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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먼 옛날 그리스도교,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

최상한 지음/돌베개/432쪽/2만원


한밤의 불이 꺼지면 보이는 것은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뿐이다. 출석 교인 기준으로 뽑은 세계 50대 교회 리스트에 한국 교회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었다. 2005년 인구주택조사 인구부문 전수집계결과 개신교인은 861만명, 천주교인은 514만명이다. 둘을 합치면 1375만명으로 전체 인구 4700만명 중 29.2%다. 불교(22.8%)를 넘는 수치다.  


천주교에서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1784년을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한국에 전래된 해로 삼는다.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을 공식 설립 연도로 본다. 그러나 언제나 궁금한 것은 ‘공식’보다 ‘비공식’이다.


하지만 ‘비공식’ 분야를 연구하는 데는 제약이 따른다. ‘공식’의 힘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대형 교단은 정통성을 중시하고 그 외의 것은 이단으로 멀리한다. 따라서 종교의 ‘비공식’ 분야를 들춰내는 건 불편함을 넘어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다.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의 저자 최상한은 경상대학교에서 행정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미국에서 목회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선 교회, 신학계와 드러나는 연계 고리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비공식적인 한반도 전래사를 다룬 이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외부자가 이런저런 이해와 권력 관계에 얽혀 있는 내부자보다 더 날카롭고 정직한 말을 하는 사례를 우리는 흔히 찾을 수 있다. 


의문은 단순한 데서 나왔다. 불교와 유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됐고, 7세기 중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는 불과 100여년만에 통일 신라의 국제무역항 울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보다 훨씬 오래된 그리스도교가 한반도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노플을 기점으로 라틴어를 쓰는 서방 그리스도교,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 그리스도교로 나뉜다. 동방 그리스도교는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까지 도착했다. 중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한반도에도 그리스도교가 어떤 형태로든 알려졌을 것이란 이야기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동양에서 유래한 종교다. 구약의 중심인 아브라함, 신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모두 오늘날의 동양 땅에서 태어나 활동했고, 인종적으로도 동양인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도 동양인이다. 최초의 교회라고 일컫어지는 안디옥도 동양이다. 그러나 동방 그리스도교의 위세가 꺾이고 서방 그리스도교가 강해지면서 그리스도교는 서양 종교처럼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도들은 모두 서방 그리스도교를 믿는다. 


17~18세기 조선에 전해진 천주교 역시 서방 그리스도교였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박지원, 홍대용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을 연구했는데, 그중에는 당연히 서양인들이 믿는 종교인 천주교도 있었다. 물론 천주교를 지식이 아니라 신앙으로 받아들인 이도 있었다. 정약전·약종·약용의 3형제와 이벽, 이승훈 등이었다. 이들은 그 댓가로 목숨을 내놓거나, 살기 위해 신앙을 버려야 했다. 


조선 왕조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1791년 윤지충이 어머니의 초상을 유교식이 아닌 로마 카톨릭 예식으로 치른 사건이다. 그러나 장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교는 당대의 기득권층이 받아들이기 힘든 교리를 전파하고 있었다. 에수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섬겼다. 예수를 진심으로 따른다면 왕-귀족-평민-노예의 수직적 계급 구조나 부자와 빈자가 엄격하게 나뉘는 부의 재분배 구조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로마가 그랬듯이, 조선 역시 이같은 혁명적 사상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혁명적 가치가 세계 각지에 고스란히 전해질 리는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가치는 받아들이는 이의 편의에 따라 윤색됐다.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아고스띠뇨라는 세례명을 가진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에도 고니시의 동상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의 군사 1만8000명도 대부분 그리스도교인이었다. 


