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문학 구공육>(외국문학연구소/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 게재된 글임. 이 책에는 2011~2012 발간된 외국문학 중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는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 <빅픽쳐>, <1Q84> 등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음.
애초 10부작으로 구성된 추리소설 ‘밀레니엄’ 시리즈의 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작품 바깥의 이야기거리가 풍성하다. 먼저 작가 스티그 라르손. 1954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그는 반파시스트 운동을 하던 외조부모의 손에 성장했고, 1983년 언론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시사잡지 ‘엑스포’를 창간한 그는 2004년 사망할 때까지 ‘엑스포’에서 활동하면서 스웨덴의 사회문제, 특히 인종차별과 극우파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그의 기사에 앙심을 품은 이들이 많았기에, 라르손은 동갑 여성 에바 가브리엘손과 32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으면서도 그녀의 안전을 염려해 끝내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의 독자가 라르손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그의 기사가 아니라 소설 때문이다. 추리소설, SF 등 장르 소설의 팬이었던 라르손은 퇴근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 ‘밀레니엄’ 시리즈를 써내려갔다. 기자로선 유명했지만 작가로선 신인이었던 그의 작품이 출간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라르손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운이 좋다면 인세 수입을 통한 노후보장을 위해 ‘밀레니엄’을 썼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쓴 다음에야 출판사와 접촉을 했다. 라르손은 사무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계단을 오르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그가 세상을 뜬 이듬해인 2005년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출간됐다.
센세이션이었다. 스웨덴에서는 물론 영국, 미국에서도 ‘밀레니엄’ 시리즈가 잇달아 출간됐다. 생전 라르손이 써두었던 ‘밀레니엄’ 시리즈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2부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3부 『벌집을 발로 찬 소녀』 등 3종이다. 라르손의 책은 2011년 말까지 전 세계에서 6500만권이 판매됐다. 좋은 원작 소설을 갈구하는 영화제작자들이 ‘밀레니엄’ 시리즈를 놓칠 리 없었다. 스웨덴에서는 1~3부가 2009년 영화화됐다. 할리우드에서도 데이비드 핀처 감독, 대니얼 크레이그, 루니 마라 주연으로 2011년 1부가 <용문신을 한 소녀>라는 제목으로 스크린에 옮겨졌다.
32년간 라르손의 연인이었던 가브리엘손은 라르손이 노트북 컴퓨터에 남겨둔 초고를 바탕으로 ‘밀레니엄’ 4부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밀레니엄’ 1~3부의 인세는 정식 혼인 관계를 맺지 않은 가브리엘손이 아닌, 라르손과 평소 왕래가 거의 없었던 가족에게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좋은 추리소설인가. 그렇다. 이 소설엔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 적당한 미스터리, 속도감 있는 구성, 흥미로운 캐릭터가 있다. 한국판은 두 권으로 분책됐는데 모두 합해 700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손을 더욱 빠르게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러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특이한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수십 년에 걸쳐 끔찍한 동기와 방식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서도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대담한 독자라면 리스베트 살란데르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과정이 할리우드 고전 황금기의 스크루볼 코미디를 닮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영화화된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할리우드 각색(사진 위)과 스웨덴 각색.
