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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무엇인가, 두 개의 건축전시회를 보고 공교롭게도 집과 연관된 두 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르코 미술관은 규모가 큰데다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서울시립미술관은 참여 작가들의 이름값이 있다. 현대 건축의 화려한 구상과 기술은 관공서, 기업, 도서관, 미술관 등 거대한 건물에서 빛나지만, 삶의 기본은 역시 집이다. 두 발 뻗고 편히 쉴 공간은 사람의 기본권이다. 집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아르코미술관에서 내년 2월 15일까지 열리는 ‘즐거운 나의 집’전은 집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을 정리해볼 수 있는 자리다. 전시의 큰 틀은 고 정기용 건축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따왔다. “집은 유년시절을 보낸 기억의 집, 현재 사는 집, 살아 보고 싶은 꿈 속의 집이 있다. 이 세 가지 겹친 집에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주최측.. 더보기
초인의 초상, <루시언 프로이드> 루시언 프로이드(1922~2011)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다. 현재 내 미감은 설치, 영상, 팝아트보다는 구상에 더 끌린다. 리움에 갈 때마다 상설관에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앞에 한참을 머물곤 한다. 반면 마크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분할은 스윽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다. 베이컨은 "추상은 장식일 뿐"이라고 비아냥 거렸다고 한다. 내 주제에 베이컨처럼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로스코, 폴록의 그림보다 베이컨, 프로이드의 그림에 끌리는 건 분명하다.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활동한 베이컨과 프로이드는 친구였고 서로의 초상을 몇 차례 그려주기도 했는데, 작은 오해와 다툼으로 인해 의절한 뒤 평생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디 그레이그가 쓴 (다빈치)를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프로이드의 .. 더보기
초현실적인 말의 질주, <카발리아>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공연을 보았다. 아니 셋이 같이 본 것은 처음인가? 어린이용 공연은 둘 중 하나만 들어갔으니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미션을 포함해 130분에 달하는 공연이라 아이가 지겨워할지 몰라 걱정을 했지만 기우였다. 어린이 관객이 많았고 대체로 즐겁게 관람하는 분위기였다. 중세 배경의 판타지 영화에서 본 듯한 말들이 눈 앞에서 질주하는 모습은 초현실적이었다. 수십 개의 말 발굽이 만드는 가설 좌석의 진동은 이 쇼가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내 화이트빅탑씨어터에서 공연중인 는 ‘태양의 서커스’ 공동설립자 중 한 명인 노먼 라투렐이 연출한 아트 서커스다. 는 2003년 캐나다에서 첫 공연된 이후, 미국, 독일, 호주, 싱가포르 등의 52개 도시를 순회하며 선보이는 중이다. 아랍.. 더보기
그 남자가 일하는 법, <모스트 원티드 맨> **스포일러 있음. 안톤 코르빈 감독의은 스파이 소설의 명장 존 르 카레(1931~)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83세의 르 카레는 올해에도 신작을 발표했다. 소설 은 2008년인데, 냉전 시대부터 스파이 소설을 써온 존 르 카레가 나날이 변하는 현대의 외교, 정치 상황에 대해 여전히 예리한 안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 장군이 체첸의 미성년 여성을 성폭행해 태어난 청년 이사 카르포프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여러 곳을 떠돌며 신산한 삶을 살아온 그는 심성이 곱고 이슬람교에 대한 신심이 강하다. 독일 함부르크로 밀항해 온 카르포프는 한 소규모 은행을 찾아가려는 중이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부정하게 모은 거액의 돈이 예치돼 있다. 카르포프가 돈의 쓰임새를 두고 갈등하는 사이, 독일의 온건한 정보요원과.. 더보기
