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673건

  1. 위대하고 진정한 관심사를 찾아라, '오늘부터, 시작'
  2.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 (4)
  3.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 '포퓰리즘'
  4. 한 영화팬의 애도와 추억,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5. 백색의 두 가지 방향, '눈'과 '흰'
  6. 모든 병사의 죽음, '전쟁의 재발견'
  7. 자연에 끼어든 초자연, 스티븐 킹의 '아웃사이더' (2)
  8. 테드 창과 김초엽
  9. 줌파 라히리의 세계
  10. 일과 삶이 엮이는 순간, '본딩'
  11. 과격한 보헤미안 랩소디? '더 더트'
  12. 고통스러운 삶에 익숙해지기, '부서지기 쉬운 삶'
  13. 이것저것 섞여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 '아사코'
  14. 군주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15. 80일간의 어둠, '극야행'
  16. 인사이트 있는 교양서, '앞으로의 교양'
  17.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18. '왕좌의 게임' 작가의 호러SF, '나이트플라이어'
  19. 완결에 대해, '알리타: 배틀 엔젤'과 '킹덤'의 경우
  20. 50대 액션 스타, '폴라'
  21. 청소년이 볼 수 없는 청소년물, '아메리칸 반달리즘'
  22. 히트 예감! '종이 동물원'
  23. 인터액티브 영화의 시작?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24. 패러디와 통찰 사이, '생명창조자의 율법'
  25. 마법 대신 가족 로맨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26. 문화혁명과 SF의 상상력 '삼체'
  27. 가장 이상한 도시들,'이중도시'
  28. '퍼스트맨'에 대한 몇 가지 생각
  29.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30. 비 오는 밤의 꿈같은 인생, '나, 제왕의 생애'

영국 시인 테드 휴즈(1930~1998)의 '오늘부터, 시작'(비아북)을 읽다. 휴즈가 BBC 프로그램 '듣기와 쓰기'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시작법에 대한 책으로 현지에선 1967년 출간됐다. 한국에 1990년 해적판으로 출판됐는데 이후 절판돼 중고서점에선 고가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번에 매끈한 번역과 깔끔한 편집으로 단장돼 출간됐다. 

 

52년 전 출간된 책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휴즈는 사냥에 대한 어린 시절의 열정을 돌이키고, 오소리, 파리, 달팽이, 여우, 안개, 바람을 관찰하고 시 쓰는 방법을 소개한다. 인용하는 시인도 D H 로렌스, 실비아 플라스, T S 엘리엇 같은 옛 시인들이다. 휴즈가 살아서 올해 책을 냈다면 전혀 다른 소재의 시와 최근의 시인들을 소개할 수 있었겠지. 솔직히 여우를 생각하며 시를 쓸 수 있는 요즘 사람은 매우 드물겠다. 

 

그래도 휴즈의 글에는 시대를 넘는 보편성이 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방법, 사람들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 자기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기를 그칠 수 없는 이유, 독자의 시선을 끄는 소설 서두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작가가 가족사에 대해 쓰면 '사연팔이 아닌가' 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할 때가 있지만, 휴즈는 이렇게 얘기한다. 

 

감정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쓸 수 없어요. 흥미롭거나 가슴을 뛰게 하는 것, 혹은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별로 할 말이 없거든요....여러분도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세상에서 가족만큼 잘 알게 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누구나 어떤 것보다도 감정적으로 깊이 묶여 있죠. 따라서 작가 대부분이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차고 넘친답니다. 

물론 가족 이야기를 그대로 쓰란건 아니다. 단지 가족으로부터 파생된 감정과 아이디어를 활용해 쓸 수 있다는 제안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가 '아버지'를 묘사할 때, 그 아버지는 실제 작가 부친, 친구의 부친, 어디선가 들은 부친의 특징을 골고루 갖출 수 있다.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흥미롭다. 소설은 재미있게 써야 한다. 어떻게? 휴즈는 "정답은 자신이 진심으로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답한다. 

 

글을 쓰면서 작가가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쓰려고 하면 글쓰기도 재미없고 지루해집니다. 예를 들어, 거대한 쥐의 습격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재미있게 쓰려면 거대한 쥐의 등장에 흥분하는 작가가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찾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는데 온몸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발자크는 등장인물의 고뇌를 상상하면서 침대보를 조각조각 물어뜯어 놨다고 한다. 연기에 비유하면, 글쓰기에도 메서드 액팅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이 쓰는 글과 멀찌감치 떨어져 편하게 팔짱 낀 채 관망할 수는 없다는 것. 내겐 동물이나 식물, 자연현상을 묘사하는 구체적인 테크닉보다는, 이러한 휴즈의 창작 태도가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이상한 춤을 추는 조커

 

*스포일러 있음.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는 그런 영화다. 조커는 DC코믹스에서 배트맨의 숙적이다. 잭 니컬슨, 히스 레저 등이 조커를 연기해왔다. 조커는 돈도 없고, 가문도 없고, 초능력도 없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질서를 추구하는 배트맨을 괴롭히지만, 왜 괴롭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돈 때문도 아니고 세계 정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 때문도 아니다. 왜 나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커는 무섭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놀음을 하는 것 같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이 허용되지 않을 법한 순간에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이기 떄문에 무섭다. 조커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다. 하지만 혼란 이후의 헤게모니 같은 것을 노리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걸 즐길 뿐인듯하다. 그래서 조커는 무섭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에서도 조커는 언제나처럼 고담시에 산다. 고담시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가 그러했든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됐다. 고담이란 이름을 지우고 '80년대 뉴욕'이라 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지만, 부유한 엘리트 정치인들은 그 불만을 감지하지 못한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은 고담시 시장 출마를 준비한다. 토마스 웨인은 공감 능력 부족한 엘리트의 전형이다. 소외계층의 불만을 '루저들의 불평' 정도로 해석한다. 도시의 질서를 회복하고 경제를 일으키면 자연스럽게 상황이 좋아지고 불만도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낙수효과의 신봉자다.

 

훗날 조커가 되는 아서 플렉은 파티 광대다. 광대 옷을 입고 상점을 홍보해주거나, 아동 병동에 가서 춤을 춘다. 아서는 그 일을 즐기지만,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서의 유머 감각은 기괴해서, 웃음보다는 불편을 준다. 게다가 상황에 상관 없이 웃음이 터지는 신경질환을 앓고 있다. 웃지 않아야 될 순간에 웃는 아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아서는 언젠가는 텔레비전 쇼를 진행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것은 관객 모두가 안다. 

 

아서는 꿈에 근접하기는커녕 조금씩 나쁜 상황으로 빠져든다. 알고 싶지 않았던 가족사에 얽힌 불편한 진실도 알게 된다. 그의 불행은 사소한 실수, 성격적이며 신체적인 결함, 주변 사람의 악의, 사회의 모순이 결합된 결과다. 어느 부분 하나에서도 난국을 돌파할 기색이 안보인다. 아주 예전에 보았던 만화 '이나중 탁구부'엔 그런 대사가 나온다. "아무렇게나 돼버려." 아서도 점점 그런 생각으로 빠지는 것 같다. 

 

아서는 우연히 사람을 죽인다. 지하철에서 만난 월스트리트 양복쟁이들이 아서를 집단 폭행하자,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아서는 고담시의 혼란을 증폭시킨다. 빈자들 사이에서 아서는 재수없는 양복쟁이들을 죽인 영웅이 된다. 본인은 의도치 않았지만, 아서는 카오스의 중심이 된다. 한국의 시위대는 이념이 어찌됐든 명목상으로는 '새로운 나라'를 꿈꾼다. 시위를 통해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고담시의 시위대는 그렇게 믿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오늘의 질서를 파괴하고 싶을 뿐이다. 내일 고담시가 멸망한다 해도 상관 없다. 고담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조커와 그를 추앙하는 시위대가 벌이는 행동은 혁명이라기보단 폭동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그린 테러보다도 훨씬 무질서하다. 미국에선 '조커'가 총기 난사 같은 문제를 촉발할까봐 노심초사한다고 한다. '조커'가 하층민의 분노와 그로 인한 질서의 파괴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영화긴 하지만, 이런 영화 때문에 실제 혼란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사회는 얼마나 취약한가. 물론 담배 꽁초 하나도 거대한 산불을 일으킬 수 있다. 건기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다면. 

 

아이슬란드 첼리스트 힐두르 구드나도티르의 음악이 '조커'의 지분 4분의 1은 차지한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 이미 실력을 입증했다. 앞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창작자는 일단 구드나도티르를 떠올릴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도 꽤 큰 몫을 차지한다. 난 메소드 액터를 좋아하지 않지만, 피닉스의 연기를 보는 것이 흥미진진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저렇게 연기하는 배우의 몸과 마음이 온전할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한다. 

 

웃어서 불편하게 하는 조커

 

카스 무데,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교유서가)을 읽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왔다. 200쪽 정도의 길지 않은 책이지만, 포퓰리즘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사례를 적재적소에 제시했다. 교과서적으로 명료하다. 역자는 친절하게도 라클라우와 무페, 슈미트, 베버 등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참고할만한 책도 제시해주었다. 편집의 센스다.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그들(포퓰리스트) 주장의 핵심은 실제 권력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 즉 포퓰리스트에게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림자 같은 모종의 세력이 불법적 권력을 보유한 채 민중의 목소리를 억누른다는 것이다....포퓰리즘의 '피해망상적 정치 스타일'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례다. 
포퓰리즘에서 말하는 일반의지 개념은 공공 영역에서 합리적 과정을 거쳐 구성되기보다는 '상식'에 기반한다....'일반의지' 개념은 권위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포퓰리즘은 우세한 정치 세력이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충분히 제기하지 않고 있는 사회적 불만을 감지하고 정치 쟁점화하는 데 능하다. 
포퓰리즘은 국민주권과 다수결은 단호히 옹호하지만, 소수자 권리와 다원주의에는 반대한다....포퓰리즘은 국민주권을 지지하되 사법 독립이나 소수자 권리처럼 다수결을 제약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에든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일부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의 거울상보다는 민주주의의 (께름칙한) 양심에 더 가깝다. 
포퓰리즘이 대개 옳은 질문을 하고 틀린 답을 내놓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저자들은 포퓰리즘은 '얇은' 이데올로기라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한다고도 지적한다. 남미에선 사회주의(차베스)와, 유럽에선 인종주의(르펜)와 결합하는 식이다. 포퓰리즘은 좌파 ,우파로 가를만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중의 의지'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이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국가 장치들을 무시하고 파괴하려한다는 지적은 중대한 교훈이다. 세계의 수많은 포퓰리스트들이 언급되는데, 한국에선 노무현을 사례로 들었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포퓰리즘에 비판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포퓰리즘에 단호히 적대하기보다는 포퓰리즘이 배양된 환경을 살피고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관리의 방법이란 포퓰리스트들의 주장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베일에 쌓인 엘리트 기구의 결정 과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일러 있음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기대치 이상의 감정으로 나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매우 이모셔널한(감상적, 감정적이라는 표현보다 왠지 '이모셔널'이 적절하다고 느낀다) 영화고, 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이 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어쩌면 이 두 가지 관점은 결국 연결된다. '할리우드'는 60을 바라보는 타란티노가 이모셔널하게 돌아보는 추억, 역사, 소망, 꿈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 할만한 '찰스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다.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3명의 불한당이 1969년 8월 8일 배우 샤론 테이트-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침입해 임신 8개월의 테이트와 그 친구들 등 5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폴란스키는 영화 촬영을 위해 해외에 있었다) 살인자와 테이트 일행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맨슨은 테이트 집의 이전 거주자와 인연이 있었고, 왜 그런지 지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라고 지시했다. 촉망받는 여배우가 끔찍하게 살해됐고, 살인자들이 '악마'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상징이자 트라우마였다. 타란티노는 영화에서 이 살인자들을 당시 끝물이었던 히피즘의 추종자들로 묘사한다. 

 

'할리우드'의 주인공은 한물간 액션 스타 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 대역 겸 매니저 클리프(브래드 피트)다. 릭은 50년대 텔레비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제 전쟁영화, 서부영화의 악역으로 배우 경력을 간신히 이어간다. 릭의 일이 줄어드니 클리프의 일도 줄어든다. 클리프는 주로 릭을 촬영장으로 데려다주거나 그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정도의 일만 한다. 날이면 날마다 근사한 신인 배우들이 등장하므로, 릭에겐 산업과 대중의 시선 뒤편으로 조금씩 사라져 가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할리우드'의 초중반부는 느리다. '느리다'기보단 사건이 거의 전개되지 않는다. 릭을 중심으로 1969년 할리우드 풍경을 인류학적으로 재현하려는 목적으로 찍은 것 같다. 세트장과 촬영 장면이 재현되고, 감독, 배우, 스태프들의 관계가 묘사되며, 영화 사조의 흐름을 알려준다. 미국 서부극의 흐름이 쇠퇴하자, 이탈리아에서 수정주의 서부극,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이 나온다. 한 제작자(알 파치노)는 릭에게 수차례 이탈리아 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안한다. 릭은 자기 삶의 중심이었던 할리우드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아 하지만,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한다. 릭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가 다음날 대사를 완벽히 외우지 못해 스스로 자책하고, 그러다가 다시 배우로서의 소명을 깨달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릭은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 나쁘다기보단 스타로서의 적당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스타로서의 위치가 위협받고 더 이상 세상이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릭은 좌절하고 다시 노력하고 결국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릭을 옆에서 지켜보는 클리프는 트레일러에서 애견과 단둘이 산다. 있을 건 있는, 하지만 세련되진 않은 삶이다. 클리프는 릭의 관찰자로서, 한 스타의 전성기와 몰락을 함께 느낀다. 타란티노는 황혼기에 접어든 할리우드 사람들을 풍자하거나 비틀지 않고, 애상을 담아 그려낸다. 

