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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사람의 클래식 음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클래식 분야의 교양서가 종종 나오지만, 만족스러운 책은 드물다. 향유층이 넓진 않지만, 그들의 취향이 까다로운 분야에선 종종 그런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 만족스러웠다. 클래식 인문교양서로서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 언급될만하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문학수 지음/돌베개/384쪽/1만8000원 음악을 하거나 듣기 위해서는 음악만 알면 되는걸까. 얼핏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 음악가는 좋은 연주를 하면 되고, 청취자는 열심히 들으면 된다. 음악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실제로 “단지 음악을 했을 뿐”이라는 답한 이가 있었다. 베를린 필의 리더였으며 아마도 20세기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지휘자였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자발적으로 나치에 입당해 성공가도를 달렸던 그는 전쟁 이후 자신을 심문한 미군 장.. 더보기
당신은 무엇을 팔 수 있는가, <장사의 시대> 잘 고르지 않는 종류의 책인데 이번에는 과감하게 골라봤고, 꽤 재미있게 읽었다. 영미권 저널리스트들의 책이 흔히 그러하듯 많은 이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명쾌하게 정리했는데, 상당히 냉정한 현실인식에 기반해 있다. 장사의 시대필립 델브스 브러턴 지음·문희경 옮김/어크로스/348쪽/1만5000원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60대 남자 윌리 로먼은 최근 의기소침해졌다. 일거리는 줄어들었고, 두 아들 비프와 해피는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급기야 직장상사는 로먼을 해고하고, 비프 역시 일자리를 구하는데 실패한다. 윌리 로먼과 두 아들은 화해를 위한 저녁 자리를 갖지만, 다시 말다툼만 시작한다. 이런저런 감정의 굴곡 끝에 비프와 화해한 로먼은 자신의 생명보험금을 아들의 사업자금으로 내주기 위.. 더보기
콩고기 버거를 먹어봐야 소용없다고? <채식의 배신> 논지 자체는 흥미로웠는데 서술이 다소 장황한 편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하고 싶은 말, 무엇보다 울분이 넘쳐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해보도록 하자. 왠지 저자를 실제로 만나면 어떤 사람일지 눈에 떠오르는 것 같다. 채식의 배신리어 키스 지음·김희정 옮김/부키/440쪽/1만5000원 20년간 고기는 물론 생선, 계란, 우유, 꿀 등도 일절 먹지 않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 즉 비건으로 살아온 리어 키스는 어느 날 유명한 중국계 미국인 기공(氣功) 선생을 찾았다. 기공 선생은 키스의 맥을 짚은 뒤 말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군요. 기가 전혀 없어요.” 키스가 동물들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고기든 생선이든 먹지 않는다고 간신히 말하자, 선생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는 건 자연의 이치”.. 더보기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연휴가 지났는데도 책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이번 주도 회의가 길었다. 고민 끝에 이 책을 골랐는데 예상보다 잘 읽혔다. 대동법을 전공한 저자라 대동법의 착안, 실행, 완성 과정에 관여한 4명의 정치인, 관료를 다뤘다. 저자의 의도도 그런 것이겠지만, 하나같이 요즘 정치 상황을 연상시킬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이정철 지음/역사비평사/324쪽/1만7000원 국정을 맡아달라는 권유에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귀를 씻은 허유와 소부의 고사에서 볼 수 있듯, 현실 정치판을 멀리한 채 학문을 닦으며 은거해 사는 것은 동북아 지식인들의 한 이상이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조선의 지식인들도 대체로 현실 정치와 상관 없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었다.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연.. 더보기
세계종말, 좌파의 좌절, 컬트 종교-<화성연대기>와 <언더그라운드2>에 대한 단상 누군가 내게 요즘 독서의 방법을 묻는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라고 답하겠다. 한 가지 주제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들을 훑은 적도 있었는데, 비슷한 책들을 오래 읽으니 어느 순간 독서에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과 를 이어서 읽는것 까지는 괜찮은데, 그러다가 같은 시기를 다룬 책을 하나 더 읽으면 좀 질려버리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는 이 주제별, 시대별 독서를 조금 유연하게 적용한 것이라 할만하다. 지난해 인터뷰했던 평론가 김봉석씨가 추천했던 레이 브래드버리의를 읽었다. 브래드버리의 작품은 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은 비판적인 사유를 갖게 하기에 전면 금지되고, 책을 발견해 태우는 걸 직업으로 삼은 남자가 책의 소중함을 깨달아간다는 내용이.. 더보기
