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해당되는 글 7건

  1. 가족극의 진화 '프라이빗 라이프'
  2. 자매 갈등은 어떻게 공적 의무와 충돌하는가, '더 크라운'
  3. 일과 삶이 엮이는 순간, '본딩'
  4. 50대 액션 스타, '폴라'
  5. 청소년이 볼 수 없는 청소년물, '아메리칸 반달리즘'
  6. 인터액티브 영화의 시작?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7.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가족은 픽션의 주요한 테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따져보면 가족극이다. 햄릿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비슷한 배우가 비슷한 가족 역할을 연기한 영화를 찍어 대가로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 오즈 야스지로다. (요즘 바탕 화면에 오즈 야스지로 묘비 사진을 깔아두었다. 원래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유전에서 불 뿜어나오는 장면이었는데, 그게 요즘 주변 상황 같아서...)

 

넷플릭스에서 '프라이빗 라이프'를 봤다. '코미디'라고 돼있긴 한데, 거의 웃지 못했다. 오히려 영화 속의 상황과 감정이 너무 인텐스해서(영화 속에서도 '인텐스'라는 표현이 몇 번 나온다), 어젯밤 반을 보고 오늘 오전 나머지를 봤다. 요즘 내 감정적 체력은 이런 인텐스한 영화를 두 시간 보아낼 수 없는가보다. 

 

40대에 접어든 뉴욕의 극작가 리처드, 작가 레이첼 부부가 주인공이다. 부부는 아이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만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 입양을 하려다가 사기를 당하고, 의학적인 시술은 여자 혹은 남자 쪽의 문제로 매번 실패한다. 부부는 건강한 난자 기증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의붓조카 세이디를 떠올린다. 청년 예술가로서의 야심을 가진 세이디에게 뉴욕의 예술가 부부 리처드와 레이첼은 롤모델이다. 세이디는 다소 답답한 윤리관과 세속적 세계관에 붙잡힌 친모보다, 뉴욕의 삼촌, 숙모를 더 가깝게 느낀다. 리처드와 레이첼은 난자 기증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데, 세이디는 의외로 흔쾌히 승락한다. 이들 부부가 아이를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해준 그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물론 친모는 노발대발하지만, 이미 성인으로서 결정을 내린 딸을 말리진 못한다. 

 

'프라이빗 라이프'에서 표현되는 가족 사이의 감정은 사실 매우 전통적이다. 중년의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며 살지만, 더 이상 로맨틱한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아이를 가져 전통적인 핵가족을 만들려는 사람들에 가깝다. 엄마를 미워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썩 좋아하지도 않는 세이디와 딸에게 조금 더 많은 성취를 요구하는 엄마의 관계도 많은 모녀 갈등 드라마에서 목격된다. 리처드와 레이첼 부부가 경험하는 의학 과정(심하게 말하면 출산 산업)의 문제가 끼어들면서 전통적 가족극에는 트위스트가 생긴다. 환자 대기실에서 완전히 침묵한 불임 부부들이 가득 앉아있는 모습은 우울하지만, 그렇다고 불임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SF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근대 이후의 많은 가족들이 겪어온 보편적 감정을 드러내고 그 감정들 중 무엇도 개연성 없거나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이 감정들이 현대의 발전한 의학 기술과 가족관의 미묘한 변화를 거치면서 흥미로운 변이를 만들어낸다. 제목의 '사적인 삶'이 병원이라는 공적 공간에서의 임신과 출산 과정에 노출되면서, 부부는 때론 희망을 느끼고 때론 모욕을 겪는다. 혈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제도로는 이어진 의붓조카의 난자를 기증받는다는 설정이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가족극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창작자의 사고 실험으로 이해한다. 세이디에게 조금 더 넓은 세상을 찾아주려는 이해심과 능력은 친모가 아니라 의붓 친척에게 있었다. 

 

연출과 대본을 맡은 이는 50대 후반의 여성 타마라 젠킨스.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간혹 연기도 했다고 한다. '프라이빗 라이프'의 전작 '세비지스'는 2007년작이다. '프라이빗 라이프'가 '원 히트 원더'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 영화의 만듦새를 보면 오히려 지난 10여년간 젠킨스의 재능이 빛을 보지 못했다는 추정이 더 설득력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한국영화에서도 좀 더 괜찮은 가족극을 만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엄마 불쌍해, 아빠도 힘들어, 그도 아니면 우리집은 콩가루야, 라고 말하는 그런 영화들 말고. 

 

 

리처드와 레이첼 부부. 

