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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세상,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동화 (파랑새)를 읽었다. 피노키오는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는 나무인형' 이야기 정도로 기억되지만, 사실 의 전체적인 정서는 매우 비정하다. 축약되지 않은 판본을 아이에게 읽어준다면 어른이 먼저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긴 많은 옛 동화들이 그렇다. 예를 들어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는 저주를 받아 춤을 멈출 수 없자, 발목을 잘라낸다. 옛 동화에는 이런 고어 신이 비일비재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는 를 비튼 영화인데, 덕분에 스필버그의 영화 중 가장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갖게 됐다. 의 교훈을 요약하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자'다. 이는 고래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알려주길 원하는 교훈이지만, 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만하다. 부모라고 다 좋은 부모인가. 오만과 독선과 아집과 편견에.. 더보기
심미주의자를 위한 삶의 원칙,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 시간이 없어서 전화로 인터뷰했지만, 직접 만났다면 더 재미있을 법했다. 요즘 만나는 분마다 거창하게 말해서 수행, 가볍게 말해 처세의 방법에 대해 묻곤 한다. 많이 공부하고 생각한 분들은 대부분 나름의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문광훈 충북대 독문과 교수(51)는 신간 (김영사)에서 아내와의 대화 한 토막을 전한다. 책의 일부를 미리 읽은 아내는 “답답하다”고 촌평했다. 남편이 주장하는 ‘심미주의’는 부동산 투기, 명품 구입에 관심 없이 건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조차 “고차원적이거나 허황되거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광훈 같은 이는 “희귀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더 희귀한 사람”이다. 문광훈 역시 아내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도 문광훈은 이 ‘무모한 사투’를 멈출 생각이 없다. 선언적이기는 커녕, 세.. 더보기
좌파도 자기계발합시다. 조정환의 <예술인간의 탄생>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는 말을 받아치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런 분과 인터뷰를 하고 나면, 그 오랜 공부를 짧은 시간에 압축 전달받은 느낌이 들어 기자 생활의 유익함을 새삼 깨닫는다. 아래 글에는 지면 분량상 넣지 않은 건강론에 대한 부분을 덧붙였다. 예술가는 누구일까. 미술관에 작품이 걸려 있고, 커다란 무대 위에 오르며, 도서관이 그의 책을 구입하는 사람일까.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59)는 4년만에 낸 단독 저서 (갈무리)에서 ‘예술가’와 ‘예술인간’을 구분한다. ‘예술가’는 예술대학 졸업장, 수상 실적에 의해 자격을 얻지만, ‘예술인간’은 저마다의 삶에 내재한 에너지를 끄집어낸 즉시 태어난다. 그는 우파의 전유물처럼 들리는 ‘자기계발’이란 말을 쓰기도 꺼리지 않았다. 다만 .. 더보기
70대 남성과 30대 여성의 우정, 라종일과 김현진의 이야기 살아온 배경, 성향, 생각, 세대가 다른 두 남녀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둘 모두에게 행운이다. 특히 중장년층 남성 정치인, 지식인 중에서 라 교수를 부러워하고 이런 파트너를 구해 책을 쓰고 싶어하는 이가 많을 것 같다. 70대의 남자와 30대의 여자가 우정을 나눈다. 남자는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교관이자 현실 정치권의 실세였으며, 여자는 백수다. 남자는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내가 창피하다”는 사람이고, 여자는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알코올의존증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남자는 차가운 현실주의자지만, 여자는 뜨거운 이상주의자다. 어느날 여자는 남자에게 ‘연애편지’를 주고받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네 계절 동안 32통의 이메일이 오갔다. 온갖 흉사로 피 흘리던 여자는 “왜 살아야 하느냐”고.. 더보기
DDP는 명품백, 서대문형무소는 엽기테마파크, <서울건축만담> 건축가 최준석, 차현호씨는 소설가 김연수, 김중혁씨의 릴레이 에세이를 모델로 삼아 '건축 만담'을 구상했다고 한다.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책을 '건축책'이라고 취급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재미있는 만담 같은 책도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실제 책으로만 보면 한국 건축가들은 모두 철학자 같다) 기사는 둘을 인터뷰한 후 책 내용과 섞어서 구성했다. 책은 꽤 술술 읽힌다. 이 남자들, 치맥(치킨과 맥주)만 15년째다. 1999년 1월 한 대형설계사무소 면접장에서 만난 이후 한 달에 1~2번은 치맥을 먹었다. 만나면 건축 이야기, 사는 이야기,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고, 티격태격 다투기도 했다. 그 사이 한 명은 자신의 사무소를 차렸고, 한 명은 대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각자 몇 권의 건축책을 냈고,.. 더보기
