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봄으로써, 지금까지 개봉한 7편의 '엑스맨' 시리즈 중 <더 울버린>(2013)을 제외한 6편을 봤다. 첫번째 <엑스맨>은 2000년 개봉했다. 며칠전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다시 봤는데, 휴 잭맨이 놀랄만큼 '뽀송뽀송'했다. 하기야 그 사이 15년이 흘렀다.
<유주얼 서스펙트>(1995)로 주목받았던 브라이언 싱어는 <엑스맨>의 첫 두 편을 통해 할리우드 주류 감독으로 올라섰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한 명의 슈퍼히어로에 의존하는 다른 히어로물과 달리, <엑스맨>은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라는 두 친구이자 적의 대결을 중심으로 울버린, 진 그레이, 사이클롭스의 삼각관계, 자신의 남다른 정체성을 감추려하는 10대 등 다양한 주제, 인물을 다룬다. 싱어는 복잡한 인물과 줄거리를 탄탄하게 엮어내 이후 <엑스맨> 시리즈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15년간 만들어진 7편의 시리즈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전편과 같은 배우가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영화의 짜임새나 위엄은 딴판인 경우도 있었다. "이제 <엑스맨>도 망해가는구나" 할 때 나온 것이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였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 역을 맡았던 두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와 이언 맥캘런은 슈퍼히어로로 등장하기엔 물리적 나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아진 상태였다. <킥애스>로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뒤틀린) 애정을 보여줬던 매튜 본을 감독으로 영입한 <엑스맨> 제작진은 둘의 젊은 시절을 프리퀄로 재현함으로써 시리즈의 생명 연장을 꾀한다. 제임스 맥어보이, 마이클 파스밴더라는 근사한 조합을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젊은 시절에 캐스팅해 스튜어트와 맥캘런 '이후'를 도모한다. 때로 위대한 전임자의 그림자가 후배의 앞날을 가리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알렉스 퍼거슨가 그 후계자 데이비드 모예스가 좋은 예), 이 두 배우는 그들의 새로운 프랜차이즈 배역에 연착륙했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싱어의 복귀작이다. <슈퍼맨 리턴즈>(2006)로 '외도'를 하다가 자신이 정립한 프랜차이즈로 복귀한 셈이다. 일단 그 구성력은 놀랍다. 시간여행이라는 테마를 이용해 미래 시점의 엑스맨, 1970년대의 엑스맨을 자연스럽게 교차시킨다. 물론 극의 중심과도 같은 휴 잭맨은 과거와 미래에 모두 등장하지만,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는 스튜어트와 맥어보이, 맥캘런과 파스밴더의 두 배우가 시간대를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가뜩이나 등장인물이 많은데다가 과거와 현재를 각기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복잡한 인물 구도이지만, 캐릭터의 역할이 헷갈린다거나 줄거리를 이해못하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앞뒤가 딱딱 들어맞고 모든 것이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새로 등장한 악당은 왜곡된, 그러나 이해할만한 욕망을 보여주며, 그를 막으려는 뮤턴트들에게도 명분이 있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는 여전히 티격태격하는데, 응원하는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절묘한 균형감각이다. 새로 등장한 뮤턴트인 퀵실버는 길지 않은 출연 시간동안 확실한 재미를 선사한다. 시리즈의 오랜 팬들에게 선물처럼 안겨주는 흥미로운 팁들도 곳곳에 숨어있다. 미래에서 과거로 간 울버린이 주로 이러한 농담의 주체가 된다. 대사를 하는 휴 잭맨도 즐거웠을법한 농담이다.
퀵 실버(가장 오른쪽)는 이 영화의 히든 카드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만족스러워서 불만스러웠다. 이건 트집이자 트집이 아니다. 이 영화는 프랜차이즈의 한 시기를 결산하면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속편을 만들 수 있도록 시리즈를 리뉴얼하는 역할을 해냈다. 나는 이러한 영화의 역할이 지나치게 '자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리즈 바깥으로 발언하는 대신, 시리즈 자체의 완성도만 노린 영화. '엑스맨' 세계에서는 완벽하지만, 그 세계 밖으로 나오면 할 말이 적은 영화. 나는 저마다 구비구비 사연을 갖고 있지만, 한정된 분량 속에서 그것을 소화해야 하는 히어로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프로페서 X는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안락을 얻는 대가로, 세상에 대한 의무를 포기해야 한다. 프로페서 X만으로도 2시간이 넘는 이야기거리다. 옛 연인(혹은 멘토)과 새 연인(혹은 멘토)의 사이, 테러와 협상 사이, 분노와 이성 사이를 오가는 미스틱은 어떤가. 아니면 악당 트래스크 박사의 생각을 강박적이지만 그럴싸한 안보관을 가진 보수 정치인에 비유하면 어떤가. 그러나 이 모든 충분한 이야기거리는 1만원 안팎의 돈을 내고 2시간만 즐기고픈 관객이 소화하기 딱 쉬운 정도로 처리된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그려낸다. 하지만 때로 어려운 주제는 어렵게 보이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감정, 행동의 덩어리들이 남아 있을 때 영화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싱어는 영리한 감독이다. 쉽게 말해 '꾀'가 많다고 해도 좋겠다. 하자민 그의 영화의 이면에 무언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윈터스본>때 못알아뵈서 죄송합니다. 대세녀 제니퍼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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