혁명은 없다. 봉기 하라,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책이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예전 프론트 리뷰로 쓴 적이 있는 에 한 꼭지의 글을 실은 히로세 준의 저작을 골랐다. 그의 단행본이 완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을 읽었을 때도 느낀 것인데, 일본의 젊은 사상가들의 글은 재미있지만 어딘지 허공으로 한 발짝 떠있다는 감이 든다. 그 한 발짝의 감각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히로세 준 지음·김경원 옮김/바다출판사/288쪽/1만3800원 당신의 삶은 안정적인가. 조금 더 은유적으로 말해, 당신의 인생에는 해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큰 행운아다. 나고 자라 낳고 죽을 때까지 삶의 범위와 행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 더보기
혁명의 열망과 뒤끝, <적군파> 적군파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임정은 옮김/교양인/388쪽/1만6000원 언젠가 일본 여행 중 우연히 경찰서 앞을 지나던 중 빛바랜 지명수배자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은 수십 년 전 유행했을 법한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채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미 체포된 듯 스티커로 얼굴이 가려졌다. 지명수배자들은 모두 일본적군 소속이었다. 한때 이 포스터는 일본의 국제 공항 내 모든 출입국 관리소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적군파는 이제 역사 혹은 좌파 운동에 관심있는 이들이나 기억하는 이름이 됐다. 지명수배자들은 체포돼 형을 살고 있거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거나, 죽었다. 는 일본 급진 좌파 운동을 오랜 기간 연구한 미국의 사회학자 퍼트리샤 스테인호프가 쓴 책이다. 19.. 더보기
연애소설? 성장소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외국문학연구소/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 게재된 글임. 이 책에는 2011~2012 발간된 외국문학 중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는 , , 등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음. 애초 10부작으로 구성된 추리소설 ‘밀레니엄’ 시리즈의 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작품 바깥의 이야기거리가 풍성하다. 먼저 작가 스티그 라르손. 1954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그는 반파시스트 운동을 하던 외조부모의 손에 성장했고, 1983년 언론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시사잡지 ‘엑스포’를 창간한 그는 2004년 사망할 때까지 ‘엑스포’에서 활동하면서 스웨덴의 사회문제, 특히 인종차별과 극우파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그의 기사에 앙심을 품은 이들이 많았기에, 라르손은 동갑 여성 에바 가브리엘손과 32년간 사실혼 .. 더보기
뱀파이어가 되고픈 사람들, <어모털리티> 어모털리티캐서린 메이어 지음·황덕창 옮김/퍼플카우/400쪽/2만원 학교에 다니던 10대에는 이어폰으로 귀가 떨어져나갈 듯한 음악을 들으며 몸에 딱 붙은 청바지를 입었다. 직장에 취직한 20대에는 재테크를 살피기 시작했다. 30대가 되자 결혼과 출산을 했다. 학부형이 된 40대에는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50대가 돼 아이들을 사회에 내보내고 은퇴 후의 삶을 그려보았다. 은퇴한 60대부터는 손주들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렸다. 이렇게 한 사회에는 특정 연령대에 기대되는 행동 양식이 있다. 여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삶의 태도를 보이는 이들에 대해선 “나이값 못한다”고 혀를 찬다. 예를 들어 60대 남성이 30살 연하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거나 50대 여성이 귀여운 캐릭터가.. 더보기
왜 사는가?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의 를 읽다. 지난 대선의 '멘붕' 이후 책 제목에 끌려 읽었다는 분들도 있었지만, 난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은 김에 읽었다. 전작이라 할 수 있는 에서도 강상중은 나쓰메 소세키, 그리고 막스 베버를 통한 '철학적 자기계발서'를 내놓았던 것이다. 일본판 제목은 정도인데, 한국에서 번역돼 나오면서 제목이 바뀌었다. 난 한국 편집자의 센스가 돋보인다고 생각하며, 지난해 방한 때 강상중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한국판이 일본판과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서문에서 아들의 죽음(자살)을 밝힌 것이다. 전해 듣기로 그의 아들은 극심한 우울과 비관에 빠져 세상과의 교류를 거의 차단한 상태였고, 상태가 조금 나아지려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강상중은 일본에서 진지한 토.. 더보기