 

끝물 히피 혹은 가장 끔찍하게 왜곡된 히피라 할 수 있는 맨슨 패밀리는 조롱하고 뒤튼다. 이들은 처음에는 캘리포니아 이곳저곳을 히치하이킹하며 다니는 천진난만한 젊은이처럼 보이지만, 기념비적인 악역을 만드는데 일가견 있는 타란티노 영화답게 곧 마각을 드러낸다. 한 농장주를 구워삶아 농장을 사실상 점거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죽어가는 쥐가 그대로 남아있을만큼 더럽게 산다. 무엇보다 참전용사이자 구시대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클리프에게 비겁하게 굴다가 얻어맞는다. (여기서 피트는 멋있는 '옛날 남자'를 잘 연기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안테나 고치다가 뜬금없이 상의 탈의하는 모습도 선보인다.) 영화 하이라이트인 테이트 집 습격 사건에서도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고,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멍청한 인간들로 묘사된다. 그럼 점에서 '할리우드'의 악역은 인상적이지만, 다른 타란티노 영화의 악역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무엇보다 타란티노의 트위스트는 맨슨 패밀리가 습격하는 곳이 테이트 집이 아니라 릭의 집으로 변경되는 대목이다. 무고하고 천진난만하며 자신이 나온 영화를 기쁨에 차서 관람하고 신나 하는 임신 8개월의 배우 테이트는 적어도 이 영화에선 안전하다. 대신 맨슨 패밀리는 클리프와 그의 잘 훈련된 개에게 끔찍하게 척살된다. 어쩌다 릭의 집 수영장으로 떨어진 용의자 중 한 명은 릭의 화염방사기를 맞고 새카맣게 구워진다. 이 대목은 타란티노의 전매특허와 같은 B급 영화 감성이다. 아무리 화염방사기를 사용한 영화에 출연했다 하더라도, 배우가 그걸 집에 뒀을 리는 없지 않은가. 죽음 묘사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산탄총을 맞고 죽은 악당같고, 영화에서만 가능한 대안 역사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히틀러 암살 성공 묘사 같다.

 

그렇게 영화에서만 가능만 상상과 무리를 해서라도 타란티노는 테이트와 친구들을 구해내고 추모한다. 아내가 개와 함께 잠들고, 부상을 입은 클리프는 병원으로 실려간 뒤 릭은 홀로 남는다. 그때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살아남은 옆집의 테이트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릭이 상황을 설명하자, 인터폰으로 테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릭은 평소 테이트, 폴란스키와 친해보려 했으나 인사조차 나누지 못해 아쉬워하던 참이다. 놀랍게도 테이트는 릭이 옆집에 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릭이 테이트의 초대를 받아 그 집으로 올라가 이웃과 인사를 나누면서 영화는 끝난다. 타란티노 영화 중 가장 따뜻한 결말이다. 

기쁨에 찬 배우 샤론 테이트는 현실에서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산다. 

지난해 김민정 시인은 인터뷰하는 자리에 넓직한 교정지를 들고 왔다. 무슨 책이냐 물어보니 곧 나올 막상스 페르민의 '눈'(난다)이라고 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인 책이라고 자랑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작가 한강에게 이 책을 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페르민은 처음 듣는 작가라 이름만 기억했다. 인터뷰 다음 달 '눈'이 출간됐으나, 곧바로 집어들만큼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여름 막바지가 돼서야 챙겨두었던 '눈'을 펼쳤다. 

 

1999년 출간된 책이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124쪽에 불과하고, 게다가 행간이나 여백이 넓어 텍스트는 더욱 적다. 마음 먹으면 1시간 이내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책을 '마음 먹고' 읽을 이유는 없다. 책에 여백이 많다는 건 그만큼 독서에도 여백을 주라는 지침일 것이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지만 19세기 후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하이쿠와 눈을 사랑하는 청년 유코 아키타가 주인공이다. 유코가 승려나 군인이 되길 원하는 아버지는 시인이 되겠다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아버지가 말하자 아들이 답한다.

"시인은 직업이 아니야.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흘러가는 물이다. 이 강물처럼 말이야."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눈을 좋아하는 유코는 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서만 시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봄이 오면 벚꽃 잎의 향을 맡고 ,여름이 되면 숲에서 꿀 향기를 맡고, 우기에는 버섯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눈에 관한 하이쿠를 썼다. 그러던 중 유코의 집에 궁정 시인이 찾아온다. 궁정 시인은 유코가 서예, 회화, 춤에 대해 무지하고, 유코의 시에 색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더욱 수련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유코는 내키지 않았지만 궁정 시인의 권유에 따라 남쪽의 소세키 선생을 찾아나선다. 

 

여기까지가 도입부고, 이후엔 유코와 전직 무인이자 현직 예술가인 소세키, 소세키와 프랑스 출신 곡예사 여성의 사랑, 유코가 예기치 않게 둘의 운명에 개입하는 과정, 유코가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솔직히 도입부 이후는 도입부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 책의 이미지나 부피에서 조금 더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것 같다. 소세키와 곡예사의 사랑은 동화적으로 그려지는데, 시의 본질이나 눈에 대한 탐구를 그린 도입부와 잘 접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친 김에 한강의 '흰'(문학동네)도 사서 읽었다. 이 책의 편집자 역시 김민정이다. 내가 구입한 건 지난달 나온 2판 6쇄다. 2판엔초판에 없던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그리고 '작가의 말'은 책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흰' 역시 '눈'처럼 시적이고 짤막한 소설이다. ('흰'은 196쪽이다.) 물론 흰 색을 소재로 한다는 점을 빼고 둘은 크게 다른 소설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하얀'과 '흰'을 구분한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작가는 '흰' 책을 쓰기로 하고 소재의 목록을 만들어간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수의...

 

픽션에서 작가의 자전적 삶을 읽어내는 건 부질없고 무용하겠지만, '흰'에는 작가의 경험담이 크게 들어있는 것 같다. 추정컨대 작가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한동안 머물며 이 책을 썼다. 그곳은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본보기 절멸 도시로 지적돼 95%가 파괴됐다. 조금 스산하고 한적한 도시에서 작가는 두통에 시달리며 글을 쓴다. 무엇보다 그 글은 작가의 어머니가 스물 네살 때 혼자 있다가 조산한 큰 딸, 두 시간 동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속삭였지만 끝내 떠난 아기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듬해 두번째로 낳은 사내 아기를 또다시 잃었고, 그로부터 3년이 흘러 '나'를, 또 4년이 흘러 남동생을 낳았다. 앞선 두 생명이 살았다면, 화자와 그의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도 임종 직전까지 "그 부스러진 기억들을 꺼내 어루만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에게 죽은 언니는 일종의 빚이고, 화자는 죽은 언니 대신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작가의 말'에서 전한 것처럼, '흰'은 죽음과 애도에 대한 글이다. 하지만 꺼이꺼이 통곡하지는 않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상을 살면서 문득 생각하고 애도한다. 낯선 동유럽의 도시를 산책하면서, 조금씩 춥고 어두워지는 도시의 분위기에 침잠하면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두통을 견뎌내면서 애도한다. 순진하게 예쁜 '하얀'이 아니라, 먹먹한 '흰' 글을 쓴다. '흰'은 한강의 전작보다 조금 더 개인적인 글이겠지만, 거창하게 말하면 존재의 부채의식을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거저 주어진 것,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누군가의 희생이나 죽음에 기반한다는 인식, 개인적이라고 사소하진 않다. 

 

마이클 스티븐슨의 '전쟁의 재발견'(교양인)을 읽다. 오랜만에 읽은 흥미진진한 논픽션. 원제는 'The Last Full Measure: How Soldiers Die in Battle'이다. 말 그대로 고대 전투 서사시 '일리아스'부터 현대 베트남전, 이라크전까지 전쟁에서 군인들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그린다. (번역제목을 좀 점잖고 심심하게 달았다.) 이런 설명만 들으면 흔하고 말초적인 미시사 서술 같은데, 막상 읽으면 방대하게 수집돼 적절하게 배치된 자료에 감탄하고, 자료를 관통하는 저자의 안목에 또 감탄한다. 분량이 648쪽이라 들고 다니며 읽기는 좀 버거운데, 그래도 오래 걸리지 않아 완독했다. 

 

청동기부터 무기가 조금씩 발달하면서 죽음의 방식도 달라지는 양상을 서술한다. 1대1의 전투를 선호하던 중세 기사들은 멀리서 쏘아 죽일 수 있는 화살이나 머스킷총을 비겁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는 윤리의 기준을 뒤바꾸기에, 기사들의 불평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면 돌격'의 이상 역시 조금씩 쇠퇴한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적과 아군, 군과 민간의 구분이 뚜렷했으나,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에 이르러 민간인 소년이 갑자기 전투원으로 돌변하는 등의 일이 벌어진다. 미군은 군인과 구분되지 않는 민간인 여성, 미성년을 전투원처럼 대한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의 원인을 베트남, 이라크 등 피침략 국가의 게릴라전술 때문으로 돌리는 서술은 조금 거북하지만, 이 책이 정치서가 아니라 전쟁사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겠다. 

 

산업화, 대량생산의 시기로 접어든 20세기 전투의 양상이 고전적일리는 없다. 19세기까지 전쟁의 양상이 점진적으로 변화했다면, 20세기는 급진적으로 달라졌다. 무기의 성능이 갑작스럽게 발달하면서, 많은 전투인력이 짧은 기간에 '소모'되는 전면전이 전개된다. 패전하면 말할 것도 없고, 승전해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피할 수 없다. 2차 대전 때는 1600만명이 죽었다. 소련은 승전국이 됐지만, 그건 다른 연합국의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10배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총 든 고깃덩어리'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 어떤 영광과 명예의 수식을 붙여도 달라지지 않는 진실이다. 

 

 

 

스티븐 킹의 신작 '아웃사이더'(황금가지)를 읽다. 72세의 킹은 여전히 다산이다. 꽤 두꺼운 장편을 별다른 공백기 없이 매년 펴낸다. '아웃사이더'는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됐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올해도 또다른 장편이 예정된 모양이다. 내년엔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등장하는 홀리 기브니를 내세운 또다른 소설이 나온다. 예전에 미국의 장르 소설 작가는 이름을 내세운 기업처럼 작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혹시 스티븐 킹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자료를 조사해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소도시의 리틀 야구단 코치이자 교사가 끔찍한 소년 성폭행 살해범으로 백주에 체포된다. 경찰들은 그를 범인으로 확신해 야구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구장에서 눈에 띄게 망신을 주며 체포한다. 코치가 당일 살해된 소년과 관련이 있음을 증언하는 수많은 목격자가 있다. 하지만 평범한 가정의 성실한 아버지인 코치는 이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 소년이 살해되던 날 코치는 인근 소도시에서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한 작가의 강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함께한 교사들과 지역 방송사 카메라에 잡힌 모습이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한다. 용의자가 같은 시각 두 군데서 목격된 사건. 검찰과 경찰은 당황하면서도 형사 사법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려 한다. 하지만 검사가 의도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게 연출한 피의자 이송 과정에서, 피해자의 형이 코치를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은 애매하게 묻힐 뻔하지만, 킹은 소설 중간쯤 이야기의 급커브를 튼다. 

 

여느 추리 작가였다면 한 사람이 두 장소에 있는 트릭을 만들고 깨기 위해 온갖 언어적, 물리적 장치를 설치해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45년의 작가 경력 동안 독자를 소름끼치게 하는 이야기를 써나가며 즐거워했던 킹은 자신의 장기로 이 트릭을 훌쩍 뛰어넘는다. 자연적 이야기에 초자연적 설정을 도입하는 것이다. 아마 기존의 추리 작가였다면 '반칙'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추리 소설에서 유령이 벽을 뚫고 들어와 살인을 저질렀다고 결말을 내버린다면, 그건 반칙 아닌가. 킹은 개의치 않는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추리소설'이라고 했던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도 은근 슬쩍 킹의 호러 장기가 드러난 적이 있지만, '아웃사이더'처럼 노골적으로 초자연적 존재를 도입한 적은 없다.

 

'아웃사이더' 중반부에 나타나는 홀리 기브니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 시작하는 빌 호지스 3부작의 조연 캐릭터였다. 호지스 3부작의 끝에 호지스가 죽었기에 기브니도 그대로 사라질 뻔 했지만, 킹은 신경 과민, 대인 기피 탐정이라 할 수 있는 기브니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에 다시 기브니를 연결고리로 추리 소설을 썼다. 물론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추리 70에 호러 30이라면, '아웃사이더'는 그 반대 비율이다. 

 

 

 

 

 

 

 

두 권의 SF를 잇달아 읽다. 테드 창의 신작 '숨'(엘리)과 김초엽의 데뷔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딱히 비교해 읽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테드 창의 작품을 다 읽어가는 시점에 김초엽의 책이 손에 들어왔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세간의 평만큼 좋게 읽지는 않았다. 어떤 작품은 너무 길다고 느꼈다. '보르헤스가 5페이지에 쓸 이야기를 50페이지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 '컨택트' 덕분에 뒤늦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주목받기도 했지만, 난 여전히 아서 클라크에 더 끌리는 사람이다. 

