 연출하는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에 캐스팅됐다. 아울러 샐리 호킨스는 물론 좋은 배우지만,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그를 주연으로 삼은건 모험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영화가 한국 언론 시점에는 블록버스터지만, 미국에선 20세기 폭스가 아니라 그 산하 스튜디오인 폭스 서치라이트가 제작한 1900만달러 제작비의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블랙 컬쳐는 쿨하다. ('흑인 문화'보다는 '블랙 컬쳐'가 쿨해 보여서 그렇게 표현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감수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블랙 컬쳐는 쿨하고 쉬크하고 모던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블랙 컬쳐는 미국 대중문화의 한 줄기임에는 분명했으나, '주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국에선 물론이다. 유색인종인 한국인들이 다른 유색인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밀도 아니니까. 


분위기가 바뀐 건 힙합의 인기와 맞물린 듯하다. 지금 힙합은 대중음악의 확고부동한 중심 장르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쇼 미 더 머니'다. 그 서브 컨텐츠인 '언프리티 랩스타'나 '고등래퍼'까지 인기 있으니, 반면 록을 중심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 '탑밴드'는 어땠나. KBS라는 공영방송의 형식적, 감성적 한계가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탑밴드'는 한 마디로 '구렸다'. 내가 수십년간 록을 좋아했지만, '탑밴드'를 보면서 구리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방송에서 재현되는 록에선 더 이상 신선하거나 세련되거나 쿨한 무언가를 느낄 수 없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인터뷰 방식, 옷매무새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조금 슬펐다)


연휴기간중 '블랙 팬서'를 봤다. 또 마블 영화다. 사실 영화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마블의 최근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재치,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각 효과적 도전이 없었다. 상영시간이 134분에 달하는데 이야기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 팬서'엔 다른 강점이 있다. 흑인 배우가 대부분의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그것도 미국 바깥 시장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는 배우들이다. 이건 블랙 컬쳐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쿨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자신감이다. 


배경은 서부 아프리카에 있다는 가상의 왕국 와칸다. 국제 사회에서는 '세게 최빈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와칸다는 우주에서 온 금속 비브라늄을 사용해 막대한 부와 첨단 기술을 축적한 국가다. 이곳의 생활수준과 이를 떠받치는 테크놀로지는 동시대 지구 어느 국가도 능가한다. 다만 와칸다는 국제 사회에 자신의 실체를 숨긴 채 자족적인 삶을 즐긴다. 외교적으로 일종의 '고립주의'다. 이들의 고립주의는 나중에 원로와 젊은 세대의 갈등 요소가 된다. 



전통과 초현대가 뒤섞인 '블랙 팬서'의 소품과 의상들. 저 망토를 펼치면 방패가 된다. 


재밌는 건 와칸다가 미래의 테크놀로지를 선취한 나라이면서도, 아프리카의 전통적 이미지(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여전히 간직한 나라라는 점이다. 와칸다는 왕정 국가이며, 왕위는 부계의 장자가 세습한다. 왕이 되기 위해선 와칸다의 주요한 여러 부족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대일 결투로 완력을 증명해야할 때도 있다. 도전자와의 결투에서 이기면 정당하게 왕위를 이어받는다. 부족의 원로들은 아프리카의 전통 의상을 입고 회의에 참여한다. 와칸다 국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창을 든 민머리 여인들인데, 이들 역시 전통에 기반한 의상을 입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총을 미개한 무기라고 여긴다. 왕은 신비한 허브로 만든 약을 마시고 '블랙 팬서'의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이 허브의 성분은 물론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과 초현대, 첨단 정보통신 기술과 고래로부터 내려온 신비의 영약이 공존하는 곳이 와칸다 왕국이다. 


