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책이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예전 프론트 리뷰로 쓴 적이 있는 <사상으로서의 3.11>에 한 꼭지의 글을 실은 히로세 준의 저작을 골랐다. 그의 단행본이 완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을 읽었을 때도 느낀 것인데, 일본의 젊은 사상가들의 글은 재미있지만 어딘지 허공으로 한 발짝 떠있다는 감이 든다. 그 한 발짝의 감각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히로세 준 지음·김경원 옮김/바다출판사/288쪽/1만3800원
당신의 삶은 안정적인가. 조금 더 은유적으로 말해, 당신의 인생에는 해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큰 행운아다. 나고 자라 낳고 죽을 때까지 삶의 범위와 행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던 시대가 있었으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불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년에 금융 위기가 닥쳐 다니던 회사가 도산할지, 내일 자연 재해에 고장난 원자력 발전소가 방사능을 유출시킬지, 아무도 모른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기라도 하듯, 개인과 사회가 모두 불안하다.
그래서 이 불안한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견뎌나가야 하나. 일본의 젊은 사상가 히로세 준의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그에 대한 한 가지 대응책이라 할만하다. 그는 세계가 ‘형편 없는 영화’ 같다거나, ‘더럽다’고 부른다. 많은 이들이 히로세의 인식에 동의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그만 보고 극장을 나서라’라고 촉구하거나 ‘더러운 세상을 정화하자’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로세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형편 없는 영화든, 더러운 세상이든, 인간은 그것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 혼란한 세상의 삶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 좋다. 히로세는 1970년대 이탈리아 학생들이 외쳤던 구호를 다시 불러낸다. “불안정한 것은 아름답다”. 일본 잡지에 연재된 시평을 묶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프리케리아트의 철학’, 혹은 ‘프리타족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할만하다.
히로세가 보기에 원자력 발전소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상징과 같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글의 연재가 시작된 후에 일어났지만, 사고 여부와 무관하게 원전은 우리 삶의 속성을 이미 드러내주고 있었다. 수력발전소의 물, 화력발전소의 불은 일단 전기를 내면 낮은 곳으로 흘러가거나 타서 재가 됨으로써 소멸한다. 즉 해결된다. 그러나 원자력은 다르다. 낡은 원자로, 다 사용한 핵폐기물의 처리 문제는 인류가 지구상에 남아있는 동안 영원히 함께 한다. 원자력에 있어서 ‘최종처분’은 없다. 원자력 발전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방사성 폐기물은 늘 ‘준안정’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원자력 폐기물의 ‘처리’와 ‘사고’를 명확히 구분하는 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진과 쓰나미는 ‘일어 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원전 사고는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답이 없다’는 점은 ‘테러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오사마 빈 라덴을 죽였지만 테러는 종식되지 않았다. 후세인이 죽었지만 이라크는 안정되지 않았다. 오직 혼란과 갈등과 불안이 지루하게 이어질 뿐이다. 그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물론 에전에는 답을 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로 ‘혁명’이다. 시민과 학생에 의한 것이든, 무장한 군인에 의한 것이든, 혁명은 사회와 개인이 당면한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겠다는 시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게 한 표를 던진 유권자, 그 반대 지점에서 <레미제라블>의 좌절한 혁명을 보며 눈물 흘린 관객은 모두 ‘최종해결책’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기대를 여전히 품고 있고 있는 셈이다.
히로세는 “아직 혁명을 꿈꾸는가”라고 되묻는다. 혁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팔짱 끼고 앉아있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히로세는 혁명 대신 ‘봉기’를 이야기한다. 봉기는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끝없이 흐르는 운동이며, 문제 해결이 아닌 문제 제어를 위한 것이며, 지도자나 전위당을 알지 못한다.