'숨'을 읽은 뒤에는 '보르헤스 비교'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아지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의 훌륭한 업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센테니얼맨'이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를 질문함으로써 결국 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색한다면, '소프트웨어 객체...'는 프로그래밍된 버츄얼한 존재와 인간의 차이를 묻는다. 피와 살이 없는 존재 인간의 감정이 투여된다면,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더라도 자아가 있다면, 그것의 존재적 위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탐구한다. 그 탐구가 앙상한 개념을 넘어 튼실한 내러티브로 지탱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언어, 사실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사회학, 인류학, 문학 수업 시간의 교재로 쓰일 법하다. '옴팔로스'는 유사 종교 소설이다. 과학적 사고를 한계 너머로 밀어가려는 SF가 어느 순간 종교 전통과 만나는 것은 낯선 시도가 아닌데, 테드 창은 이 쪽으로도 재능이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최상급의 SF작가인 테드 창과 이제 첫 소설집을 낸 김초엽을 비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도 테드 창에 뒤이어 읽으니, 김초엽의 글에서 어디가 문제인지 조금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소설집에 담긴 작품 중 어떤 것들은 부실한 설계도를 따른 건물, 취재가 덜된 기사 같았다. 작품의 과학적 배경이나 플롯의 논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테크닉에 의지해 마무리지은 듯한 글들이 있다. (작가가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혹은 작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독자는 완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 보완을 요구하는 건 최초의 독자인 편집자 몫이 아닐까. 한국의 문학 편집자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이 주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는 빛나는 글들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관내분실'.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는 존재인 여성, 특히 엄마의 처지를 거대한 도서관에서 색인이 삭제된 채 방치된 책에 비유했다(이 작품에선 책이 아니라 생전의 두뇌를 사후에 데이터화한 정보로 은유된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거리의 유한성과 우주 여행의 무한성을 대비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작품이다(영화 '인터스텔라'도 이런 테크닉을 썼다). '공생가설'도 흥미롭다.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작가는 '가장 즐겁게 썼던 글'이라고 말하는데, 읽는데도 즐겁다. 

 

 

줌파 라히리의 책 두 권을 잇달아 읽다. 사실 다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라히리에 대해 몇 자라도 적어놓고 싶다. 먼저 읽은 책은 신간 '내가 있는 곳'(마음산책)이었다. 인도계 영국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히리는 어느날 갑자기 이탈리아어를 배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곤 한다는데, '내가 있는 곳'이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장편소설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했지만,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낯선 도시에 머물며 얻어낸 짤막한 이야기들이 '보도에서' '길에서' '사무실에서' '수영장에서'와 같은 제목을 단 채 이어진 연작 형태다. 감각적이고 투명하고 단순한 문체로 삶의 감각을 전한다. 작가가 모어보다 덜 익숙한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스타일이 그러한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부분에선 한때 내가 열심히 읽었던 뒤라스의 문체가 느껴지기도 했다. 좋았다는 얘기다. 

 

줌파 라히리(1967~)

내친김에 2013년 펴낸 두번째 장편 '저지대'(마음산책)를 구매했다. 그런데 두께부터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있는 곳'은 200쪽이지만, '저지대'는 548쪽이다. '내가 있는 곳'이 현대의 작가(혹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저지대'는 1960년대 인도 낙살라이트 운동의 전조를 다루면서 시작한다. 낙살라이트란 인도 낙살바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오쩌둥주의 운동으로, 무장봉기와 반정부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초반 4분의 1까지는 낯설었다. (여기 낙살라이트에 관심 있었던 분?) 하지만 라히리는 낙살라이트 운동의 전개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다. 이야기는 수바시와 우다얀이라는 형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수바시는 내성적이고 차분하지만, 우다얀은 활달하고 적극적이다. 수바시가 학업에 열중해 미국으로 유학가 해양학 박사가 된 사이, 우다얀은 인도에 남아 낙살라이트 운동에 투신한다. 우다얀의 지난한 투쟁기가 펼쳐지려나보다 하는 순간, 우다얀은 정부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아직 소설 초반이다. 이제 라히리는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 수바시는 우다얀의 아이를 임신한 처제 가우리를 미국으로 데려간다. 명목상 결혼으로 동생의 아이와 아내를 책임지려 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수바시, 가우리, 그리고 가우리의 친딸이자 수바시의 양딸인 벨라의 이야기가 이후에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인도의 고된 현대사와 큰 관계가 없다. 

아니, 있다. 상처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으니까. 멀찌감치서 낙살라이트 운동을 지켜본 수바시에게도, 신혼에 남편을 잃은 가우리에게도, 낙살라이트가 무엇인지, 수바시가 양아버지인지 모르고 자란 벨라에게도, 역사와 사회가 할퀸 흔적은 남았다. 라히리는 개인에게 미친 역사의 궤적을 세 사람의 기묘한 관계와 요동치는 마음으로 그려보인다. 엄마 가우리가 갑자기 가출한 뒤, 청소년기 들어 마음의 혼돈을 겪는 벨라는 상담가 닥터 그랜트를 만난다. 그리고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랜트 선생님은 그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겠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벨라가 어디를 가든 그 감정은 풍경의 일부를 이룰 거라고 했다. 벨라의 생각 속에 엄마의 부재가 항상 존재할 거라고 그랜트 선생님은 말했다. 엄마가 왜 떠났는지에 대한 답은 결코 찾지 못할 거라고 벨라에게 말했다. 

수바시가 왜 동생의 아내 가우리를 미국으로 데려왔는지, 왜 가우리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아이를 남겨두고 가출한 뒤에도 별다른 원망을 하지 않는지, 독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그 짐작이 이끄는 수바시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엄마가 떠난 뒤 청소년기의 고비를 넘긴 벨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갖지 않고 미국을 떠돈다. 아니 직장을 갖지 않았다는 건 편견어린 말이다. 벨라는 농촌 운동, 환경 운동 비슷한 흐름에 몸을 얹었다. 벨라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다. 역시 가장 공감이 어려운 건 가우리다. 어찌 보면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수바시를, 그리고 친딸을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 철학을 공부하며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라히리는 가우리의 선택에도 논리적인 감정의 길을 만들었다.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감정, 역사와 세월이 할퀸 상처가 가우리를 그리로 이끌었다. 

'저지대'의 사람들은 애초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낸다. 가혹한 삶이었지만 그로부터 물러서지 않는다. 어찌 보면 우연 같은, 알고 보면 필연인 선택으로 삶을 이어간다. 소설 속 사람들은 이해못할, 낯선, 기괴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그걸 그냥 이상하고 충격적으로 그려내는 작가가 있고, 충분히 논리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도 있다. 물론 라히리는 후자다. 비논리적인 삶을 논리적으로 직관해낸다.  

 

 

넷플릭스 시리즈 '본딩'을 봤다. '러시아 인형처럼'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본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일단 끝까지 보기에 부담이 없다. 편당 15분 안팎, 총 7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리즈 전부를 봐도 2시간 정도라는 얘기다. 모바일폰 환경,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매체 환경이 이런 분량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게이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인 피트가 오랜 친구 티프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티프의 직업은 '도미나트릭스'다. 생소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성적으로 지배적인 여성'을 뜻한다. 티프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간지럼을 태워달라거나, 펭귄옷을 입고 씨름을 한다거나, 막말을 들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남자들이 티프를 찾아온다. 티프는 고분고분하진 않고,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미나트릭스'다. 자신에게 오줌을 눠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피트가 나서서 얼굴 위로 미적지근한 오줌을 뿌려준다. 피트는 티프의 조수가 돼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적 취향의 지하 세계를 그리지만, 중반 이후는 멜로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티프와 고객 사이가 아니라, 티프와 피트, 티프와 같은 대학 강의를 듣는 남자, 피트와 동성 남자 친구 이야기가 그렇다. 난 '본딩'을 보면서 멜로드라마는 아직 가능성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의 핵심은 남녀든, 여여든, 남남이든 '관계'의 얽히고 설키는 모양새다. 그런 모양새를 그림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재미와 의미는 무한대에 가깝다. 다만 멜로드라마의 가능성이 두 시간 안팎의 영화에서도 구현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딩' 후반부에서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일과 삶의 섞임이다. 우린 흔히 공과 사, 일터와 가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구분선이 생각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당장 주 52시간 노동과 관련한 계산을 봐도 그렇다. 집에서 다음날 회의 때 제시할 아이디어를 열심히 생각하면 노동시간인가. 생각만 하면 노동이 아니라면, 집에서 컴퓨터를 열어 무언가 끄적이면 노동인가. 직장에서 배우자에게 전화하면 노동 시간에서 빼야 하나. 고객의 은밀한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티프의 직업은 어차피 고객의 삶에 깊숙히 개입돼 있다. 티프에겐 '일'이지만, 고객에겐 '삶'이다. 고객은 때로 티프에겐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티프의 삶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다. 티프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려는 순간에, 티프의 노예 노릇을 하며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던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티프와 데이트 하는 남자에게 질투를 드러낸다. 티프가 또다른 남자를 '지배'하려는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리즈 종반부 티프와 피트는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한다. 이 역시 일이 삶에 너무 깊숙히 파고들어왔기 때문에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Bonding'이라는 제목의 뜻도 '밀접한 감정적 교류'라는군. 일할 때 감정이 안섞일 수가 있나.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영화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석 달만에 해낼 순 없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넷플릭스에서 본 음악영화 '더 더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가진다. 물론 좀 더 과격하긴 하다. 그건 퀸과 머틀리 크루의 음악, 태도적 간극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테고. 

프레디 머큐리가 성적, 인종적 소수자이긴 했지만, 퀸의 다른 멤버들은 비교적 '정상가족'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머큐리의 떠들석한 파티를 묘사했지만, 그런 행동이 당대 록커들의 태도에 비해 그다지 튄다고 볼 수도 없다. 영국의 록 신은 이미 섹스 피스톨즈 같은 '개쌍놈'의 음악이 휩쓸고간 뒤였으니까. 하지만 머틀리 크루는 차원이 다르다. 어느 록커들의 삶에 견주어봐도 떠들석하고 요란하고 일탈적인 삶을 살았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머틀리 크루는 그러한 자신들의 태도를 밴드의 정체성으로 삼기도 했다. 1980년대 미국 헤비 메탈이 섹스, 마약, 폭력에 탐닉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머틀리 크루가 있다. 

'더 더트'는 시작부터 떠들석하다. 오랜 지병인 강직성 척추염을 앓고 있는 과묵한 기타리스트 믹 마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보컬 빈스 닐, 베이시스트 니키 식스, 드러머 토미 리)는 말할 수 없이 난잡한 파티를 즐기고 있다. 곳곳에 마약과 섹스가 넘실댄다. 마약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섹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빈스 닐은 거의 발정난 짐승처럼 묘사된다. 누구의 여자친구든, 약혼자든, 부인이든 아랑곳 않는다(물론 관계가 강제적이라는 흔적은 없다). 니키 식스는 헤어날 수 없는 마약중독자다. 맞고 깨면 또 맞는다. 팔뚝에 주사를 꽂은 채 피를 흘리며 잠들었다가 꺠어나곤 한다. 토미 리는 키만 큰 막되먹은 아이 같다. 니키 식스처럼 조용히 마약하거나, 빈스 닐처럼 문닫고 섹스하는 것이 아니라, 호텔 전체를 뒤집어놓으며 난동을 부린다. 

그런데도 '더 더트'가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보인다고 말한 건, 이들의 떠들석한 소동이 내면의 상처에서 비롯됐으며, 모두가 결국 지독히 외로운 사람들이며, 급격한 성공이 그만큼 급격한 몰락을 가져올 뻔 했으며, 밴드 멤버들이 한때 다투다가도 결국은 가족처럼 재회해 화해한다는 내용 떄문이다. 베이시스트로선 특이하게 팀의 지주 역할을 한 니키 식스가 대표적 사례다. 영화는 아예 니키 식스의 내레이션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의 어린 시절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생부를 보지 못한 채 자랐고, 엄마는 한 주가 멀다하고 다른 남자를 집으로 들였으며, 그렇게 집에 온 남자들은 하나 같이 니키 식스를 학대했다. 니키 식스는 칼로 자해하는 소동 끝에 엄마와 격리되는데 성공한다. (니키 식스라는 이름은 그가 과거와 절연하면서 스스로 새로 지은 이름이다) 성인기의 난동에 대한 그럴듯한 알리바이긴 하지만, 기원을 알 수 없는 괴물이 더 무섭다는 것은 오랜 진실이다. 

PC함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던 80년대의 이야기고, 그래서 요즘 보기엔 구리지만 또 신기하고 재미있다. 나도 80년대 후반부터 록을 들었지만 머틀리 크루 음악은 많이 접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좀 심각한 가사 때문에 국내 발매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난 오히려 본 조비, 스키드 로, 건즈 앤 로지즈로 이어서 듣다가, 그보다 조금 앞 세대인 머틀리 크루는 나중에야 알았다. 다만 음악영화, 특히 록밴드를 다룬 영화가 '보헤미안 랩소디'나 '더 더트'같은 유형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선 약한 불만이 생겼다.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돌베개)을 읽다. 원제는 'A Fragile Life: Accepting Our Vulnerability'다. 쉽게 말해 '철학 에세이'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출판계에서 '철학 에세이'라는 명명이 주는 어감보다는 무거운 책이다. 

저자는 철학이 이론의 전개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강단의 학자들이 까다로운 개념어로 세심하게 다루는 '철학'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삶의 메시지를 전했다. 메이는 해탈하지 못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 상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색한다. 메이는 '희박하나마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철학적 관점 네 가지에 주목한다. 불교, 도교,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다. 

불교는 만물이 변화한다고 본다. 여기 있는 노트북 컴퓨터와 테이블도 언젠가는 썩거나 부서져 다른 무언가로 바뀐다. 나는 파도 같은 존재다. 파도가 솟구칠 때는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바다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삶의 괴로움은 우주가 하나의 변화의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그저 이 과정의 한순간에 불과한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한 방법이 명상이다. 명상은 외부에서 내부로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집착을 줄여나가는 훈련이다. 물론 불교도도 타자를 연민한다. 다만 그러한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동정이 아니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정에 기반한다. 

도교는 천지만물의 근원인 '도'를 말한다. 물론 '도덕경'의 첫 구절처럼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도는 인간의 언어가 쉽게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무위'(inaction 혹은 nonaction으로 번역된다고)를 통해서만이 우주를 과정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장자는 말한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탄식, 변덕과 집착, 경박함과 방종, 아첨과 아양은 음악 소리가 텅 빈 곳에서 나오고 버섯이 습기에서 생겨나듯 밤낮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모른다. 두어라! 두어라!"