과거였으면 아시아의 어느 국가에 이런 설정을 넣었을 것이다. 사실 '닥터 스트레인지'나 '배트맨 비긴즈'가 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그리긴 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한 나라 전체가 이렇게 묘사된 적은 없었다. 그건 이미 20세기 초 세계 열강에 든 일본은 물론,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과 중국이 더 이상 '신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에 '신비의 영약'이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꽁꽁 숨어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블랙 팬서'는 블랙 컬쳐의 근원인 아프리카의 전통을 '쿨'하게 그리면서도, 아프리카가 처한 저개발의 현실에서 나온 이미지를 교묘히 활용하는 영화다. 그래서 '블랙 팬서'의 시선은 어딘지 이중적이다. 아울러 아직 아시아계 슈퍼히어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블랙 컬쳐가 아시안 컬쳐보단 주류가 되었거나 주류에 거의 근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스타워즈'는 신화적이고 '스타트렉'은 철학적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금 유보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두 시리즈에 대한 팬덤이 너무나 강력해 뭐라고 함부로 말을 보태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조셉 캠벨이 잘 지적했듯 '스타워즈'는 신화에서 볼법한 오랜 영웅 서사를 담았다.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소명을 깨닫고 머나먼 여정에 나서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난을 당했다가, 결국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베이더 부자의 오이디푸스 궤적도 엮여있다. 요즘 나오고 있는 시퀄 시리즈에선 고아 소녀 레이에게 루크의 궤적을 따르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조금의 뒤틀림을 줬는데, 이 때문에 팬덤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다고도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구조에 기반한 '스타워즈'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왕, 귀족, 기사, 유목민의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스타트렉'의 등장인물은 기본적으로 군인, 과학자, 탐험가다. 행성연방 소속의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 대원들은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는데, 그 과정에서 연방에 대항하는 적들을 만나 전투를 벌이거나, 미지의 행성 종족들의 낯선 풍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함선의 명칭과 대원들을 달리 하며 몇 차례의 시리즈가 이어져온데서 알 수 있듯, '스타트렉'에는 '스타워즈'에서 보이는 '중심 서사'랄 것이 없다. '스타트렉'은 기본적으로 단막극에 가깝고, 각 에피소드에서 각자 사건을 해결하고 윤리적 교훈을 주곤 한다. '스타워즈'는 전편을 보지 않으면 다음편에 정붙이기 어렵지만, '스타트렉'은 그 연계성이 희미하다. 


새로운 '스타트렉' 텔레비전 시리즈인 '스타트렉: 디스커버리'가 15개의 에피소드로 최근 끝났다. 두번째 시즌도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디스커버리'에는 몇 가지 새로운 설정이 있었다. 시리즈 최초로 선장이 아닌, 대원이 주인공이다. 게다가 그 대원은 반역죄를 저질렀다가 일시적으로 사면된 흑인 여성이다. 이 여성의 이름은 남성적인 마이클 버넘이다. 마이클이 보필하던 선장 필리파 조지우도 여성(양자경)이다. 조지우의 상급자인 제독도 여성이다. 남성은 악당이거나, 조력자 정도다. 중요한 또다른 남성 캐릭터가 있는데, 암시적이었던 예전 시리즈와 달리 동성애자임을 확실히 드러낸다. (동성 간의 키스신이 있다)


'디스커버리'는 9편까지 잇달아 방영되었다가 잠시 휴방후 10편부터 다시 방영되었다. 그리고 10~15편은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9편 마지막에 디스커버리호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기 위해 스포어 점프를 시도하는데, 이후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한다. 디스커버리호가 도착한 곳은 일종의 평행우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디스커버리호가 위치했던 우주와 정확히 같은 인물들이 살고 있지만, 역사는 전혀 달리 진행된 곳이다. 현우주의 인간이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연방제를 추구한다면, 평행우주의 인간은 무력에 근간한 독재, 제국을 구성하고 있다. 현우주에서 민주적인 리더십의 선장 필리파가, 평행우주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의 황제다. 디스커버리호는 우여곡절 끝에 현우주로 돌아오지만, 그 사이 연방은 숙적 클링온의 기세에 밀려 전쟁에 거의 진 상태였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마이클이 현우주로 충동적으로 데려온 평행우주의 황제가 유용해진다. 연방은 평행우주의 독재자 필리파의 리더십을 빌리려 한다. 필리파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포로에 대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다. 승리,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상과 원칙에 어긋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 미국이 좀 더 효율적인 대테러전을 수행하기 위해 도입한 '강화된 심문기술' 같은 것. 