새로운 볼거리, 오래된 주제, <인터스텔라> **스포일러 있음. 촬영장에서도 잠바데기 같은 건 입지 않으시는 젠틀맨, 크리스토퍼 놀란(왼쪽) 크리스토퍼 놀란의 를 보러 간 극장 옆에는 세계 최대의 스크린임을 입증하는 '기네스 레코드' 표시가 붙어있었다. 황폐하고 좁은 지구를 떠나 끝없이 넓은 우주를 탐험하는 영화이니 큰 스크린에서 보는 것도 좋겠지만, 난 이 영화의 주제가 매우 고전적이거나 보수적이거나 고루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형용사를 택할 지는 아직 결정 못했다. 가 그리는 지구의 근미래는 그 어느 디스토피아 영화보다 디스토피아적이다. 차라리 혜성과 충돌하거나 외계인의 침략을 받거나 유전자 변형 괴물이 나타나거나 엄청난 독재 체제 아래서 신음하고 말지, 온 지구가 누런 먼지 구덩이 속에서 조금씩 목 마르고 굶주리고 헐벗어 죽어가는 모습은 끔찍하.. 더보기
삼각관계의 공식, 헝거게임 시리즈. 에서 전편과는 차원이 다른 악역을 보여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무성의한듯 악랄하게 연기한다. RIP 제니퍼 로렌스가 주연한 (2012)과 (2013)를 뒤늦게 봤다. 조만간 시리즈의 3편인 이 개봉한다. 이 시리즈가 미국에선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한국에선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는 정도의 정보만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청소년에게 인기를 얻은 이유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우선 모르겠다는 이유. 영화가 상당히 시니컬하다. 독재국가 판엠은 부와 권력이 집중된 캐피톨을 중심으로 한 13개 구역으로 구성됐다 74년전 13개 구역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고, 판엠은 이후 매년 각 구역에서 10대의 남녀 1명씩을 뽑아 최후의 1인이 남을 떄까지 싸우게 하는 '헝거 게임.. 더보기
간첩이란 무엇인가, 박노자와 박찬경의 대담 기사가 나간 후 관련 코멘트가 세 건 있었는데 하나는 박노자 교수가 언제까지 체류하느냐는 것이었고(기사에 이미 출국했다고 씀), 다른 두 개는 박노자 교수의 체형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아시아는 위급하다.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격변기다. 지금 예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간첩, 귀신, 할머니’란 주제로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11월2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은 ‘아시아’를 화두로 삼았다.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적·성찰적 시선을 제공해온 노르웨이 오슬로대의 박노자 교수(41)가 미디어시티2014 강연을 위해 내한해 박찬경 예술감독(49)과 23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났다. -전시 어떻게 보셨습니까. 박노자=황홀경이었어요. 아직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적군파가 국.. 더보기
우리는 무언가를 버려야 성장한다, <보이후드> **스포일러 있긴 한데, 관람에 영향 미칠 정도는 아닐 듯. 사실 스포일러랄 게 없는 영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신작 를 봤다. 링클레이터가 요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 제목은 얼마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날 다시 익혔다. 그날 한국의 문화부 기자들은 외국의 한 도박 사이트를 종일 들락날락 해야 한다. 그곳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고 도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수상자인 파트릭 모디아노는 5위권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이트에서는 내년초 아카데미 수상자를 두고도 벌써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데, 는 가장 유력한 작품상 후보였다. 배당율은 2/1. (지금 확인해보니 마찬가지다. 참고로 2위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와 안젤리나 졸리 감독님의 으로 둘 다 4/.. 더보기