스토아주의자들의 시각은 불교와 조금 비슷하다. 이들은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최대한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익살을 섞지 말고 품위 있게 삶에 맞서라. 억눌리지 말고 희망을 높게 잡지도 말라. 승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극복하는 데 있다." 세상 온갖 악과 부조리와 고통은 예고 없이 우리를 습격하지만, 우리에겐 이에 맞설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세계의 관계, 즉 실존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통제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조차 체념적으로 '명상록'에 적었다. "매일 아침 너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참견하는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을, 오만한 사람을, 신의 없는 사람을, 악의 있는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이 역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태도와 관련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는 흔히 '향락주의자'라고 번역되지만, 맛있는 음식, 좋은 자동차,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에피쿠로스는 다음처럼 적었다. "욕망의 일부는 자연적이고, 일부는 근거가 없으며, 자연적 욕망에는 필연적인 것과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필연적인 욕망에는 행복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 있고, 육체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 삶 자체를 위한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향락주의자'라는 명칭은 이 모든 욕망을 뭉뚱그려 합친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비싼 차를 사고 싶다는 '근거 없는 욕망'을 배격하고,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욕망, 예를 들어 '성욕' 같은 것도 자제하라고 권한다. (결국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전혀 향락적이지 않다.)  모든 향락의 끝인 죽음에 대해서는 어떨까. 심플하고 논리적인 답이 준비돼 있다.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감각에 존재하고, 죽으면 감각이 상실"된다. 

언젠가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고 있다. 책을 읽고 그에 연관된 책을 살피는 식이다. 강하게 의식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책을 짚는다. 그러므로 '부서지기 쉬운 삶' 이후에 읽을 책은 오랫동안 회사 책상에 꽂혀 있던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이다. 




**스포일러 있음

어제 오전에 극장에서 다섯명 쯤의 관객과 함께 '아사코'를 봤다. 영화가 너무너무 이상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했다. 서사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감정은 정확히 묘사됐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는 아니다. 이상한 흐름이 자꾸 생각나고, 왜 그리 이상하게 찍었는지 궁금하고, 스스로 해명해보고 싶다. 훌륭한 영화라는 뜻이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이상하다. 오사카의 아사코는 어느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말도 안되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사랑이이었다. 하지만 바쿠는 안정적이기보단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저녁에 빵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빵 사러 갔다가 동네 목욕탕에 들렀는데 거기서 만난 아저씨와 친해져서 그 아저씨 집에 가 만취하고 잔 뒤 빵은 주고 왔다....는 식이다. 결국 바쿠는 신발을 사러간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고 아사코의 내레이션을 통해 회상된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은 남겼다. 

2년 후, 아사코는 도쿄로 이사해 한 카페에서 일한다. 인근 회사의 직장인 료헤이라는 사람이 자꾸 아사코 앞에 나타난다. 놀랍게도 료헤이는 바쿠와 똑같이 생겼다(실제로 같은 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한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다가가지만, 아사코는 바쿠와 너무 닮은 모습에 자꾸 뒷걸음질친다. 사귀어 보려고도 하지만 마음이 온전히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이 잠시 두려움에 떨만한 지진이 발생한 날, 아사코는 료헤이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지진 묘사가 섬찟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하나도 안나오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혼란이 생생히 느껴진다. 거리 곳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후 5년간 둘은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료헤이는 성실하고 유머러스하며 다정다감하다.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질 사람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둘은 동일본대지진 피해를 입은 센다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 활동도 자주 한다. 주변 친구들도 그런 그들을 축복한다. 료헤이는 오사카 본사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청혼하기 전 빠진 에피소드가 있다. 바쿠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쿠는 그 사이 꽤 인기 있는 모델이 됐고, 아침 드라마에 나와 인기를 끄는 셀러브러티가 됐다. 청혼을 받은 순간, 아사코는 옛 연인 바쿠 이야기를 한다. 사실 바쿠가 료헤이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2년 전쯤 바쿠란 사람의 존재를 잡지에서 봤고,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사코가 자신을 처음 본 순간 멈칫한 이유도 이해했다고 말한다. 둘의 결혼은 문제 없이 진행될 것 같다. 오사카에는 창문에서 강이 바라다 보이는 집까지 구했다. 

아사코와 료헤이와 친한 친구들의 저녁 자리에 파국이 발생한다. 바쿠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료헤이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바쿠를 보고 놀란다. 바쿠는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펴 올린다. 2~3초쯤 고민하던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잡고, 둘은 그대로 나가버린다. 바쿠는 아사코를 차에 태우고 달린다. 부모님이 쓰지 않는 빈 집이 훗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자기 일을 대신할 사람은 많다며 휴대폰을 부서 던져버린다. 아사코도 돌아오라는 친구들에게 이별의 말, 사과의 말을 남긴 채 휴대폰을 던진다. 그렇게 자동차는 밤의 도로를 달린다. 

눈을 떠보니 새벽이다. 차는 방파제 근처에 서있다. 센다이 초입이다. 바쿠는 졸리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해서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파제 때문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아사코는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한다. 바쿠는 그러라고 한다. 차를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사코는 면허가 없다고 한다. 역까지 태워줄 필요도 없다고 한다. 바쿠는 그냥 떠나고, 아사코는 돈도 핸드폰도 없이 돌아간다. 

마침 센다이엔 평소 자원봉사를 하며 알고 지낸 지역 주민들이 있다. 한 할아버지가 돈을 빌려주면서도, 남자는 다른 남자와 놀다 들어온 여자는 용서하지 못하니 돌아가지 말라고 권한다. 하지만 아사코는 돌아가기로 한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이. 

아사코는 오사카의 료헤이 집을 찾아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전날 저녁이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혼집이 될 곳이었다. 아사코를 발견한 료헤이는 화를 내면서 무슨 낯으로 나타났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키우던 고양이는 버렸다고도 한다. 아사코는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앓아누웠다는 오사카 시절 고향 친구를 찾아가기도 한다. 활발하던 친구는 루게릭 병으로 침대에 누운 상태다. 아사코는 친구 어머니로부터 귀여운 반전이 담긴 옛 이야기를 듣는다.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의 집 앞으로 와 고양이를 찾는다. 사실 료헤이는 고양이를 버리지 않았고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아사코는 료헤이의 집으로 들어간다. 료헤이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다. 료헤이는 앞으로 아사코를 완전히 믿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사코는 수긍한다. 그리고 료헤이에게 덜 의지하겠다고 말한다. 둘은 베란다에 서서 비가 와 불어난 강을 바라본다. 료헤이는 물이 더럽다고 한다.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고 한다. 끝. 

자유로운 바쿠(위)와 성실한 료헤이(아래). 

처음엔 바쿠와 료헤이가 도플갱어인줄 알았다. 아니다. 도플갱어는 만나면 죽는데, 둘은 한 번 마주친다. 아니면 둘이 닮았다는 건 아사코만의 착각이었던가. 아니다. 바쿠와 사귀던 시절 아사코의 단짝 친구가 료헤이를 보고 똑같이 생긴 모습에 놀란다. 바쿠와 료헤이가 닮았다는 건 아사코의 주관이 아니라 제3자가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다. 

아사코는 다시 돌아온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바쿠를 외면하고, 오랜 시간 자신을 사랑할 료헤이를 찾기로 한다. 낭만과 현실의 대결에서 현실이 승리? 하지만 되찾은 현실이 그리 맑고 밝지만은 않다. 료헤이와 아사코의 마지막 대사는 시적이다. 강물은 더럽다. 하지만 아름답다. 폭우로 불어나 이것저것 뒤섞인 강물이지만 아름답다. 인간 관계는 단일한 감정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이나 숭배나 증오는 없다. 여러 가지 감정이 비율을 달리하며 섞이며 관계를 직조해나갈 따름이다. 최상의 잉꼬 부부라해도 미움이나 의심이나 권태의 싹은 마음 어딘가 뿌려져있다. 그것이 얼마나 자라나느냐, 자라났을 때 얼마나 현명하게 가지치기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실존인물인 영국 앤 여왕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어딘지 실제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 영화의 양식이 지금까지의 시대극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여왕이 중심인 영화야 많았지만, 그의 측근들까지 모두 여성으로 그린 영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왕과 두 여성 측근에 의해 조종되는 말에 불과하다. 권력있는 신하들조차 여왕 하녀의 술수에 놀아난다. 

세습군주국가의 많은 왕이 그러했겠지만,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꽤나 이상하다. 군주로서의 의무감으로 국정을 억지로 수행하지만,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국가를 운영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안아픈 데가 없어서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기괴한 컴플렉스까지 갖고 있다. 그 와중에 오랜 친구인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가 여왕 대신 국정 전반에 관여한다. 신분 상승의 욕구에 불타는 귀족 출신 하녀 에비게일 힐(엠마 스톤)이 여왕과 사라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에비게일, 여왕, 사라,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전쟁이 벌어지는 화려한 궁궐. 

여왕의 존재감은 크면서도 없다. 하녀와 하인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릴 때, 호화찬란한 침실을 마음대로 사용할 때는 궁궐의 주인이지만, 국정을 관할할 때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길 기다리는 꼭둑각시 인형 같다. 흥겨운 무도회를 갑자기 중단시키거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현악5중주단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사라의 뺨을 후려치더니, 곧 그녀의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다. 군주제 권력 시스템의 허점, 앤 여왕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허점을 파고드는 모리배들이 나타난다. 사라가 왜 그리 권력을 휘두르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사라는 마치 권력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양 자연스럽게 휘두른다. 반면 에비게일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다. 뚱뚱하고 성기가 작은 독일인에게 팔려가듯 시집간 경험이 있는 에비게일은 어떻게든 신분을 다시 상승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에비게일은 사라가 어떻게 앤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조심스레 살핀 뒤, 이를 업그레이드해 적용한다. 에비게일은 사라보다 젊고, 더 강한 동기부여가 돼 있다. 어쩌면 에비게일은 사라의 20여년전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더 페이버릿'은 무능해 보이지만 여전히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여왕을 중심으로, 획득하기도 다루기도 어렵지만 일단 쥐고 있으면 더없이 좋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두 여성의 이야기다.국가 운영의 큰 틀을 둘러싼 이념적 대결도, 셰익스피어식의 장엄한 궁중 비극도 없다. 누가 권력자의 비위를 잘 맞춰 환심을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뿐이다. 

두 차례 인상적인 롱테이크 클로즈업이 나온다. 앤 여왕이 무도회에서 사라의 춤을 보다가 조금씩 표정이 굳어가는 모습, 앤 여왕이 권력을 차지한 에비게일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며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모습이다. 그때 앤 여왕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올리비아 콜맨의 스산하면서도 무서운 표정으로 권력자 내면의 황폐한 풍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라와 에비게일, 두 여자가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쟁투를 벌였지만, 이 전쟁의 주인공은 결국, 당연히도 여왕이다. 여왕의 내면은 두 여자가 맞붙은 전쟁터가 됐다.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이 그 내면의 전쟁터 풍경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군주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묻는다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풍경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권력 일반의 속성에 대해서도 은근한 암시를 한다. 

아름다운 포스터. 


가쿠하타 유스케의 논픽션 '극야행'(마티)을 읽다. '극야'란 말이 낯설었는데, 대략 '백야'의 반대말이다. 북극 지역에서 해가 뜨지 않고 몇 달이고 밤만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논픽션 작가이자 탐험가인 가쿠하타는 북극 지역의 극야를 홀로 걷기로 하고 4년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한다. 부분적으로 직접 걸어 지형을 익히고, 곳곳의 창고에 식량과 물품을 저장한다. 100여년 전에야 북극점, 남극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는 경쟁들이 있었지만, 이제 지구 표면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고, 지구에 기록되지 않은 곳도 없다. 이제 탐험가는 어디를 가야할까. 가쿠하타는 극야행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탐험은 요컨대 인간 사회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는 활동입니다. 옛날에는 탐험의 목적이 지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이었죠. 그때는 지도가 당대의 시스템이 미치는 범위를 도식화한 매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지도에는 공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탐험은 어떤 모습일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극야가 떠올랐습니다. 이번 탐험은 미답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

매일 태양이 뜨는 건 얼마나 당연한가요. 우린 태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태양이 뜨지 않는 세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죠. 그 점에서 저는 극야 세계가 미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120일 동안 밤뿐인 세계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극야의 세계로 나간다면 현대인이 잃어버린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쿠하타가 북극의 극야를 80일간 헤맸다고 해서 어딘가에 '세계기록'으로 남을 리는 없다. 애초에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정이었으니까. 가쿠하타는 그저 스스로 세운 '탐험'의 정의에 따라 북극을 떠돈다. 누가 뭐라하든, 스스로 설정한 장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생의 한 절정기와 많은 돈을 투자한다. (가쿠하타는 극야행이 자신 인생의 절정기에 도전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탐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쿠하타는 자기가 세운 목적을 이뤘을까. 쉬웠다면 책이 재미있을리 없다. 사람도 없고 불빛도 없는 끝없이 광활한 밤의 세계에서 인간의 감각은 혼돈에 빠진다. 작은 언덕이 거대한 산맥처럼 보이고, 바위 덩어리가 사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쿠하타는 몇 번이나 지역을 걸어 눈과 발로 익혔지만, 어둠은 여전히 가쿠하타를 속인다. 가쿠하타는 일부러 GPS도 가져가지 않았다. 특수제작한 육분의는 극야행 초반부에 잃어버렸다. 나침반과 별의 위치에 의존해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걸었다. 빛이 없어 공간감을 상실한 순간, 가쿠하타는 자신의 실체를 잃어버린다. 