물론 '디스커버리'는 청소년도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시리즈. 파국적이고 암울한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건 '스타트렉' 시리즈의 이상적이고 희망차고 낙관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으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은 정당화되는가'라는 윤리학의 오랜 딜레마를 슬쩍 던졌다가 회수하는 솜씨는 미국의 텔레비전 시리즈가 허용하는 적절한 수준이다. 시즌 2를 보고 싶다.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의 주인공 마이클 버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역력하다. 

현우주에선 자애로웠던 필리파 조지우 선장이 평행우주에선 무자비한 황제로 등장한다. 양자경이 상반된 역할을 잘해냈다. 솔직히 황제 역은 최고였다. 


뒤늦게 노아 바움벡의 '프란시스 하'(2012)를 보다. 감독 바움벡과 주연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 이후 좋은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바움벡의 최근작 '마이로위츠 스토리'는 지난해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거윅의 연출 데뷔작 '레이디 버드'는 지난해 각종 시상식에서 가장 각광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바움벡하고 거윅은 지금 사귀고 있대나 어쨌대나. 


'프란시스 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흑백영화다. 20대 후반의 프란시스는 현대무용가, 그의 절친인 소피는 출판 편집자다. 하지만 아직 입지가 확고하지는 않다. 프란시스는 일종의 연습단원으로 겨우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상태다. 생활비 비싼 뉴욕에서의 생활은 당연히도 쉽지 않다. '프란시스 하'는 그래서 현대 대도시 청년 1인 가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프란시스는 소피와 함께 살기 위해 남자친구의 동거제안을 거부한다. 이를 계기로 프란시스와 남자친구는 헤어진다. 하지만 소피는 임대 계약이 끝나자 평소 동경하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 한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프란시스는 꽤 부유한 두 남자 사람 친구의 집의 방 한 칸에 자리잡지만, 그마저도 일시적이다. 무용가로서의 프란시스의 커리어는 피어날 기색이 없고, 그에 따라 프란시스의 주거 환경도 점점 열악해진다. 결국 프란시스는 오래전 떠난 대학의 기숙사로 돌아가는 신세가 된다. 이곳에서 프란시스는 행사 알바로 연명한다.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의 패러디.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배경음악으로 깔릴 때, 프란시스가 도심을 달려간다. '나쁜 피'에서 드니 라방은 오른쪽으로 달려가지만, 프란시스는 왼쪽으로 달려간다는 점이 다를뿐. 바움벡은 이 영화에서 '프랑스빠'임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영화 포스터로 쓰인 장면. 사실 영화에선 정말 짧게 스쳐간다. 


랜덤하우스 편집자는 왼쪽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제목인 '프란시스 하'란 프란시스가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뉴욕에서 얻어낸 자기 집 우편함에 끼워 넣은 이름이다. 풀 네임은 '프란시스 할러데이'인데, 우편함의 이름 적는 곳이 부족해 종이를 접다보니 '프란시스 하'로 끝났다. 이 이름이 보여주듯 부족한 것 많은 집이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차지한 프란시스의 표정은 뿌듯하다. 다 적히지 않은 이름을 보여주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간다. 귀엽고 적절하고 재치있는 엔딩이다. 


