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662건

  1. 고통스러운 삶에 익숙해지기, '부서지기 쉬운 삶'
  2. 이것저것 섞여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 '아사코'
  3. 군주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4. 80일간의 어둠, '극야행'
  5. 인사이트 있는 교양서, '앞으로의 교양'
  6.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7. '왕좌의 게임' 작가의 호러SF, '나이트플라이어'
  8. 완결에 대해, '알리타: 배틀 엔젤'과 '킹덤'의 경우
  9. 50대 액션 스타, '폴라'
  10. 청소년이 볼 수 없는 청소년물, '아메리칸 반달리즘'
  11. 히트 예감! '종이 동물원'
  12. 인터액티브 영화의 시작?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13. 패러디와 통찰 사이, '생명창조자의 율법'
  14. 마법 대신 가족 로맨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15. 문화혁명과 SF의 상상력 '삼체'
  16. 가장 이상한 도시들,'이중도시'
  17. '퍼스트맨'에 대한 몇 가지 생각
  18. '너는 여기에 없었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
  19. 비 오는 밤의 꿈같은 인생, '나, 제왕의 생애'
  20. 트라우마와 킬러와 소녀, '너는 여기에 없었다'
  21. 앞선 문명으로부터 뒤처진 문명에게,'중력의 임무'
  22. 짓다만 성, '안시성'
  23. 스와핑, 섹스봇, 신경개조, 감옥실험...'심장은 마지막 순간에' (1)
  24. 인간관계의 총합 '검의 폭풍'
  25. 음악만 들어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26. SF? 로맨스! '스타터스'
  27. 난삽하지만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한, '유령퇴장'
  28. 지속가능하지 않은 승리와 열정 '보리 vs 매켄로'
  29. 투명성의 지옥 '아논'
  30. 커다란 농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미국의 철학자 토드 메이의 '부서지기 쉬운 삶'(돌베개)을 읽다. 원제는 'A Fragile Life: Accepting Our Vulnerability'다. 쉽게 말해 '철학 에세이'이라 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출판계에서 '철학 에세이'라는 명명이 주는 어감보다는 무거운 책이다. 

저자는 철학이 이론의 전개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메시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강단의 학자들이 까다로운 개념어로 세심하게 다루는 '철학'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모두 삶의 메시지를 전했다. 메이는 해탈하지 못한 모든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 상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색한다. 메이는 '희박하나마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철학적 관점 네 가지에 주목한다. 불교, 도교,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다. 

불교는 만물이 변화한다고 본다. 여기 있는 노트북 컴퓨터와 테이블도 언젠가는 썩거나 부서져 다른 무언가로 바뀐다. 나는 파도 같은 존재다. 파도가 솟구칠 때는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바다의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삶의 괴로움은 우주가 하나의 변화의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제로는 그저 이 과정의 한순간에 불과한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한 방법이 명상이다. 명상은 외부에서 내부로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집착을 줄여나가는 훈련이다. 물론 불교도도 타자를 연민한다. 다만 그러한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동정이 아니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정에 기반한다. 

도교는 천지만물의 근원인 '도'를 말한다. 물론 '도덕경'의 첫 구절처럼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도는 인간의 언어가 쉽게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무위'(inaction 혹은 nonaction으로 번역된다고)를 통해서만이 우주를 과정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장자는 말한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걱정과 탄식, 변덕과 집착, 경박함과 방종, 아첨과 아양은 음악 소리가 텅 빈 곳에서 나오고 버섯이 습기에서 생겨나듯 밤낮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모른다. 두어라! 두어라!"

스토아주의자들의 시각은 불교와 조금 비슷하다. 이들은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에 최대한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익살을 섞지 말고 품위 있게 삶에 맞서라. 억눌리지 말고 희망을 높게 잡지도 말라. 승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극복하는 데 있다." 세상 온갖 악과 부조리와 고통은 예고 없이 우리를 습격하지만, 우리에겐 이에 맞설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세계의 관계, 즉 실존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통제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조차 체념적으로 '명상록'에 적었다. "매일 아침 너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나는 참견하는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을, 오만한 사람을, 신의 없는 사람을, 악의 있는 사람을,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이 역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태도와 관련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는 흔히 '향락주의자'라고 번역되지만, 맛있는 음식, 좋은 자동차,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에피쿠로스는 다음처럼 적었다. "욕망의 일부는 자연적이고, 일부는 근거가 없으며, 자연적 욕망에는 필연적인 것과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필연적인 욕망에는 행복을 위해 필연적인 것이 있고, 육체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 삶 자체를 위한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향락주의자'라는 명칭은 이 모든 욕망을 뭉뚱그려 합친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비싼 차를 사고 싶다는 '근거 없는 욕망'을 배격하고,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욕망, 예를 들어 '성욕' 같은 것도 자제하라고 권한다. (결국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전혀 향락적이지 않다.)  모든 향락의 끝인 죽음에 대해서는 어떨까. 심플하고 논리적인 답이 준비돼 있다.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감각에 존재하고, 죽으면 감각이 상실"된다. 

언젠가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고 있다. 책을 읽고 그에 연관된 책을 살피는 식이다. 강하게 의식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책을 짚는다. 그러므로 '부서지기 쉬운 삶' 이후에 읽을 책은 오랫동안 회사 책상에 꽂혀 있던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이다. 




**스포일러 있음

어제 오전에 극장에서 다섯명 쯤의 관객과 함께 '아사코'를 봤다. 영화가 너무너무 이상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했다. 서사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감정은 정확히 묘사됐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는 아니다. 이상한 흐름이 자꾸 생각나고, 왜 그리 이상하게 찍었는지 궁금하고, 스스로 해명해보고 싶다. 훌륭한 영화라는 뜻이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이상하다. 오사카의 아사코는 어느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말도 안되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사랑이이었다. 하지만 바쿠는 안정적이기보단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저녁에 빵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빵 사러 갔다가 동네 목욕탕에 들렀는데 거기서 만난 아저씨와 친해져서 그 아저씨 집에 가 만취하고 잔 뒤 빵은 주고 왔다....는 식이다. 결국 바쿠는 신발을 사러간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고 아사코의 내레이션을 통해 회상된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은 남겼다. 

2년 후, 아사코는 도쿄로 이사해 한 카페에서 일한다. 인근 회사의 직장인 료헤이라는 사람이 자꾸 아사코 앞에 나타난다. 놀랍게도 료헤이는 바쿠와 똑같이 생겼다(실제로 같은 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한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다가가지만, 아사코는 바쿠와 너무 닮은 모습에 자꾸 뒷걸음질친다. 사귀어 보려고도 하지만 마음이 온전히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이 잠시 두려움에 떨만한 지진이 발생한 날, 아사코는 료헤이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지진 묘사가 섬찟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하나도 안나오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혼란이 생생히 느껴진다. 거리 곳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후 5년간 둘은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료헤이는 성실하고 유머러스하며 다정다감하다.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질 사람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둘은 동일본대지진 피해를 입은 센다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 활동도 자주 한다. 주변 친구들도 그런 그들을 축복한다. 료헤이는 오사카 본사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청혼하기 전 빠진 에피소드가 있다. 바쿠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쿠는 그 사이 꽤 인기 있는 모델이 됐고, 아침 드라마에 나와 인기를 끄는 셀러브러티가 됐다. 청혼을 받은 순간, 아사코는 옛 연인 바쿠 이야기를 한다. 사실 바쿠가 료헤이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2년 전쯤 바쿠란 사람의 존재를 잡지에서 봤고,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사코가 자신을 처음 본 순간 멈칫한 이유도 이해했다고 말한다. 둘의 결혼은 문제 없이 진행될 것 같다. 오사카에는 창문에서 강이 바라다 보이는 집까지 구했다. 

아사코와 료헤이와 친한 친구들의 저녁 자리에 파국이 발생한다. 바쿠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료헤이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바쿠를 보고 놀란다. 바쿠는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펴 올린다. 2~3초쯤 고민하던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잡고, 둘은 그대로 나가버린다. 바쿠는 아사코를 차에 태우고 달린다. 부모님이 쓰지 않는 빈 집이 훗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자기 일을 대신할 사람은 많다며 휴대폰을 부서 던져버린다. 아사코도 돌아오라는 친구들에게 이별의 말, 사과의 말을 남긴 채 휴대폰을 던진다. 그렇게 자동차는 밤의 도로를 달린다. 

눈을 떠보니 새벽이다. 차는 방파제 근처에 서있다. 센다이 초입이다. 바쿠는 졸리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해서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파제 때문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아사코는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한다. 바쿠는 그러라고 한다. 차를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사코는 면허가 없다고 한다. 역까지 태워줄 필요도 없다고 한다. 바쿠는 그냥 떠나고, 아사코는 돈도 핸드폰도 없이 돌아간다. 

마침 센다이엔 평소 자원봉사를 하며 알고 지낸 지역 주민들이 있다. 한 할아버지가 돈을 빌려주면서도, 남자는 다른 남자와 놀다 들어온 여자는 용서하지 못하니 돌아가지 말라고 권한다. 하지만 아사코는 돌아가기로 한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이. 

아사코는 오사카의 료헤이 집을 찾아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전날 저녁이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혼집이 될 곳이었다. 아사코를 발견한 료헤이는 화를 내면서 무슨 낯으로 나타났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키우던 고양이는 버렸다고도 한다. 아사코는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앓아누웠다는 오사카 시절 고향 친구를 찾아가기도 한다. 활발하던 친구는 루게릭 병으로 침대에 누운 상태다. 아사코는 친구 어머니로부터 귀여운 반전이 담긴 옛 이야기를 듣는다.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의 집 앞으로 와 고양이를 찾는다. 사실 료헤이는 고양이를 버리지 않았고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아사코는 료헤이의 집으로 들어간다. 료헤이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다. 료헤이는 앞으로 아사코를 완전히 믿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사코는 수긍한다. 그리고 료헤이에게 덜 의지하겠다고 말한다. 둘은 베란다에 서서 비가 와 불어난 강을 바라본다. 료헤이는 물이 더럽다고 한다.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고 한다. 끝. 