세월의 마스터, <런어웨이> 장르 단편 모음집인 에서 시작해 조이스 캐럴 오츠, 레이먼드 카버까지 영미권 작가들의 단편집들을 잇달아 읽다보니 어느덧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기도 한 앨리스 먼로에 이르렀다. 국내에 몇 권의 작품집이 소개돼 있는데 난 얼마전 가디언이 '최고의 단편선 10권' 중 하나로 뽑은 (2004)를 골랐다. 가디언은 이 작품집에 대해 "는 먼로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이며, 그가 가진 최고의 기술들, 즉 때로 수십년에 이르는 시간의 매끄러운 이동, 몇 페이지로 전 생애를 전개하는 능력, 단순한 언어를 통한 복잡한 진실의 탐구 등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나를 사로잡은 건 가디언이 첫번째로 꼽은 기술이다. 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표제작 '런어웨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은 수십 페이지로 수십 .. 더보기
피가 듣는 삶의 단면,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1938~1988) 예전에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몇 권을 읽은 적이 있다. 를 들고 있는 걸 본 한 친구가 표지의 제목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이거 그런 책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명을 한 적도 있다. 사실 그 책은 책 디자인이 좀 그래서 레이먼드 카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해할만도 하다. 아무튼 그때 카버를 읽었을 대는 "좋았다" 정도였다.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일환으로 다시 나온 을 읽은 뒤에는 그냥 입이 벌어졌다. 카버를 처음 읽은 뒤로도 10년이 흘렀고, 그 사이 나도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고, 그래서 카버가 그린 삶의 정수를 조금 더 실감나게 느끼고 있는 걸까. 카버를 두고 '미국의 체홉'이라고 흔히들 얘기하지만, 난 체홉의 단편 몇 편을 읽으며 그다지 강렬한 인상.. 더보기
냉소적인 부음, 소녀 수집하는 노인(+10가지 글쓰기 팁) 조이스 캐롤 오츠(1938~)의 단편집 을 읽다. 살아있는 미국 작가 중 매우 각광받는 인물이라고 하며,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올해도 도박 사이트에서 10위권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섯 편의 단편은 모두 영미권 문학 대가의 말년을 상상해 그리고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손에 의해 요리된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마크 트웨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헨리 제임스, 에드거 앨런 포, 에밀리 디킨슨. 디킨슨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다. 내가 '요리'라고 표현한 건 이유가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각 작가의 작품 혹은 삶에서 영감을 얻어 그들의 말년을 재현했다. 책을 읽기 전이라면 이것이 앞선 대가들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읽으면 조이스 캐롤 오츠가 그린 그들의.. 더보기
낙관과 무대책 사이, <큐레이션의 시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예전 출판 담당일 때 슬쩍 제목만 봤던 (사사키 도시나오/민음사)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이런 류의 일본 서적이 그러하듯, 이 책도 마음 먹으면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다. '큐레이션'은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의 저자 사사키 도시나오는 큐레이션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특히 인터넷의 시대 이후 도처에 쏟아지는 정보를 적절히 취합한 뒤 추려 내놓는 행위를 통틀어 큐레이션이라고 한다. 예전이야 콘텐츠가 주인이었지만, 이젠 아무리 뛰어난 콘텐츠라 하더라도 수많은 콘텐츠 중의 하나로 묻힐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콘텐츠의 발굴은 창작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논지다. 저자는 이를 위해 큐레이션에 의해 빛을 본 사례들을 언급한다. 아마추어 화가가 .. 더보기
작심한 단편모음집, <안 그러면 아비규환> 단편집을 읽으면서 한결같이 주옥같은 작품들만 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에, 몇 편에서라도 번뜩이는 인상을 얻으면 만족하는 편이다. 장편은 읽는데 어느 정도의 노력, 시간을 투자해야 하므로 그만큼 기억에도 남는 반면, 쉽게 읽히는 단편은 쉽게 잊힌다. 이지 컴, 이지 고. 은 "영미권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작정하고 쓴 ‘장르’ 단편소설 모음집"를 표방한다. '공포'라는 주제 외엔 공통점이 전혀 없는 단편집이라고 홍보되지만, 어떤 것들은 별로 공포스럽지도 않다. 제목을 표제로 따온 닉 혼비의 '안 그러면 아비규환'은 티비 시리즈 의 한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였다. 별 볼일 없는 15살짜리 남자 아이가 교내의 퀸카 여핛생과 섹스를 하게 된 사연을 1인칭의 구어체로 풀어놓는다. 