가난하지만 빈곤하지 않은 리슨투더시티 남산 회현시범아파트는 44년이라는 세월을 고려하면 상당히 깨끗하게 관리된 편이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젊은 예술가들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의 행동은 '어떻게든 되겠지'식의 근거 없지만 낙관적인, 그래서 사랑스러운 패기에 근거한다. 물론 거대한 상대에 맞서야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표정에는 30% 정도의 망설임과 두려움도 스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30%가 오히려 이들을 응원하게 만든다. 남산 회현시범아파트의 사무실 부근에서 포즈를 취한 리슨투더시티 멤버들. 왼쪽부터 정영훈, 권아주, 박은선씨. /김창길 기자 예술 공동체 ‘리슨투더시티’의 사무실은 1970년 완공된 남산 회현시범아파트에 자리 잡고 있다. 어둡고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복도를 따라가니 이들의 거처가 나왔다. 한가하게 남산.. 더보기
관계의 다른 단계, <엣지 오브 투모로우> 저 강화복은 10년 내로 실용화되지 않을까 싶다. **스포일러 포함 VOD로 뒤늦게 를 봤다. 52세의 톰 크루즈는 여전히 준수한 액션을 선보인댜. 크루즈는 심지어 극중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돼 최전방에 차출돼 생고생을 한다. (그리고 여러번 죽는다). 쓸만한 윙어가 나타나지 않아 라이언 긱스가 은퇴를 번복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로 돌아와서 50살까지 뛰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까. 정체모를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해 지구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있는 상황. 뺀질한 공보장교 케이지(톰 크루즈)는 전방에서 홍보영화를 찍으라는 장군의 말을 거역하려다가 이등병으로 강등돼 상륙작전에 투입된다. 종이에 베는 것도 참지 못하는 이 남자는 전장에서 무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허둥대다가 죽는다. 그런데 죽은 뒤 다시 이등병으로.. 더보기
제 몸을 제 맘대로 부리는 사람들, <신체지도 다시 그리기> 단상 오랜만에 무용 공연을 보고 왔다. '문화'라는 넓은 카테고리에 속해도, 공연마다 관객의 분위기가 다르다. 클래식 음악, 대중음악, 무용, 뮤지컬, 전통적인 회화, 미디어아트 관객의 느낌은 미묘하게 다르다.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몇 가지만 예를 들면 클래식 음악 공연엔 "나 이런데 오는 사람이에요"라고 머리 위에 말풍선을 달고 있는 중장년층이 좀 계시다. 오늘 본 무용 공연에는 무용수임이 티가 나는 관객이 많았다. 매우 짧은 머리카락에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으며 몸매가 날렵해 보이는 남자 관객은 어떠한 뮤지컬 전용관, 미술관에서도 만나기 어렵다. 오늘 본 공연은 스위스 링가무용단의 였다.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의 일환으로 열리는 공연이었다. 취재를 위해 며칠전 연습실을 방문해 .. 더보기
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 미디어아트 전시회 2제 공교롭게 미디어아트 전시회 2건이 비슷한 시기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 2014와 금천문화공장에서 열리는 다빈치 크리에이티브다. 또 공교롭게도 두 전시회의 주체는 모두 서울시 산하기관인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문화재단이다. 시기와 주제가 다소 겹치기에 두 기관 사이에 모종의 껄끄러움이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미디어시티서울 2014는 올해 내가 본 몇 안 되는 전시중 최고다. 솔직히 리움 10주년 기념전보다 좋았다. 물론 리움도 훌륭했다. 어딘가에 숨겨뒀던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내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미언 허스트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이렇게 말하면 천박하게 들리겠지만) '돈값'을 한다. 이전에 상설전시돼있던 허스트와 부르주아의 작품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 더보기
서촌에서 '장난질'을 목격하다 태고 적에 수성동 계곡 부근을 산책하다가 이런 걸 목격했더랬다. 이런 장난. 또 이런 장난. 준법 정신이 투철한 시민이었다면 차선에 장난을 치거나 조상님들이 노니신 바위에 불경스럽게도 나체의 인간을 얹어두는 풍경에 대노하여 당장 관공서에 신고를 했겠지만, 난 천성이 게을러 그냥 사진만 찍고 넘겨두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행위들이 다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이 계획에 포함된 한 관계자는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이 사진을 보고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못한 그 이발사처럼 속으로 끙끙 앓기도 하고 또 자신의 계략이 맞아떨어진 것을 알고 쾌재를 부르기도 하고 아마 그랬다. 문화부로 전입온 뒤, 그 간악한 계획의 전모를 파악하고 아래와 같은 기사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 더보기