자유로운 바쿠(위)와 성실한 료헤이(아래). 

처음엔 바쿠와 료헤이가 도플갱어인줄 알았다. 아니다. 도플갱어는 만나면 죽는데, 둘은 한 번 마주친다. 아니면 둘이 닮았다는 건 아사코만의 착각이었던가. 아니다. 바쿠와 사귀던 시절 아사코의 단짝 친구가 료헤이를 보고 똑같이 생긴 모습에 놀란다. 바쿠와 료헤이가 닮았다는 건 아사코의 주관이 아니라 제3자가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다. 

아사코는 다시 돌아온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바쿠를 외면하고, 오랜 시간 자신을 사랑할 료헤이를 찾기로 한다. 낭만과 현실의 대결에서 현실이 승리? 하지만 되찾은 현실이 그리 맑고 밝지만은 않다. 료헤이와 아사코의 마지막 대사는 시적이다. 강물은 더럽다. 하지만 아름답다. 폭우로 불어나 이것저것 뒤섞인 강물이지만 아름답다. 인간 관계는 단일한 감정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이나 숭배나 증오는 없다. 여러 가지 감정이 비율을 달리하며 섞이며 관계를 직조해나갈 따름이다. 최상의 잉꼬 부부라해도 미움이나 의심이나 권태의 싹은 마음 어딘가 뿌려져있다. 그것이 얼마나 자라나느냐, 자라났을 때 얼마나 현명하게 가지치기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실존인물인 영국 앤 여왕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어딘지 실제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 영화의 양식이 지금까지의 시대극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여왕이 중심인 영화야 많았지만, 그의 측근들까지 모두 여성으로 그린 영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왕과 두 여성 측근에 의해 조종되는 말에 불과하다. 권력있는 신하들조차 여왕 하녀의 술수에 놀아난다. 

세습군주국가의 많은 왕이 그러했겠지만,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꽤나 이상하다. 군주로서의 의무감으로 국정을 억지로 수행하지만,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국가를 운영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안아픈 데가 없어서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기괴한 컴플렉스까지 갖고 있다. 그 와중에 오랜 친구인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가 여왕 대신 국정 전반에 관여한다. 신분 상승의 욕구에 불타는 귀족 출신 하녀 에비게일 힐(엠마 스톤)이 여왕과 사라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에비게일, 여왕, 사라,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전쟁이 벌어지는 화려한 궁궐. 

여왕의 존재감은 크면서도 없다. 하녀와 하인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릴 때, 호화찬란한 침실을 마음대로 사용할 때는 궁궐의 주인이지만, 국정을 관할할 때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길 기다리는 꼭둑각시 인형 같다. 흥겨운 무도회를 갑자기 중단시키거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현악5중주단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사라의 뺨을 후려치더니, 곧 그녀의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다. 군주제 권력 시스템의 허점, 앤 여왕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허점을 파고드는 모리배들이 나타난다. 사라가 왜 그리 권력을 휘두르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사라는 마치 권력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양 자연스럽게 휘두른다. 반면 에비게일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다. 뚱뚱하고 성기가 작은 독일인에게 팔려가듯 시집간 경험이 있는 에비게일은 어떻게든 신분을 다시 상승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에비게일은 사라가 어떻게 앤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조심스레 살핀 뒤, 이를 업그레이드해 적용한다. 에비게일은 사라보다 젊고, 더 강한 동기부여가 돼 있다. 어쩌면 에비게일은 사라의 20여년전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더 페이버릿'은 무능해 보이지만 여전히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여왕을 중심으로, 획득하기도 다루기도 어렵지만 일단 쥐고 있으면 더없이 좋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두 여성의 이야기다.국가 운영의 큰 틀을 둘러싼 이념적 대결도, 셰익스피어식의 장엄한 궁중 비극도 없다. 누가 권력자의 비위를 잘 맞춰 환심을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뿐이다. 

두 차례 인상적인 롱테이크 클로즈업이 나온다. 앤 여왕이 무도회에서 사라의 춤을 보다가 조금씩 표정이 굳어가는 모습, 앤 여왕이 권력을 차지한 에비게일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며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모습이다. 그때 앤 여왕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올리비아 콜맨의 스산하면서도 무서운 표정으로 권력자 내면의 황폐한 풍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라와 에비게일, 두 여자가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쟁투를 벌였지만, 이 전쟁의 주인공은 결국, 당연히도 여왕이다. 여왕의 내면은 두 여자가 맞붙은 전쟁터가 됐다.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이 그 내면의 전쟁터 풍경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군주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묻는다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풍경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권력 일반의 속성에 대해서도 은근한 암시를 한다. 

아름다운 포스터. 


가쿠하타 유스케의 논픽션 '극야행'(마티)을 읽다. '극야'란 말이 낯설었는데, 대략 '백야'의 반대말이다. 북극 지역에서 해가 뜨지 않고 몇 달이고 밤만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논픽션 작가이자 탐험가인 가쿠하타는 북극 지역의 극야를 홀로 걷기로 하고 4년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한다. 부분적으로 직접 걸어 지형을 익히고, 곳곳의 창고에 식량과 물품을 저장한다. 100여년 전에야 북극점, 남극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는 경쟁들이 있었지만, 이제 지구 표면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고, 지구에 기록되지 않은 곳도 없다. 이제 탐험가는 어디를 가야할까. 가쿠하타는 극야행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탐험은 요컨대 인간 사회 시스템 바깥으로 나오는 활동입니다. 옛날에는 탐험의 목적이 지도의 공백을 채우는 것이었죠. 그때는 지도가 당대의 시스템이 미치는 범위를 도식화한 매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지도에는 공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탐험은 어떤 모습일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극야가 떠올랐습니다. 이번 탐험은 미답의 땅을 개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

매일 태양이 뜨는 건 얼마나 당연한가요. 우린 태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태양이 뜨지 않는 세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죠. 그 점에서 저는 극야 세계가 미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120일 동안 밤뿐인 세계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극야의 세계로 나간다면 현대인이 잃어버린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쿠하타가 북극의 극야를 80일간 헤맸다고 해서 어딘가에 '세계기록'으로 남을 리는 없다. 애초에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정이었으니까. 가쿠하타는 그저 스스로 세운 '탐험'의 정의에 따라 북극을 떠돈다. 누가 뭐라하든, 스스로 설정한 장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생의 한 절정기와 많은 돈을 투자한다. (가쿠하타는 극야행이 자신 인생의 절정기에 도전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탐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가쿠하타는 자기가 세운 목적을 이뤘을까. 쉬웠다면 책이 재미있을리 없다. 사람도 없고 불빛도 없는 끝없이 광활한 밤의 세계에서 인간의 감각은 혼돈에 빠진다. 작은 언덕이 거대한 산맥처럼 보이고, 바위 덩어리가 사향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쿠하타는 몇 번이나 지역을 걸어 눈과 발로 익혔지만, 어둠은 여전히 가쿠하타를 속인다. 가쿠하타는 일부러 GPS도 가져가지 않았다. 특수제작한 육분의는 극야행 초반부에 잃어버렸다. 나침반과 별의 위치에 의존해 대략적인 방향을 잡고 걸었다. 빛이 없어 공간감을 상실한 순간, 가쿠하타는 자신의 실체를 잃어버린다. 

개 한 마리가 그의 유일한 동행이다. 어둠 속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무렵 식량 저장고를 발견하지만, 북극곰이 털어간 지 오래다. 절망에 빠진 가쿠하타는 생존의 방법을 모색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개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개도 사료를 충분히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상태지만, 어쩔 수 없다. 책 후반부는 가쿠하타가 개를 잡아먹는 최후 수단만은 사용하지 않기 위해 야생동물 사냥에 전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물론 어두컴컴한 빙판 위에서 사냥이 잘 될 리는 없다. 

극한 고생이 이어지는 후반부는 처절하지만, 의외로 유머러스한 대목도 많다. 다 떠나서, 개 한 마리와 썰매를 번갈아 끌며 끝없는 어둠 속의 북극 지대를 헤매는 풍경만큼은 인상 깊다. 그런 체험을 들려준 사람은 아마도 없었으니까. 상상만해도 두렵고 외롭고 우울한 여정이다. 이런 탐험을 생각해내 실행하는 '예외적 인간'이 나타나는 사회도 대단하다. '인도방랑'의 후지와라 신야, 북극 사진가 호시노 미치오도 생각이 난다. 





스카쓰케 마사노부의 '앞으로의 교양'(항해)을 읽다.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의뢰로, 편집자인 스가쓰케가 미디어, 디자인, 건축, 경제, 문학, 생명 등 12개 분야의 명사와 월 1회 대담을 했고, 그 중 11개를 묶어서 책을 냈다. 11명 중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건축가 이토 도요,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였다. 각 대담의 분량이 길지 않고, '일본책은 정리를 잘한다'는 인상이 있어, 우연히 입수하고 얼마 뒤 읽기 시작했다. 대담이 2016년 9월~2017년 9월 진행됐으니, 비교적 최근의 양상과 흐름에 대한 정보를 기대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인사이트가 있었다. 각 대담자 당 길지 않은 분량이다보니 간략하고 단정적이라는 인상도 없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책에 기대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간결함이다. 사전 조사를 많이 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쉬운 질문부터 던져나가는 인터뷰어의 태도가 좋았다(인터뷰어로서 이상적인 자세다). 구루인 양 허세 부리거나, 20~30년전 공부에 기대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읽어내려 고민하는 인터뷰이들의 태도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몇 군데 줄을 쳤다. 몇 문장 인용한다. 