 

 

1년 전쯤 넷플릭스 '더 크라운'을 몇 편 보다가 접어두었다. 공들인 '웰메이드' 시리즈인줄은 알겠으나, 전개가 지지부진한데다 캐릭터들의 고뇌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일찍 왕위에 오른 20세기 중반의 영국 여왕 이야기는 나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배우를 교체해 시즌 3이 방영될 예정이라는 소식에 보다 만 지점에서 다시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엔 좋았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시리즈의 분위기에 좀 싫증이 나기도 한 터였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세 줄짜리 시놉시스와 예고편을 보면 대단히 독창적이지만 막상 본편은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하이 컨셉'이라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넷플릭스를 뒤지며 뭘 볼까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관람패턴을 보이는 것이다. 1. 예고편에 이끌려 두어 편을 봤지만 더 볼 동력이 생기지 않아 나머지는 남겨둔다(데이브레이크, 리빙 위드 유어셀프 등). 2. 예고편을 보고 내용에 궁금증이 생기지만 봐도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영화는 아예 인터넷을 뒤져 결말을 읽고 넘어간다(일라이, 상처의 해석 등). 수많은 컨텐츠가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넷플릭스에서 유저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간략하지만 자극적인 예고편과 시놉시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위와 같은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더 크라운'은 다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기에 별다르게 내세울 컨셉이 없다. 드라마가 다루는 에피소드는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전말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게다가 드라마 속 인물들이 대부분 살아있기에 명예훼손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주인공은 강대국의 여왕이다. 

 

그러므로 '더 크라운'은 배우들의 연극적이면서도 능숙한 연기, 우아한 촬영과 편집, 많은 돈을 쓴 흔적이 역력한 미술 등 고전적 요소들로 승부한다. 시즌 1 후반부에 들면서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대본의 질이다. 왕위에 익숙하지 않던 엘리자베스는 점차 자리에 대한 자신감을 찾는다. 그러면서 왕으로서의 의무가 남편, 여동생 등 가족과의 사적 인연과 갈등한다. 에피소드 8에서 여왕과 동생 마거릿이 군주의 역할을 두고 나누는 설전, 에피소드 9에서 처칠과 그의 초상화가가 노화와 은퇴 시기를 두고 나누는 설전, 에피소드 10에서 여왕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지만 정부와 교회가 반대하는 마거릿의 결혼을 두고 고민하는 대목은 교과서적으로 잘 쓰여진 대사들로 구성됐다. 아무리 영국의 여왕과 총리라 해도 현실에서 그렇게 문어적이고 철학적이며 함축적인 대사를 틱탁틱탁 팽팽하게 연극적인 어조로 내뱉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즐기는 것이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엘리자베스는 '노잼'이다. 사적 인연보다는 공적 의무에 충실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는 당연히 재미없다. 그래서 제작진은 그의 빛나는 여동생 마거릿을 부각한다. 재치있고 활기넘치며 왕가의 규율을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마거릿과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언니 엘리자베스가 대비돼, 극적 재미를 준다. 제작진이 이 구도를 성격 다른 두 자매의 다툼 정도로 축소시키지도 않는다. 자매의 캐릭터가 공적인 의무, 규율, 전통에 스며들고 충돌하는 광경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비록 영화에서는 그리 빛나지 못한 듯하지만, '더 크라운'의 클레어 포이는 훌륭하다. 여기 나오는 모든 배우가 훌륭하다. 시즌 3에서는 중년의 배우로 교체된다고 한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올리비아 콜먼이 여왕, 헬레나 본햄 카터가 마거릿이다. 기대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본딩'을 봤다. '러시아 인형처럼'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본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일단 끝까지 보기에 부담이 없다. 편당 15분 안팎, 총 7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리즈 전부를 봐도 2시간 정도라는 얘기다. 모바일폰 환경,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매체 환경이 이런 분량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게이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인 피트가 오랜 친구 티프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티프의 직업은 '도미나트릭스'다. 생소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성적으로 지배적인 여성'을 뜻한다. 티프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간지럼을 태워달라거나, 펭귄옷을 입고 씨름을 한다거나, 막말을 들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남자들이 티프를 찾아온다. 티프는 고분고분하진 않고,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미나트릭스'다. 자신에게 오줌을 눠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피트가 나서서 얼굴 위로 미적지근한 오줌을 뿌려준다. 피트는 티프의 조수가 돼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적 취향의 지하 세계를 그리지만, 중반 이후는 멜로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티프와 고객 사이가 아니라, 티프와 피트, 티프와 같은 대학 강의를 듣는 남자, 피트와 동성 남자 친구 이야기가 그렇다. 난 '본딩'을 보면서 멜로드라마는 아직 가능성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의 핵심은 남녀든, 여여든, 남남이든 '관계'의 얽히고 설키는 모양새다. 그런 모양새를 그림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재미와 의미는 무한대에 가깝다. 다만 멜로드라마의 가능성이 두 시간 안팎의 영화에서도 구현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딩' 후반부에서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일과 삶의 섞임이다. 우린 흔히 공과 사, 일터와 가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구분선이 생각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당장 주 52시간 노동과 관련한 계산을 봐도 그렇다. 집에서 다음날 회의 때 제시할 아이디어를 열심히 생각하면 노동시간인가. 생각만 하면 노동이 아니라면, 집에서 컴퓨터를 열어 무언가 끄적이면 노동인가. 직장에서 배우자에게 전화하면 노동 시간에서 빼야 하나. 고객의 은밀한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티프의 직업은 어차피 고객의 삶에 깊숙히 개입돼 있다. 티프에겐 '일'이지만, 고객에겐 '삶'이다. 고객은 때로 티프에겐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티프의 삶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다. 티프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려는 순간에, 티프의 노예 노릇을 하며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던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티프와 데이트 하는 남자에게 질투를 드러낸다. 티프가 또다른 남자를 '지배'하려는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리즈 종반부 티프와 피트는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한다. 이 역시 일이 삶에 너무 깊숙히 파고들어왔기 때문에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Bonding'이라는 제목의 뜻도 '밀접한 감정적 교류'라는군. 일할 때 감정이 안섞일 수가 있나. 