왜 한국 기업은 이 모양인가, <대한민국 나쁜기업 보고서>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김순천 지음/오월의봄/416쪽/1만6000원 의 19쪽은 텅 비어 있다. 인쇄 사고가 아니다. 여기엔 책을 위한 수많은 인터뷰 중에서도 그 내용이 중요해 가장 첫 장에 배치하기로 한 삼성전자 노동자의 육성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원고가 완성된 뒤 인터뷰이는 마음을 돌렸다. 미안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그는 원고를 싣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가명을 쓴다 해도 회사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 나가면 결국 피해가 돌아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저자는 “많이 아쉬웠지만 그이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서는 한 쪽을 백지로 남겨두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에 다닌다. 새벽별을 보며 출근해 막차를 타고 허겁지겁 돌아올 때까지 기업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 더보기
한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 <내 이름은 욤비> 내 이름은 욤비욤비 토나·박진숙 지음/이후/340쪽/1만6500원 국가의 역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이다. 그러나 간혹 나라가 보호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난민이다. 주로 정치, 종교, 성정체성과 관련해 자유를 제약받거나 생명을 위협받아 난민이 된다. 2011년말 현재 전 세계 난민의 수는 3000만명을 넘는다. 나라의 체제가 불안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중동 지역 나라와 소말리아, 수단, 콩고민주공화국 등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난민이 대거 발생한다. 중동이든 아프리카든 한국과는 멀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은 1992년 국제연합의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01년부터 난민 인정자가 나왔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 더보기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인가, <당신들의 기독교> 당신들의 기독교김영민 지음/글항아리/144쪽/9000원 여기 10명의 기독교인, 정확하게 말하면 개신교인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으며 한때 교회에서 침식을 해결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대학부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철학자 김영민은 이 10명의 신도들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모습을 읽어낸다. 짐작이 가다시피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10명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얼부 허구가 가미됐다고 한다. 여기서도 문제는 돈이다. 에수가 가난뱅이였다는 사실을 잊은 듯 혹은 모르는 듯,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돈이 넘친다. 으리으리하게 지어올린 대형 교회가 다 돈 아닌가. 수십 년간 교회에 다닌 저자의 어머니는 잊을 만하면 말했다고 한다. “교회에서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아!” 이건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허나 .. 더보기
모든 훌륭한 작가는 무언가와 싸운다, <도련님의 시대>와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좋아했다. 한국의 지식인-소설가들이 "농촌 가서 계몽하자"는 소설을 쓰기도 전에, 사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을 어떻게 쓸 수 있었단 말인가. 나쓰메 소세키의 나 의 모던함은 100년 전의 소설이라곤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마 나쓰메 소세키는 조선의 소설가들처럼 나라를 잃어본 적도, 지독한 가난이나 큰 전쟁을 겪은 적도 없어서, 그렇게 물에 물탄 듯 밍밍하지만 그러나 그 물결의 무늬가 섬세하게 그려진 소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짐작해 보았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가 을 창작하는 과정을 그린 만화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가와 나쓰오 글/세미콜론)를 읽고는 생각이 싹 바뀌었다. 나쓰메가 비록 지독한 전쟁, 가난을 겪은 적은 없지만, 그리고 그의 시대인 메.. 더보기
소년의 본능적인 정의감,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를 읽은 김에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마크 트웨인의 을 꺼내들었다. 오래전에 챙겨두었으나 계기가 없어서인지 손이 가지 않은 책이다. 당연히 두 편의 소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낸다. 가 처절하고 비극적이고 잔혹하다면, 은 유쾌하고 희극적이다. 가끔 잔혹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의 시이드가 벌인 일에 비하면 장난이다. 의 살인 장면이 잔혹하지 않은 것처럼. 허클베리 핀은 주정뱅이에 폭력적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인 아버지로부터 도망친다. 그렇다고 자신을 돌보아준 '문명화'된 여성들에게 의식주를 맡기고 싶지도 않다. 헉은 그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내려가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허클베리 핀, 그와 함께 한 도망노예 짐은 뗏목 위의 여정에서 영국 출신 왕과 귀족임을 자처하는 두 명의 사기.. 더보기