개인의 개성이 사물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주관을 억제하고 사실을 담담하게 쓴 기사보다 글쓴이의 색깔이 드러나는 기사가 더 잘 읽히거든요. 

앞으로의 시대에는 기자보다 편집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고, 더 덧붙이자면 편집자보다 편집자 겸 경영자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 오늘날에는 동영상, 음성, 사진, 문자, 이벤트 등 무수한 편집 대상이 있습니다. 게다가 각 분야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서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편집자는 이 좋은 재료를 활용할 줄 아는 요리사가 되어야 하죠. (미디어, 사사키 노리히코)



그 시대에 적합한 건물을 만들지 않으면 건축은 힘을 잃습니다. 즉 동시대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건축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클라이언트가 명확하지 않은 건축은 예외 없이 잘되지 않습니다. (건축, 이토 도요)



제 생각에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거든요. 그분들은 모더니스트입니다. 가라타니는 이제 전형적인 이와나미-아사히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시대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표로 일컬어져 왔지만, 사실은 1970년대 후반에 일본이 고도 소비 사회가 되면서 무척 복잡한 사회가 된 것, 즉 정보의 유통 경로가 너무 많아지고, 대중이 와해되어서 소위 '분중(分衆)'이 되어가는 현상에 대응하지 않은 분들인 거죠. 

결국 "대중이 지금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하고 눈에 보이게 드러내면, 우리 사회는 그것을 정의처럼 취급해버리죠.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대중의 생각은 정의도 정답도 아니거든요. 그들의 생각을 가시화한 다음에 그것과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변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통치 기구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사상, 아즈마 히로키)


세계 상위 8명과 하위 50퍼센트의 재산 규모가 같아요. (...) 요점은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극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일본은 은둔형 외톨이 증후군에 걸려서 자본주의라는 학교에서 졸업하고 싶지 않다고 뗴를 쓰고 있어요. 

결국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라는 근대 사회의 원리에서 벗어나 '더 느리게, 더 가까이'를 실현해야 화석 연료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경제, 미즈노 가즈오)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은 나약하다는 전제하에 제도 및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게 예방 의학의 기본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 대해 체념하고 있다고 할까요. (건강, 이시카와 요시키)


우리 뇌는 60만 년 전부터 더 이상 커지는 걸 그만뒀습니다. 대신 인간은 1500cc정도 되는 작은 뇌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언어를 만들어냈죠. 주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기억을 외부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책에 정보를 전부 넣어두면,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죠.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생각하는 힘, 혹은 응용하는 힘입니다. (...) 하지만 인공 지능이 나오면 생각과 응용까지 외부에 위탁하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 '당신이 원하는 게 이거죠?' 하고 외부에서 알려주면,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되니 그저 버튼 클릭으로 물건을 사버리는 겁니다. (인류, 야마기와 주이치)









에도가와 란포의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문학과지성사)를 읽다. 전자는 중편, 후자는 단편 분량이다. 두 편 합해서 150쪽이면 끝난다. 

에도가와 란포(1894~1965)는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상의 이름으로 알려진 작가다. 필명은 란포가 좋아했던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 독자들이 일본 추리소설을 읽으며 에도가와 란포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현대 작가 아니면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마스모토 세이초 정도겠지.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151권으로 나왔다. 대산세계문학총서는 해외 문학 중에서도 문학사적 의미가 있으나 국내 번역은 잘 되지 않은 작품 위주의 목록을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추리소설이 이 시리즈로 나왔다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읽어보니, 역시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는 추리소설가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으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파노라마섬 기담'은 지역의 거부가 어느 작고 외딴 섬에 자기만의 기괴한 세계를 만들려다가 완성 직전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정체가 불분명한 화자가 이 섬의 사연을 들려준다. 거부가 죽은 뒤 그와 얼굴이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대학 동문이 소식을 듣는다. 이 동문은 이루고자 하는 바는 있으나 의지는 없는, 그래서 졸업 이후 몇 년째 빈둥거리는 사람이다. 이 남자는 섬뜩하다기 보단 황당한 계획을 떠올린다. 무덤을 파서 죽은 거부의 옷을 꺼내입고, 그가 덜 죽은 채 묻혀서 가까스로 살아돌아온 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그 돈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들 이 황당한 계획에 속아, 남자는 순식간에 거부가 된다. 단, 거부의 아내만이 그를 수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런 황당한 음모가 꾸며지거나 밝혀지는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1926년 발표된, 거의 100년전 소설이니 추리의 전개나 논리에는 위화감이 있다. 정작 란포가 말하려고 한 바는, 남자가 갑자기 손에 쥔 막대한 부를 이용해 외딴 섬을 가꿔나가는 과정이다. '파노라마 섬'의 묘사가 기괴하고 현란하다. 섬의 입구에서 중심부까지 지하로 난 유리 통로같은 것이 있어 신기하다기보다는 기괴한 해양생물들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고, 나체의 여인들이 식물인듯 동물인듯 노예인듯 살고 있으며, 거리 감각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설계로 방향과 위치를 혼란에 빠트린다. 란포는 남자가 범죄의 추리보다는 이 섬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상상해낸 파노라마 섬의 묘사에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작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래된 문예사조에서 따온다면 '탐미주의' 같은 말을 붙일 수도 있겠는데, 색깔은 눈이 아프고 향은 메스껍다.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을 위한..'같은 말을 지어내고도 싶다. 


에도가와 란포

'인간 의자'는 그보다 짤막하고 확실하게 변태적이다. 똑바로 쳐다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못생긴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 남자는 손재주가 좋아 그럴듯한 의자를 만드는 기능공이 된다. 어느날 남자는 외국인이 주문한 제법 큰 가죽 의자를 만든다. 남자는 그 의자 안에 들어가 외국인의 집으로 침입할 생각을 한다. 스프링 같은 부품을 일부 제거하고는 그 안에 들어가 앉는다. 그리고 의자 속에서 의자에 앉는 사람의 몸을 느끼고는 좋아한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좋아한다. 유럽 어느 강국의 대사가 앉았을 때는 가죽 뒤에서 칼로 푹 찌르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 어느 유럽의 여자 댄서가 앉았을 때는 '이상적인 육체미의 감촉'을 느끼며 '예술품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마음'을 느낀다. (특히 서양 여자들의 육체에 대한 찬사가 가득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이 떠오르기도 한다. '미친 사랑'은 1947년에 나왔으니, 1925년 나온 '인간 의자'에 비하면 꽤 늦었다. 아니, 서양 여자의 육체에 대한 매혹은 일본 남성 소설가들의 전통 같은 것이라 해야 하나) 결국 '인간 의자'는 그 단편을 읽는 여성 소설가의 의자에 남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아이디어로 끝나는 척 하다가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데, 김기영의 '하녀'가 마지막에 기묘한 영화에서 빠져나오는 척 하면서 관객을 놀리는 것 비슷한 효과다. 하고 싶은 변태적인 이야기는 다 했으니, 작가는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닌 듯 시치미를 뗸다. 

하긴, 조금이라도 추종자가 나오면 금세 낡아보이는 어정쩡한 소설보다는 무엇이든 색깔이 강한 글이 낫겠지. 그 색깔이 좀 이상하다 하더라도. 




***스포일러 있음

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은행나무)를 읽다. 이제 마틴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다. '나이트플라이어'는 '왕좌의 게임'을 쓰기도 전인 1985년 선보인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양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인데, '나이트 플라이어'는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SF다. 물론 두 작품 다 잔혹하다. 사실 '나이트플라이어'가 더 잔혹하다. 머리통이 갑자기 터지고, 레이저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가르고, 처리되지 않은 뼈조각, 살점, 눈알 등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안에 둥둥 떠다닌다.

몇 만 년동안 이동하고 있는 신비의 외계 종족 볼크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 나이트플라이어에 오른 여러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나이트플라이어에는 선장 로이드가 이미 탑승중인데, 그는 왠일인지 우주선 반쪽을 홀로 사용하면서 홀로그램으로만 탑승객들 앞에 나타날 뿐 실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로이드가 정체를 숨기며 대는 이런저런 핑계는 영 미심쩍다.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가 자꾸 근원이 명확하지 않은 불길한 예감을 말하다가 결국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남은 과학자들은 하나 둘씩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또 각자 잔혹한 방법으로 죽어간다. 그 와중에도 외계 종족 볼크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로이드의 정체는 여전히 미심쩍다. 

괴물 또는 살인마가 나타났을 때 문을 열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가 버리면 공포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도망칠 곳 없는 폐쇄 공간인 우주선은 그래서 공포물에 괜찮은 공간이다. '에이리언' 시리즈나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영화들은 밀폐된 우주선 내부의 공포를 잘 살렸다. '나이트플라이어' 역시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호러SF의 전형적 코드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로이드와 나이트플라이어호의 정체에 대해선 약간의 반전이 있다. 너무 놀란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치 못한 정도이기는 하다. 생전의 정신이나 마음을 데이터화해 기계 내부에 보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아이디어가 '나이트플라이어'에 고유한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전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은 덕에 이것이 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좀 더 흥미로웠다. 물론 당장 쉽게 실현할만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로는 충분히 가능하고, 언젠가 누구나 쉽게 그 기술을 이용할만큼 보편화될 수도 있다. 과거엔 기술적으로 까다로워 매우 소수의 훈련받은 이들만 다룰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쉽게 다루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꽤 많다. 영화 촬영이나 편집이 그렇고, 사제 폭탄, 유전자 분석 같은 것도 그렇다. 인류의 통념과 윤리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한 두 사람이 세상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 현대 세계다.  

나이트플라이어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그럴듯하지만, 볼크린과의 만남은 조금 얼버무린 것 같다. 아마 이 책이 근간하는 '천 개의 세계' 시리즈의 다른 책을 읽으면 좀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해서 모호하게 서술해도 되는 건 아니다. 