배를 부풀린 개구리, <하우스 오브 사담> 은 BBC와 HBO가 2008년 공동제작한 4부작 텔레비전 시리즈물이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기 직전 부시 미국 대통령의 텔레비전 연설에서 시작하는 드라마는 1979년 사담 후세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시점으로 돌아가 이란-이라크전의 발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유엔의 무기사찰을 거쳐 다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돌아와 후세인의 도피와 체포 과정을 보여주는데서 끝난다. 이라크의 혼란한 정정이 다시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은 이라크 현대사를 정리하는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사담 후세인이라는 악명 높은 독재자의 개성과 통치술을 그리는데 더 많은 노력을 들인다. 실제 사담 후세인의 외모와 놀랍게 닮은 배우 이갈 나오르는 후세인의 개성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우연인.. 더보기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기,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얼마전 를 봄으로써, 지금까지 개봉한 7편의 '엑스맨' 시리즈 중 (2013)을 제외한 6편을 봤다. 첫번째 은 2000년 개봉했다. 며칠전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다시 봤는데, 휴 잭맨이 놀랄만큼 '뽀송뽀송'했다. 하기야 그 사이 15년이 흘렀다. (1995)로 주목받았던 브라이언 싱어는 의 첫 두 편을 통해 할리우드 주류 감독으로 올라섰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한 명의 슈퍼히어로에 의존하는 다른 히어로물과 달리, 은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라는 두 친구이자 적의 대결을 중심으로 울버린, 진 그레이, 사이클롭스의 삼각관계, 자신의 남다른 정체성을 감추려하는 10대 등 다양한 주제, 인물을 다룬다. 싱어는 복잡한 인물과 줄거리를 탄탄하게 엮어내 이후 시리즈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15년간.. 더보기
복수하기 좋은 시간-피의 복수 **스포일러 조금 박찬욱의 복수 3부작도 그렇고, 타란티노의 도 그렇고, 오늘밤에도 어느 케이블 채널에서 할 지도 모르는 도 그렇고, 복수는 대중영화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다. 특히 이 영화들이 다루는 복수는 물리력을 사적으로 동원하는 종류다. 다들 알다시피 현대 법치주의 국가는 이러한 종류의 복수를 금지한다. 폭력은 국가가 독점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국가에게 "쟤 좀 혼내 주세요"라고 부탁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간접 복수는 아무래도 복수로서의 원초적 쾌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대중영화는 그렇게도 많이 직접 복수를 다루는 것 같다. 현실에서 충족할 수 없는 원초적 복수의 쾌감을 대신 맛보게 해주기 위해. 두기봉의 (2009)의 원제는 직설적으로 다. 홍콩영화의 사실상 마지막.. 더보기
이야기보다 분위기, <트루 디텍티브> 의 네번째 에피소드 마지막 10여분을 재차 봤다. 멀게는 이나 부터 시작해 1990년대 이후론 나 같은 미드를 즐겨봤지만, 미드의 같은 에피소드를 이틀 연속으로 부분적으로나마 두 번 본 것은 이번 처음이다. 형사 러스틴 콜(매튜 매커너히)은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에 접근하기 위해 용의자가 마약을 공급하는 조직에 잠입한다. 콜은 예전에 마약단속반 소속으로 4년간의 위장 근무를 한 적이 있기에, 이 조직과 안면이 있다. 조직원들은 콜을 여전히 마약상이자 과격한 갱으로 여긴다. 이 조직원들은 대체로 비대하고 머리는 대머리인데다가 수염을 길게 길렀다. 풀린 듯한 눈을 하고 있긴 하지만 금발을 멋지게 기른 콜과는 사뭇 다른 외모다. 조직원들은 콜을 의심하면서도 그를 자신들의 일에 끌어들인다. 이들의 일이란.. 더보기