 

 


넷플릭스 영화 '폴라'를 보다. 이름이 낯선 스웨덴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가 연출했다.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쪽은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대신 U2,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리고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확 들어온다. '폴라'는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화려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전부). 

던컨(매즈 미켈슨)은 50을 앞두고 은퇴 직전인 청부살인자다. 던컨은 은퇴와 함께 회사로부터 거액의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사장은 그 퇴직금이 너무 아까워 은퇴 사원들을 미리 죽이려 한다. 그러면 퇴직금을 아껴 회사 자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젊은 킬러들을 던컨에게 보낸다. 하지만 애송이들에게 쉽게 죽을 던컨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에서 서사의 약점을 들어 굳이 작품성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폴라'는 최근 할리우드 산 B급 액션의 한 흐름에서 보는 편이 낫겠다. 그 흐름이란 '존 윅' 시리즈가 대표한다. 매우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선보이며, 그 액션은 때로 코믹스 원작이라는 태생을 증명할 정도로 물리 법칙을 거스른다. '인명 경시'라는 말을 써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주인공 한 명의 손에 의해 쉽게 죽어나간다. 너무나 패셔너블하게 차려입은 킬러 주인공이 있으니, 수백, 수천명 악당의 목숨을 연민할 시간은 없다. 

'존 윅'이 볼만한 건 키애누 리브스 덕이다. 연기를 못해도 상관 없다. 리브스가 잘 맞춘 검은 양복을 입고 총을 휘두르는 순간, 연기 같은 것은 필요없다. '아토믹 블론드'에선 샤를리즈 테론이 그랬다.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테론은 스모키 화장을 한 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너무 불편해 보이는 멋진 옷들을 입고 총을 쏘아댔다. '폴라'의 절반은 매즈 미켈슨이다. 54세의 미켈슨은 작심한듯 액션 배우로서의 포부를 선보인다. 마치 리암 니슨이 '테이큰 ' 이후 뒤늦게 액션 배우가 된 것처럼. 

10년간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활동하던 미켈슨은 2006년 '카지노 로얄'에 이르러 전세계 관객에게 얼굴을 알렸다. 티비 시리즈 '한니발'이나 슈퍼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한 단계 높였다. 그리고 자신이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폴라'에서 야심을 보인다. 

내보일만한 야심이다. 북유럽 겨울처럼 차가운 미켈슨의 표정과 액션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미국 이외 다른 문화권 배우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위해선 자국에서 확실하게 성공하고 이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어야 하기에, 미국이나 영국 배우보다 출발이 늦다. 그래서 경력이 얼마되지 않은 배우 같은데 나이가 꽤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이제 액션 영화 좀 찍어보려하는데 이미 50대 중반인 미켈슨. 하지만 60대 중반이 넘은 리암 니슨도 여전히 액션을 찍으니 미켈슨도 10년 이상 못 찍으리란 법이 없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반달리즘'(American Vandal) 시즌 1, 2를 봤다. 시즌 1은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있던 차량들에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로 남성 성기 낙서를 해놓은 사건을, 시즌 2는 고등학교 급식 레모네이드에 설사제를 넣거나 피냐타 안에 똥을 넣거나 하는 식의 '똥 테러'를 그린다. 두 명의 고등학생 프로듀서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해나가는 페이크 다큐 형식이다. 두 사건 모두 유력한 용의자가 드러났고, 해당 학생은 퇴학당한 상태다. 일단 부딪히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진 두 프로듀서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꼼꼼히 살핀 끝에, 진범으로 몰린 이가 진범이 아님을 밝혀 나간다. 