남자 아이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 더보기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중 강론 모음 4박5일간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일정이 마무리됐다. 교황은 방문하는 곳마다 강론, 기도를 했고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새겨볼만한 말씀을 남겼다. 교황의 강론을 모두 정리했다. (한국어 번역의 유려함에도 감탄했다. 밑줄은 내가 그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연설 대통령과 정부 공직자들과 외교단과 만남, 서울, 청와대, 2014년 8월 14일.​​ 대통령님, 존경하는 정부 공직자들과 외교관 여러분, 친애하는 벗들이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오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되어서, 또 무엇보다 한국의 국민들과 그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 민족의 유산은 오랜 세월 폭력과 박해와 전쟁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대.. 더보기
예술은 언제나 미래다, <레트로 마니아> 주제가 뚜렷하고 사례가 풍부하며 표현이 신랄하다. 영미권 대중문화 평론가 특유의 현란한 문체가 살아있다. 대중음악, 나아가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관심있는 이라면 읽어볼만하다. 70년대 후반 펑크 폭발을 주도한 클래(위)와 섹스 피스톨스.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헌액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 밴드의 반응은 상이했다. 클래시의 믹 존스는 이마가 벗어지고 검은 양복을 입은 채로 "45년간 조직에 성실히 복무한 공로로 감사장을 받으려고 구부정한 자세로 발을 질질 끌며 연단에 올라가는 회사원" 같이 시상식 무대에 올랐다. 반면 섹스 피스톨스는 초대장을 받자마자 "로큰롤과 명예의 전당은 오줌 자국에 불과하다"고 반응했다. 레트로 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지음·최성민 옮김/작업실유령/456쪽/1만8000원 2006년 .. 더보기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저스트 키즈>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을 읽은 김에 예술가의 자서전을 좀 더 들춰보고 싶어졌다. 서가를 둘러보니 패티 스미스의 가 눈에 띄었다. 다 읽고 난 지금, "참 잘 챙겨두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이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패티 스미스의 음악에 대해 잘 모르거니와, 히피즘에 대해서도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미스가 이 책에서 한때 연인이었던 로버트 메이플소프와의 관계를 주로 다룬다는 점에 대해서는 궁금했다. 난 메이플소프의 사진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이플소프는 게이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스미스와 연인이었다는 거지?)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는 '예술가'가 되길 원했으나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어떤 예술을 해야 하는지, 미래의 모습이 어떨지 아.. 더보기
지휘자는 뭐하는 사람인가, <거장 신화> 거장 신화노먼 레브레히트 지음·김재용 옮김/펜타그램/824쪽/2만8000원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야구감독, 해군제독과 함께 ‘남자가 해볼만한 3대 직업’으로 꼽히곤 한다. 이 3가지 직업은 모두 한정된 시·공간 속에 있는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을 이끌어 좋은 결과를 내야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지휘자의 손 끝, 야구감독의 사인, 제독의 명령에 따라 성공과 패배가 순식간에 갈린다. (원제 The Maestro Myth)는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1991년작이다.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001년 개정판을 근간으로 했다. 레브레히트는 지휘자라는 직업이 생겨나 인기를 얻은 뒤 쇠락해가는 지난 120년간의 과정을 두툼한 분량, 날카로운 서술로 풀어냈다. 모차르트, 베토벤의 시대에는 지휘자라는 직업이 없었.. 더보기
멋진 삶에 멋진 자서전,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 제목을 듣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 영문판 제목도 이다. 박찬욱 감독은 한국판 추천사에 '추천사 비슷한 것'이란 제목을 달았다. 책은 구로사와가 만 69세쯤인 1978년에 썼다. 구로사와는 이 책을 쓰고서도 20년을 더 살았고, 다섯 편의 장편 영화를 더 만들었다. 구로사와는 그동안 자서전을 쓰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글로 써서 남길 정도로 내 이야기가 재미있다고는 생각하기 않았기 때문"에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마음을 바꾼 계기는 두 명의 존경하는 감독 때문이었다. 한 명은 장 르누아르. 그는 르누아르의 자서전을 읽고 자극을 받아 그와 비슷한 것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존 포드. 구로사와는 존 포드의 자서전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더보기