인생의 기회, <인사이드 르윈> 은 외관상 음악영화다. 1950년대말, 음반을 두어 장 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은 포크 뮤지션이 주인공이다. 원래는 듀엣이었지만 파트너가 자살을 한 뒤 솔로로 전향한 르윈 데이비스는 밤에는 시시껄렁한 농담과 함께 클럽에서 노래를 하고, 그보다 늦은 밤에는 동가식서가숙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술가'하면 이리저리 떠도는 '보헤미안'의 느낌이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그런 모습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도 않지만, 르윈의 경우는 좀 다르다. 르윈이 하루 혹은 며칠밤의 잠자리를 청하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고, 르윈 역시 아티스트답게 당당하기보다는 어딘지 궁상맞이 보인다. 르윈은 스스로 자조적으로 농담하듯 "다 그게 그거 같은" 포크송을 불러대는데, 가사만큼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날 목매달아.. 더보기
월스트리트에서 필요한 두 가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스포일러 소량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를 줄곧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2013)가 (1990)의 월 스트리트 버전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는 큰 흐름의 측면에서 비슷하다. 야심만만한 젊은이가 큰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그러나 대개 위험하고 종종 불법적인 직업의 세계에 뛰어든다. 개인의 능력과 몇 가지 우연으로 젊은이는 금세 성공한다. 그러나 이른 성공에는 많은 함정이 기다린다. 마약 또는 여자. 젊은이는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다에 중독돼 짧은 전성기를 누린다. 세상엔 그처럼 되길 꿈꾸는 젊은이가 많지만, 법의 수호자들은 이들의 뒤를 노린다. 그리고 젊은이는 결국 법망에 걸려들어 이른 전성기를 끝내고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인생의 많은 나날들을 초라하게, 가끔 옛 영.. 더보기
영원한 하루, <하나 그리고 둘> 2013년 마지막 날 집에 들어가니 가족이 모두들 자고 있었다. IPTV의 영화 목록을 스크롤하다가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어 디비디를 뒤졌다. 지금은 폐간한 영화 주간지에서 독자에게 끼워준 이 눈에 띄었다. 173분의 러닝 타임 때문에 좀처럼 디비디 플레이어에 넣을 엄두를 못냈던 영화다. 그러나 이날은 1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영화는 대만의 어느 중산층 4인 가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들의 결혼식날 노모가 갑작스럽게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눕는다. 말을 들려주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는 의료진의 말에 가족들은 돌아가면서 할머니에게 말을 걸기로 한다. IT회사의 중역인 사위, 어머니께 들려줄 말이 없다며 울먹이는 그의 아내, 웬인일지 외할머니께 말 걸기를 싫어하는 장난꾸러기 초등생 손자, 내성적인 여.. 더보기
타인의 시선을 즐기다, <쇼를 사랑한 남자> **스포일러 소량 저런 미소는 어떻게 짓는 것인가. 소문은 들었지만 (원제 Behind the Candelabra) 에서 마이클 더글러스의 연기는 무시무시했다. 그의 연기가 늙은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전형을 기막히게 표현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아침에 자신의 침대에서 갓 일어난 맷 데이먼을 바라보는 더글러스의 그 눈빛, 미소!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피아니스트 월터 리버라치(더글러스)는 새 비서(겸 애인)로 스콧(맷 데이먼)을 들이고자 한다. 스콧은 이 늙은 남자의 애인이 돼도 좋은지 잠시 번민하는 척 하지만, 애초에 그는 '인생의 연인'을 찾아 방황하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가 머뭇댄 이유는 "돈에 팔려간다"는 주변의 비난을 의식해.. 더보기