그래서 이 엔딩은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청년이 집값 비싼 도심에서 자기만의 번듯한 공간을 얻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 청년이 몸담고 있는 분야가 그 어느 곳보다 성공 가능성이 적은 예술 분야라면. 프란시스가 무용단의 행정직으로 일하며 틈틈이 만든 안무작을 작은 무대에 올리고, 그 공연으로 주변 사람에게 격려받는 엔딩은 소박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난 비슷하게 해피엔딩이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호하게 처리된 한국영화 '4등'의 결말부가 좀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프란시스 하'가 현실과 무관한, 억지스러운 가짜 엔딩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난 '프란시스 하'가 좋았고, 때로 자기 자리에서 분투하는, 집정리를 안하고 얼렁뚱땅하고 철부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어깨를 토닥이는 연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태도가 정말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열린책들에서 야심차게 콜렉션을 내놓은, 하지만 판매실적은 신통치 않다는 풍문을 전해들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유문화사)을 읽다. 볼라뇨는 "스탈린과 딜런 토머스가 죽은 해"인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났고 2003년 대작 '2666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1996년 발간됐는데, 비평계에서는 찬사를, 독자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일 때문에 접촉한 모 소설가의 추천으로 손에 들게 되었다. 그 소설가는 연재를 타진하기 위해 샘플 원고를 보내왔고 나는 그 원고가 좋았으나, 여러가지 사정상 게재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매체에서라도 소설가의 후속 작업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북미, 남미에서 20세기 이후 활동했던 극우 작가의 인명 사전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물론 이 작가들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 인물이지만, 이들의 삶과 문학은 실제의 역사, 문학과 교묘하게 교차되어 있다. 볼라뇨는 '극우'의 스펙트럼을 폭넓게 사용한다. 한국적 관점에서 '극우'라 보기 어려운 이들도 이 사전에 포함시킨다. 예를 들어 에델미라 톰슨 데 멘딜루세(1894~1993)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사회의 귀부인으로 목가적이며 종교적인 시와 에세이를 쓰는 이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글을 쓴 적은 드물었으나 오히려 정치적으로 공허하고 무뇌의 글을 썼다는 점에서 영예의 극우 문학인 사전에 등재된다. 이탈로 스키피아노와 아르헨티노 스키피아노 형제는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극렬한 서포터였는데, 평생 축구장과 관련한 폭력, 그리고 이를 선동하는 글을 발표하며 살고 죽어 이 기묘한 사전에 올랐다. 


전체적으로는 풍자적이고 블랙코미디적인 서술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접근하는 척 하면서도 결국은 엉뚱하고 통렬하다. 예를 들어 '작가는 평생을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으나 돌아온 반응은 거의 없었고, 그의 수천페이지짜리 소설은 결국 허풍이거나 허섭쓰레기였다'는 투의 서술이다. 어처구니 없는 작가들의 삶이 간략하게 나열돼 있지만, 바로 그 어처구니 없음의 스케일 때문에 키득거리며 읽게 되는 것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다. 



1966년 미국 알래스카주 아다크 섬에서 태어난 작가 데이비드 밴의 인터뷰 중 발췌. 격월간 문예지 '악스트' 15호에 실림. 작가가 13살 때 아버지가 자살. 국내에는 '자살의 전설' '고트 마운틴' '아쿠아리움' 등이 출간.



"대부분의 작가는 (적어도 초기작에서는) 개인사와 가족 이야기를 끌어다 쓴다. 그 소재에는 무게와 진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 나는 학생들에게 "가족을 제단에 올려놓고 도끼를 휘두르라"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 비극을 쓰는데, 그리스인들은 가족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현대의 치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망가졌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시 온전해질 수 없다."


"역경은 품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일부러 역경을 선택하는 것은 피학적일 것이다. 차라리 품성을 덜 발달시키고 편하게 사는 편을 택하겠다."


"(소설의 소재를 어디서 찾는지 질문에)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소재를 찾을 수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저절로 떠오르거나 안 떠오르거나 둘 중 하나다."