개 한 마리가 그의 유일한 동행이다. 어둠 속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무렵 식량 저장고를 발견하지만, 북극곰이 털어간 지 오래다. 절망에 빠진 가쿠하타는 생존의 방법을 모색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개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개도 사료를 충분히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상태지만, 어쩔 수 없다. 책 후반부는 가쿠하타가 개를 잡아먹는 최후 수단만은 사용하지 않기 위해 야생동물 사냥에 전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물론 어두컴컴한 빙판 위에서 사냥이 잘 될 리는 없다. 

극한 고생이 이어지는 후반부는 처절하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한 대목도 많다. 다 떠나서, 개 한 마리와 썰매를 번갈아 끌며 끝없는 어둠 속의 북극 지대를 헤매는 풍경만큼은 인상 깊다. 그런 체험을 들려준 사람은 아마도 없었으니까. 상상만해도 두렵고 외롭고 우울한 여정이다. 이런 탐험을 생각해내 실행하는 '예외적 인간'이 나타나는 사회도 대단하다. '인도방랑'의 후지와라 신야, 북극 사진가 호시노 미치오도 생각이 난다. 





스카쓰케 마사노부의 '앞으로의 교양'(항해)을 읽다.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의뢰로, 편집자인 스가쓰케가 미디어, 디자인, 건축, 경제, 문학, 생명 등 12개 분야의 명사와 월 1회 대담을 했고, 그 중 11개를 묶어서 책을 냈다. 11명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건축가 이토 도요,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였다. 각 대담의 분량이 길지 않고, '일본책은 정리를 잘한다'는 인상이 있어, 우연히 입수하고 얼마 뒤 읽기 시작했다. 대담이 2016년 9월~2017년 9월 진행됐으니, 비교적 최근의 양상과 흐름에 대한 정보를 기대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인사이트가 있었다. 각 대담자 당 길지 않은 분량이다보니 간략하고 단정적이라는 인상도 없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책에 기대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간결함이다. 사전 조사를 많이 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쉬운 질문부터 던져나가는 인터뷰어의 태도가 좋았다(인터뷰어로서 이상적인 자세다). 구루인 양 허세 부리거나, 20~30년전 공부에 기대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읽어내려 고민하는 인터뷰이들의 태도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몇 군데 줄을 쳤다. 몇 문장 인용한다. 


개인의 개성이 사물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주관을 억제하고 사실을 담담하게 쓴 기사보다 글쓴이의 색깔이 드러나는 기사가 더 잘 읽히거든요. 

앞으로의 시대에는 기자보다 편집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고, 더 덧붙이자면 편집자보다 편집자 겸 경영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 오늘날에는 동영상, 음성, 사진, 문자, 이벤트 등 무수한 편집 대상이 있습니다. 게다가 각 분야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서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편집자는 이 좋은 재료를 활용할 줄 아는 요리사가 되어야 하죠. (미디어, 사사키 노리히코)



그 시대에 적합한 건물을 만들지 않으면 건축은 힘을 잃습니다. 즉 동시대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건축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클라이언트가 명확하지 않은 건축은 예외 없이 잘되지 않습니다. (건축, 이토 도요)



제 생각에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거든요. 그분들은 모더니스트입니다. 가라타니는 이제 전형적인 이와나미-아사히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시대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표로 일컬어져 왔지만, 사실은 1970년대 후반에 일본이 고도 소비 사회가 되면서 무척 복잡한 사회가 된 것, 즉 정보의 유통 경로가 너무 많아지고, 대중이 와해되어서 소위 '분중(分衆)'이 되어가는 현상에 대응하지 않은 분들인 거죠. 

결국 "대중이 지금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하고 눈에 보이게 드러내면, 우리 사회는 그것을 정의처럼 취급해버리죠.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대중의 생각은 정의도 정답도 아니거든요. 그들의 생각을 가시화한 다음에 그것과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변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통치 기구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사상, 아즈마 히로키)


세계 상위 8명과 하위 50퍼센트의 재산 규모가 같아요. (...) 요점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극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일본은 은둔형 외톨이 증후군에 걸려서 자본주의라는 학교에서 졸업하고 싶지 않다고 뗴를 쓰고 있어요. 

결국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라는 근대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나 '더 느리게, 더 가까이'를 실현해야 화석 연료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경제, 미즈노 가즈오)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은 나약하다는 전제하에 제도 및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게 예방 의학의 기본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 대해 체념하고 있다고 할까요. (건강, 이시카와 요시키)


우리 뇌는 60만 년 전부터 더 이상 커지는 걸 그만뒀습니다. 대신 인간은 1500cc정도 되는 작은 뇌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언어를 만들어냈죠. 주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기억을 외부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책에 정보를 전부 넣어두면,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죠.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생각하는 힘, 혹은 응용하는 힘입니다. (...) 하지만 인공 지능이 나오면 생각과 응용까지 외부에 위탁하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죠?' 하고 외부에서 알려주면,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되니 그저 버튼 클릭으로 물건을 사버리는 겁니다. (인류, 야마기와 주이치)









에도가와 란포의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문학과지성사)를 읽다. 전자는 중편, 후자는 단편 분량이다. 두 편 합해서 150쪽이면 끝난다. 

에도가와 란포(1894~1965)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작가다. 필명은 란포가 좋아했던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 독자들이 일본 추리소설을 읽으며 에도가와 란포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현대 작가 아니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마스모토 세이초 정도겠지.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51권으로 나왔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해외 문학 중에서도 문학사적 의미가 있으나 국내 번역은 잘 되지 않은 작품 위주의 목록을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추리소설이 이 시리즈로 나왔다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읽어보니, 역시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추리소설가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으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파노라마섬 기담'은 지역의 거부가 어느 작고 외딴 섬에 자기만의 기괴한 세계를 만들려다가 완성 직전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정체가 불분명한 화자가 이 섬의 사연을 들려준다. 거부가 죽은 뒤 그와 얼굴이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대학 동문이 소식을 듣는다. 이 동문은 이루고자 하는 바는 있으나 의지는 없는, 그래서 졸업 이후 몇 년째 빈둥거리는 사람이다. 이 남자는 섬뜩하다기 보단 황당한 계획을 떠올린다. 무덤을 파서 죽은 거부의 옷을 꺼내입고, 그가 덜 죽은 채 묻혀서 가까스로 살아돌아온 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그 돈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들 이 황당한 계획에 속아, 남자는 순식간에 거부가 된다. 단, 거부의 아내만이 그를 수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런 황당한 음모가 꾸며지거나 밝혀지는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1926년 발표된, 거의 100년전 소설이니 추리의 전개나 논리에는 위화감이 있다. 정작 란포가 말하려고 한 바는, 남자가 갑자기 손에 쥔 막대한 부를 이용해 외딴 섬을 가꿔나가는 과정이다. '파노라마 섬'의 묘사가 기괴하고 현란하다. 섬의 입구에서 중심부까지 지하로 난 유리 통로같은 것이 있어 신기하다기보다는 기괴한 해양생물들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고, 나체의 여인들이 식물인듯 동물인듯 노예인듯 살고 있으며, 거리 감각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설계로 방향과 위치를 혼란에 빠트린다. 란포는 남자가 범죄의 추리보다는 이 섬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상상해낸 파노라마 섬의 묘사에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래된 문예사조에서 따온다면 '탐미주의' 같은 말을 붙일 수도 있겠는데, 색깔은 눈이 아프고 향은 메스껍다.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같은 말을 지어내고도 싶다. 


에도가와 란포

'인간 의자'는 그보다 짤막하고 확실하게 변태적이다.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못생긴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 남자는 손재주가 좋아 그럴듯한 의자를 만드는 기능공이 된다. 어느날 남자는 외국인이 주문한 제법 큰 가죽 의자를 만든다. 남자는 그 의자 안에 들어가 외국인의 집으로 침입할 생각을 한다. 스프링 같은 부품을 일부 제거하고는 그 안에 들어가 앉는다. 그리고 의자 속에서 의자에 앉는 사람의 몸을 느끼고는 좋아한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좋아한다. 유럽 어느 강국의 대사가 앉았을 때는 가죽 뒤에서 칼로 푹 찌르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 어느 유럽의 여자 댄서가 앉았을 때는 '이상적인 육체미의 감촉'을 느끼며 '예술품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마음'을 느낀다. (특히 서양 여자들의 육체에 대한 찬사가 가득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친 사랑'은 1947년에 나왔으니, 1925년 나온 '인간 의자'에 비하면 꽤 늦었다. 아니, 서양 여자의 육체에 대한 매혹은 일본 남성 소설가들의 전통 같은 것이라 해야 하나) 결국 '인간 의자'는 그 단편을 읽는 여성 소설가의 의자에 남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아이디어로 끝나는 척 하다가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데, 김기영의 '하녀'가 마지막에 기묘한 영화에서 빠져나오는 척 하면서 관객을 놀리는 것 비슷한 효과다. 하고 싶은 변태적인 이야기는 다 했으니, 작가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닌 듯 시치미를 뗸다. 

하긴, 조금이라도 추종자가 나오면 금세 낡아보이는 어정쩡한 소설보다는 무엇이든 색깔이 강한 글이 낫겠지. 그 색깔이 좀 이상하다 하더라도. 




***스포일러 있음

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은행나무)를 읽다. 이제 마틴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다. '나이트플라이어'는 '왕좌의 게임'을 쓰기도 전인 1985년 선보인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양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인데, '나이트 플라이어'는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SF다. 물론 두 작품 다 잔혹하다. 사실 '나이트플라이어'가 더 잔혹하다. 머리통이 갑자기 터지고, 레이저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가르고, 처리되지 않은 뼈조각, 살점, 눈알 등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안에 둥둥 떠다닌다.

몇 만 년동안 이동하고 있는 신비의 외계 종족 볼크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 나이트플라이어에 오른 여러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나이트플라이어에는 선장 로이드가 이미 탑승중인데, 그는 왠일인지 우주선 반쪽을 홀로 사용하면서 홀로그램으로만 탑승객들 앞에 나타날 뿐 실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로이드가 정체를 숨기며 대는 이런저런 핑계는 영 미심쩍다.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가 자꾸 근원이 명확하지 않은 불길한 예감을 말하다가 결국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남은 과학자들은 하나 둘씩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또 각자 잔혹한 방법으로 죽어간다. 그 와중에도 외계 종족 볼크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로이드의 정체는 여전히 미심쩍다. 

괴물 또는 살인마가 나타났을 때 문을 열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가 버리면 공포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도망칠 곳 없는 폐쇄 공간인 우주선은 그래서 공포물에 괜찮은 공간이다. '에이리언' 시리즈나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영화들은 밀폐된 우주선 내부의 공포를 잘 살렸다. '나이트플라이어' 역시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호러SF의 전형적 코드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로이드와 나이트플라이어호의 정체에 대해선 약간의 반전이 있다. 너무 놀란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치 못한 정도이기는 하다. 생전의 정신이나 마음을 데이터화해 기계 내부에 보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아이디어가 '나이트플라이어'에 고유한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전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은 덕에 이것이 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좀 더 흥미로웠다. 물론 당장 쉽게 실현할만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로는 충분히 가능하고, 언젠가 누구나 쉽게 그 기술을 이용할만큼 보편화될 수도 있다. 과거엔 기술적으로 까다로워 매우 소수의 훈련받은 이들만 다룰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쉽게 다루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꽤 많다. 영화 촬영이나 편집이 그렇고, 사제 폭탄, 유전자 분석 같은 것도 그렇다. 인류의 통념과 윤리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한 두 사람이 세상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 현대 세계다.  

나이트플라이어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그럴듯하지만, 볼크린과의 만남은 조금 얼버무린 것 같다. 아마 이 책이 근간하는 '천 개의 세계' 시리즈의 다른 책을 읽으면 좀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해서 모호하게 서술해도 되는 건 아니다. 

마침 '나이트플라이어'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도입부 10분을 본 뒤,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영상물이 너무 많고, 볼만한 영상은 너무 적다. 초반에 확실한 각인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 볼 의지가 사라진다. 





 





***스포일러 있음

'알리타: 배틀 엔젤'은 지금보다 더 근사할 수 있었던 영화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크게 흠잡을데가 없다. 이미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은 가상 캐릭터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 재현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는 SF의 오랜 소재지만, '알리타'는 인간과 사이보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이질성을 극복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세상을 시각적, 감정적 이물감 없이 보여준다. 사이보그지만 또한 10대 소녀의 외모와 행동 방식을 가진 알리타는 10대 소년과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알리타가 심장을 꺼내 보여주며 사랑을 증명하려 하자 소년 휴고가 당황하는 장면은 인간과 기계가 교류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마주칠 '언캐니 밸리'를 재치있게 그려낸다. 수십년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기계와 신체의 융합을 시적인 악몽처럼 그려냈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 상상의 산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AI'에서 그려낸 이물감 정도가 사이보그에 대한 동시대 이미지의 극한에 가까울 것 같다. 

문제는 서사다. 프로듀서 제임스 카메론과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알리타'의 서사가 조금 더 완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도 박사(크리스토퍼 왈츠)는 천공의 도시에서 떨어진 고철 더미에서 사이보그 소녀의 두뇌를 줍는다. 두뇌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 이도 박사는 소녀에게 그럴듯한 신체를 붙여주고는 죽은 딸의 이름 알리타를 선사한다. 하지만 알리타의 옛 기억은 사라졌다. 다만 거대한 경찰 기계를 맞아 전투 자세를 취하는 알리타의 반사 신경이 과거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줄 뿐이다. 

