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협력자
마틴 노왁·로저 하이필드 지음, 허준석 옮김/사이언스북스/496쪽/2만원
진화론은 보따리다. 이 보따리는 너무나 커서 온갖 이질적인 주장과 이론들을 하나로 묶어낸다. 보따리 속의 주장들은 서로 자신이 진화론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학계내 적자생존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작 <종의 기원>(1859)에서 ‘진화’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찰스 다윈이 이 상황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진화론은 원래 생물학자들이 활개치는 영역이었는데, 나중엔 온갖 배경의 사람들이 진화라는 화두를 공유하려 했다. 사회현상에 진화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격렬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동반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귀여운 괴물들이 ‘진화’하게 만들었는데, 그 결과 전세계 아이들은 포켓몬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진화’하는지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마틴 노왁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에 입학학 그는 “수학에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을 정식화하는 열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수학적 진실이 실재적이고 절대적이어서, 지구인 뿐 아니라 태양계 너머 머나먼 행성의 촉수 달린 외계인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는다. “우주 자체가 수학”이다. 그러므로 생물의 진화에 대해 수학적 해석을 덧붙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옥스퍼드대, 프린스턴대를 거쳐 현재 하버드대 생물학과·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의 연구실은 ‘노왁 랜드’라고 불린다. 전세계에서 모인 생물학, 수학의 천재들이 노왁 랜드에서 수학을 도구로 생명의 기원,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마틴 노왁
진화론에 대한 노왁의 의문은 이렇다.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가 생존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 진화론의 골자라면, 생명의 세계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피를 튀겨야 하는 전장인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연은 “피 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온통 갈등의 장인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먼저 떠올려보자. 두 공범이 잡혀 따로 취조받는다.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둘 다 죄를 시인할 경우, 한 쪽만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등이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검사는 둘에게 중죄를 물을 근거가 없어 2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협력하는 경우다. 둘 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둘은 중죄로 기소되지만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3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배신하는 경우다. 한 쪽이 배신하고 한 쪽이 협력하면, 배신한 쪽은 1년형을, 협력한 쪽은 4년형을 받는다. 두 범인은 사전에 협력을 모의할 수 없다. 보수 행렬(payoff matrix)이라고 불리는 선택의 표를 그려볼 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면 ‘배신’을 택해야 한다. 즉 둘 다 3년형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믿고 침묵을 지켰다가는 4년간 감옥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자연 선택 역시 배신을 지지한다. 진화론의 언어를 쓰자면 “협력자는 항상 배신자에 비해 낮은 적합도(번식률)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범인이 협력해 2년형을 받고 풀려나는 수는 없는걸까. 사실 생명은 최선의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생물이 갈등을 접고 때론 협력한다는 것은 다윈의 딜레마였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침팬지, 사자, 개미, 벌의 세계에서도 종종 이타적인 행위와 협력이 관찰된다. 다윈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진화의 주체는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기 때문에, 종 전체의 보호를 위해선 개체의 이타적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뒤, 노왁은 변이, 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가지 규칙에 협력이라는 세 번째 규칙을 덧붙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죄수의 딜레마 도식. 수감되는 햇수는 본문과 다르다. 그런데 수감 햇수에 따라 범죄자들의 선택도 달라질 것 같기는 하다.
먼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직접 상호성’이다. “내 등을 긁어다오. 그렇다면 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방법은 생물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스타리카의 흡혈박쥐를 조사해 보니, 밤 사이 충분한 피를 마신 박쥐는 사냥에 실패한 동료에게 자신이 빨아낸 피를 토해서 먹였다. 덕분에 매일 밤 몇 퍼센트의 성인 박쥐와 3분의 1 가량의 미성년 박쥐들이 피 한 톨 마시지 못하지만, 굶어죽는 개체는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건 박쥐들이 과거에 자신들에게 피를 나눠줬던 박쥐에게 피를 더 잘 준다는 사실이다.