"미국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며 바보들의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 발행인, 에이전트, 서평가, 사서 등 문학을 홍보하는게 일인 사람들조차 새로운 문학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저 행운을 빈다. 번역 시장도 민망한 수준이다. 미국인들은 바깥 세상에 관심이 없으며 다른 나라의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


"비극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말은 옳다. 어느 정도는 고통이 우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관점을 바꾸는데, 관점이야말로 문학의 핵심이다. 경험을 통해 인물의 관점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문학의 본질이다."


"글쓰기를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다른 무엇도 글쓰기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누이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당신과 엄마, 내 아내를 사랑하지만 -당시는 이혼하기 전이었다- 글쓰기를 더 좋아하며 나 자신보다 글쓰기가 더 좋다고 말이다.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었다. 글쓰기는 내게 종교의 대체물이 되었다."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2000년작 '눈먼 암살자'(민음사)를 읽다. 작가가 61세에 집필한 작품이다. 한국 번역본으로 두 권, 900쪽에 육박하는 묵직한 분량이다. (덕분에 추석 연휴 전에 시작해 지금까지 읽었다) 분량만으로만 봐도 작가 후반부의 역량이 집대성된 작품이라 여겨진다.  


액자 안 액자 소설 구조다. 82세의 아이리스 체이스 그리픈이 말한다. 아이리스는 유복한 단추공장 사장의 손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참전군인이었던 아버지대에 이르러 사업은 조금씩 쇠락기에 접어든다. 아이리스는 결국 10대 후반의 나이에 신흥 사업가인 리처드와 일종의 정략 결혼을 했다. 부와 함께 명예를 중시하던 아버지와 달리, 리처드와 그의 여동생 위니프리드는 속물적인 졸부였다. (애트우드는 이 남매의 한심한 행각을 신나게 놀린다) 타협적인 아이리스와 달리, 동생 로라는 리처드의 속물성에 반항한다. 스페인 내전, 2차대전 등을 거치며 사업은 부침을 겪고, 아이리스와 로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정 안팎의 파고에 맞서 나간다. 이 이야기 안에는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로라가 남긴 소설 '눈먼 암살자'가 포함돼 있다. 로라는 이 소설 한 편으로 당대에는 논란이 됐고, 후대에는 불멸의 작가가 됐다. '눈먼 암살자'는 부유층 여성이 노동운동가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내용이다. 노동운동가는 여성에게 우주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SF를 들려준다. 여성은 때로 이 SF의 이야기를 이어 자신만의 이야기로 꾸며낸다. 이것이 액자 안 액자 소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1939~)



이 복잡한 구조는 매우 지적이고 정교하다. 액자와 액자의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고, 간혹 삽입되는 가상의 신문 기사는 사건의 전후맥락을 건조하게 안내한다. 신흥부자이자 속물적 허영을 가진 남편과 전통부자이자 귀족적 정신을 가진 아내의 불화로 가득찬 결혼생활 묘사는 익숙해서 새롭지는 않다. '눈먼 암살자'가 나온지 17년밖에 안된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액자 가장 바깥의 이야기는 상당히 고풍스럽게 읽힌다. 


20대에 요절한 로라는 물론, 숙적 같던 리처드와 위니프리드가 모두 죽은 뒤, 노년의 아이리스는 차분히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제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에겐 입이 없기에, 역사의 주도권은 아이리스에게 있다. 소설은 노년의 아이리스가 걷거나 먹거나 하는 일상생활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몇 차례나 묘사하지만, 기억하고 말하는 능력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일생을 힘겹게 살아왔을지언정, 적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아이리스는 승자다.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권력이나 돈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아이리스의 특권이기에, 아이리스는 그것을 마음껏 누린다. 


물론 특권은 남용되선 안된다. 그리고 내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끝없이 하는, 그러면서 그 말에 과도한 확신을 담은 노인들이 자꾸 떠오른다. '눈먼 암살자'도 그런 소설일까. 아이리스는 불특정다수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종반부에 가면 청자가 특정돼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래서 '눈먼 암살자'의 이야기는 한껏 부풀었다가 겸손하게 수그러든다. 난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청자, 넓게는 후속세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나지막한 조언도 좋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성자, 수십 개의 출신 국가, 수십 개의 취소된 지도, 수백 개의 파괴된 마을들, 네 마음대로 고르렴. 그로부터 네가 물려받은 유산은 무한한 추론의 영역이다. 너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단다



재미 없지는 않지만, 기대만큼 좋지도 않은 '에이리언: 커버넌트'. 