행해진 일은 행해진 일, <카운슬러>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몇 편 읽어왔다. 영화로도 제작된 (2006)나 (2005)보다는 한국에 번역된 작품 중에는 가장 먼저 쓰여진 (1985)을 '압도적'이라 느끼며 읽었다. 찾아보니 예전에 쓴 짤막한 평이 있다. 나 자신의 말을 뻔뻔하게 인용하자면 에 비하면 나 는 "왜 썼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는 맥카시의 시나리오다. 2013년 출간됐고, 리들리 스코트가 같은 해에 영화로 선보였다. 찾아보니 맥카시는 2011년에도 토미 리 존스가 연출하고 주연까지 맡은 라는 텔레비전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 평가도 알 수 없다. 마이클 파스밴더, 하비에르 바르뎀, 카메론 디아즈, 페넬로페 크루즈,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역시 그 화려한 연출자, 배우의 이름에.. 더보기
아름답지만 입맛에 안맞는 일본요리, <가면의 고백> 미시마 유키오의 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지만 '내가 그리 좋아하는 소설은 아니었다'는 점만 기억이 난다. 교토 여행중 실제로 금각사를 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도금된 외관이 밝게 반짝이는 쾌청한 날이었다. 명색이 절인데 그토록 호화롭게 금빛으로 번쩍이는 모습이 아름답거나 멋있다기보다는 어딘지 과잉으로 여겨졌다. 전혀 반짝이지 않지만 기품있으며 충격적으로 모던하기까지한 은각사와 비교하니 금각사의 아름다움이 더욱 이상했다. 아마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도 실제의 금각사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미시마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1949년에 출간한 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쓰긴 했지만, 그리고 많은 소설가들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변형해 내놓는 경향이 있긴 .. 더보기
80년전의 매저키스트,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이른바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소설 중에 '막장스러운' 내용이 많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의 줄거리는 그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에세이 는 내가 무척 좋아해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거나 선물한 적도 있는 책인데, 혹시라도 내 추천에 를 읽은 뒤 이나 그외 다른 소설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볼까 하는 마음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타임스는 1965년 8월 6일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부음 기사에서 그를 '동양의 D H. 로렌스'라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에서 드러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성관념은 로렌스식의 원초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 의 네 남녀를 한 마디로 '변태'라 불러도 무방하다. 차라리 다지나키 준이치로를 매저키즘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 .. 더보기
우연하고 쓸쓸한 삶, <에브리맨> 정동길을 걸으면 매번 지나는 부대찌개 식당이 있다. (회사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집을 안다) 얼마전 늦은밤 퇴근을 하다가 이 식당을 지나치고 있었다. 영업이 끝났는지 매장엔 불이 꺼져있었고 오직 높게 매달린 텔레비전 불빛만 반짝였다. 낮에는 손님들이 앉았을 자리에 식당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종종 불을 모두 끄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다) 브라운관에서는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아마 김연아?)가 우아한 동작으로 은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식당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도 재빠르지 않을 법한 할머니는 그 날렵하고 아름다운 젊은이의 동작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필립 로스의 은 매 페이지마다 독자에게 "메멘토 모리"라고 속삭이는 책이다. 번역본으로 200쪽에 .. 더보기
삶은 하나의 얼룩, <울분> 을 읽은 김에 필립 로스의 소설을 한 편 더 꺼내들었다. 2008년작인 (Indignation)이다. 2권으로 분책될 정도의 분량인데다가 인종, 성, 계급 등 다양한 문제를 현학적인 문체로 다뤘던 과 달리 은 한 젊은이가 자신의 길지 않은 삶을 회상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더 쉽게 읽힌다. (혹시 번역 때문?) 약간의 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으나, 의 주인공은 죽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생사의 경계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에서도 그랬지만, 로스는 소설이 3분의 1쯤 전개됐을 때 주인공이 이미 죽었다는 암시를 한다. 주인공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고, 주변 인물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형성이 돼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점이다. 