짤막한 프롤로그를 제외한다면, 소설은 미카엘이 기업인 베네르스트룀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시사잡지 ‘밀레니엄’의 편집장인 미카엘은 베네르스트룀의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가, 이 기사에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궁지에 몰렸다. 미카엘은 패배를 인정하고 밀레니엄을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미카엘의 올곧은 기자정신과 취재력을 높이 산 방예르 그룹의 명예회장 헨리크 방예르가 미카엘에게 자신의 가족과 관련한 오랜 미스터리를 풀어줄 것을 의뢰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미카엘의 반대편에 리스베트가 서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미카엘은 유명 언론인이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하며, 듬직한 체구의 남자다. 리스베트는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며, 반사회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진 여자다. 목 뒤편까지 올라오는 문신, 코나 눈썹 주변의 피어싱은 리스베트와 그를 둘러싼 사회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외면과 내면이 모두 다른 리스베트와 미카엘이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고 좋아하고 섹스하고 갈등하는지 그리는 연애소설이다. 아울러 이 소설은 리스베트가 연애를 하는 과정에 타인을 향해 꼭 닫아두었던 문을 조금씩 열어간다는 점에서 한 은둔형 외톨이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둘의 연애는 지난하다.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소설의 중반부 이후가 돼서야 처음으로 대면한다. 물론 먼저 다가간 이는 반사회적인 리스베트가 아니라 사회적인 미카엘이다. 미카엘은 리스베트 집의 문을 다짜고짜 두드린다. 이 대목은 정의롭긴 하지만 가끔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미카엘이 소설 속에서 가장 결단력있게 비춰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카엘을 대하는 리스베트의 태도가 흥미롭다. 미카엘이 리스베트의 집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데도 리스베트는 그를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미카엘이 샤워를 하라고 하자 리스베트는 그 말을 따른다. 머리 속으로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자기 뜻이 아니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단 말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렇게 한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전까지 묘사된 리스베트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이해할 수 없을만큼 냉랭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사이자 남모르게 연정을 품고 있는 드라간 아르만스키는 물론이고, 리스베트의 후견인이자 그를 매우 인격적으로 대해준 홀예르 팔름그렌조차 리스베트에게 다가가기까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랜 세월 동안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독이 든 배를 부풀린 복어 같은 존재였던 리스베트를 미카엘은 첫 만남에서 무장해제 시킨다.
이전까지 미카엘은 리스베트를 몰랐지만, 리스베트는 미카엘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아르만스키가 최고경영자로 있는 보안 회사 밀턴 시큐리티를 위해 일하는 프리랜서 조사요원 리스베트는 헨리크 방예르의 의뢰로 미카엘의 모든 것을 샅샅이 조사해둔 상태였다. 심지어 의뢰인이 요청을 중단한 뒤에도 개인적으로 미카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초반부의 독자는 리스베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지만, 중반부 이후에 이르면 그것이 미카엘에 대한 리스베트의 관심의 표현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은 없다. 그가 누구와 친한지, 하는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음악, 영화, 음식을 좋아하는지, 이전에는 어떤 사람과 사랑을 나누었는지, 손을 잡으면 어떤 느낌인지, 키스할 때 눈을 뜨고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은 아닌지. 짝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직 자기 곁에 다가오지 않은 사람에 대해 온갖 호기심을 부풀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대에는 이런 호기심을 충족시킬 많은 수단이 많다. 상대방이 남긴 흔적은 구글 검색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에서 쉽게 검색된다.
미카엘은 애초 리스베트를 몰랐다. 그러나 리스베트와 일을 시작한 뒤에는 점점 그에게 빠져든다. 빼어난 직관, 해커로서의 뛰어난 능력,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리스베트는 진전이 없던 미카엘의 수사에 숨통을 틔운다. 사소한 말로 리스베트의 마음을 상하게 한 미카엘은 뛰쳐나간 그를 쫓아가 말한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토록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내게는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어.”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협업은 추리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콤비인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을 연상케 한다. 리스베트가 반사회적인 인물인 것처럼, 홈즈 역시 평생 독신이었고 일을 위한 것이 아니면 사람을 만나길 꺼린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나왔던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에서는 둘의 관계를 업무를 위한 좋은 파트너 이상으로 상상하는 독자가 드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둘의 관계에 대한 ‘발랄한’ 해석도 종종 나온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현대로 옮겨 각색한 영국의 텔레비전 시리즈 <셜록>(2010~)에도 홈즈와 왓슨의 콤비 플레이가 등장한다. 그러나 나른하고 괴팍한 천재 홈즈와 참전군인 출신의 상식적 인간 왓슨의 관계는 평범한 우정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실제 이 시리즈를 방영한 한국의 케이블 방송사는 둘의 등장 장면에 로맨틱한 음악을 넣어 노골적인 동성애 분위기의 퀴어 드라마 예고편으로 유머러스하게 각색하기도 했다.