여섯 번째 ‘에이리언’ 시리즈인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갓 깨어난 인공지능(AI)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와 그의 창조자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의 대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피아노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고, 차도 만들 줄 아는 데이비드는 자신의 창조주에게 문득 묻는다. “누가 당신을 창조했습니까?” 

42세에 전설적인 SF호러영화 <에이리언>(1979)을 만든 감독 리들리 스콧(80)은 30여년이 흐른 뒤 <에이리언>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2012)로 돌아왔다.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 이후의 상황을 그린다. 우주 식민지 개척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머나먼 목적지로 향하던 커버넌트호는 비행 도중 사고를 당한다. 예상보다 일찍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승무원들은 목적지 대신 인간이 살기에 적합해 보이는 근처의 또 다른 행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공포를 경험한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시도했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초기 시리즈로 돌아간 듯 에이리언과 인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과 살육전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스콧은 순수한 추격전과 폭력의 쾌감을 전시하는데서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1편 이후 3편의 후속작 <에이리언 2>(제임스 카메론·1986), <에이리언 3>(데이비드 핀처·1992), <에이리언 4>(장 피에르 주네·1997)가 더 제작됐지만, 그 어떤 영화도 내가 1편에서 던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데이비드가 인간의 기원에 대해 묻듯, 스콧 역시 자신이 창조한 에이리언 세계의 시발점을 궁금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악당이 기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성장 배경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지만, 철창 뒤의 한니발이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에게 몇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무서웠다. 1편 제작 당시 <에이리언>을 소개하는 마케팅적 설명은 ‘우주의 죠스’였다. 밀폐된 우주선 안에서 에이리언과 인간은 숨막히는 생존게임을 벌였다. 그때 에이리언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있었을까. 죠스가 왜 사람을 공격하는지, 죠스의 어미는 누구인지, 혹시 죠스가 핵실험에 의해 생긴 돌연변이는 아닌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AI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간적 감정까지 표현하는 AI 데이비드, 좀 더 이성적인 AI 월터로 1인 2역을 하는 마이클 패스벤더의 이름이 배우 중 제일 처음 등장한다. 인류 최고 과학기술의 결집인 AI와 인류의 힘을 능가하는 괴생명체인 에이리언이 만나는 셈이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과 미묘하게 다른 AI 패스벤더의 연기는 소름이 끼친다. 에이리언들이 인간의 육체를 갈가리 찢고, 피와 살과 뼈를 분리하는 풍경은 이 시리즈의 시각적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끔찍한 풍경이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충분히 즐길 만한 수위를 유지하는 데서는 스콧의 노련함이 느껴진다. 9일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결말 보고 당황한 '길소뜸', 영화화 생각하면서 읽은 '우리의 소원은 전쟁'. 실제로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영화제작중이라고. 


통일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초등학교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정작 소원 빌 일이 있을 때 ‘통일’이라고 말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애니메이션 <똘이장군>을 본 기억도 어렴풋이 나는데, 북한의 공산주의자가 사실 알고 봤더니 돼지나 늑대였다는 내용은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유치했다. 텔레비전에 북한 관련 소식과 북한 방송 내용을 전해주는 <통일전망대>란 제목의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같다. 제작진께는 죄송하지만, 요즘도 이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야 알았다. ‘일요일 오전 6시10분’이라는, 평범한 의지의 인간이라면 시청을 장담할 수 없는 방영시간만 탓해본다. 대학 시절엔 통일 문제에 특히 관심 많은 학우들이 있긴 했으나, 그 수가 줄어드는 추세였을뿐더러 친해질 기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은 화석화한 인식의 틀을 사정 없이 부수곤 한다. 지난달 26일부터 오는 6일까지 열리는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그중 <길소뜸>(1985)은 송길한과 명콤비였던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흔히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막상 보면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화영(김지미)은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을 보며 전쟁 중 헤어진 연인 동진(신성일)을 생각한다. 화영은 임신해 아이를 낳지만, 전쟁 중 동진과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다.