이도 박사, 알리타가 등장하고, 알리타와 밀당하는 소년 휴고가 등장하고, 이도 박사의 비밀이 밝혀지고, 알리타가 조금씩 기억을 회복한 뒤 능력을 발휘하는 중간 부분까지 영화는 매우 경쾌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중간을 넘어서면서 서사는 조금 숨을 고른다. 종반부의 장쾌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살짝 속력을 줄였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떄까지 흘러간 러닝타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알리타'는 서사의 장애물을 잘 피한 뒤에도 좀처럼 속력을 내지 않는다. 레이싱 게임으로 치면, 앞서가던 라이벌 차량을 다 따돌리고 결승선까지 직선 도로만 남았는데, 액셀레이터를 밟지 않는 모양이다. 왠일인지 레이서는 속력을 적당하게 줄이고, 심지어 타이어를 교체하러 들어가고, 괜히 오솔길을 탄다. 122분의 상영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자꾸 딴청을 부린다. 상영시간 내에 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카메론과 로드리게즈는 속편을 준비했다. 영화 내내 몇 번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된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끝내 알리타와 마주하지 않는다. 모터볼 경기 선수로 나선 알리타가 천공의 도시쪽으로 칼을 치켜들면, 리더는 그런 알리타를 보고 웃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아마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은 다음 편에서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일본 만화 원작이 있었고, 그 서사를 어느 정도는 담아내려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알리타'가 할리우드의 속편 관행을 너무 일찍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래서 한 영화에 전력을 다하는 대신, 후속편을 위해 서사의 꼭지들과 아이디어들을 남겨둔 것 같다. 이런 의심이 들었을 때 생각난 건 원빈이 '아저씨'에서 했던 대사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알리타: 배틀 엔젤'의 장면들. 인간과 기계의 로맨스에는 이물감이 없다. 

다음 편을 위해 이번 편의 아이디어를 아낀다고? 이번 편이 망해서 아예 다음 편을 제작할 기회가 없다면 어쩌려고? 카메론의 영화를 예로 들자.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가 터미네이터와의 대결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났다면? '아바타'에서 인간 군인들이 나비족의 터전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끝났다면? 할리우드가 속편을 만들어 사골 우리는 관행을 탓하자는게 아니다. 장기적,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려는 건 자본주의 기업의 속성이다. 다만 속편을 염두에 두었더라도 개별 영화의 서사적 완성도는 갖추어야 한다. 완성된 영화의 세계관이 워낙 탄탄할 때, 1편에서 구현되지 않은 아이디어가 풍부할 때, 속편은 제작될 수 있다. '터미네이터2'가 그런 영화였다. '터미네이터'는 그 자체로 뛰어났지만, 2편 역시 자체적으로 뛰어났다. (이후의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덤 혹은 향수 상품이다) 그때의 카메론은 아이디어를 하나의 영화에 모두 쏟아부은 뒤에도, 다시 다음 영화를 만들만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이었다. 이제 카메론은 더 이상 샘솟는 아이디어가 없을까봐, 아니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걱정이 많았던 걸까. '알리타'가 이런 식의 결말을 내려고 했다면, 애초에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그토록 자주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속편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 종반부에 힌트만 숨겨두었으면 됐다. 하지만 '알리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 구도를 조성한 뒤, 둘이 한 번도 대결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난다. 이건 완성된 영화가 아니다. 

'알리타' 얘기를 한참 해서 사족처럼 붙이는 격이 됐지만, 넷플릭스의 '킹덤' 역시 완결성 면에선 실격이다. '킹덤' 첫번째 시즌은 6편으로 끝났다. '킹덤'을 시즌제 드라마로 볼 수 있다면, 이건 시즌제를 오용하거나 악용한 사례다. 조선 중후반 어느 시대,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병이 발생한다. 역병은 죽어가는 왕을 무리하게 살려두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감염자들은 밤이면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바위 밑, 마루 밑 등에 숨는다. 이 조선판 좀비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제작진은 좀비의 출현 이유에 대해 제대로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다음 시즌으로 해결을 미룬다. 심지어 좀비와 인간의 일대 대결이 벌어지려는 순간 첫번째 시즌을 끝낸다. 여러 가지 인터뷰나 극의 전개로 짐작컨대, 제작진은 이미 모든 설정과 서사의 구상을 마친 것 같다. 시즌 2가 시즌 1의 인기에 힘입어 억지로 제작됐을 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시즌제 드라마라도 최소한의 완결성은 있어야 한다.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죄수들이 탈옥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면, 그걸 시즌의 끝이라 부를 수 있나. 

'킹덤'의 첫번째 시즌 여섯 개 에피소드는 완결된 시즌이라기보단 10~12편 시즌의 전반부로 보인다. 첫번째 시즌이 이렇게 끝나고 보니 '킹덤' 1, 2편이 다소 늘어지는 것처럼 보인 이유도 마음대로 추정해보고 싶다. 제작진은 '킹덤'을 두 개의 시즌으로 늘이기 위해 초반부 호흡을 일부러 늘어뜨린 것 아닐까. 차라리 두 개의 시즌이 아니라 10편짜리 한 개의 시즌으로 계획을 세웠다면, '킹덤'은 훨씬 깔끔한 호흡의 서사를 보여줬을 것 같다. 

  




넷플릭스 영화 '폴라'를 보다. 이름이 낯선 스웨덴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가 연출했다.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쪽은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대신 U2,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리고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확 들어온다. '폴라'는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화려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전부). 

던컨(매즈 미켈슨)은 50을 앞두고 은퇴 직전인 청부살인자다. 던컨은 은퇴와 함께 회사로부터 거액의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사장은 그 퇴직금이 너무 아까워 은퇴 사원들을 미리 죽이려 한다. 그러면 퇴직금을 아껴 회사 자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젊은 킬러들을 던컨에게 보낸다. 하지만 애송이들에게 쉽게 죽을 던컨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에서 서사의 약점을 들어 굳이 작품성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폴라'는 최근 할리우드 산 B급 액션의 한 흐름에서 보는 편이 낫겠다. 그 흐름이란 '존 윅' 시리즈가 대표한다. 매우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선보이며, 그 액션은 때로 코믹스 원작이라는 태생을 증명할 정도로 물리 법칙을 거스른다. '인명 경시'라는 말을 써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주인공 한 명의 손에 의해 쉽게 죽어나간다. 너무나 패셔너블하게 차려입은 킬러 주인공이 있으니, 수백, 수천명 악당의 목숨을 연민할 시간은 없다. 

'존 윅'이 볼만한 건 키애누 리브스 덕이다. 연기를 못해도 상관 없다. 리브스가 잘 맞춘 검은 양복을 입고 총을 휘두르는 순간, 연기 같은 것은 필요없다. '아토믹 블론드'에선 샤를리즈 테론이 그랬다.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테론은 스모키 화장을 한 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너무 불편해 보이는 멋진 옷들을 입고 총을 쏘아댔다. '폴라'의 절반은 매즈 미켈슨이다. 54세의 미켈슨은 작심한듯 액션 배우로서의 포부를 선보인다. 마치 리암 니슨이 '테이큰 ' 이후 뒤늦게 액션 배우가 된 것처럼. 

10년간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활동하던 미켈슨은 2006년 '카지노 로얄'에 이르러 전세계 관객에게 얼굴을 알렸다. 티비 시리즈 '한니발'이나 슈퍼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한 단계 높였다. 그리고 자신이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폴라'에서 야심을 보인다. 

내보일만한 야심이다. 북유럽 겨울처럼 차가운 미켈슨의 표정과 액션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미국 이외 다른 문화권 배우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위해선 자국에서 확실하게 성공하고 이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어야 하기에, 미국이나 영국 배우보다 출발이 늦다. 그래서 경력이 얼마되지 않은 배우 같은데 나이가 꽤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이제 액션 영화 좀 찍어보려하는데 이미 50대 중반인 미켈슨. 하지만 60대 중반이 넘은 리암 니슨도 여전히 액션을 찍으니 미켈슨도 10년 이상 못 찍으리란 법이 없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반달리즘'(American Vandal) 시즌 1, 2를 봤다. 시즌 1은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있던 차량들에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로 남성 성기 낙서를 해놓은 사건을, 시즌 2는 고등학교 급식 레모네이드에 설사제를 넣거나 피냐타 안에 똥을 넣거나 하는 식의 '똥 테러'를 그린다. 두 명의 고등학생 프로듀서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해나가는 페이크 다큐 형식이다. 두 사건 모두 유력한 용의자가 드러났고, 해당 학생은 퇴학당한 상태다. 일단 부딪히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진 두 프로듀서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꼼꼼히 살핀 끝에, 진범으로 몰린 이가 진범이 아님을 밝혀 나간다. 

범죄는 범죄인데 중범죄는 아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피의자로 연루된 사건이다. 범행도 심각하다기보단 조금 웃긴다. 하지만 제작진은 시침 떼고 사건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마치 '외로운 늑대'가 끔찍한 테러라도 벌인 듯한 시선으로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별 거 아닌 걸 별 거 처럼 다루니, 웃음기는 거의 없다. 가끔 분량을 채우려는 듯한 억측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각 편 30분 분량, 총 8편의 시리즈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게다가 제작진은 분명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를 심어두었다. 각 시즌의 마지막 회를 보고나면 무척이나 씁쓸해지는 이유다. 첫 시즌에서 범인으로 지목받은 소년은 무죄가 입증된 뒤에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다큐 제작 과정에서 인터뷰한 동급생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평소 자신을 미워하던 스페인어 선생의 집에 실제로 페인트 테러를 하고 만다. 무죄가 밝혀진 뒤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세상이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주한다. 그 편견을 확신시켜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편견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간다. 

시즌2는 인터넷 세상의 가면에 대해 다룬다. 자주 언급되는 주제긴 하지만, 7편의 에피소드를 거치다가 마지막 회에 갑자기 주제를 제시한다. 소셜미디어의 시대,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는 친구인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나눌 친구는 없는 사람들. 또 그러한 약점을 노리는 사람들. 은밀한 따돌림, 따돌림을 이겨내기 위해 벌이는 자기방어적 기괴함, 관료적인 학교, 시즌 1에서도 언급된 주제인 편견. 그런 점에서 극으로서의 구성은 시즌 1이 나았을지 모르지만, 주제적인 확장성 측면에선 시즌 2가 나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긴 하지만, 청소년이 보고 생각해보면 좋을 주제다. 시즌 3가 나올 것을 확신한다.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를 말할 때 당연히 떠올리는 사람은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 테드 창이다. 하지만 이제 떠올리는 사람을 바꿔야할지 모른다. '종이 동물원'(황금가지)의 켄 리우다.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불만이 좀 있었다. '이건 보르헤스가 7쪽 정도로 쓸 글을 50쪽으로 늘려놓은 것 아닌가?' 사변이나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선 삐걱대는 관절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켄 리우는 다르다.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그걸 능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때론 너무 능숙해 '반칙'이란 생각도 든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이 그런 느낌이다.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 어머니를 무시하고 멀리하다가, 뒤늦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이런 이야기를 읽고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불쌍한 엄마' 이야기를 자주 쓰면 안된다. 동화 속 주인공이 궁지에 몰렸을 때 꺼내드는 비밀 주머니처럼, 프로페셔널한 작가라면 평생 단 한 번만 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종이 동물원'은 재미있지만 조금 미심쩍었다면, 이어지는 단편들은 훌륭하다. 예를 들어 '레귤러'는 퇴직한 중국계 여성 경찰이 주인공이다. 이 시대에는 '레귤레이터'라 불리는 장치가 개발돼 있다. 이는 중추 신경 어딘가에 이식하는 장치로, 감정적인 반응을 조절한다. 그러므로 경찰, 판사 등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한 이성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이식해야 하는 장치다. 특정 직업군의 사람에게 분명 도움이 되는 미래의 가상 기계 장치지만, 작가는 이를 역으로 인물의 단점, 소설의 소재로 활용한다. 레귤레이터로 가질 수 있는 능력의 양가적 면모를 모두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를 쥐락펴락한다. 깊이 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잘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이 주인공을 향후 장편에 재등장시킬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게 한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이나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파'는 조금 더 사변적인 소설이다. 생명체의 존재 양상, 인지의 다양한 방법 등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핀다. 순수한 지적 즐거움을 위한 소설이다. 반면 역사에 뿌리 박은 단편도 꽤 있다. '파자점술사'는 미국의 반공정책이 현대 대만에 미친 비극,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731부대와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는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와 뉴딜 정책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이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미국과 일본, 중국을 잇는 태평양 횡단 지하 터널을 제안하고, 이에 따라 2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다. 물론 전쟁은 없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착취는 그대로였고, 공산주의자 포로들과 식민지의 징용인들, 위안부들에 대한 인권 유린은 2차 대전이라는 분기점에 의해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혔다. '모노노아와레'는 애상에 젖은 일본적 미의식과 우주 공간에서의 영웅적 희생을 정밀하게 교차했는데, 하이쿠처럼 어느 한 부분 빼기 힘든 꽉 짜여진 소설이다. 켄 리우의 단편 선집과 장편이 조만간 나온다고 한다. 꾸준히 살필 예정이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다섯 번째 시즌이 신기한 시도를 했다. 12월 28일 공개된 첫 에피소드 제목은 '밴더스내치'. 사실 '블랙 미러'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이긴 한데, '밴더스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이 신기하다. '밴더스내치'는 간단히 말해 인터액티브 영화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밴더스내치'가 인터액티브 영화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 가지 옵션 중 10초 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항상 선택할 자세를 취하라고 일러준다. 난 집에서 PS4로 넷플릭스를 보았기에, 이 기계에 딸린 듀얼쇼크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대배경은 1980년대 초반. 주인공 스테판은 '밴더스내치'라는 소설을 게임으로 옮기려 하는 초보 개발자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정신착란에 빠져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밴더스내치'는 독자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이 다른 길을 걷는 소설이다. 아마 "이러이러한 선택이면 00쪽, 다른 선택이면 xx쪽으로 가시오" 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스테판은 게임 출시를 위해 밤낮으로 코딩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극적 사고로 사망한데 대한 죄책감과 원망을 갖고 있는 스테판은 작업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조금씩 정신을 놓는다. '밴더스내치' 게임 속 주인공이 게이머의 손에 의해 이런 저런 선택을 하듯, 자기도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의 게임회사 사장과 천재 개발자, 그리고 초보 개발자 스테판(왼쪽부터)

작품을 보기 전에는 결정적인 몇 가지 선택지만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반부터 선택지가 많다. 아침 시리얼로 무얼 먹을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떤 음악을 들을지도 선택해야 한다. 관객이 한 가지 옵션을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대로 그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 과정의 편집에 버퍼링이나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다. 아침 식사나 음악에 대한 선택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스테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난 어쩌다가 두 가지 엔딩을 보았다. 하나는 스테판이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떠나는 선택을 한 뒤, 성인이 된 스테판이 상담가와 상담하다가 갑자기 죽는 엔딩, 다른 하나는 스테판이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에 갇힌 뒤 그의 게임이 출시되지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하는 엔딩이다. 이미 해외 사이트에는 '밴더스내치'의 선택에 따른 플로우차트가 올라있다. 게임도 잘 만들고 스테판의 정신도 멀쩡한, 확실한 해피엔딩은 없는 것 같다. 스테판은 환각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정신과에서 주는 약을 먹고 밋밋한 게임을 만들거나, 약을 먹지 않고 조금 나은 게임을 만들지만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 시신을 토막내고 엄청난 게임을 만들거나 하는, 그런 엔딩들이 소개돼 있다. '블랙 미러'식 엔딩이라고 할까.  (외신을 보면, 다섯 가지 주요 엔딩이 있다고 한다.)