무협지가 중국을 망쳤다? <강호중국> 강호중국위양 지음·서아담 옮김/학고재/336쪽/1만6000원 생물학을 전공한 저자 위양은 1980년대 중반 과학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농촌으로 갔을 때의 경험담을 전한다. 광둥성의 한 농촌 마을을 찾은 그는 시험관 바나나 묘목을 보급하려 했는데, 농업과학연구소의 한 친구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지역 관료를 찾아가야 한다고 귀띔했다. 관료를 만나러 간 곳은 관공서가 아니라 술집이었다. 지역 관리들은 동네 술집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전화 통화와 측근의 전언으로 공무를 집행했다. 이듬해 한 민영 회사의 책임자로 푸젠성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관리를 만나기 위해선 술집에 가야했다. 관리는 술집 여사장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저자의 말을 흘려 듣고 있었다. 이와 상관 없어 보이는 또.. 더보기
원귀가 들린 집, 파괴적인 사랑, <빌러비드> 벨 훅스의 에 인용된 김에 생각이 나서,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으나 읽지는 않았던 토니 모리슨의 소설 하나를 집어 들었다. 훅스가 인용한 작품은 아니지만, 왠지 끌린 제목은 였다. 를 4분의 1도 안 읽고 기분이 나빠진 채 포기한 직후였다.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진 않지만, 그래도 는 첫 두어 챕터만 읽고도 "역시 이래서 노벨문학상!"이란 감탄이 나오며, 또 로 침침해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가 마냥 독자의 영혼을 평화롭게 만드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빌러비드'는 어느 여성 노예의 죽은 딸이다. 아이를 묻을 때 묘비명을 새겨야 하는데, 글자를 모두 새길 돈이 없어 '사랑하는'(빌러비드)이라고만 새기고 말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짦은 묘비명조차 묘비 새기는 석.. 더보기
선거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 <대통령을 위한 수학> 대통령을 위한 수학조지 슈피로 지음·차백만 옮김/살림/384쪽/1만5000원 이 글이 지면에 게재되고 4일 뒤면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4000여만명의 유권자들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다음 5년간 한국의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갖는다. 최고 지도자나 국회의원을 뽑는 방법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에선 한 차례의 직접 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수를 기록한 후보가 대통령아 된다. 국회의원은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으로 구분된다. 비례대표 의원은 정당 득표율에 비례대표 의석수(54석)를 곱해 나온 수에 따라 배정된다. 이때 소수점 이하는 일단 배제한 뒤, 잔여의석은 소수점 이하가 큰 정당 순으로 54석을 다 채울 때까지 한 석씩 나눠 갖는다. 지난 4월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더보기
여행은 해서 뭐하나, <여행의 사고> 여행의 사고(전 3권)윤여일 지음/돌베개/1권 352쪽, 2권 400쪽, 3권 368쪽/1·3권 1만8000원, 2권 2만원 왜 여행을 하는가. 누군가는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려고, 누군가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물건을 사려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사는 작가에게 허락된 특권이기도 해서, 동서 고금의 많은 작가들이 그럴듯한 여행기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요즘엔 여행 인구가 늘어나면서 여행작가가 되려는 이도 많아졌고, 여행작가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나 과정도 생겼다. 는 여행기이되, 여행기가 아니다. 저자는 멕시코, 과테말라, 인도, 네팔, 중국, 일본의 여러 장소들을 여행했지만 여느 여행기처럼 여행지의 풍광, 음식, 쇼핑장소, 사람 이야기를 쓰진 .. 더보기
현대 진화론과 고대 종교의 공통 해답, <초협력자> 초협력자마틴 노왁·로저 하이필드 지음, 허준석 옮김/사이언스북스/496쪽/2만원 진화론은 보따리다. 이 보따리는 너무나 커서 온갖 이질적인 주장과 이론들을 하나로 묶어낸다. 보따리 속의 주장들은 서로 자신이 진화론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학계내 적자생존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작 (1859)에서 ‘진화’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찰스 다윈이 이 상황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진화론은 원래 생물학자들이 활개치는 영역이었는데, 나중엔 온갖 배경의 사람들이 진화라는 화두를 공유하려 했다. 사회현상에 진화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격렬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동반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의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귀여운 괴물들이 ‘진화’하게 만들었는데, 그 결과 전세계 아이들은 포켓몬들이 어떤 상.. 더보기