마침 '나이트플라이어'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도입부 10분을 본 뒤,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영상물이 너무 많고, 볼만한 영상은 너무 적다. 초반에 확실한 각인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 볼 의지가 사라진다. 





 





***스포일러 있음

'알리타: 배틀 엔젤'은 지금보다 더 근사할 수 있었던 영화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크게 흠잡을데가 없다. 이미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은 가상 캐릭터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 재현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는 SF의 오랜 소재지만, '알리타'는 인간과 사이보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이질성을 극복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세상을 시각적, 감정적 이물감 없이 보여준다. 사이보그지만 또한 10대 소녀의 외모와 행동 방식을 가진 알리타는 10대 소년과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알리타가 심장을 꺼내 보여주며 사랑을 증명하려 하자 소년 휴고가 당황하는 장면은 인간과 기계가 교류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마주칠 '언캐니 밸리'를 재치있게 그려낸다. 수십년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기계와 신체의 융합을 시적인 악몽처럼 그려냈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 상상의 산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AI'에서 그려낸 이물감 정도가 사이보그에 대한 동시대 이미지의 극한에 가까울 것 같다. 

문제는 서사다. 프로듀서 제임스 카메론과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알리타'의 서사가 조금 더 완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도 박사(크리스토퍼 왈츠)는 천공의 도시에서 떨어진 고철 더미에서 사이보그 소녀의 두뇌를 줍는다. 두뇌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 이도 박사는 소녀에게 그럴듯한 신체를 붙여주고는 죽은 딸의 이름 알리타를 선사한다. 하지만 알리타의 옛 기억은 사라졌다. 다만 거대한 경찰 기계를 맞아 전투 자세를 취하는 알리타의 반사 신경이 과거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줄 뿐이다. 

이도 박사, 알리타가 등장하고, 알리타와 밀당하는 소년 휴고가 등장하고, 이도 박사의 비밀이 밝혀지고, 알리타가 조금씩 기억을 회복한 뒤 능력을 발휘하는 중간 부분까지 영화는 매우 경쾌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중간을 넘어서면서 서사는 조금 숨을 고른다. 종반부의 장쾌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살짝 속력을 줄였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떄까지 흘러간 러닝타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알리타'는 서사의 장애물을 잘 피한 뒤에도 좀처럼 속력을 내지 않는다. 레이싱 게임으로 치면, 앞서가던 라이벌 차량을 다 따돌리고 결승선까지 직선 도로만 남았는데, 액셀레이터를 밟지 않는 모양이다. 왠일인지 레이서는 속력을 적당하게 줄이고, 심지어 타이어를 교체하러 들어가고, 괜히 오솔길을 탄다. 122분의 상영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자꾸 딴청을 부린다. 상영시간 내에 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카메론과 로드리게즈는 속편을 준비했다. 영화 내내 몇 번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된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끝내 알리타와 마주하지 않는다. 모터볼 경기 선수로 나선 알리타가 천공의 도시쪽으로 칼을 치켜들면, 리더는 그런 알리타를 보고 웃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아마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은 다음 편에서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일본 만화 원작이 있었고, 그 서사를 어느 정도는 담아내려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알리타'가 할리우드의 속편 관행을 너무 일찍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래서 한 영화에 전력을 다하는 대신, 후속편을 위해 서사의 꼭지들과 아이디어들을 남겨둔 것 같다. 이런 의심이 들었을 때 생각난 건 원빈이 '아저씨'에서 했던 대사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알리타: 배틀 엔젤'의 장면들. 인간과 기계의 로맨스에는 이물감이 없다. 

다음 편을 위해 이번 편의 아이디어를 아낀다고? 이번 편이 망해서 아예 다음 편을 제작할 기회가 없다면 어쩌려고? 카메론의 영화를 예로 들자.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가 터미네이터와의 대결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났다면? '아바타'에서 인간 군인들이 나비족의 터전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끝났다면? 할리우드가 속편을 만들어 사골 우리는 관행을 탓하자는게 아니다. 장기적,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려는 건 자본주의 기업의 속성이다. 다만 속편을 염두에 두었더라도 개별 영화의 서사적 완성도는 갖추어야 한다. 완성된 영화의 세계관이 워낙 탄탄할 때, 1편에서 구현되지 않은 아이디어가 풍부할 때, 속편은 제작될 수 있다. '터미네이터2'가 그런 영화였다. '터미네이터'는 그 자체로 뛰어났지만, 2편 역시 자체적으로 뛰어났다. (이후의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덤 혹은 향수 상품이다) 그때의 카메론은 아이디어를 하나의 영화에 모두 쏟아부은 뒤에도, 다시 다음 영화를 만들만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이었다. 이제 카메론은 더 이상 샘솟는 아이디어가 없을까봐, 아니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걱정이 많았던 걸까. '알리타'가 이런 식의 결말을 내려고 했다면, 애초에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그토록 자주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속편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 종반부에 힌트만 숨겨두었으면 됐다. 하지만 '알리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 구도를 조성한 뒤, 둘이 한 번도 대결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난다. 이건 완성된 영화가 아니다. 

'알리타' 얘기를 한참 해서 사족처럼 붙이는 격이 됐지만, 넷플릭스의 '킹덤' 역시 완결성 면에선 실격이다. '킹덤' 첫번째 시즌은 6편으로 끝났다. '킹덤'을 시즌제 드라마로 볼 수 있다면, 이건 시즌제를 오용하거나 악용한 사례다. 조선 중후반 어느 시대,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병이 발생한다. 역병은 죽어가는 왕을 무리하게 살려두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감염자들은 밤이면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바위 밑, 마루 밑 등에 숨는다. 이 조선판 좀비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제작진은 좀비의 출현 이유에 대해 제대로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다음 시즌으로 해결을 미룬다. 심지어 좀비와 인간의 일대 대결이 벌어지려는 순간 첫번째 시즌을 끝낸다. 여러 가지 인터뷰나 극의 전개로 짐작컨대, 제작진은 이미 모든 설정과 서사의 구상을 마친 것 같다. 시즌 2가 시즌 1의 인기에 힘입어 억지로 제작됐을 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시즌제 드라마라도 최소한의 완결성은 있어야 한다.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죄수들이 탈옥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면, 그걸 시즌의 끝이라 부를 수 있나. 

'킹덤'의 첫번째 시즌 여섯 개 에피소드는 완결된 시즌이라기보단 10~12편 시즌의 전반부로 보인다. 첫번째 시즌이 이렇게 끝나고 보니 '킹덤' 1, 2편이 다소 늘어지는 것처럼 보인 이유도 마음대로 추정해보고 싶다. 제작진은 '킹덤'을 두 개의 시즌으로 늘이기 위해 초반부 호흡을 일부러 늘어뜨린 것 아닐까. 차라리 두 개의 시즌이 아니라 10편짜리 한 개의 시즌으로 계획을 세웠다면, '킹덤'은 훨씬 깔끔한 호흡의 서사를 보여줬을 것 같다. 

  




넷플릭스 영화 '폴라'를 보다. 이름이 낯선 스웨덴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가 연출했다.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쪽은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대신 U2,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리고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확 들어온다. '폴라'는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화려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전부). 

던컨(매즈 미켈슨)은 50을 앞두고 은퇴 직전인 청부살인자다. 던컨은 은퇴와 함께 회사로부터 거액의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사장은 그 퇴직금이 너무 아까워 은퇴 사원들을 미리 죽이려 한다. 그러면 퇴직금을 아껴 회사 자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젊은 킬러들을 던컨에게 보낸다. 하지만 애송이들에게 쉽게 죽을 던컨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에서 서사의 약점을 들어 굳이 작품성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폴라'는 최근 할리우드 산 B급 액션의 한 흐름에서 보는 편이 낫겠다. 그 흐름이란 '존 윅' 시리즈가 대표한다. 매우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선보이며, 그 액션은 때로 코믹스 원작이라는 태생을 증명할 정도로 물리 법칙을 거스른다. '인명 경시'라는 말을 써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주인공 한 명의 손에 의해 쉽게 죽어나간다. 너무나 패셔너블하게 차려입은 킬러 주인공이 있으니, 수백, 수천명 악당의 목숨을 연민할 시간은 없다. 

'존 윅'이 볼만한 건 키애누 리브스 덕이다. 연기를 못해도 상관 없다. 리브스가 잘 맞춘 검은 양복을 입고 총을 휘두르는 순간, 연기 같은 것은 필요없다. '아토믹 블론드'에선 샤를리즈 테론이 그랬다.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테론은 스모키 화장을 한 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너무 불편해 보이는 멋진 옷들을 입고 총을 쏘아댔다. '폴라'의 절반은 매즈 미켈슨이다. 54세의 미켈슨은 작심한듯 액션 배우로서의 포부를 선보인다. 마치 리암 니슨이 '테이큰 ' 이후 뒤늦게 액션 배우가 된 것처럼. 

10년간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활동하던 미켈슨은 2006년 '카지노 로얄'에 이르러 전세계 관객에게 얼굴을 알렸다. 티비 시리즈 '한니발'이나 슈퍼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한 단계 높였다. 그리고 자신이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폴라'에서 야심을 보인다. 