화영과 동진은 ‘이산가족 찾기’ 이벤트 덕에 재회한다. 둘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나서고, 유력한 남자를 만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거지떼를 따라다닌 남자는 화영, 동진같이 안온한 중산층 남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혈액검사 결과 남자는 둘의 아들임이 거의 확실해지지만, 화영은 “100%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동진이 아들일 게 뻔한 남자에게 “가끔 연락이나 하고 지내자”고 하자, 남자는 “하루 벌어 먹고살기 힘든데 그럴 시간이 어딨냐”며 가버린다. 동진 역시 화영의 연락처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생이별했던 가족이 30여년 만에 만나는 모습에는 목석 같은 사람도 눈물을 참기 어렵지만, 송길한과 임권택은 대담한 상상을 시작한다. 그 만남은 결국 행복할까. 30여년이란 세월은 사람의 마음, 생각, 습관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었을까. 피만 섞였을 뿐,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산 사람은 사실상 남이 아닐까. 같은 나라 안에서 떨어져 살던 사람의 결합도 이렇게 힘든데, 두 나라의 결합이 가능하긴 할까. 옳든 그르든, 이 질문은 필요하다.

장강명은 최근 가장 각광받는 한국의 젊은 소설가다. 신문기자 신분으로 뒤늦게 장편 데뷔작을 낸 그는 아예 언론사를 떠난 뒤 1년에 2~3편의 장편을 써내는 괴력을 보이고 있다. 그가 지난해 펴낸 <우리의 소원은 전쟁> 역시 통일 문제를 다룬다. ‘김씨 왕조’ 체제가 붕괴하자, 북한에는 통일과도정부가 들어선다. 통일과도정부는 즉각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핵사찰을 받아들인다. 미국은 휴전선 이북으로, 중국은 압록강 이남으로 내려가지 않기로 상호 합의한다. 북한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된다. ‘조선인민군’은 ‘조선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꾼 뒤, 김씨 왕조 체제의 최대 수출품이었던 마약을 독점 공급하는 범죄조직이 된다. 이들은 넘쳐나는 마약을 새로운 시장인 한국에서 판매하려 한다.

이 소설 속 북한은 마약 조직의 힘이 군대 또는 경찰보다 더 센 중남미의 어느 국가처럼 보인다. 중남미 사람들이 미국 국경을 넘어 영주권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하듯, 초토화된 북한의 주민들은 자본주의 한국으로의 이주를 꿈꾼다. 한국에는 북한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인종주의가 발흥한다.

앞에서 통일이든 북한이든 남의 일처럼 얘기했지만,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으로, 미국은 막강한 무기를 한반도 안팎에 배치하는 것으로 불안감을 조성한다. 소셜미디어에는 수시로 “곧 전쟁이 난다”는 풍문이 떠돈다. 실제 북한의 성명이나 미국 정치인의 말만 들으면 곧 전쟁이 터질 것 같다. 그 무서운 말들이 모두 ‘협상용 허풍’일 가능성도 없지 않겠지만, 그 허풍은 우리의 불안감에 젖줄을 대고 또 부풀린다.

19대 대선이 1주일도 안 남았다. 사드를 배치하자 말자, 북한과 대화를 하자 말자, 한국에 전술핵을 들이자 말자 후보 사이에 논쟁이 오간다. 하나같이 중요한 논쟁거리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엔 각론을 넘어선 비전이 필요하다. 사드를 배치하는 궁극적 목적, 북한과 대화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정치인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대선후보들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