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해당되는 글 4건

  1. 50대 액션 스타, '폴라'
  2. 청소년이 볼 수 없는 청소년물, '아메리칸 반달리즘'
  3. 인터액티브 영화의 시작?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4.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넷플릭스 영화 '폴라'를 보다. 이름이 낯선 스웨덴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가 연출했다.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쪽은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대신 U2,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리고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확 들어온다. '폴라'는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화려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전부). 

던컨(매즈 미켈슨)은 50을 앞두고 은퇴 직전인 청부살인자다. 던컨은 은퇴와 함께 회사로부터 거액의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사장은 그 퇴직금이 너무 아까워 은퇴 사원들을 미리 죽이려 한다. 그러면 퇴직금을 아껴 회사 자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젊은 킬러들을 던컨에게 보낸다. 하지만 애송이들에게 쉽게 죽을 던컨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에서 서사의 약점을 들어 굳이 작품성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폴라'는 최근 할리우드 산 B급 액션의 한 흐름에서 보는 편이 낫겠다. 그 흐름이란 '존 윅' 시리즈가 대표한다. 매우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선보이며, 그 액션은 때로 코믹스 원작이라는 태생을 증명할 정도로 물리 법칙을 거스른다. '인명 경시'라는 말을 써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주인공 한 명의 손에 의해 쉽게 죽어나간다. 너무나 패셔너블하게 차려입은 킬러 주인공이 있으니, 수백, 수천명 악당의 목숨을 연민할 시간은 없다. 

'존 윅'이 볼만한 건 키애누 리브스 덕이다. 연기를 못해도 상관 없다. 리브스가 잘 맞춘 검은 양복을 입고 총을 휘두르는 순간, 연기 같은 것은 필요없다. '아토믹 블론드'에선 샤를리즈 테론이 그랬다.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테론은 스모키 화장을 한 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너무 불편해 보이는 멋진 옷들을 입고 총을 쏘아댔다. '폴라'의 절반은 매즈 미켈슨이다. 54세의 미켈슨은 작심한듯 액션 배우로서의 포부를 선보인다. 마치 리암 니슨이 '테이큰 ' 이후 뒤늦게 액션 배우가 된 것처럼. 

10년간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활동하던 미켈슨은 2006년 '카지노 로얄'에 이르러 전세계 관객에게 얼굴을 알렸다. 티비 시리즈 '한니발'이나 슈퍼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한 단계 높였다. 그리고 자신이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폴라'에서 야심을 보인다. 

내보일만한 야심이다. 북유럽 겨울처럼 차가운 미켈슨의 표정과 액션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미국 이외 다른 문화권 배우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위해선 자국에서 확실하게 성공하고 이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어야 하기에, 미국이나 영국 배우보다 출발이 늦다. 그래서 경력이 얼마되지 않은 배우 같은데 나이가 꽤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이제 액션 영화 좀 찍어보려하는데 이미 50대 중반인 미켈슨. 하지만 60대 중반이 넘은 리암 니슨도 여전히 액션을 찍으니 미켈슨도 10년 이상 못 찍으리란 법이 없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반달리즘'(American Vandal) 시즌 1, 2를 봤다. 시즌 1은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있던 차량들에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로 남성 성기 낙서를 해놓은 사건을, 시즌 2는 고등학교 급식 레모네이드에 설사제를 넣거나 피냐타 안에 똥을 넣거나 하는 식의 '똥 테러'를 그린다. 두 명의 고등학생 프로듀서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해나가는 페이크 다큐 형식이다. 두 사건 모두 유력한 용의자가 드러났고, 해당 학생은 퇴학당한 상태다. 일단 부딪히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진 두 프로듀서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꼼꼼히 살핀 끝에, 진범으로 몰린 이가 진범이 아님을 밝혀 나간다. 