멜로드라마는 역경에 기반한다. 주인공의 고난이 없는 서사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멜로드라마는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끔찍하고 풀기 어려운 사건에서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에서도 발생한다.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미카엘 주변에는 리스베트 외에도 두 명의 여자가 더 있다. ‘밀레니엄’의 공동 편집장이자 오랜 연인인 에리카 베르예르, 사건에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세실리아 방예르다. 미카엘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에리카, 세실리아, 리스베트와 각기 섹스한다. 그 세 명의 여인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에리카는 지적이고 능력있는 동료이며, 세실리아는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감춘 연상의 여성이다. 일에 대해선 이성적이고 철저하지만, 연애에 대해선 감정적이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미카엘의 태도 때문에, 결국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관계는 위기를 맞이한다.
특이한 점은 리스베트의 연애가 그가 사회로 발 딛는 중요한 과정의 하나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리스베트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안에 잔뜩 웅크린 채 세계에 대한 공격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그런 리스베트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의 마음속에 닫혀있던 문을 조금씩 열게 한다. 선의에서 우러나왔다고 해도 방법이 틀리면 결국 잘못된 행동이다. 미카엘은 옳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강요하지 않고 기다린다. “진심으로 친구가 되고 싶어. 네가 나를 친구로 원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결정은 너의 몫이지. 난 집으로 돌아갈게. 원하면 언제든 들어와도 돼.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리스베트는 먼저 걷는 미카엘을 말없이 따라간다. 그리고 훗날 회상한다. “누군가와 같이 일한다는 것, 전에는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미카엘)와는 조금도 힘들지 않게 해나갈 수 있었다. 그는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리스베트는 미카엘을 도와 일하고, 그와 함께 살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삶의 만족과 생의 의욕을 느끼기 시작한다. 펑크족 복장을 하고 다니던 리스베트는 급기야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틀고, 장작불을 피워놓은 채, ‘고전적’인 방식으로 미카엘과 사랑을 나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리스베트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대목이다. 리스베트가 남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미카엘은 리스베트의 연인이자 아버지다.
그러나 소설 종반부에 있는 이런 대목은 리스베트의 ‘사회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낳는다. “라텍스 젖가슴에 대해서는 잠시 동안의 고민이 있었고, 결국 이레네 네세르(필자 주-리스베트의 가명)는 그것을 보관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스베트가 베네르스트룀이 세계 곳곳에 숨겨둔 비자금을 빼돌리는 대목인데, 이 과정에서 리스베트는 변장을 하고 각 은행을 돌아다녔다. 화장을 덧칠해 문신을 지우고 피어싱을 빼고 보조물을 넣어 가슴을 부풀렸다. 목적을 달성한 리스베트는 이런저런 액세서리는 모두 버렸지만, 가슴 보조물로 사용한 라텍스만은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리스베트의 ‘사회화’란 결국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됐던 여성성을 되찾는 과정이었을까. 조사 능력에 있어서는 ‘슈퍼히어로’급 활약을 보이던 리스베트에게 라텍스 가슴 같은 것이 필요했단 말인가. 리스베트는 세상 속 미녀의 표준을 따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캐릭터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바르가스 요사는 책의 추천사에서 “여주인공(리스베트)은 훨씬 활동적이고, 용감하고, 대담하고, 영리하다”며 “불멸의 문학에 온 걸 환영한다, 리스베트 살란데르”라고 적었다.
리스베트는 어떻게 살아나갈까. 세상에 자신을 맞추면서 평범해질까,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세상과 공존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어야 할 것 같다.
'텍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혁명은 없다. 봉기 하라,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0) | 2013.02.11 |
---|---|
혁명의 열망과 뒤끝, <적군파> (0) | 2013.02.02 |
뱀파이어가 되고픈 사람들, <어모털리티> (0) | 2013.01.26 |
왜 사는가?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 (0) | 2013.01.20 |
왜 한국 기업은 이 모양인가, <대한민국 나쁜기업 보고서> (0) | 2013.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