애프터눈 티와 아편, <음식의 제국> 음식의 제국에번 D G 프레이저·앤드루 리마스 지음, 유영훈 옮김/알에이치코리아/488쪽/2만원 지난 끼니에 무엇을 먹었는지 떠올려보자. 고슬고슬한 쌀밥과 구수한 된장찌개, 보기 좋게 담긴 초밥, 상큼한 드레싱을 얹은 샐러드…. 대체로 그 음식의 맛, 향, 모양이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그 음식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까지 기억해본다면 어떨까. 음식의 재료로 쓰인 쌀, 두부, 참치, 올리브는 누가 어떻게 수확했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른 걸까.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거나 바다에 나가 직접 물고기를 잡아오지 않은 이상, 그 재료가 식탁에 오르는 과정에는 세계인의 손이 탄다. 나라 사이의 운송 수단이 발달하고 무역 장벽이 낮아진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노르웨이 어부가 잡아올린 고등어, 케냐 소.. 더보기
'세계가족'의 탄생. <장거리 사랑> 장거리 사랑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홍찬숙 옮김/새물결/359쪽/1만8000원 둘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출산해 가정을 꾸려나간다. 이것이 현대 서구 사회의 전형적 핵가족의 발달 단계다. 전통적 가치관이 강한 아시아, 남미 지역이라면 ‘둘’의 결정에 부모, 친척 등 가족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부모의 반대에 결혼을 망설이는 연인은 아직도 한국 드라마의 흔한 소재다. 그것 뿐일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럴리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지역 사회, 국가, 민족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엮여 있다. 내 통장의 잔액은 중동 지역의 정세에 연동되고, 내 점심 식사의 메뉴는 남미를 흔든 기상 이변에 영향 받는다. 경제, 정치, 문화가 세계와 함께 움직이는데, 가정이라고 다.. 더보기
과학과 종교는 싸울 필요가 없다, <다윈의 경건한 생각> 다윈의 경건한 생각 코너 커닝햄 지음·배성민 옮김/새물결플러스/830쪽/3만6000원 리처드 도킨스가 2006년 을 출간하면서 일이 시끄러워졌다. 기세등등한 무신론자들은 먼지 쌓인 전통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던 종교, 특히 기독교를 공격했다. 도킨스와 함께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선봉에 섰다. 이 강경한 두 명의 무신론 전사들을 묶어 ‘히치킨스’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여기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을 공격했고, 미국은 ‘십자군’ 운운하며 이슬람에 반격했다. 종교가 이 세상에 화마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히치킨스’가 작심하고 종교 비판에 나선 까닭이다. 종교계도 가만히 있지 .. 더보기
옛날 먼 옛날 그리스도교,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최상한 지음/돌베개/432쪽/2만원 한밤의 불이 꺼지면 보이는 것은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뿐이다. 출석 교인 기준으로 뽑은 세계 50대 교회 리스트에 한국 교회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었다. 2005년 인구주택조사 인구부문 전수집계결과 개신교인은 861만명, 천주교인은 514만명이다. 둘을 합치면 1375만명으로 전체 인구 4700만명 중 29.2%다. 불교(22.8%)를 넘는 수치다. 천주교에서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1784년을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에 전래된 해로 삼는다.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을 공식 설립 연도로 본다. 그러나 언제나 궁금한 것은 ‘공식’보다 ‘비공식’이다. 하지만 ‘비공식’ 분야를 연구하는 .. 더보기
독서단평, <엄마 교과서>, <만년>, <우게쓰 이야기>, <죽음과 섹스> 외 1. 업무 외에 재미로 읽은 몇 권의 책에 대해 간단하게 남긴다. 길게 쓸 여유가 없고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박경순/비룡소)'아기랑 엄마랑 함께 행복해지는 육아'와 '정신분석학자가 전하는 스트레스 0%의 행복한 육아법'을 전하는 실용서인척 하지만, 사실 어린이에 대한 정신분석 서적에 가깝다. 편집과 마케팅 과정에서 출판사, 편집자의 의도가 많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아기를 키우는 부모를 위한 실용적인 조언이 없지는 않지만, 인문학으로서의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더 많은 지적 자극을 줄 것 같다. 프로이트의 그 유명한 구분,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에 대해 임상적으로 설명을 하고, 멜라니 클라인, 도널드 위니콧 등 유명한 정신분석가의 이론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한다. 아이의 공격성에 .. 더보기