내보일만한 야심이다. 북유럽 겨울처럼 차가운 미켈슨의 표정과 액션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미국 이외 다른 문화권 배우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위해선 자국에서 확실하게 성공하고 이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어야 하기에, 미국이나 영국 배우보다 출발이 늦다. 그래서 경력이 얼마되지 않은 배우 같은데 나이가 꽤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이제 액션 영화 좀 찍어보려하는데 이미 50대 중반인 미켈슨. 하지만 60대 중반이 넘은 리암 니슨도 여전히 액션을 찍으니 미켈슨도 10년 이상 못 찍으리란 법이 없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반달리즘'(American Vandal) 시즌 1, 2를 봤다. 시즌 1은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있던 차량들에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로 남성 성기 낙서를 해놓은 사건을, 시즌 2는 고등학교 급식 레모네이드에 설사제를 넣거나 피냐타 안에 똥을 넣거나 하는 식의 '똥 테러'를 그린다. 두 명의 고등학생 프로듀서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해나가는 페이크 다큐 형식이다. 두 사건 모두 유력한 용의자가 드러났고, 해당 학생은 퇴학당한 상태다. 일단 부딪히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진 두 프로듀서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꼼꼼히 살핀 끝에, 진범으로 몰린 이가 진범이 아님을 밝혀 나간다. 

범죄는 범죄인데 중범죄는 아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피의자로 연루된 사건이다. 범행도 심각하다기보단 조금 웃긴다. 하지만 제작진은 시침 떼고 사건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마치 '외로운 늑대'가 끔찍한 테러라도 벌인 듯한 시선으로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별 거 아닌 걸 별 거 처럼 다루니, 웃음기는 거의 없다. 가끔 분량을 채우려는 듯한 억측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각 편 30분 분량, 총 8편의 시리즈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게다가 제작진은 분명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를 심어두었다. 각 시즌의 마지막 회를 보고나면 무척이나 씁쓸해지는 이유다. 첫 시즌에서 범인으로 지목받은 소년은 무죄가 입증된 뒤에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다큐 제작 과정에서 인터뷰한 동급생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평소 자신을 미워하던 스페인어 선생의 집에 실제로 페인트 테러를 하고 만다. 무죄가 밝혀진 뒤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세상이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주한다. 그 편견을 확신시켜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편견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간다. 

시즌2는 인터넷 세상의 가면에 대해 다룬다. 자주 언급되는 주제긴 하지만, 7편의 에피소드를 거치다가 마지막 회에 갑자기 주제를 제시한다. 소셜미디어의 시대,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는 친구인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나눌 친구는 없는 사람들. 또 그러한 약점을 노리는 사람들. 은밀한 따돌림, 따돌림을 이겨내기 위해 벌이는 자기방어적 기괴함, 관료적인 학교, 시즌 1에서도 언급된 주제인 편견. 그런 점에서 극으로서의 구성은 시즌 1이 나았을지 모르지만, 주제적인 확장성 측면에선 시즌 2가 나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긴 하지만, 청소년이 보고 생각해보면 좋을 주제다. 시즌 3가 나올 것을 확신한다.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를 말할 때 당연히 떠올리는 사람은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 테드 창이다. 하지만 이제 떠올리는 사람을 바꿔야할지 모른다. '종이 동물원'(황금가지)의 켄 리우다.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불만이 좀 있었다. '이건 보르헤스가 7쪽 정도로 쓸 글을 50쪽으로 늘려놓은 것 아닌가?' 사변이나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에선 삐걱대는 관절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켄 리우는 다르다. 아이디어가 재미있고, 그걸 능숙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때론 너무 능숙해 '반칙'이란 생각도 든다. 표제작 '종이 동물원'이 그런 느낌이다.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 어머니를 무시하고 멀리하다가, 뒤늦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이런 이야기를 읽고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불쌍한 엄마' 이야기를 자주 쓰면 안된다. 동화 속 주인공이 궁지에 몰렸을 때 꺼내드는 비밀 주머니처럼, 프로페셔널한 작가라면 평생 단 한 번만 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종이 동물원'은 재미있지만 조금 미심쩍었다면, 이어지는 단편들은 훌륭하다. 예를 들어 '레귤러'는 퇴직한 중국계 여성 경찰이 주인공이다. 이 시대에는 '레귤레이터'라 불리는 장치가 개발돼 있다. 이는 중추 신경 어딘가에 이식하는 장치로, 감정적인 반응을 조절한다. 그러므로 경찰, 판사 등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한 이성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이식해야 하는 장치다. 특정 직업군의 사람에게 분명 도움이 되는 미래의 가상 기계 장치지만, 작가는 이를 역으로 인물의 단점, 소설의 소재로 활용한다. 레귤레이터로 가질 수 있는 능력의 양가적 면모를 모두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를 쥐락펴락한다. 깊이 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잘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이 주인공을 향후 장편에 재등장시킬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게 한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이나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파'는 조금 더 사변적인 소설이다. 생명체의 존재 양상, 인지의 다양한 방법 등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핀다. 순수한 지적 즐거움을 위한 소설이다. 반면 역사에 뿌리 박은 단편도 꽤 있다. '파자점술사'는 미국의 반공정책이 현대 대만에 미친 비극,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731부대와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는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와 뉴딜 정책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이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미국과 일본, 중국을 잇는 태평양 횡단 지하 터널을 제안하고, 이에 따라 2차 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다. 물론 전쟁은 없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착취는 그대로였고, 공산주의자 포로들과 식민지의 징용인들, 위안부들에 대한 인권 유린은 2차 대전이라는 분기점에 의해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혔다. '모노노아와레'는 애상에 젖은 일본적 미의식과 우주 공간에서의 영웅적 희생을 정밀하게 교차했는데, 하이쿠처럼 어느 한 부분 빼기 힘든 꽉 짜여진 소설이다. 켄 리우의 단편 선집과 장편이 조만간 나온다고 한다. 꾸준히 살필 예정이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다섯 번째 시즌이 신기한 시도를 했다. 12월 28일 공개된 첫 에피소드 제목은 '밴더스내치'. 사실 '블랙 미러'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이긴 한데, '밴더스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이 신기하다. '밴더스내치'는 간단히 말해 인터액티브 영화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밴더스내치'가 인터액티브 영화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 가지 옵션 중 10초 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항상 선택할 자세를 취하라고 일러준다. 난 집에서 PS4로 넷플릭스를 보았기에, 이 기계에 딸린 듀얼쇼크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대배경은 1980년대 초반. 주인공 스테판은 '밴더스내치'라는 소설을 게임으로 옮기려 하는 초보 개발자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정신착란에 빠져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밴더스내치'는 독자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이 다른 길을 걷는 소설이다. 아마 "이러이러한 선택이면 00쪽, 다른 선택이면 xx쪽으로 가시오" 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스테판은 게임 출시를 위해 밤낮으로 코딩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극적 사고로 사망한데 대한 죄책감과 원망을 갖고 있는 스테판은 작업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조금씩 정신을 놓는다. '밴더스내치' 게임 속 주인공이 게이머의 손에 의해 이런 저런 선택을 하듯, 자기도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의 게임회사 사장과 천재 개발자, 그리고 초보 개발자 스테판(왼쪽부터)

작품을 보기 전에는 결정적인 몇 가지 선택지만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반부터 선택지가 많다. 아침 시리얼로 무얼 먹을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떤 음악을 들을지도 선택해야 한다. 관객이 한 가지 옵션을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대로 그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 과정의 편집에 버퍼링이나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다. 아침 식사나 음악에 대한 선택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스테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난 어쩌다가 두 가지 엔딩을 보았다. 하나는 스테판이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떠나는 선택을 한 뒤, 성인이 된 스테판이 상담가와 상담하다가 갑자기 죽는 엔딩, 다른 하나는 스테판이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에 갇힌 뒤 그의 게임이 출시되지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하는 엔딩이다. 이미 해외 사이트에는 '밴더스내치'의 선택에 따른 플로우차트가 올라있다. 게임도 잘 만들고 스테판의 정신도 멀쩡한, 확실한 해피엔딩은 없는 것 같다. 스테판은 환각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정신과에서 주는 약을 먹고 밋밋한 게임을 만들거나, 약을 먹지 않고 조금 나은 게임을 만들지만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 시신을 토막내고 엄청난 게임을 만들거나 하는, 그런 엔딩들이 소개돼 있다. '블랙 미러'식 엔딩이라고 할까.  (외신을 보면, 다섯 가지 주요 엔딩이 있다고 한다.)

선택에 따라 결말에 너무 빨리 이르면, 친절하게도 앞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안내한다. 내가 두 가지 엔딩을 본 것도 이렇게 선택을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성격에 따라 자극적이고 흥미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상담가 만나고, 주는대로 약도 먹고, 자살도 하지 않으려 하고, 게임 회사 사장 말도 잘 듣다보니 자꾸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선택을 되돌려야 했다. 

이렇게 쓰다보니 매우 우울하고 무서운 이야기 같은데, 의외의 유머 코드도 있다. 스테판에게 지금 자기를 조종하는 것이 '넷플릭스'라고 알려주는 선택이다. 80년대의 스테판은 물론 넷플릭스를 모른다. 그러면 넷플릭스가 무엇인지 조금 더 설명해주는 옵션도 있다. 스테판이 천장을 보면서 "넷플릭스가 뭐야!"라고 외치는데 조금 웃긴다. 