범죄는 범죄인데 중범죄는 아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피의자로 연루된 사건이다. 범행도 심각하다기보단 조금 웃긴다. 하지만 제작진은 시침 떼고 사건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마치 '외로운 늑대'가 끔찍한 테러라도 벌인 듯한 시선으로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별 거 아닌 걸 별 거 처럼 다루니, 웃음기는 거의 없다. 가끔 분량을 채우려는 듯한 억측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각 편 30분 분량, 총 8편의 시리즈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게다가 제작진은 분명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를 심어두었다. 각 시즌의 마지막 회를 보고나면 무척이나 씁쓸해지는 이유다. 첫 시즌에서 범인으로 지목받은 소년은 무죄가 입증된 뒤에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다큐 제작 과정에서 인터뷰한 동급생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평소 자신을 미워하던 스페인어 선생의 집에 실제로 페인트 테러를 하고 만다. 무죄가 밝혀진 뒤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세상이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주한다. 그 편견을 확신시켜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편견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간다. 

시즌2는 인터넷 세상의 가면에 대해 다룬다. 자주 언급되는 주제긴 하지만, 7편의 에피소드를 거치다가 마지막 회에 갑자기 주제를 제시한다. 소셜미디어의 시대,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는 친구인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나눌 친구는 없는 사람들. 또 그러한 약점을 노리는 사람들. 은밀한 따돌림, 따돌림을 이겨내기 위해 벌이는 자기방어적 기괴함, 관료적인 학교, 시즌 1에서도 언급된 주제인 편견. 그런 점에서 극으로서의 구성은 시즌 1이 나았을지 모르지만, 주제적인 확장성 측면에선 시즌 2가 나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긴 하지만, 청소년이 보고 생각해보면 좋을 주제다. 시즌 3가 나올 것을 확신한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다섯 번째 시즌이 신기한 시도를 했다. 12월 28일 공개된 첫 에피소드 제목은 '밴더스내치'. 사실 '블랙 미러'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이긴 한데, '밴더스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이 신기하다. '밴더스내치'는 간단히 말해 인터액티브 영화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밴더스내치'가 인터액티브 영화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 가지 옵션 중 10초 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항상 선택할 자세를 취하라고 일러준다. 난 집에서 PS4로 넷플릭스를 보았기에, 이 기계에 딸린 듀얼쇼크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대배경은 1980년대 초반. 주인공 스테판은 '밴더스내치'라는 소설을 게임으로 옮기려 하는 초보 개발자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정신착란에 빠져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밴더스내치'는 독자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이 다른 길을 걷는 소설이다. 아마 "이러이러한 선택이면 00쪽, 다른 선택이면 xx쪽으로 가시오" 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스테판은 게임 출시를 위해 밤낮으로 코딩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극적 사고로 사망한데 대한 죄책감과 원망을 갖고 있는 스테판은 작업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조금씩 정신을 놓는다. '밴더스내치' 게임 속 주인공이 게이머의 손에 의해 이런 저런 선택을 하듯, 자기도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의 게임회사 사장과 천재 개발자, 그리고 초보 개발자 스테판(왼쪽부터)

작품을 보기 전에는 결정적인 몇 가지 선택지만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반부터 선택지가 많다. 아침 시리얼로 무얼 먹을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떤 음악을 들을지도 선택해야 한다. 관객이 한 가지 옵션을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대로 그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 과정의 편집에 버퍼링이나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다. 아침 식사나 음악에 대한 선택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스테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난 어쩌다가 두 가지 엔딩을 보았다. 하나는 스테판이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떠나는 선택을 한 뒤, 성인이 된 스테판이 상담가와 상담하다가 갑자기 죽는 엔딩, 다른 하나는 스테판이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에 갇힌 뒤 그의 게임이 출시되지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하는 엔딩이다. 이미 해외 사이트에는 '밴더스내치'의 선택에 따른 플로우차트가 올라있다. 게임도 잘 만들고 스테판의 정신도 멀쩡한, 확실한 해피엔딩은 없는 것 같다. 스테판은 환각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정신과에서 주는 약을 먹고 밋밋한 게임을 만들거나, 약을 먹지 않고 조금 나은 게임을 만들지만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 시신을 토막내고 엄청난 게임을 만들거나 하는, 그런 엔딩들이 소개돼 있다. '블랙 미러'식 엔딩이라고 할까.  (외신을 보면, 다섯 가지 주요 엔딩이 있다고 한다.)

