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마지막 날 집에 들어가니 가족이 모두들 자고 있었다. IPTV의 영화 목록을 스크롤하다가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어 디비디를 뒤졌다. 지금은 폐간한 영화 주간지에서 독자에게 끼워준 <하나 그리고 둘>이 눈에 띄었다. 173분의 러닝 타임 때문에 좀처럼 디비디 플레이어에 넣을 엄두를 못냈던 영화다. 그러나 이날은 1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영화는 대만의 어느 중산층 4인 가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들의 결혼식날 노모가 갑작스럽게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눕는다. 말을 들려주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는 의료진의 말에 가족들은 돌아가면서 할머니에게 말을 걸기로 한다. IT회사의 중역인 사위, 어머니께 들려줄 말이 없다며 울먹이는 그의 아내, 웬인일지 외할머니께 말 걸기를 싫어하는 장난꾸러기 초등생 손자, 내성적인 여고생인 그의 누나가 각자의 삶을 스크린 위에 펼친다.
영화의 첫 시퀀스, 결혼식
말이 적고 언제나 차분한 듯 보이는 아버지는 예상치 못한 턱에 걸려 기우뚱한다. 우연히 옛 연인을 만나고, 직장의 의사 결정 과정에선 자꾸 배제되는 느낌이다. 몸져 누운 모친 앞에 들려줄 사연이 없다는 처지에 스스로 충격받은 어머니 역시 지금까지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잠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딸은 그 나이대 아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즐거운 함정, 첫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 사랑의 모양은 조금 기묘해서 풋풋하기보다는 기괴한 방향으로 흐른다. 아들은 아버지가 준 카메라로 엉뚱한 사진들을 찍어댄다. 엄마에게 보여준다며 모기를 찍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겠다면서 그들의 뒤통수를 찍는다.
영화가 길어봐야 3시간. 그 안에 사람의 삶의 정수를 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영화는 그것도 여러 사람의 삶을 담아낸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이어지는 삶의 연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순간, 감정의 굴곡이 일어나는 장면을 포착하면서도, 그것이 일부러 꿰어맞춰진듯 과장돼 보이지 않게 한다. 많은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그러하듯, <하나 그리고 둘>을 보면서도 우리는 누군가가 평생의 삶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거저 손에 넣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장면처럼 할머니가 깨어날 일은 없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란, 평온하고 소소해 보이는 영화의 분위기와 달리, 대단히 허무주의적이다. 영화 종반부, 남편은 여행을 다녀온 아내에게 고백한다. "당신이 없는 사이, 잠시 옛날에 다녀왔어". 이국의 출장길에 옛 애인을 만나 함께 1주일을 보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그러나 솔직하게 전하는 말이다. 그러나 남자에게 그 1주일은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는 다를줄 알았는데 똑같다고,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하루가 영원 같고, 영원이 하루 같다. 이런 인식이 허무하고 또 우울한 이유는, 삶이 그렇게 똑같다면 그걸 계속할 이유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늘 끝나도, 1주일 뒤 끝나도, 10년 뒤 끝나도 같은 삶에서 의미를 찾기 어렵다.
더 섬뜩한 건 마지막 장면이다. 할머니는 결국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결국 이 영화는 결혼식에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난다. 어린 손자는 할머니의 영정 앞에 서서 편지를 읽는다. 할머니께 말을 걸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할 이야기는 할머니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나도 할머니처럼 늙어가고 있다고. 이 꼬마는 우리의 삶이 어찌 됐든 똑같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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