본격 스티브 잡스 까는 영화,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2> 제목이 낚시성이긴 하지만, 에 스티브 잡스 비슷한 인물이 악당으로 나오는 건 사실이다. 별로 눈이 밝지 않은 사람도 이 악당이 잡스를 모델로 했다는 사실은 금세 눈치챌 수 있다. 공식 릴리스한 스틸 중에는 이 악당의 모습이 담긴 것이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주인공의 뒤를 따라가는 흰 수염 남자가 바로 그 악당이다. 당근을 연상시키는 패딩 조끼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가 입은 옷이 검은 터틀넥 티셔츠에 청바지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 악당은 '라이브'(LIVE)라는 회사의 CEO인데,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롤모델로 삼은 인물이기도 하다. 악당은 초반부터 본색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전편에서 만든 음식 만드는 기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은 뒤 에너지바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겠다는 야심을 품는다. .. 더보기
당신은 무엇이 부끄러운가,<셰임> 셀 수 없을 정도로 잦은 이성간의 섹스, 충동적인 동성애, 그만큼 잦은 자위, 영화 속 성인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의 연쇄에도 불구하고, 은 매우 엄격한 도덕주의를 설파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음란한 것은 주인공의 성기를 뿌옇게 가린 채 흔들리는 한국 검열관들의 모자이크 뿐이다. 뉴욕의 여피, 브랜든은 섹스 중독자다. 매춘부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건 예사고, 컴퓨터 하드에는 온갖 종류의 음란 동영상이 가득 차 있다. 회사돈으로 포르노를 결재했다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근무를 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자위도 한다. 브랜든이 왜 그러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브랜든의 '평온한' 삶은 동생 씨씨에 의해 깨진다. '동생'이라고 소개하긴 하지만, 사실 둘의 관계는 의심스럽다. 첫만남부터 벌거벗은 채다... 더보기
웨이팅 포 언아더 슈퍼맨, <슈퍼맨 리턴즈> 먼지 쌓인 DVD 선반을 보다가 에 눈이 머물렀다. 그동안 뜯지도 않은 비닐을 벗겨내고 플레이어에 넣었다. 아마 잭 스나이더의 슈퍼맨 영화인 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했겠지. 2006년 개봉 당시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시원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찾아보니 2억 달러 제작비를 들여 전세계적으로 3억9천만 달러를 벌여들였으니 장사는 생각보다 잘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슈퍼맨 신작을 기다려온 대중을 충분히 만족시킨 것 같지는 않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가 잘나가던 엑스맨 시리즈를 버리고 슈퍼맨 프로젝트로 합류한 브라이언 싱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아마 엑스맨의 팬들은 "어디 잘되나 보자"는 심정이었을테지) 아니나 다를까,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 차기작 소식은 사라졌.. 더보기
어느 짐승의 삶, <러스트 앤 본> *스포일러 적정량 함유 이 남자는 한 마리 짐승이다. 싸우고 섹스하고 자고 다시 싸우고... 그 외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물론 싸운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싸우는 건 아니다. 이 남자는 넘처나는 남성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할 뿐이다. 한때 복싱 선수였던 그는 프랑스로 건너와 경비원 일로 연명하는 사이에도 운동을 쉬지 않는다. 그리고 뒷골목의 불법 격투기판에 끼어든다. 돈은? 이겨도 몇 푼 되지 않는다. 이 남자는 그저 때리고 맞고 피흘리는게 즐겁다. 고향 어딘가에 남은 듯한 아내는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에겐 어린 아들이 있지만,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남자에겐 싸울 때 쓰는 에너지 말고도 다른 에너지가 남아 있다. 그래서 괜찮아 보이는 .. 더보기