일본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선교를 하던 시기보다 50여년 뒤인 1549년 그리스도교를 본격적으로 접했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일행이 가고시마에 내리면서 일본의 가톨릭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집권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침략하기 위해 포루투갈로부터 들여오는 조총이 필요했고, 때문에 서양인들의 활동을 허락했다. 하비에르의 도착으로부터 100년간 일본은 ‘크리스천 시대’라 할만큼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평등과 사랑을 설파하는 그리스도교가 봉건질서와 가난에 신음하던 일본 하층민들을 파고든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십자군이 그러했듯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그리스도교 군대도 조선의 죄없는 민중을 가책 없이 학살했다. 민중은 조선에서 죽느니 포로로 붙잡혀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10만여명의 조선인이 왜군에게 끌려갔는데, 그중 일부는 일본에 퍼져 있던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규슈 일대에만 수천 명의 조선인이 그리스도 교리를 공부하고 교회까지 세웠다. 원치 않게 끌려온 이국에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내세에서의 평화를 보장하는 종교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던 동방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됐을까. 로마 카톨릭과 그에 대항해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위세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사실 동방 그리스도교 역시 조금씩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서방 그리스도교가 마테오 리치를 내세워 중국을 찾았을 때, 그곳엔 이미 오래 전 잃어버린 자신의 형제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까지 전해진 그리스도교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안교였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안교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권력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렸고, 박해를 피해 묵묵히 동진했다. 마침 그곳엔 실크로드가 있었다. 네스토리안교는 중국, 몽골, 만주, 고려 국경 일대까지 퍼졌다. 중국인들은 네스토리안교를 빛나는 종교라는 의미의 ‘경교’(景敎)라 불렀다. 


경교가 결정적으로 세를 떨친 것은 원나라 때였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칸은 다민족·다문화 제국의 경영자답게 모든 종교에 관대했다. 그는 유교의 이상 군주, 불교의 보살, 이슬람의 후원자, 그리스도교의 개종자였다. 쿠빌라이칸의 어머니이자 칭기즈칸의 며느리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아예 독실한 동방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고려의 충렬왕은 쿠빌라이칸의 사위로 그의 성대한 생일 축하연에도 다녀온 적이 있으니, 그리스도교도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왕을 경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에 전해지면서 토착화됐다는 것이다. 몽골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시설에 ‘사’(寺)를 붙였다. 대흥국사, 운산사, 취명산사 등이 모두 그리스도교 시설이었다. 서양에서도 교회(church)라는 말이 정립된 것이 17세기이니, 그 이전의 그리스도교 시설을 구분하는 별다른 이름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몽골의 그리스도교 사제들은 새벽에 일어나 목탁을 치고 향을 피우기도 했다. 그들은 삭발까지 했다. 


몽골 그리스도교는 고려에도 들어왔다. 몽골이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세운 기관인 정동행성의 수장이 바로 그리스도교도였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교 성인인 조지의 한자 음차인 활리길사(기와르기스)였다. 활리길사는 2년간 개경에 살면서 노비제도의 혁파를 시도하는 등 그리스도교 색채가 가미된 조치를 취했다. 


시간은 더욱 거슬러 오른다. 한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던 발해는 훗날의 용어를 쓰자면 ‘동북아 중심국가’이자 ‘글로벌 공동체’였다. 산동반도, 일본, 거란, 신라, 사마르칸트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수많은 민족, 언어가 뒤섞여 있었다. 당시 상인들은 중국과 터키가 싸우느라 불안했던 실크로드 대신 사마르칸트에서 러시아를 거쳐 발해까지 이어지는 ‘담비의 길’을 택하곤 했는데, 이 길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옛 발해 땅이었던 러시아 우스리스크에서 서쪽 40㎞ 지점에선 두 개의 절터가 발굴됐는데, 이곳에는 불상, 사천왕상 머리, 용의 머리와 함께 동방 그리스도교 십자가가 그려진 점토판까지 나왔다. 한때 발해의 수도였던 중국 훈춘에서는 삼존불상이 발견됐는데, 부처 오른쪽의 협시보살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다. 당대의 종교란 불교, 그리스도교, 무속 신앙이 뒤섞인 ‘어울림의 신앙’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스도교 문화는 불교 미술의 정수인 석굴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전해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교도들은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켰다. 석굴암 역시 간다라 미술의 영향 아래 신라인들의 미의식을 더한 걸작이다. 그리스도교 동진 연구자인 E A 고든은 석굴암 전실 내벽에 부각된 십일면관음상, 십나한상 등에 나타난 옷 무늬나 신발이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경교에선 하느님을 천존, 에수를 세존이라 불렀다. 토착화를 위해 ‘존’(尊)이라는 불교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당나라 때 번역된 시리아어 그리스도교 경전에는 그리스도가 무욕(無慾), 무위(無爲), 무덕(無德), 무증(無證)을 터득하라고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노자나 장자가 했을 법한 말 같이 들린다.


오늘날에는 사소한 것으로도 구분한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다르고, 개신교 내부도 수많은 종파가 나뉜다. 조금만 다르면 같이 못살 것처럼 으르렁댄다. 더 평화롭게 사랑하며 사는 대신, 싸우다가 문명이 스러지고 인생이 끝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싸우라”는 말 대신 “사랑하라”는 말을 더 많이 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