서서히 독서에 속도를 내 문장을 빠르게 훑어나가려는 차에 작가의 이런 기교에 .. 더보기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휴먼 스테인>과 <화장>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어렵게 읽은 김에 현대 미국 작가의 소설을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책꽂이를 살피니 필립 로스의 두 권짜리 책이 있었다. . 난 보지 못했지만, 앤서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은 동명 영화로 알려진 작품이다. 읽어보니 은 영화 제작자들이 탐낼만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인습을 넘는 사랑, 그에 대한 질투, 살인, 오해 받는 남자, 인종 갈등, 가족간 불화 등. 이 소설의 통속적인 고갱이만 뽑아내니 이렇다. 허나 영화가 소설을 얼마나 담아냈는지는 좀 궁금하다. (솔직히 회의적이다) 앤서니 홉킨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배우다. 70대에 접어들어서도 젊은이같은 활력을 보이며, 자신의 주장에 굽힘이 없고, 오만한데다 독선적인 동시 지적이며, 세상이 자신을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히 .. 더보기
모더니즘 막장극, <소리와 분노> 윌리엄 포크너의 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출판사의 번역본으로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수십 페이지는 읽은 것 같은데 그때까지 줄거리는커녕 등장인물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전 읽은 에 포크너의 인터뷰가 게재돼 있기에 다시 흥미가 생겼고 마침 문학동네 판본을 구해둔 적이 있어 다시 도전해 보았다. 첫 페이지 안쪽에 써있는 역자의 다섯 줄짜리 설명을 읽자마자 내가 예전에 이 책을 읽다가 실패한 이유를 알아냈다. 첫번째 챕터의 화자는 33세이지만 3살 지능을 가진 지적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이 챕터는 벤지라는 이름의 남자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하는 것들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게다가 벤지의 머리 속에서는 크게 분류해 4 가지, 세밀히 분류하면 14가지 시간대가 별도의 구분 없이 혼재돼 흘러.. 더보기
금욕의 왕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톨스토이에 대해선 그의 교훈적이고 종교적인 우화와 말년의 자족적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의 두 거두로 대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꼽지만, 왠지 요즘의 ‘트렌드’는 도스토예프스키 쪽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성스러운’ 톨스토이보다는, 차르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나고 훗날엔 도박빚에 쪼들리며 소설을 써나갔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이 더 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몇 편을 읽어 보았으나 솔직히 말해 그다지 깊숙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나 이 그랬고, 얼마전 읽다가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집어치운 도 그랬다. 아, 단편집 도 읽긴 했다. 기억 나지 않긴 하지만. 그러나 톨스토이는 달랐다... 더보기
글쓰기는 일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다른)는 1953년 창간된 문학 계간지 '파리 리뷰'가 게재해온 작가 인터뷰 중 12편을 묶어낸 책이다. 이 계간지가 지금까지 인터뷰한 인물은 250여명이라고 하는데, 출판사는 앞으로도 12명씩 묶어 두 차례 더 책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파리 리뷰' 인터뷰가 한국에 처음 묶여 나온 것은 아니다. (책세상)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나도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밍웨이 편은 과 에 모두 실렸다. 읽은 김에 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발췌해 옮긴다. 12명의 작가 인터뷰를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확실한 느낌은 '글쓰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세간에선 소설가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영감에 의지해 엄청난 작품을 써내는 '낭만주의적 천재'로 여기겠지만, 이 책 .. 더보기
삶을 바꾸는 글, <모든 것은 빛난다> 정보를 주는 글은 많겠지만, 삶을 바꾸는 글은 많지 않다. 일 때문에 한 주에도 많은 책을 훑어보고 또 그 중 한 두 권을 자세히 읽는 처지이지만, 사실 책을 덮고 그에 대한 글을 쓴 뒤에도 오래 기억할만한 책은 드물다. 미국의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가 함께 지은 (원제 All Thins Shining)은 일 때문에 읽은 책은 아니지만, 일 때문에 읽은 어떤 책보다 훌륭했다. 많은 정보를 주는 것을 넘어, 삶의 지향에 영향을 미친다. 나 자신이 대단한 독서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주중에는 일을 위한 책을 읽고 나머지 시간엔 개인의 취향에 따른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그 '나머지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이 책은 증명한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난 서슴 없이.. 더보기