선택에 따라 결말에 너무 빨리 이르면, 친절하게도 앞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안내한다. 내가 두 가지 엔딩을 본 것도 이렇게 선택을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성격에 따라 자극적이고 흥미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상담가 만나고, 주는대로 약도 먹고, 자살도 하지 않으려 하고, 게임 회사 사장 말도 잘 듣다보니 자꾸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선택을 되돌려야 했다. 

이렇게 쓰다보니 매우 우울하고 무서운 이야기 같은데, 의외의 유머 코드도 있다. 스테판에게 지금 자기를 조종하는 것이 '넷플릭스'라고 알려주는 선택이다. 80년대의 스테판은 물론 넷플릭스를 모른다. 그러면 넷플릭스가 무엇인지 조금 더 설명해주는 옵션도 있다. 스테판이 천장을 보면서 "넷플릭스가 뭐야!"라고 외치는데 조금 웃긴다. 

넷플릭스 시리즈 속 주인공이 대사로 넷플릭스를 언급하는 건 자기반영적 유머다. 인간에게 자유의지 같은 건 없고 누군가(신,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닌 외계인 등)의 조작을 따라 살아간다는 생각은 종종 만나는 아이디어다. 넷플릭스는 그들의 첫 인터액티브 영화를 인터액티브 매체 자체에 대한 영화로 만들었다. 영리하고 흥미로운 선택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영화가 지속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해외 언론에 '밴더스내치'에 대한 언급이 꽤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초기 반응은 괜찮은 거 같고(뉴욕타임스는 '시청자가 권력을 얻었다'고 표현), 넷플릭스나 다른 회사가 인터액티브 영화를 몇 편 더 만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처럼 자기반영적인 영화를 계속 만들수는 없을 것이니, 그러면 영화의 인터액티브란 것이 관람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나만 해도 '밴더스내치'가 흥미로울지언정 여느 '블랙미러' 시리즈처럼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다. 프레임 자체, 프레임 바깥 세상을 자꾸 의식하게 만드는 건 전통적인 극작에서 금기다. 아마 이런 인식은 '작품'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에 근거했겠지. 하지만 배우가 관객을 향해 직접 말하거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건 매우 드물게,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테크닉이다. 관객(독자)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완결된 창작자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에 호응하거나 반대할 뿐, 그 세계관과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에 동참하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한국 드라마야말로 가벼운 인터액티브 제작방식을 선보였는지도 모른다. 초반 몇 회분만 찍어놓고 시작한 뒤 시청자 여론을 보고 주인공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애초 작가는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결말을 쓰고 싶었지만, 극에 몰입한 시청자들이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주인공을 살리는 결말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그런 작품이 좋을 리가. 게다가 현대의 관객들은 이미 인터액티브한 또다른 매체에 충분히 익숙하다. 바로 게임이다. 매체와의 인터액티브한 상황을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를 보기보단 게임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제임스 P 호건의 1983년작 SF '생명창조자의 율법'(폴라북스)을 읽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중세 지구 수준의 문명을 갖춘 로봇 생태계가 발견된다는 전제가 흥미롭다. 폰 노이만의 무한 자기복제기계 개념에 근거해 타이탄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번식한 기계 생태계를 묘사하는 프롤로그가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하기도 하다. 

발달한 지구인과 그에 뒤쳐진 기계의 구도는 제국주의 서구와 피식민지 비서구 구도의 명확한 패러디다. 제국주의 정책을 편 서구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적,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듯, 지구인들 중에서도 '탈로이드'(타이탄의 기계 개체를 이렇게 부른다) 세계를 전적인 자원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있고 탈로이드를 독자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해야할 개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지동설이나 훗날의 진화론이 종교 기득권층의 탄압을 받았듯, 탈로이드 세계에서도 실험과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사유는 배척받는다. 억압적인 국가, 비교적 자유롭게 사상을 보장하는 국가, 과학자 탈로이드, 종교 탈로이드 등이 엮여 펼치는 갈등이 다른 한 축이다. 

다만 지구의 중세를 패러디한 탈로이드 세계의 묘사에는 패러디 이상의 새로운 통찰은 없어 보인다. 인간이 기계로, 지구가 타이탄으로 바뀌어 서술될 뿐이다. 모세가 십계를 받는 장면의 묘사도 조금 웃길 뿐이다. 기적과 영성을 믿고 경전의 문자적 해석에 치중하는 한 탈로이드가 결국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전개는 '역시 SF는 과학의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유리 겔라를 연상케하는, 심령술사를 자처하는 잠벤도르프를 지구인측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독특하다. 잠벤도르프는 물론 진짜 초능력을 가진 건 아니고, 유능한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피관찰자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많이 모으는 능력, 이를 대중 앞에 극적으로 연출하는 능력을 가진 엔터테이너다. 우주탐사 기업의 진짜 목적을 안 잠벤도르프는 탈로이드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우려 한다. 작가는 초능력, 영성, 종교의 힘 등은 믿지 않는 대신, 이미지 연출이나 여론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있다. 초능력자가 아니라 그 어떤 권위 있는 종교인이라도, 결국은 인간의 논리적 취약성, 결핍, 의존성을 이용하는 엔터테이너라고 여기는 듯하다. 





***스포일러 있음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는 대체적 평가대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그 스핀오프 작품 중에서도 못 만든 편에 속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133분은 그리 긴 상영시간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유독 길게 느껴진다. 영화가 이렇게 제작된데에는 짐작가는 이유는 있다. 워너브라더스는 '신비한 동물' 시리즈를 격년에 한 편 꼴로, 모두 5편 선보이겠다고 공언했다. 5편의 시리즈를 동력을 잃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선 서사가 유장하고 굴곡지게 이어지고, 캐릭터는 충분한 깊이를 갖출 준비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작진은 '신비한 동물' 2편인 이번 영화에서 그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2편은 1편처럼 신비한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그 특성을 현시해 관객의 시선을 모으지 않고, 이렇다할 사건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저 1편에서 간략히 소개된 그린델왈드, 크레덴스 등 인물들의 개인사를 조금 더 보여주고, 내기니, 덤블도어 같은 새 캐릭터를 소개하며, 1편에서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 퀴니 같은 인물에게는 전혀 새로운 진로를 제시한다. 그래서 신비한 동물들과 마법을 보러왔던 관객들은 난데없는 '가족 로맨스'를 지켜보게 됐다. 말이 가족 로맨스긴 한데, "알고 보니 형제" "알고 보니 남매"로 이어지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가계도는 한국식 '막장 드라마'에서도 익숙하다. 

그래도 몇몇 배우의 퍼포먼스는 언급할만하다. 에디 레드메인이 '덕후 연기의 일인자'임은 다시 증명됐다. 이번 영화에선 뉴트 스캐맨더의 학창 시절도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방학 때도 집에 안가고 학교에 남아 동물을 돌보는 학생이었다. 사람보다, 마법사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듯한 그는 대화를 할 때도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45도 각도 아래로 시선을 깐 채 대화하는가 하면, 좀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활보하고, 마법과 동물 돌보기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제도에 속해 공식적인 일을 하기는 거부한다. 이 때문에 가족과도 다툴 정도로 고집이 센 인물이다. 이런 '양덕'을 연기하는데 레드매인 말고 다른 배우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조니 뎁은 악당 그린델왈드로 본격 등장한다. 가위손, 에드 우드, 윌리 웡카 같은 팀 버튼과의 협업작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당장 잭 스패로우 연기만 봐도 조니 뎁이 기괴하게 과장된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하는데 재능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린델왈드도 그렇다. 이번 영화에서도 출연 분량이 절대적으로 많진 않아 보이는데, 감옥에 갇힌 첫 장면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묘지에서의 연설 장면에선 좀 뻔한 논리(우리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을 더 큰 악에서 구하려 할 뿐이다) 에도 살짝 설득된다. 악 그 자체였던 볼드모트와 달리, 그린델왈드의 행동엔 그럴싸한 논리를 제공한다는 점이 '신비한 동물' 시리즈의 특색 같기도 하다. 반면, 그린델왈드의 카운터파트라 할 수 있는 주드 로의 덤블도어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만일 둘의 역할을 바꿨다면 주드 로가 조니 뎁만큼 할 수 있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덕중의 덕,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

설득력있는 악당 그린델왈드(조니 뎁)

허허실실 덤블도어(주드 로)

문제의 내기니(수현)와 크레덴스(에즈라 밀러).

 



***스포일러 있음. 

SF 업데이트의 일환으로 중국 소설 '삼체'(류츠신, 삼체)를 읽다. 중국 SF로는 처음으로 2015년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읽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접한 '삼체'라는 게임 공간의 묘사가 그렇다. '삼체'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인데, 세 개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움직여 안정적인 기후기와 불안정한 기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게이머는 이 공간의 규칙을 파악해 가급적 문명을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주왕, 복희, 코페르니쿠스, 뉴턴,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 등(의 아이디를 쓰는 게이머)이 등장해 세계의 규칙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때마다 게임은 종료돼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제왕과 학자가 얽혀 우주의 법칙을 논하는 상황을 따라가긴 역부족, 요령부득이었다.  

하지만 게임 공간 묘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흥미롭다. 왕먀오라는 물리학자의 눈 앞에 갑자기 카운트다운이 보이면서 시작한다. 왕먀오는 이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리고 예원제라는 원로 물리학자의 삶을 접한다. 예원제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역시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아버지를 잃었다. 10대의 홍위병들은 빅뱅, 상대성이론 같은 '반동이론'을 가르쳤다며 아버지를 쳐죽였다. 살아남은 예원제는 한 미사일 기지에 배치되는데, 이곳은 사실 군사 목적이 아닌 외계인과의 교신을 위해 세워졌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던 예원제는 어느날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는다. 외계인은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전제한 뒤, 자신의 세계가 안정적인 환경을 가진 행성을 찾고 있으며, 만일 지구를 발견한다면 그곳을 점령하려 할 것이고, 그러니까 다시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메시지를 발신하지 말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지구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고, 곧 자신의 행성인들이 지구를 점령하려 찾아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던 예원제는 곧바로 메시지를 보내 어서 와서 지구를 정복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예원제를 수장으로 하는 삼체 조직은 급진적 지식인 모임이자 종교 조직으로 진화한다. 구원자 외계인을 기다리는 종교적 열정과, 지구의 종다양성을 훼손하는 인간을 저주하는 극단적인 환경론 등을 아우르는 조직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지구의 각 나라 정부는 삼체 조직을 일망타진하려 하지만, 삼체 행성에선 이미 지구 정복을 위한 우주선을 보낸 뒤였다. 거리가 멀기에,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400년이 남았다. 삼체 행성에선 지구의 문명이 자신들을 막아낼만큼 발달할 것을 우려해. 이미 양성자 2개를 지구에 쏘아보낸 상태였다. 이 양성자는 정확한 물리적 측정을 방해하기에, 지구에선 이제 실험에 근거한 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다. 물리학을 발달시키지 못하면, 문명도 발달할 수 없다. 

문화혁명의 기과한 열정과 그에 대한 환멸, 이에서 파생된 인류에 대한 저주, 그 저주의 수신자가 되는 외계인, 400년 뒤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구인. 현재의 상황, 과거의 오류, 미래의 전망을 연결시키는 솜씨가 능란하다. 400년 뒤라는 멸망 시점을 100년 혹은 50년 혹은 10년 뒤로 하면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혁명의 광기에 대한 성찰이 성숙하다(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인가).  과학적 관찰을 문명 발달의 근원으로 삼는 작가의 인식이 확고한데,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넷플릭스 영화로도 제작된 '서던 리치' 시리즈 1권 '소멸의 땅'을 읽다가 '뉴 위어드'라는 장르 이름을 알게 됐다. SF의 하위 장르라고 하는데, 그냥 '위어드'의 원조는 러브크래프트라고 한다. 그러니 '뉴 위어드' 분위기가 대략 짐작이 됐다. 호러 같다가 판타지 같다가 SF 요소도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같지만 읽다 보면 끌리는, 그런 이야기인 것으로 마음대로 생각했다. 

내친 김에 '뉴 위어드'를 더 읽어보기로 했다. '서던 리치'의 제프 밴더미어와 함께 차이나 미에빌이 최근의 대표적 작가라고 한다. 그의 '이중도시'(아작)를 찾아 읽었다. 미에빌은 특이하게도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인류학을 공부했고, 런던정경대에서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다. 톨킨류의 권선징악적 판타지에 대한 혐오를 여러 차례 표현했고, 소설이 길기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이중도시'는 다행히 한 권이지만, 그래도 576쪽에 이른다. 