넷플릭스 시리즈 속 주인공이 대사로 넷플릭스를 언급하는 건 자기반영적 유머다. 인간에게 자유의지 같은 건 없고 누군가(신,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닌 외계인 등)의 조작을 따라 살아간다는 생각은 종종 만나는 아이디어다. 넷플릭스는 그들의 첫 인터액티브 영화를 인터액티브 매체 자체에 대한 영화로 만들었다. 영리하고 흥미로운 선택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영화가 지속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해외 언론에 '밴더스내치'에 대한 언급이 꽤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초기 반응은 괜찮은 거 같고(뉴욕타임스는 '시청자가 권력을 얻었다'고 표현), 넷플릭스나 다른 회사가 인터액티브 영화를 몇 편 더 만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처럼 자기반영적인 영화를 계속 만들수는 없을 것이니, 그러면 영화의 인터액티브란 것이 관람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나만 해도 '밴더스내치'가 흥미로울지언정 여느 '블랙미러' 시리즈처럼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다. 프레임 자체, 프레임 바깥 세상을 자꾸 의식하게 만드는 건 전통적인 극작에서 금기다. 아마 이런 인식은 '작품'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에 근거했겠지. 하지만 배우가 관객을 향해 직접 말하거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건 매우 드물게,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테크닉이다. 관객(독자)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완결된 창작자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에 호응하거나 반대할 뿐, 그 세계관과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에 동참하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한국 드라마야말로 가벼운 인터액티브 제작방식을 선보였는지도 모른다. 초반 몇 회분만 찍어놓고 시작한 뒤 시청자 여론을 보고 주인공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애초 작가는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결말을 쓰고 싶었지만, 극에 몰입한 시청자들이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주인공을 살리는 결말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그런 작품이 좋을 리가. 게다가 현대의 관객들은 이미 인터액티브한 또다른 매체에 충분히 익숙하다. 바로 게임이다. 매체와의 인터액티브한 상황을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를 보기보단 게임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제임스 P 호건의 1983년작 SF '생명창조자의 율법'(폴라북스)을 읽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 중세 지구 수준의 문명을 갖춘 로봇 생태계가 발견된다는 전제가 흥미롭다. 폰 노이만의 무한 자기복제기계 개념에 근거해 타이탄에서 스스로 진화하고 번식한 기계 생태계를 묘사하는 프롤로그가 얼마나 정확한지 궁금하기도 하다. 

발달한 지구인과 그에 뒤쳐진 기계의 구도는 제국주의 서구와 피식민지 비서구 구도의 명확한 패러디다. 제국주의 정책을 편 서구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적,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듯, 지구인들 중에서도 '탈로이드'(타이탄의 기계 개체를 이렇게 부른다) 세계를 전적인 자원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있고 탈로이드를 독자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해야할 개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지동설이나 훗날의 진화론이 종교 기득권층의 탄압을 받았듯, 탈로이드 세계에서도 실험과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사유는 배척받는다. 억압적인 국가, 비교적 자유롭게 사상을 보장하는 국가, 과학자 탈로이드, 종교 탈로이드 등이 엮여 펼치는 갈등이 다른 한 축이다. 

다만 지구의 중세를 패러디한 탈로이드 세계의 묘사에는 패러디 이상의 새로운 통찰은 없어 보인다. 인간이 기계로, 지구가 타이탄으로 바뀌어 서술될 뿐이다. 모세가 십계를 받는 장면의 묘사도 조금 웃길 뿐이다. 기적과 영성을 믿고 경전의 문자적 해석에 치중하는 한 탈로이드가 결국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전개는 '역시 SF는 과학의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유리 겔라를 연상케하는, 심령술사를 자처하는 잠벤도르프를 지구인측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독특하다. 잠벤도르프는 물론 진짜 초능력을 가진 건 아니고, 유능한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피관찰자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많이 모으는 능력, 이를 대중 앞에 극적으로 연출하는 능력을 가진 엔터테이너다. 우주탐사 기업의 진짜 목적을 안 잠벤도르프는 탈로이드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우려 한다. 작가는 초능력, 영성, 종교의 힘 등은 믿지 않는 대신, 이미지 연출이나 여론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있다. 초능력자가 아니라 그 어떤 권위 있는 종교인이라도, 결국은 인간의 논리적 취약성, 결핍, 의존성을 이용하는 엔터테이너라고 여기는 듯하다. 





***스포일러 있음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는 대체적 평가대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그 스핀오프 작품 중에서도 못 만든 편에 속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133분은 그리 긴 상영시간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유독 길게 느껴진다. 영화가 이렇게 제작된데에는 짐작가는 이유는 있다. 워너브라더스는 '신비한 동물' 시리즈를 격년에 한 편 꼴로, 모두 5편 선보이겠다고 공언했다. 5편의 시리즈를 동력을 잃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선 서사가 유장하고 굴곡지게 이어지고, 캐릭터는 충분한 깊이를 갖출 준비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작진은 '신비한 동물' 2편인 이번 영화에서 그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2편은 1편처럼 신비한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그 특성을 현시해 관객의 시선을 모으지 않고, 이렇다할 사건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저 1편에서 간략히 소개된 그린델왈드, 크레덴스 등 인물들의 개인사를 조금 더 보여주고, 내기니, 덤블도어 같은 새 캐릭터를 소개하며, 1편에서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 퀴니 같은 인물에게는 전혀 새로운 진로를 제시한다. 그래서 신비한 동물들과 마법을 보러왔던 관객들은 난데없는 '가족 로맨스'를 지켜보게 됐다. 말이 가족 로맨스긴 한데, "알고 보니 형제" "알고 보니 남매"로 이어지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가계도는 한국식 '막장 드라마'에서도 익숙하다. 

그래도 몇몇 배우의 퍼포먼스는 언급할만하다. 에디 레드메인이 '덕후 연기의 일인자'임은 다시 증명됐다. 이번 영화에선 뉴트 스캐맨더의 학창 시절도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방학 때도 집에 안가고 학교에 남아 동물을 돌보는 학생이었다. 사람보다, 마법사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듯한 그는 대화를 할 때도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45도 각도 아래로 시선을 깐 채 대화하는가 하면, 좀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활보하고, 마법과 동물 돌보기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제도에 속해 공식적인 일을 하기는 거부한다. 이 때문에 가족과도 다툴 정도로 고집이 센 인물이다. 이런 '양덕'을 연기하는데 레드매인 말고 다른 배우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조니 뎁은 악당 그린델왈드로 본격 등장한다. 가위손, 에드 우드, 윌리 웡카 같은 팀 버튼과의 협업작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당장 잭 스패로우 연기만 봐도 조니 뎁이 기괴하게 과장된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하는데 재능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린델왈드도 그렇다. 이번 영화에서도 출연 분량이 절대적으로 많진 않아 보이는데, 감옥에 갇힌 첫 장면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묘지에서의 연설 장면에선 좀 뻔한 논리(우리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을 더 큰 악에서 구하려 할 뿐이다) 에도 살짝 설득된다. 악 그 자체였던 볼드모트와 달리, 그린델왈드의 행동엔 그럴싸한 논리를 제공한다는 점이 '신비한 동물' 시리즈의 특색 같기도 하다. 반면, 그린델왈드의 카운터파트라 할 수 있는 주드 로의 덤블도어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만일 둘의 역할을 바꿨다면 주드 로가 조니 뎁만큼 할 수 있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덕중의 덕,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

설득력있는 악당 그린델왈드(조니 뎁)

허허실실 덤블도어(주드 로)

문제의 내기니(수현)와 크레덴스(에즈라 밀러).

 



***스포일러 있음. 

SF 업데이트의 일환으로 중국 소설 '삼체'(류츠신, 삼체)를 읽다. 중국 SF로는 처음으로 2015년 휴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읽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접한 '삼체'라는 게임 공간의 묘사가 그렇다. '삼체'는 일종의 가상현실 게임인데, 세 개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움직여 안정적인 기후기와 불안정한 기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게이머는 이 공간의 규칙을 파악해 가급적 문명을 오래 지속시켜야 한다. 주왕, 복희, 코페르니쿠스, 뉴턴, 폰 노이만, 아인슈타인 등(의 아이디를 쓰는 게이머)이 등장해 세계의 규칙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때마다 게임은 종료돼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제왕과 학자가 얽혀 우주의 법칙을 논하는 상황을 따라가긴 역부족, 요령부득이었다.  

하지만 게임 공간 묘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흥미롭다. 왕먀오라는 물리학자의 눈 앞에 갑자기 카운트다운이 보이면서 시작한다. 왕먀오는 이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추적한다. 그리고 예원제라는 원로 물리학자의 삶을 접한다. 예원제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역시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아버지를 잃었다. 10대의 홍위병들은 빅뱅, 상대성이론 같은 '반동이론'을 가르쳤다며 아버지를 쳐죽였다. 살아남은 예원제는 한 미사일 기지에 배치되는데, 이곳은 사실 군사 목적이 아닌 외계인과의 교신을 위해 세워졌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던 예원제는 어느날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는다. 외계인은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전제한 뒤, 자신의 세계가 안정적인 환경을 가진 행성을 찾고 있으며, 만일 지구를 발견한다면 그곳을 점령하려 할 것이고, 그러니까 다시는 자신이 있는 쪽으로 메시지를 발신하지 말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지구의 위치가 노출될 것이고, 곧 자신의 행성인들이 지구를 점령하려 찾아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던 예원제는 곧바로 메시지를 보내 어서 와서 지구를 정복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예원제를 수장으로 하는 삼체 조직은 급진적 지식인 모임이자 종교 조직으로 진화한다. 구원자 외계인을 기다리는 종교적 열정과, 지구의 종다양성을 훼손하는 인간을 저주하는 극단적인 환경론 등을 아우르는 조직이다.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지구의 각 나라 정부는 삼체 조직을 일망타진하려 하지만, 삼체 행성에선 이미 지구 정복을 위한 우주선을 보낸 뒤였다. 거리가 멀기에,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400년이 남았다. 삼체 행성에선 지구의 문명이 자신들을 막아낼만큼 발달할 것을 우려해. 이미 양성자 2개를 지구에 쏘아보낸 상태였다. 이 양성자는 정확한 물리적 측정을 방해하기에, 지구에선 이제 실험에 근거한 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다. 물리학을 발달시키지 못하면, 문명도 발달할 수 없다. 