범죄는 범죄인데 중범죄는 아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피의자로 연루된 사건이다. 범행도 심각하다기보단 조금 웃긴다. 하지만 제작진은 시침 떼고 사건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마치 '외로운 늑대'가 끔찍한 테러라도 벌인 듯한 시선으로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별 거 아닌 걸 별 거 처럼 다루니, 웃음기는 거의 없다. 가끔 분량을 채우려는 듯한 억측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각 편 30분 분량, 총 8편의 시리즈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게다가 제작진은 분명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를 심어두었다. 각 시즌의 마지막 회를 보고나면 무척이나 씁쓸해지는 이유다. 첫 시즌에서 범인으로 지목받은 소년은 무죄가 입증된 뒤에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다큐 제작 과정에서 인터뷰한 동급생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평소 자신을 미워하던 스페인어 선생의 집에 실제로 페인트 테러를 하고 만다. 무죄가 밝혀진 뒤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세상이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주한다. 그 편견을 확신시켜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편견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간다. 

시즌2는 인터넷 세상의 가면에 대해 다룬다. 자주 언급되는 주제긴 하지만, 7편의 에피소드를 거치다가 마지막 회에 갑자기 주제를 제시한다. 소셜미디어의 시대,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는 친구인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나눌 친구는 없는 사람들. 또 그러한 약점을 노리는 사람들. 은밀한 따돌림, 따돌림을 이겨내기 위해 벌이는 자기방어적 기괴함, 관료적인 학교, 시즌 1에서도 언급된 주제인 편견. 그런 점에서 극으로서의 구성은 시즌 1이 나았을지 모르지만, 주제적인 확장성 측면에선 시즌 2가 나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긴 하지만, 청소년이 보고 생각해보면 좋을 주제다. 시즌 3가 나올 것을 확신한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다섯 번째 시즌이 신기한 시도를 했다. 12월 28일 공개된 첫 에피소드 제목은 '밴더스내치'. 사실 '블랙 미러'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이긴 한데, '밴더스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이 신기하다. '밴더스내치'는 간단히 말해 인터액티브 영화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밴더스내치'가 인터액티브 영화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 가지 옵션 중 10초 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항상 선택할 자세를 취하라고 일러준다. 난 집에서 PS4로 넷플릭스를 보았기에, 이 기계에 딸린 듀얼쇼크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대배경은 1980년대 초반. 주인공 스테판은 '밴더스내치'라는 소설을 게임으로 옮기려 하는 초보 개발자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정신착란에 빠져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밴더스내치'는 독자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이 다른 길을 걷는 소설이다. 아마 "이러이러한 선택이면 00쪽, 다른 선택이면 xx쪽으로 가시오" 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스테판은 게임 출시를 위해 밤낮으로 코딩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극적 사고로 사망한데 대한 죄책감과 원망을 갖고 있는 스테판은 작업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조금씩 정신을 놓는다. '밴더스내치' 게임 속 주인공이 게이머의 손에 의해 이런 저런 선택을 하듯, 자기도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의 게임회사 사장과 천재 개발자, 그리고 초보 개발자 스테판(왼쪽부터)

작품을 보기 전에는 결정적인 몇 가지 선택지만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반부터 선택지가 많다. 아침 시리얼로 무얼 먹을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떤 음악을 들을지도 선택해야 한다. 관객이 한 가지 옵션을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대로 그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 과정의 편집에 버퍼링이나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다. 아침 식사나 음악에 대한 선택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스테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난 어쩌다가 두 가지 엔딩을 보았다. 하나는 스테판이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떠나는 선택을 한 뒤, 성인이 된 스테판이 상담가와 상담하다가 갑자기 죽는 엔딩, 다른 하나는 스테판이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에 갇힌 뒤 그의 게임이 출시되지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하는 엔딩이다. 이미 해외 사이트에는 '밴더스내치'의 선택에 따른 플로우차트가 올라있다. 게임도 잘 만들고 스테판의 정신도 멀쩡한, 확실한 해피엔딩은 없는 것 같다. 스테판은 환각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정신과에서 주는 약을 먹고 밋밋한 게임을 만들거나, 약을 먹지 않고 조금 나은 게임을 만들지만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 시신을 토막내고 엄청난 게임을 만들거나 하는, 그런 엔딩들이 소개돼 있다. '블랙 미러'식 엔딩이라고 할까.  (외신을 보면, 다섯 가지 주요 엔딩이 있다고 한다.)