로저 에버트의 마지막 일기 2013년 4월 2일 게재된 로버 에버트(1942~2013)의 마지막 글. 일부 축약해 급번역. 원문은 여기(http://blogs.suntimes.com/ebert/2013/04/a_leave_of_presense.html) 미국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 감사합니다. 46년전이었던 1967년 4월 3일, 저는 시카고 선 타임스의 영화 평론가가 됐습니다. 여러분 중 몇몇은 제 리뷰와 칼럼을 읽었을테고 제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을테죠. 어떤 분들은 제 텔레비전 쇼, 책, 웹사이트, 영화제, 에버트 클럽 뉴스레터를 보기도 했을테고요. 어떤 방식으로든 여러분은 저를 찾아주셨고, 평론가가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독자가 돼주셨습니다. 기쁘고 감사합니다. 평균적으로 저는 1년에 200편 이상의 리뷰를 썼습니다. 이 .. 더보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장고: 분노의 추적자> (스포 좀 있음) 그럭저럭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던 장고의 아내 구출작전이 망한 건 닥터 슐츠의 어처구니없는 돌발 행동 때문이었다. 원래 슐츠는 독일인답게 참으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능숙한 현상금 사냥꾼인 그는 장고가 가진 킬러로서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있는 목표물을 죽이길 서슴지 않았으며, 적의 기습을 정확히 예상해 매복을 할 정도로 통찰력이 뛰어났다. 어딜 가도 적의 행동을 파악하고 예상해 그에 딱 맞는 행동으로 결과를 얻어내는 사람이었다. 성노리개 노예로 붙잡혀 있는 장고의 아내 브룸힐다를 구하기 위해 캔디랜드에 들어간 슐츠와 장고. 둘은 흑인 노예들의 막싸움인 만딩고 선수를 사기 위해 들른 것처럼 꾸민 뒤, 슬쩍 브룸힐다까지 적당한 가격에 사오려고 한다. 그러나 칼빈 .. 더보기
자살 혹은 순교, <신과 인간> 애 수록된 글 빛을 저렇게 찍어보고 싶다. 1996년 3월 17일 새벽, 알제리 산골 티브히린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이슬람무장단체 괴한들이 들이닥쳐 7명의 수사를 납치했다. 괴한들은 체포된 동료와 수사를 교환할 것을 요구했다. 5월 23일, 이슬람무장단체는 공식성명을 통해 이틀전 수사들을 죽였다고 발표했다. 알제리 정부는 31일 메데아의 한 길가에서 수사들의 수급을 발견했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배우, 감독인 자비에 보부아가 연출한 은 이 사건을 다룬다. 허나 보부아는 사건의 전말이나 책임 소재 규명,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만행 고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 분석, 복잡한 국제 관계의 해설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 묘사한 전후 상황을 믿는다면, 수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더보기
국가의 아들들, <스카이폴> 제25호에 수록된 글 제임스 본드와 애스턴 마틴. 본드는 국산차를 사랑합니다. 1962년 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지난 50년간 대중을 즐겁게 했던 영화 속 스파이 제임스 본드에게 부모가 있었던가. 물론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본드에게도 부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 어느 관객이 본드의 나이든 부모를 궁금해 하겠는가. 본드에겐 젊고 매력적인 본드걸이 수없이 많은데. 그런데 2012년 나온 23번째 공식 제임스 본드 영화 은 본드의 부모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꺼낸다. 영화 초반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동안 ‘자체 휴가’를 가진 뒤 소속기관인 MI6에 복귀한 본드는 다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체력 및 심리 테스트를 받는다. 심리 테스트는 검사관이 단어를 제시하면 본드가 연상.. 더보기
어느 일중독자의 삶, <제로 다크 서티> (약스포) 의 티져 포스터 거친 비유가 되겠지만, 가 라면 는 다. 전작이 특정한 정서의 핵심을 단순한 줄거리 안에 밀도 있게 담아냈다면, 이어진 작품은 확장된 서사 구조 안에 그 정서를 고르게 녹였다. 가 서울 서북부 단독 주택가의 밤을 맴돈다면, 는 중국에서 시작해 한반도 서해안을 거쳐 반도 남부를 종으로 가로지른다. 는 이라크의 도심과 사막, 미군 기지를 오가는데, 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거리, CIA 비밀기지, 병영, 미국의 워싱턴DC, 버지니아의 CIA 본부 등을 포괄한다. 전작의 성공에 고무돼 스케일을 턱없이 키웠다가 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정한 사이즈에 맞는 이야기, 정서가 있는데, 그 사이즈를 키워버리면 이야기는 흐물흐물, 정서는 묽어진다. 그러나 두 영화의 감독인 나홍진과 캐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