‘간접 상호성’은 “내 등을 긁어다오. 그러면 너의 선행을 본 누군가가 네 등을 긁어줄 것이다”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직접 상호성이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다면, 간접 상호성은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고려한다. 집단 내 ‘평판의 힘’에 의지해 이기심을 제어하는 것이다. 간접 상호성은 영토와 인간 관계가 확장된 대규모 사회가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간 게임’은 우리의 협력이 특정 공간을 전제할 때 더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미료나 공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소 안면을 익힌 이웃에게 더 쉽게 빌릴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상상할 때도 적용된다. 비유기체 화학물이 유기체 화학물로 전환된 것은 매우 우발적이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집단 선택’은 협력이 개체가 아니라 그보다 상위인 집단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집단 선택 개념을 이단시했으나, 최근 와서는 조금씩 받아들이는 추세다. 배신자들은 개체 수준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배신자들만 모인 집단은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을 이길 수 없다. ‘혈연 선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로 요약된다. 혈연 관계가 강한 이들과는 협력하기가 쉽다.
사실 협력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단세포 생명체들이 가깝게 어울려 하나처럼 작용하다가 고등 세포가 됐다는 이론이 있다. 반면 암세포는 협력이 아닌 배신을 택한 대표 사례다. 엄청난 수준의 협력을 통해 형성된 복잡한 신체에서 암세포는 증식이라는 자신의 목적만 위하다가 신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세포나 동물의 협력을 통해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이타성 등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사회 생물학이 현실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돼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문명은 단세포 생명체 수준의 협력을 뛰어넘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룩됐다.
노왁은 인간이 가진 그 수단들을 설명한다. 가장 강력한 것은 언어다. 그는 “언어의 탄생은 지난 6억 년 동안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라며 “이는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진화의 전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인간 이전 생명체들은 DNA나 RNA 등 화학적 유전 물질로 정보를 교환했고, 원숭이, 새, 벌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단순하다. 반면 노왁은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는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언어가 우리를 창출했다”고까지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의 뇌 역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영어 사용자를 조사해보면 6살짜리 아이가 1만3000개 어휘를 쓴다. 1세부터 7세까지 익히는 인간의 단어 학습 속도를 계산하면 깨어있는 90분 마다 한 단어를 배우는 셈이다. 큰 뇌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출산에도 위험하지만, 큰 뇌가 언어 사용을 도운 덕분에 인간의 삶은 더욱 정교해졌다. 무작정 공격이 아니라 말을 통한 협력이 가능해 진 것이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협력을 증진시키는 한 방안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를 변형한 것이다. 농장주들 사이에 공유 목초지가 있을 때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가축을 굳이 이곳에 풀어놓아 목초지를 과잉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목초지가 황폐해져서 누구에게도 이득이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노왁은 오늘날의 기후 변화도 이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가 큰 위험에 처할테지만, 그럼에도 연비가 낮은 차를 타거나 물을 펑펑 흘려 보내는 이들이 많다. 지구의 위기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간접 상호성’에서 언급된 ‘평판의 힘’을 이용해 이런 행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도요타의 인기 많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는 쉽게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난 기후 온난화를 걱정하는 시민이야”라는 점을 홍보해 평판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전세계 현인들의 말을 살피면 ‘도덕 체게의 황금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네 이웃에게 바라는 존재, 너도 그런 존재가 될지어다”(그리스 철학), “네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기독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남에게 결코 해서는 안된다”(힌두교),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하려거든 누구도 해하지 마라”(이슬람교), “네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유교) 등의 격언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수학자가 최신의 게임이론을 통원해 현대의 진화생물학을 파고들어 얻어낸 아이디어가 옛 현인들의 가르침과 비슷하다는 것은 지적인 짜릿함을 전한다.
노왁은 게임이론과 진화생물학의 결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중 독자를 의식한 듯, 자신의 학문 여정, 현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애쓴 동료들의 에피소드들, 학문 세계의 별스러운 전통들을 흥미롭게 전한다. 미국의 학자 조지 프라이스는 한계에 갇혀 있던 게임 이론을 자연 선택에 적용하는 업적을 보인 인물이지만, 예수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 순간부터 학문 대신 사회사업에 몰두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결국 가산을 탕진한 뒤 자살했다. 인간의 이타성, 선함이 과연 존재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을 처음으로 설계한 가렛 하딘은 애덤 스미스식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선을 파괴할 것이라고 봤고, 생태계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감당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안락사를 지지했던 하딘과 그의 아내는 62번째 결혼기념식을 마친 직후 자살했다.
책의 제목은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지만, 정작 ‘초협력자’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 단지 인간은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등 협력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기에, ‘초협력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지금까지의 분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의 염원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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