2011년 일본에선 변혁 운동의 불길이 사그러진 후 근 40년만에 대규모 군중이 반원전 시위를 위해 모였다. 이때 일부 시위대를 체포해 취조한 경찰관은 “도대체 뭘 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이는 같은해 뉴욕의 ‘점령하라’ 시위대에 대한 일부 언론의 시각과도 상통한다. 월스트리트의 주코티 공원에 죽치고 앉아 먹고 마시며 노래하는 시위대를 향해 주류 언론들은 ‘지도부도 없고 목적도 없다’는 식으로 냉소했다. 그리고 시위대가 사라진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히로세는 바로 이같은 무규율, 무목적이야말로 봉기의 특성이라고 본다. 히로세가 주장하는 봉기는 혁명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성이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혁명은 기쁨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 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피로가 기쁨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봉기는 “답을 향해 가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나아가는 데모”다. 봉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불안정 상태를 긍정하는 것처럼, 이 책에는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제시돼 있다. 먼저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 노동의 문제. 히로세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추동한 고용의 비정규화가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지만, 역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을 촉진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생활의 불안정화라는 ‘악’을 노동에서 해방된 생활이라는 ‘선’으로 전화시키는 시도”다. 에전이라면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에 들어가 조금씩 오르는 월급에 만족하며 평생 같은 일상을 반복했을 사람들이, 이제는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프리타’족으로 살아간다. 평생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히로세는 이런 현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소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계와의 유기적 연관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행할까. 히로세는 프랑스 영화 <플레이타임>을 예로 든다. 영화 속 근미래의 파리는 온통 철과 유리로 만든 건물이 들어찬 도시다. 등장인물들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지만, 손을 맞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만나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세계에서 소외되어 타향살이를 하게 된 ‘산책자’에게도 그만의 고유한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은 그 자체로 긍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불안정한 시대의 민주주의와 정치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가. 일본의 원전 시위대에 원전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를 법한 펑크 밴드가 등장해 시끄럽게 노래한 것처럼, ‘점령하라’ 시위대의 구성원이 다양했던 것처럼, 새 시대에는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조직은 이익 단체, 압력 단체와 다르다. 자크 랑시에르는 두 가지 ‘힘’을 이야기한다. “지위를 배분하고 그 위치를 고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힘”과 “각자의 정신과 신체가 지닌 가소성(可塑性)을 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힘”이다. 전자가 ‘폴리스’라면 후자는 ‘정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일본의 영화팬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다. 요약하면 “모두가 이야기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 ‘무자격의 자격’으로 모든 문제에 개입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고 정치다.
물론 히로세는 희망찬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비관주의자에 가깝다. 68혁명 이후 젊은이들은 공장에서 탈출했지만, 그들이 들어선 곳은 ‘공장이 된 세계’였다. 노동은 취직부터 퇴직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는 특정 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있는 시간 전부가 노동의 시간이 됐다. 취업자와 실업자의 구분은 ‘일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임금을 받는가, 아닌가’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세계를 기업화했다. 푸코는 일찌감치 신자유주의는 “사회체 또는 사회 조직 안에서 ‘기업’의 형식을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표현했다.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 스스로가 하나의 기업이 된다. 그래서 노동자는 스스로를 경영하라고 강요당한다.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개발하도록 유도된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지식인이 되도록 이끈다”.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생산된 지식을 남김없이 빼먹는다.
세계가 공장이고, 모든 지식인이 신자유주의에 이용당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답이 너무 간단하다. 한국 번역본에 추가된 2011년 10월 런던대 버크백 대학 심포지엄 발표문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반란의 역동성 자체까지 자기 것으로 훔치는 자본에 대항하는 방법은 ‘반란에 대한 반란’이다. ‘외부’가 된 신자유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선 ‘외부의 외부’를 발견해야 한다. 지적 능력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히로세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 히로세조차 모를 수 있다.
그렇게 이 책은 혼란스럽다. 혼란의 시대에 혼란한 사유의 책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답이 없는 세상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일까. 히로세는 세계가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가정한 뒤, 세계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대신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긍정의 맹아를 찾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현실에 체념하고 순응하는 것인가, 반대로 급진적인 태도인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와 같은 책은 현재 한국의 지적 풍토에선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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