원제는 'The City and The City'다. '이중도시'라는 번역제목은 고심을 거듭한 결과로 보여 정확한 것 같다가도, 소설의 미묘한 느낌을 못살렸다는 느낌도 든다. 왜냐하면 '이중도시'는 경찰, 테러리스트, 범죄조직이 등장하는 경찰 스릴러 구조를 갖고 있지만, 책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도시 자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셀, 울코마라는 두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도시의 존재 양상이 말못하게 이상하다. 이 도시의 기묘한 개념을 살리는 것이 '이중도시' 번역의 목표이며, 이 도시 설정에서 재미를 느껴야 책을 읽는 재미도 있다. 캐릭터나 서사는 도시 개념 자체만큼 흥미롭게 직조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책이 다소 길다는 생각도 든다. 개념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면, 그 개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들을 읽으며 보르헤스 소설을 10배로 늘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중도시'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100배쯤 늘린 책처럼 읽히기도 한다. 

베셀과 울코마는 가상 도시지만, 파리, 뉴욕 등의 지명, 맥도날드 같은 상품명도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중도시'는 일종의 평행세계를 다룬다. 베셀과 울코마는 인접 도시이자 과거 적대한 적이 있어 서로 앙심을 품은 도시인데, 이런 설명으론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베셀과 울코마는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처음 읽으면서는 설정이 너무 이상해 같은 공간에서 유령처럼 두 도시가 겹쳐있다는 의미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고 두 도시의 물리적 공간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설정이다. 쉽게 말해 앞마당은 베셀인데 뒤에 붙은 집은 울코마이고, 카페는 베셀인데 바로 옆의 관공서는 울코마다. 여기까지라면 그럴 수 있는데 웃긴건 이 두 도시가 서로를 못본채 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베셀과 울코마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안보는' 교육을 받는다. 베셀 사람이 길을 걷다가 울코마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럴 조짐이 있으면 안보고 지나간다. 이런 훈련이 잘 돼있어 어느 순간 두 도시의 사람들은 상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같은 도로를 달려도 베셀 차와 울코마 차는 세심하게 서로를 피한다. 두 도시를 이동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검문소가 위치한 어느 터널에 가서 출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렇게 출국 절차를 밟은 뒤 입국한 곳이 원래 자기가 사는 동네 주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법적, 심리적으로 이미 타국에 있기에, 한발만 내딛어도 들어설 수 있는 자기 동네에 갈 수가 없다. 만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상대 도시 영역에 들어간다면? 두 도시의 '침범' 행위를 감시하는 '침범국' 요원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한다. 침범국은 양 도시 경찰의 힘을 뛰어넘은,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으로 그려진다. '이중도시'의 얼개는 베셀 경찰인 주인공이 두 도시에 모두 연루된 살인사건을 침범국에 넘기려다 실패하고, 결국 베셀과 울코마를 오가며 직접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이다. 

서구의 많은 독자들은 '이중도시'를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갈등, 에루살렘 같은 도시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하지만 미에빌은 소설 뒤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독해시도를 거부한다. 

"어떤 이야기가 정말로 무언가 다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그 다른 뜻이란 걸 아주 직설적으로 완벽하게 함축할 수 있다면, 그냥 그걸 말해버리면 됩니다. 소설이란 건 에둘러 표현하며 넘치게 포장할 수도 있고 독특함을 부여할 수도 있기 떄문에 흥미로운 겁니다. 소설을 우화로 해독하는 행위는 이야기에서 너무 많은 것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너무 적은 걸 읽어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소설보다 인터뷰가 더 재미있었다. 





**스포일러 조금(그런데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간게 스포일러일까?)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을 보고 몇 가지. 


1. '퍼스트맨'의 초반부 우주 유영 장면에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검고 광막한 우주 공간을 느리고 우아하게 유영하는 비행체의 모습은 모두 스탠리 큐브릭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소심하게 주장한다). 나른하고 아름다운 배경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큐브릭이 우주에서 트랜스 상태로 도달하는 방법은 관념이었지만, 셔젤은 철저히 물질이다. 큐브릭의 우주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한 끝에 제 머리 속의 관념 혹은 외계의 초인간적 존재를 만난다. 하지만 셔젤의 우주인들은 우주선의 예기치못한 사고로 인해 제자리에서 급회전을 하거나 엄청난 진동을 경험하면서 트랜스로 향한다. 영화 속 기자들은 우주를 경험한 이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해 묻지만, 이들 우주인은 철저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로 묘사된다. 닐 암스트롱은 우주에 기념품을 가져가느니 연료를 조금이라도 더 싣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2.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서의 솜씨를 보여줬듯, 셔젤은 엇박에 능한 재즈 뮤지션처럼 능란하게 서사의 리듬감을 과시한다. 난 두 가지 점에서 그 리듬감을 느꼈다. 자넷 암스트롱(클레어 포이)은 집에서 남편 닐(라이언 고슬링)의 안부에 대해 늘 노심초사한다. 나사의 배려로 라디오를 통해 우주와의 교신 내용에 대해 듣지만, 그 내용이 항상 유쾌하지만은 않다. 억지로 근심을 감추는 자넷 주변에는 두 명의 어린 아들들이 맴돈다. 아이들은 종종 천진난만하게 자넷의 근심 속으로 끼어들고, 아빠가 죽음의 목전에 다가섰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가 놀아도 되요?"라고 묻곤 한다. 닐이 달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날, 큰 아들만이 아빠가 살아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남편과 아내, 아내와 아들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사이의 감정의 엇박이 아이러니를 창출한다.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한 아폴로 계획에는 수많은 실험이 필요했고 그만큼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퍼스트맨'은 그 과정을 매우 공들여 보여준다. 그런데 암스트롱이 달에 가는 대목은 매우 재빠르게 처리한다. 암스트롱이 늦은 밤 집을 나선다. 우주인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이 짧게 삽입된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우주선에 탑승한다. 어떤 다짐도, 결의도, 절차도 생략한다. 우주선이 달에 내리고 암스트롱이 표면에 닿는 장면은 천천히 묘사하더니, 귀환하는 대목은 다시 생략한다. 또다른 엇박이다. 

3. 할리우드의 우주 영화에서 흔한, 나사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 치며 환호하는 결말부는 없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지 않는 듯 연기한다. 라이언 고슬링은 이미 이 분야의 특기를 여러 차례 자랑했다. 셔젤의 전작 '라라랜드'에서 그랬고,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에서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대사와 표정이 적었다. 그러면서도 할 연기는 다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클레어 포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걱정과 분노에 휩싸여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근엄한 척 위장하는 건 군주들의 특징 아닌가. 

4. '퍼스트맨'은 '위플래쉬'나 '라라랜드'보다 주제적으로 확정되고, 인간에 대한 시선에 깊이가 있으며, 서사의 세련미나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앞선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달에 착륙한 닐이 어린 나이에 죽은 딸을 회상하고(흔한 홈비디오 삽입 형식), 딸의 팔찌를 달의 분화구 속 어둠으로 던지는 대목은 좀 상투적으로 보인다. 닐이 공적인 임무, 사적인 감정을 모두 추구하는, 피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미 영화 속에서 드러났다. 달에 가서까지 딸과의 엣 추억을 떠올리게 한 건, 대중영화로서의 '킬링 파트'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과잉이었다. 내내 절제하던 영화가 이 대목에서 누선을 자극하려 애쓴다. 끝까지 쿨했으면 좋았을걸.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본 김에 내처 조너선 에임즈의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프시케의 숲)까지 읽었다. 소설이 나온 건 2013년인데 4년만에 영화화됐으니 상당히 빨리 진척된 셈이다. 영화가 89분으로 짧았는데, 소설 역시 152쪽으로 짧다. 분량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복잡한 미스터리를 감추어 두었거나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 일은 없다. 하드보일드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난다. 심지어 '이제 절정부로 가겠군' 하는 순간에 끝나버린다. 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구성인데, 실제 속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소설의 확장판이 2018년 나왔다고 하는데, 원판의 결말에서 더 나아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다른 부분은,


-주인공 조의 트라우마의 근원이 조금 더 드러난다. 그런데 이건 소설과 영화의 차이라고도 할 수 없긴 하다.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통상 생략과 축약을 거치니까. 그러니까 소설에선 조의 트라우마가 활자로 좀 더 구체화됐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영화에서의 짐작대로 조는 군인이었고, 이후 FBI에서 성매매전담 요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지독한 가정폭력범이었고, 아들 조를 떄리거나 아니면 아내를 때렸다. 

-영화 속 조가 시적인 킬러인 반면 소설의 조는 좀 더 실용적인 킬러다. 영화에서 조는 자신이 공격해 죽어가는 남자 옆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상당히 인상적인 장면), 어머니의 시신을 물에 떠내려보내기 위해 상복을 입고 강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소설에선 전자의 장면이 아예 없고, 어머니의 시신은 절벽 같은 곳에서 물에 던져버린다. 린 램지는 왜 조가 자기 총에 맞아 죽어가는 남자의 독백을 듣도록 했을까. 자기가 죽여놓고 종부성사를 하는 사제처럼 구는, 듣도보도 못한 살인자다. 

-무엇보다 피해자인 니나의 아버지 보토 상원의원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 소설 속 보토는 영화보다 훨씬 극악한 악당이다. 영화에선 딸의 성착취를 막아내지 못한 보토가 자살하지만, 소설에서 자살하는 것은 동료 상원의원이다. 오히려 보토는 정치적 야심을 위해 딸을 악당들에게 넘긴 것으로 드러난다. 아버지가 악당이었으면 더욱 극적이었을텐데, 굳이 제3의 악당을 설정한 램지의 선택의 이유는? 

-영화에서 니나는 악당의 목을 면도칼로 베어 스스로 죽인다. 경호원 몇몇을 처리한 뒤 도착한 조는 결국 이미 죽은 악당을 발견할 뿐이다. 그때까지 엄청난 액션을 선보인 주인공이 악당을 직접 처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 영화의 관습을 어긴다. 하지만 소설에서 악당을 죽이는 것은 당연히 조다. 

-영화에서 구출된 니나는 조와 함께 낯선 식당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둘은 어딘가로 잠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 속 조는 아직 니나(소설에선 리사란 이름)를 구출하지 못했다. 보토 의원의 이마에 망치를 박아넣은 조가 리사를 데려간 조직을 처단하려는 의지를 다지면서 소설은 끝난다. 마치 결말을 내지 않은 채 끝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선 소설의 결말이 비전형적이다. 결국 영화와 소설은 각기 다른 부분에서 전형성과 비전형성을 보이는 셈. 









오래 전부터 제목을 들었던데다가 얼마전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읽은터라 비교해보려 손에 들었는데, 독재자 소설은 빼고 이 책만 언급해도 되겠다 싶었다. 중국 작가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는 오랜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긴 책이다. 조금 더 집중했다면 한 자리에서 350여쪽을 읽어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

가상의 고대왕국 섭국이 배경이다. 왕이 승하한 뒤 여러 명의 왕자 중 열네살의 단백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장자 단문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 모두가 예상했던 터였기에, 단백의 왕위 계승은 본인조차 놀란 일이었다. 마음도, 자질도 준비되지 않은 단백은 서로 사이가 나쁜 할머니와 어머니의 수렴청정 아래 무기력한 제왕으로서의 나날을 보낸다. 어린 섭왕은 선왕의 후궁들의 혀를 자르거나, 충성스러웠던 패장을 활로 쏘아 죽이거나 하는 식의 포악한 짓도 하지만, 이 제왕은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였다. 무해한 궁녀나 신하나 군인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청년으로 자라난 섭왕은 유일하게 사랑했던 후궁과의 행복한 결혼도 이루지 못한 채, 쇠락하는 국가의 운명을 방관한다. 

3부에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방향을 튼다. 철지부심한 이복형제 단문이 군사를 몰고 돌아오자, 섭왕은 왕위에서 쫓겨난다. 새 섭왕 단문은 구 섭왕 단백을 죽이지 않고 평민으로 살아가도록 경성에서 쫓아낸다. 단백은 평소 동경하던 줄타기 광대의 길을 걷는다. 치국하고 평천하했으나 평화로운 사적인 삶을 누리지는 못한 늙은 제왕의 회고록을 생각하고 읽어나가던 나같은 독자는 어리벙벙했다. '왕이 광대가 됐다'는 급격한 전환이 어색하고 작위적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급커브 구간을 능숙하게 통과한 뒤 다시 액셀레이터를 밟는 레이서처럼, 광대로서의 삶도 흡입력있게 써나간다. 제왕의 옷이나 권력이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심 생각해왔던 단백은, 고공의 줄 위에서 구경꾼들을 내려다본 뒤에야 비로소 손에 딱 쥐어지는 권력을 향유한다. 단백의 재능은 국가 경영이나 정치적 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데에 있었다. 물론 잔학하게 꿈틀대는 세상은 단백이 행복한 외줄 광대의 삶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단백의 남은 반평생이 간략하게 정리된다. "나는 남은 절반의 생을 고죽산의 고죽사에서 지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논어'를 읽고 또 읽으며 무수한 밤을 보냈다. 나는 어떤 날은 이 성현의 책이 세상 만물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고 느꼈고, 또 어떤 날은 거기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느꼈다"로 끝난다. 연기처럼 무상한 삶이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요약된다. 단백은 로마의 현제가 아니어서, 인생이나 국가나 세계에 관한 어떤 지혜도 남기지 않지만, 그래서 어쩌면 '나, 제왕의 생애'는 "비 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같이 어지럽고 애처롭고 허무한 책이지만, 그런 몽환의 세계관에 빠졌다 나오는 것도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다. 난 더 보람있고 유익하고 능률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