선택에 따라 결말에 너무 빨리 이르면, 친절하게도 앞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안내한다. 내가 두 가지 엔딩을 본 것도 이렇게 선택을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성격에 따라 자극적이고 흥미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상담가 만나고, 주는대로 약도 먹고, 자살도 하지 않으려 하고, 게임 회사 사장 말도 잘 듣다보니 자꾸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선택을 되돌려야 했다. 

이렇게 쓰다보니 매우 우울하고 무서운 이야기 같은데, 의외의 유머 코드도 있다. 스테판에게 지금 자기를 조종하는 것이 '넷플릭스'라고 알려주는 선택이다. 80년대의 스테판은 물론 넷플릭스를 모른다. 그러면 넷플릭스가 무엇인지 조금 더 설명해주는 옵션도 있다. 스테판이 천장을 보면서 "넷플릭스가 뭐야!"라고 외치는데 조금 웃긴다. 

넷플릭스 시리즈 속 주인공이 대사로 넷플릭스를 언급하는 건 자기반영적 유머다. 인간에게 자유의지 같은 건 없고 누군가(신,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닌 외계인 등)의 조작을 따라 살아간다는 생각은 종종 만나는 아이디어다. 넷플릭스는 그들의 첫 인터액티브 영화를 인터액티브 매체 자체에 대한 영화로 만들었다. 영리하고 흥미로운 선택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영화가 지속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해외 언론에 '밴더스내치'에 대한 언급이 꽤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초기 반응은 괜찮은 거 같고(뉴욕타임스는 '시청자가 권력을 얻었다'고 표현), 넷플릭스나 다른 회사가 인터액티브 영화를 몇 편 더 만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처럼 자기반영적인 영화를 계속 만들수는 없을 것이니, 그러면 영화의 인터액티브란 것이 관람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나만 해도 '밴더스내치'가 흥미로울지언정 여느 '블랙미러' 시리즈처럼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다. 프레임 자체, 프레임 바깥 세상을 자꾸 의식하게 만드는 건 전통적인 극작에서 금기다. 아마 이런 인식은 '작품'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에 근거했겠지. 하지만 배우가 관객을 향해 직접 말하거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건 매우 드물게,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테크닉이다. 관객(독자)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완결된 창작자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에 호응하거나 반대할 뿐, 그 세계관과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에 동참하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한국 드라마야말로 가벼운 인터액티브 제작방식을 선보였는지도 모른다. 초반 몇 회분만 찍어놓고 시작한 뒤 시청자 여론을 보고 주인공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애초 작가는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결말을 쓰고 싶었지만, 극에 몰입한 시청자들이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주인공을 살리는 결말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그런 작품이 좋을 리가. 게다가 현대의 관객들은 이미 인터액티브한 또다른 매체에 충분히 익숙하다. 바로 게임이다. 매체와의 인터액티브한 상황을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를 보기보단 게임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다. 산호초는 비유하자면 바다의 숲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먹이를 얻고 생명을 낳는다. 그러므로 산호초가 사라지면 바다 생물도 타격을 입는다. 바다 생물이 줄어들면, 바다 생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죽는다. 영화 속의 한 생물학자는 '한 세대 이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섬찟한 경고를 남긴다. 

산호초가 죽는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기온 1~2도 높아지는게 대수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높아진 기온은 고스란히 해수로 흡수된다.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산호초 같은 생물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 해수의 온도는 비유하면 체온 같다. 36~37인 체온이 38~39도로 높아지면 그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산호초는 지구의 체온 변화 때문에 가장 먼저 아픈 생물인 셈이다.



'산호초를 따라서'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은 한 해상 레스토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자들은 이 레스토랑 사무실에 기지를 차리고 죽어가는 산호초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날 산호초 군락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광색으로 빛난다. 이유를 알아보니 뜨거워지는 해수를 견디다 못해 햇빛으로부터라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산호초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을 목격한 연구자는 충격을 받는다. 장비를 챙겨 해상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데, 손님들은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먹고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구자는 그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당황한다.  

'산호초를 따라서'는 목적에 충실한 영화다. 산호초의 생태와 존재 의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산호초에 빠진 '덕후'들을 보여준다. 런던의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전직한 수중 사진작가, 어렸을 때부터 산호초 분류에만 몰두한 덕후, 해양생물학자들이 나온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데도 미사여구를 쓰거나, 영화의 미학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 영화 내용을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