문화혁명의 기과한 열정과 그에 대한 환멸, 이에서 파생된 인류에 대한 저주, 그 저주의 수신자가 되는 외계인, 400년 뒤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구인. 현재의 상황, 과거의 오류, 미래의 전망을 연결시키는 솜씨가 능란하다. 400년 뒤라는 멸망 시점을 100년 혹은 50년 혹은 10년 뒤로 하면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혁명의 광기에 대한 성찰이 성숙하다(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인가).  과학적 관찰을 문명 발달의 근원으로 삼는 작가의 인식이 확고한데,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넷플릭스 영화로도 제작된 '서던 리치' 시리즈 1권 '소멸의 땅'을 읽다가 '뉴 위어드'라는 장르 이름을 알게 됐다. SF의 하위 장르라고 하는데, 그냥 '위어드'의 원조는 러브크래프트라고 한다. 그러니 '뉴 위어드' 분위기가 대략 짐작이 됐다. 호러 같다가 판타지 같다가 SF 요소도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같지만 읽다 보면 끌리는, 그런 이야기인 것으로 마음대로 생각했다. 

내친 김에 '뉴 위어드'를 더 읽어보기로 했다. '서던 리치'의 제프 밴더미어와 함께 차이나 미에빌이 최근의 대표적 작가라고 한다. 그의 '이중도시'(아작)를 찾아 읽었다. 미에빌은 특이하게도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인류학을 공부했고, 런던정경대에서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작가다. 톨킨류의 권선징악적 판타지에 대한 혐오를 여러 차례 표현했고, 소설이 길기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이중도시'는 다행히 한 권이지만, 그래도 576쪽에 이른다. 

원제는 'The City and The City'다. '이중도시'라는 번역제목은 고심을 거듭한 결과로 보여 정확한 것 같다가도, 소설의 미묘한 느낌을 못살렸다는 느낌도 든다. 왜냐하면 '이중도시'는 경찰, 테러리스트, 범죄조직이 등장하는 경찰 스릴러 구조를 갖고 있지만, 책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도시 자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셀, 울코마라는 두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도시의 존재 양상이 말못하게 이상하다. 이 도시의 기묘한 개념을 살리는 것이 '이중도시' 번역의 목표이며, 이 도시 설정에서 재미를 느껴야 책을 읽는 재미도 있다. 캐릭터나 서사는 도시 개념 자체만큼 흥미롭게 직조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책이 다소 길다는 생각도 든다. 개념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면, 그 개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예전에 테드 창의 단편들을 읽으며 보르헤스 소설을 10배로 늘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중도시'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100배쯤 늘린 책처럼 읽히기도 한다. 

베셀과 울코마는 가상 도시지만, 파리, 뉴욕 등의 지명, 맥도날드 같은 상품명도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중도시'는 일종의 평행세계를 다룬다. 베셀과 울코마는 인접 도시이자 과거 적대한 적이 있어 서로 앙심을 품은 도시인데, 이런 설명으론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베셀과 울코마는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처음 읽으면서는 설정이 너무 이상해 같은 공간에서 유령처럼 두 도시가 겹쳐있다는 의미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고 두 도시의 물리적 공간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설정이다. 쉽게 말해 앞마당은 베셀인데 뒤에 붙은 집은 울코마이고, 카페는 베셀인데 바로 옆의 관공서는 울코마다. 여기까지라면 그럴 수 있는데 웃긴건 이 두 도시가 서로를 못본채 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베셀과 울코마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안보는' 교육을 받는다. 베셀 사람이 길을 걷다가 울코마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럴 조짐이 있으면 안보고 지나간다. 이런 훈련이 잘 돼있어 어느 순간 두 도시의 사람들은 상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같은 도로를 달려도 베셀 차와 울코마 차는 세심하게 서로를 피한다. 두 도시를 이동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검문소가 위치한 어느 터널에 가서 출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렇게 출국 절차를 밟은 뒤 입국한 곳이 원래 자기가 사는 동네 주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법적, 심리적으로 이미 타국에 있기에, 한발만 내딛어도 들어설 수 있는 자기 동네에 갈 수가 없다. 만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상대 도시 영역에 들어간다면? 두 도시의 '침범' 행위를 감시하는 '침범국' 요원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한다. 침범국은 양 도시 경찰의 힘을 뛰어넘은,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으로 그려진다. '이중도시'의 얼개는 베셀 경찰인 주인공이 두 도시에 모두 연루된 살인사건을 침범국에 넘기려다 실패하고, 결국 베셀과 울코마를 오가며 직접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이다. 

서구의 많은 독자들은 '이중도시'를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갈등, 에루살렘 같은 도시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모양이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하지만 미에빌은 소설 뒤편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독해시도를 거부한다. 

"어떤 이야기가 정말로 무언가 다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그 다른 뜻이란 걸 아주 직설적으로 완벽하게 함축할 수 있다면, 그냥 그걸 말해버리면 됩니다. 소설이란 건 에둘러 표현하며 넘치게 포장할 수도 있고 독특함을 부여할 수도 있기 떄문에 흥미로운 겁니다. 소설을 우화로 해독하는 행위는 이야기에서 너무 많은 것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너무 적은 걸 읽어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소설보다 인터뷰가 더 재미있었다. 





**스포일러 조금(그런데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간게 스포일러일까?)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을 보고 몇 가지. 


1. '퍼스트맨'의 초반부 우주 유영 장면에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검고 광막한 우주 공간을 느리고 우아하게 유영하는 비행체의 모습은 모두 스탠리 큐브릭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소심하게 주장한다). 나른하고 아름다운 배경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큐브릭이 우주에서 트랜스 상태로 도달하는 방법은 관념이었지만, 셔젤은 철저히 물질이다. 큐브릭의 우주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한 끝에 제 머리 속의 관념 혹은 외계의 초인간적 존재를 만난다. 하지만 셔젤의 우주인들은 우주선의 예기치못한 사고로 인해 제자리에서 급회전을 하거나 엄청난 진동을 경험하면서 트랜스로 향한다. 영화 속 기자들은 우주를 경험한 이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해 묻지만, 이들 우주인은 철저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로 묘사된다. 닐 암스트롱은 우주에 기념품을 가져가느니 연료를 조금이라도 더 싣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2.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서의 솜씨를 보여줬듯, 셔젤은 엇박에 능한 재즈 뮤지션처럼 능란하게 서사의 리듬감을 과시한다. 난 두 가지 점에서 그 리듬감을 느꼈다. 자넷 암스트롱(클레어 포이)은 집에서 남편 닐(라이언 고슬링)의 안부에 대해 늘 노심초사한다. 나사의 배려로 라디오를 통해 우주와의 교신 내용에 대해 듣지만, 그 내용이 항상 유쾌하지만은 않다. 억지로 근심을 감추는 자넷 주변에는 두 명의 어린 아들들이 맴돈다. 아이들은 종종 천진난만하게 자넷의 근심 속으로 끼어들고, 아빠가 죽음의 목전에 다가섰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가 놀아도 되요?"라고 묻곤 한다. 닐이 달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날, 큰 아들만이 아빠가 살아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남편과 아내, 아내와 아들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사이의 감정의 엇박이 아이러니를 창출한다.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한 아폴로 계획에는 수많은 실험이 필요했고 그만큼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퍼스트맨'은 그 과정을 매우 공들여 보여준다. 그런데 암스트롱이 달에 가는 대목은 매우 재빠르게 처리한다. 암스트롱이 늦은 밤 집을 나선다. 우주인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이 짧게 삽입된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우주선에 탑승한다. 어떤 다짐도, 결의도, 절차도 생략한다. 우주선이 달에 내리고 암스트롱이 표면에 닿는 장면은 천천히 묘사하더니, 귀환하는 대목은 다시 생략한다. 또다른 엇박이다. 

3. 할리우드의 우주 영화에서 흔한, 나사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 치며 환호하는 결말부는 없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지 않는 듯 연기한다. 라이언 고슬링은 이미 이 분야의 특기를 여러 차례 자랑했다. 셔젤의 전작 '라라랜드'에서 그랬고,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에서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대사와 표정이 적었다. 그러면서도 할 연기는 다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클레어 포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걱정과 분노에 휩싸여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근엄한 척 위장하는 건 군주들의 특징 아닌가. 

4. '퍼스트맨'은 '위플래쉬'나 '라라랜드'보다 주제적으로 확정되고, 인간에 대한 시선에 깊이가 있으며, 서사의 세련미나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앞선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달에 착륙한 닐이 어린 나이에 죽은 딸을 회상하고(흔한 홈비디오 삽입 형식), 딸의 팔찌를 달의 분화구 속 어둠으로 던지는 대목은 좀 상투적으로 보인다. 닐이 공적인 임무, 사적인 감정을 모두 추구하는, 피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미 영화 속에서 드러났다. 달에 가서까지 딸과의 엣 추억을 떠올리게 한 건, 대중영화로서의 '킬링 파트'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과잉이었다. 내내 절제하던 영화가 이 대목에서 누선을 자극하려 애쓴다. 끝까지 쿨했으면 좋았을걸. 







  


**스포일러 있음


영화를 본 김에 내처 조너선 에임즈의 소설 '너는 여기에 없었다'(프시케의 숲)까지 읽었다. 소설이 나온 건 2013년인데 4년만에 영화화됐으니 상당히 빨리 진척된 셈이다. 영화가 89분으로 짧았는데, 소설 역시 152쪽으로 짧다. 분량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복잡한 미스터리를 감추어 두었거나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는 일은 없다. 하드보일드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난다. 심지어 '이제 절정부로 가겠군' 하는 순간에 끝나버린다. 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구성인데, 실제 속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소설의 확장판이 2018년 나왔다고 하는데, 원판의 결말에서 더 나아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다른 부분은,


-주인공 조의 트라우마의 근원이 조금 더 드러난다. 그런데 이건 소설과 영화의 차이라고도 할 수 없긴 하다.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통상 생략과 축약을 거치니까. 그러니까 소설에선 조의 트라우마가 활자로 좀 더 구체화됐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영화에서의 짐작대로 조는 군인이었고, 이후 FBI에서 성매매전담 요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지독한 가정폭력범이었고, 아들 조를 떄리거나 아니면 아내를 때렸다. 