사랑은 혁명이다, <올 어바웃 러브> 올 어바웃 러브벨 훅스 지음·이영기 옮김/책읽는수요일/304쪽/1만5000원 거리의 연인이 사랑하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한다. 114 안내원이 고객을 사랑하고, 펄펄 나는 저 꾀꼬리도 사랑한다. 온세상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들은 대체 사랑을 어디서 배운 걸까. ‘사랑은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사방에서 반박이 쏟아질 것 같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보듯이 사랑은 ‘타고나는 것’이며,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 그러하듯이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사랑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고, 사랑의 ‘멘토’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종교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신과 신자 사이 관계에 관한 것이라 .. 더보기
과학과 진보를 믿지말라, <불멸화위원회> 불멸화위원회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이후/300쪽/1만6500원 1983년 가수 민해경은 ‘서기 2000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우리는 로켓트 타고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그대가 부르는 노래 소리 온 세상을 수놓으리/사바 사바 사바 그날이 오면은/사바 사바 사바 우리는 행복해요” 민해경의 ‘예언’은 일부 맞고 대부분 틀렸다. 성층권까지 올라가 자유낙하를 감행한 사내가 있긴 하지만, 우주여행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언감생심이다. 1, 2차 세계대전같은 대규모 전쟁은 없지만, 아프리카, 중동 지역의 국지전은 오히려 잦아졌다. 결정적으로 틀린 부분은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기대다. 한국인은 30년전보다 즐겁고 행복한.. 더보기
왜 책을 읽는가, <책읽는 사람들> 책읽는 사람들알베르토 망구엘 지음·강주헌 옮김/교보문고/464쪽/1만7800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는 처지긴 하지만, 대체 왜 책을 읽는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아직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확실한 답이 있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읽으라고 하니까! 알베르토 망구엘은 이 분야의 확실한 ‘어른’이다. 그래서 책읽기의 즐거움과 위안에 대한 39편의 에세이를 모은 (원제 A Reader on Reading)을 통해 그 답을 구해봐도 좋겠다. 194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는 20살에 독재 정권 치하의 조국을 떠나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살아왔다.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해온 망구엘이지만, 그를 부르는 가장 좋은 호칭은 ‘독서가’가 .. 더보기
순백의 혁명에 헌신한 사나이, <자백의 대가> 자백의 대가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전혜영 옮김/글항아리/532쪽/2만2000원 “똑똑하고 교양 있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소한 것까지 꼼꼼하게 신경 쓰는 사람,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 모든 방면에 프로 정신을 보이며 상부를 만족시키는 성과를 보여주고자 애쓰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에 대체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 이 진술은 깡 켁 이우, 일명 ‘두크’라 불린 어느 관료에 대한 자타의 평가다. 조직에 속한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칭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크가 크메르 루즈의 교도소장이었고, 그 교도소에서 1만2000명이 고문당한 뒤 살해됐다면 이 평가는 달라져야 할까. 는 2009년 3월부터 1년 4개월간 캄보디아 프놈펜의 국제 재판소.. 더보기
새로운 것은 모두 사탄이었다, <마녀> 마녀 쥘 미슐레 지음·정진국 옮김/봄아필/432쪽/1만9000원 신들이 죽고 신이 태어났다. 유럽 곳곳을 누비던 판, 오시리스, 아도니스, 불카누스가 있던 자리에 중동에서 유래한 기독교 유일신이 나타난 것이다. 유럽의 유일한 공식 종교가 된 기독교는 라이벌 신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신전을 청소하고 우상을 파괴했다. 로마 제국 기독교도의 신앙심이 독실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국은 영토 안 수많은 신민들이 각기 다른 수호신을 섬기는 꼴을 보아넘길 수 없었다. ‘마녀’라 불린 여자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런 역사, 종교 배경이 있다.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1798~1874)는 1862년 처음 나온 에서 마녀의 탄생, 마녀 숭배, 마녀 재판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방대한 자료, 날카로운 시각, 유려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