선택에 따라 결말에 너무 빨리 이르면, 친절하게도 앞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안내한다. 내가 두 가지 엔딩을 본 것도 이렇게 선택을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성격에 따라 자극적이고 흥미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상담가 만나고, 주는대로 약도 먹고, 자살도 하지 않으려 하고, 게임 회사 사장 말도 잘 듣다보니 자꾸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선택을 되돌려야 했다. 

이렇게 쓰다보니 매우 우울하고 무서운 이야기 같은데, 의외의 유머 코드도 있다. 스테판에게 지금 자기를 조종하는 것이 '넷플릭스'라고 알려주는 선택이다. 80년대의 스테판은 물론 넷플릭스를 모른다. 그러면 넷플릭스가 무엇인지 조금 더 설명해주는 옵션도 있다. 스테판이 천장을 보면서 "넷플릭스가 뭐야!"라고 외치는데 조금 웃긴다. 

넷플릭스 시리즈 속 주인공이 대사로 넷플릭스를 언급하는 건 자기반영적 유머다. 인간에게 자유의지 같은 건 없고 누군가(신,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닌 외계인 등)의 조작을 따라 살아간다는 생각은 종종 만나는 아이디어다. 넷플릭스는 그들의 첫 인터액티브 영화를 인터액티브 매체 자체에 대한 영화로 만들었다. 영리하고 흥미로운 선택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영화가 지속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해외 언론에 '밴더스내치'에 대한 언급이 꽤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초기 반응은 괜찮은 거 같고(뉴욕타임스는 '시청자가 권력을 얻었다'고 표현), 넷플릭스나 다른 회사가 인터액티브 영화를 몇 편 더 만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처럼 자기반영적인 영화를 계속 만들수는 없을 것이니, 그러면 영화의 인터액티브란 것이 관람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나만 해도 '밴더스내치'가 흥미로울지언정 여느 '블랙미러' 시리즈처럼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다. 프레임 자체, 프레임 바깥 세상을 자꾸 의식하게 만드는 건 전통적인 극작에서 금기다. 아마 이런 인식은 '작품'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에 근거했겠지. 하지만 배우가 관객을 향해 직접 말하거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건 매우 드물게,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테크닉이다. 관객(독자)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완결된 창작자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에 호응하거나 반대할 뿐, 그 세계관과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에 동참하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한국 드라마야말로 가벼운 인터액티브 제작방식을 선보였는지도 모른다. 초반 몇 회분만 찍어놓고 시작한 뒤 시청자 여론을 보고 주인공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애초 작가는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결말을 쓰고 싶었지만, 극에 몰입한 시청자들이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주인공을 살리는 결말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그런 작품이 좋을 리가. 게다가 현대의 관객들은 이미 인터액티브한 또다른 매체에 충분히 익숙하다. 바로 게임이다. 매체와의 인터액티브한 상황을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를 보기보단 게임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다. 산호초는 비유하자면 바다의 숲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먹이를 얻고 생명을 낳는다. 그러므로 산호초가 사라지면 바다 생물도 타격을 입는다. 바다 생물이 줄어들면, 바다 생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죽는다. 영화 속의 한 생물학자는 '한 세대 이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섬찟한 경고를 남긴다. 

산호초가 죽는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기온 1~2도 높아지는게 대수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높아진 기온은 고스란히 해수로 흡수된다.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산호초 같은 생물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 해수의 온도는 비유하면 체온 같다. 36~37인 체온이 38~39도로 높아지면 그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산호초는 지구의 체온 변화 때문에 가장 먼저 아픈 생물인 셈이다.



'산호초를 따라서'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은 한 해상 레스토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자들은 이 레스토랑 사무실에 기지를 차리고 죽어가는 산호초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날 산호초 군락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광색으로 빛난다. 이유를 알아보니 뜨거워지는 해수를 견디다 못해 햇빛으로부터라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산호초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을 목격한 연구자는 충격을 받는다. 장비를 챙겨 해상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데, 손님들은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먹고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구자는 그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당황한다.  

'산호초를 따라서'는 목적에 충실한 영화다. 산호초의 생태와 존재 의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산호초에 빠진 '덕후'들을 보여준다. 런던의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전직한 수중 사진작가, 어렸을 때부터 산호초 분류에만 몰두한 덕후, 해양생물학자들이 나온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데도 미사여구를 쓰거나, 영화의 미학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 영화 내용을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