한국인은 무엇인가, <한국인의 탄생> 한국인의 탄생최정운 지음/미지북스/580쪽/2만원 한국인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질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최고 수준의 학술 저작으로 평가되는 의 저자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한국 근·현대 소설을 텍스트로 삼는 우회적 접근법을 택했다. 그는 한국 근현대 사상사 연구의 난점으로 텍스트의 부재를 꼽는다. 당시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사회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어낸 저술이 없다는 것이다. 500년 왕조가 붕괴되고 경천동지할 새 시대가 열리는 한복판에 서있던 지식인들이 이를 차분하게 조망하는 글을 남기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소설이 남아있다. 고종이 즉위한 해는 1863년이었는데, 그 뒤 43년이 지.. 더보기
뉴 파워라이터20 - 1. 엄기호 이번에 '뉴 파워라이터 20'이란 걸 선정해보았다. 출판 관계자 32명의 추천에 여러 가지 기준을 더했다. 20명을 차례로 인터뷰할 예정인데, 첫 주자는 문화학자 엄기호다. 아래에 명단, 엄기호 인터뷰, 선정 과정 등을 차례로 옮긴다. 뉴 파워라이터 20(가나다 순)고병권 사회학자김원 정치학자김종대 국방평론가박천홍 역사저술가박해천 디자인연구자신형철 문학평론가엄기호 문화학자이강영 물리학자이원재 경제평론가이주은 미술사학자이현우 서평가임승수 저술가장대익 과학철학자전중환 진화심리학자정여울 문학평론가정혜윤 라디오 프로듀서정희진 여성학자진태원 철학자하지현 정신과전문의한윤형 칼럼니스트 도움주신 분들(가나다 순)강성민 글항아리 대표·기인선 이매진 편집장·김미정 책세상 인문팀장·김미정 푸른숲 편집장·김보경 웅진지식하우스.. 더보기
바리케이드가 높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질 것이다, <안티프래질> 에서 캐리가 그의 리뷰를 받고 기뻐 날 뛸 정도로 유명한 것으로 묘사된 뉴욕타임스의 미치코 카쿠타니는 이 책에 대해 장문의 혹평을 씀.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까지 조롱하면서 묘사. 음..."서평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구만" 싶음. 안티프래질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안세민 옮김/와이즈베리/756쪽/2만8000원 1960년 레바논에서 태어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월스트리트의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일하다가 2006년 에세이스트로 전업했다. 2007년 내놓은 은 그의 출세작이다. 서구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모든 백조는 희다”는 명제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검은 백조(블랙 스완) 두어 마리가 갑자기 발견됐다. 여기서 검은 백조는 과거의 경험으로는 존재 가능성.. 더보기
철학자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이 치열한 무력을> 사사키 아타루의 전작에 대한 블로그글에서 일부 인용(자기 표절?) 이 치열한 무력을사사키 아타루 지음·안천 옮김/자음과모음/408쪽/1만7000원 사사키 아타루는 일본에서도 시골인 아오모리에서 1973년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봐 도쿄대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었다. 그는 논문을 들고 10군데 출판사를 돌아다녔으나, 무명의 저자가 쓴 800여쪽의 학술서를 선뜻 내겠다는 곳은 없었다. 2008년 을 가까스로 출판하고 2년 뒤 내놓은 책이 이었다. 제목은 사사키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파울 첼란의 시에서 따왔다. 그는 이 책에서 서구에는 역사를 뒤바꾼 여섯 가지 혁명이 있다고 설명한다.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 더보기
어떻게 '양놈'들을 이길 것인가, <제국의 폐허에서> 제국의 폐허에서판카지 미슈라 지음·이재만 옮김/책과함께/488쪽/2만5000원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지금도 그 여파로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낯선 이야기겠지만, 1905년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의 소규모 함대가 러시아 주력 함대를 이겨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최종 승리를 거뒀을 때 많은 아시아인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당시 무명의 변호사였던 간디는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서 이제 그 열매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고, 학생 네루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고 돌이켰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던 쑨원은 그를 일본인으로 오해한 아랍인 노동자로부터 축하를 받기도 했다. 러일전쟁은 “중세 이래 처음으로 비유럽 국가가 주요 전쟁에서 유럽의 열강을 격파”한 사건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