-영화 속 조가 시적인 킬러인 반면 소설의 조는 좀 더 실용적인 킬러다. 영화에서 조는 자신이 공격해 죽어가는 남자 옆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상당히 인상적인 장면), 어머니의 시신을 물에 떠내려보내기 위해 상복을 입고 강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소설에선 전자의 장면이 아예 없고, 어머니의 시신은 절벽 같은 곳에서 물에 던져버린다. 린 램지는 왜 조가 자기 총에 맞아 죽어가는 남자의 독백을 듣도록 했을까. 자기가 죽여놓고 종부성사를 하는 사제처럼 구는, 듣도보도 못한 살인자다. 

-무엇보다 피해자인 니나의 아버지 보토 상원의원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 소설 속 보토는 영화보다 훨씬 극악한 악당이다. 영화에선 딸의 성착취를 막아내지 못한 보토가 자살하지만, 소설에서 자살하는 것은 동료 상원의원이다. 오히려 보토는 정치적 야심을 위해 딸을 악당들에게 넘긴 것으로 드러난다. 아버지가 악당이었으면 더욱 극적이었을텐데, 굳이 제3의 악당을 설정한 램지의 선택의 이유는? 

-영화에서 니나는 악당의 목을 면도칼로 베어 스스로 죽인다. 경호원 몇몇을 처리한 뒤 도착한 조는 결국 이미 죽은 악당을 발견할 뿐이다. 그때까지 엄청난 액션을 선보인 주인공이 악당을 직접 처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 영화의 관습을 어긴다. 하지만 소설에서 악당을 죽이는 것은 당연히 조다. 

-영화에서 구출된 니나는 조와 함께 낯선 식당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둘은 어딘가로 잠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 속 조는 아직 니나(소설에선 리사란 이름)를 구출하지 못했다. 보토 의원의 이마에 망치를 박아넣은 조가 리사를 데려간 조직을 처단하려는 의지를 다지면서 소설은 끝난다. 마치 결말을 내지 않은 채 끝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선 소설의 결말이 비전형적이다. 결국 영화와 소설은 각기 다른 부분에서 전형성과 비전형성을 보이는 셈. 









오래 전부터 제목을 들었던데다가 얼마전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읽은터라 비교해보려 손에 들었는데, 독재자 소설은 빼고 이 책만 언급해도 되겠다 싶었다. 중국 작가 쑤퉁의 '나, 제왕의 생애'(아고라)는 오랜만에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긴 책이다. 조금 더 집중했다면 한 자리에서 350여쪽을 읽어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

가상의 고대왕국 섭국이 배경이다. 왕이 승하한 뒤 여러 명의 왕자 중 열네살의 단백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장자 단문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 모두가 예상했던 터였기에, 단백의 왕위 계승은 본인조차 놀란 일이었다. 마음도, 자질도 준비되지 않은 단백은 서로 사이가 나쁜 할머니와 어머니의 수렴청정 아래 무기력한 제왕으로서의 나날을 보낸다. 어린 섭왕은 선왕의 후궁들의 혀를 자르거나, 충성스러웠던 패장을 활로 쏘아 죽이거나 하는 식의 포악한 짓도 하지만, 이 제왕은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였다. 무해한 궁녀나 신하나 군인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청년으로 자라난 섭왕은 유일하게 사랑했던 후궁과의 행복한 결혼도 이루지 못한 채, 쇠락하는 국가의 운명을 방관한다. 

3부에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방향을 튼다. 철지부심한 이복형제 단문이 군사를 몰고 돌아오자, 섭왕은 왕위에서 쫓겨난다. 새 섭왕 단문은 구 섭왕 단백을 죽이지 않고 평민으로 살아가도록 경성에서 쫓아낸다. 단백은 평소 동경하던 줄타기 광대의 길을 걷는다. 치국하고 평천하했으나 평화로운 사적인 삶을 누리지는 못한 늙은 제왕의 회고록을 생각하고 읽어나가던 나같은 독자는 어리벙벙했다. '왕이 광대가 됐다'는 급격한 전환이 어색하고 작위적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급커브 구간을 능숙하게 통과한 뒤 다시 액셀레이터를 밟는 레이서처럼, 광대로서의 삶도 흡입력있게 써나간다. 제왕의 옷이나 권력이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심 생각해왔던 단백은, 고공의 줄 위에서 구경꾼들을 내려다본 뒤에야 비로소 손에 딱 쥐어지는 권력을 향유한다. 단백의 재능은 국가 경영이나 정치적 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는데에 있었다. 물론 잔학하게 꿈틀대는 세상은 단백이 행복한 외줄 광대의 삶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단백의 남은 반평생이 간략하게 정리된다. "나는 남은 절반의 생을 고죽산의 고죽사에서 지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논어'를 읽고 또 읽으며 무수한 밤을 보냈다. 나는 어떤 날은 이 성현의 책이 세상 만물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고 느꼈고, 또 어떤 날은 거기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느꼈다"로 끝난다. 연기처럼 무상한 삶이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요약된다. 단백은 로마의 현제가 아니어서, 인생이나 국가나 세계에 관한 어떤 지혜도 남기지 않지만, 그래서 어쩌면 '나, 제왕의 생애'는 "비 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같이 어지럽고 애처롭고 허무한 책이지만, 그런 몽환의 세계관에 빠졌다 나오는 것도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다. 난 더 보람있고 유익하고 능률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스포일러 있음

'케빈에 대하여'(2011)는 근 10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무섭다. 1시간 52분이면 긴 상영시간도 아닌데, 그 시간 내내 온몸이 굳어 있었다. 나중에는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봐도 무서웠다. 이 영화에서 '케빈' 역을 맡은 에즈라 밀라는 이후 어디서 봐도 무서워하게 됐다. 아무리 멀쩡한 역을 연기해도 무섭다. (하긴 멀쩡한 역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하다) 기자회견이나 팬미팅에서 활짝 웃고 있어도 무섭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린 램지가 '케빈에 대하여' 이후 6년만에 내놓은 영화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돼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받았다. '케빈에 대하여'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여전히 온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다. 

조(호아킨 피닉스)는 실종 혹은 납치된 사람을 구출하는 일을 하는 남자다. 물론 구출 과정에는 무지막지한 폭력이 수반되기에, 조는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노모와 함께 살아간다. 조에게 상원의원의 딸 니나를 구출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미성년자인 니나는 아마도 성적 착취를 당하는 곳에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 조는 (올드보이 최민식처럼) 망치 하나 들고 악당의 소굴에 잠입한다. 

소녀와 그를 지키는 킬러. 금세 '레옹'이나 '아저씨'가 떠오를만큼 대중영화에서 흔한 구도다. 램지는 킬러의 트라우마에 조금 더 접근한다. 물론 아저씨(원빈)나 레옹(장 르노)도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조는 그 양상이 조금 심각하다. 조는 일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 종종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친다. 짐작컨대 그는 어린 시절 심각한 가정폭력이 횡행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돼 군인으로 복무했으나 여전히 무언가 끔찍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도 여러 차례 목격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는 일을 할 때는 폭력적인 남자지만, 평상시엔 자기파괴적인 남자다.조는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종종 자살을 흉내낸다.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거나 칼을 입 안으로 넣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꽤 체중을 불린 호아킨 피닉스가 그 육중한 육체 안에 갇혀 자기 자신과 싸운다. 트라우마는 이 남자의 온몸을 병들게 한 것 같다. 


자기가 죽인 남자 옆에서 괴로워하는 조(왼쪽). 


장례식을 치르는 조. (어머니 시체를 검은 비닐로 싸서 강물에 유기하는, 장례식 맞습니다)


가정폭력으로부터 도피하는 어린 시절의 조


조와 그가 구한 소녀 니나. 최종 보스의 결말은 예상밖으로 이뤄진다. 


'트라우마 탐구'라는 영화의 '예술적' 주제가 '킬러와 소녀'라는 대중영화의 구도와 정확히 어울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 각본상을 주는 것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한 남자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홀로 버둥거리는 모습을 89분간 관찰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남자가 무언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을 하다가 자신의 과거에 발목잡히는 구도가 영화를 풀어가기에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남우주연상엔 이의가 전혀 없다. 실제로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70%는 호아킨 피닉스다. 피닉스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 크리스찬 베일과 함께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메소드 액팅 남우가 아닐까.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은퇴를 선언했으니, 이제 걷는 뒷모습만으로도 긴장감을 주는 배우는 많지 않다. 베일의 연기를 보면서도 가끔 느끼는 거지만, 이 영화에서 피닉스를 보면서 "저러다 죽는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니.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이른 은퇴를 선언한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무당이라도, 접신을 반복해 신체와 정신을 변환하다보면 원래의 자기 자신을 건강히 유지할 수 있을까. 게다가 피닉스 같은 배우가 맡는 역할이라는 것이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처럼 거대한 고통을 체내에서 삭혀야하는 일이고 보면, 괜한 걱정은 아닐 듯하다. 

피닉스가 70%라면 나머지 30%는 음악을 맡은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다. 도입부의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부터 압도적이어서,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초반부터 관객의 기선을 제압한다. 카메라에 무엇이 찍혔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을 배경에 깔면 일단 그 영상은 볼 수밖에 없다. 

물론 호아킨 피닉스와 조니 그린우드를 불러모은 감독의 역할을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할 클레멘트의 1954년작 '중력의 임무'는 하드SF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교과서'란 표현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학계 다수로부터 인정받은 주류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비관보다는 낙관에, 감성보다는 이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지루하다. 

적도 지름 7만7000km, 극 지름 3만km의 찌그러진 팬케이크 모양 외계 행성 메스클린이 배경이다. 자전 속도가 매우 빨라, 지구 시간으로 18분이면 하루가 지난다. 메스클린이 지구와 가장 다른 점은 중력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이다. 이 행성의 중력은 적도에서는 지구의 3배, 극지방에서는 지구의 700배에 달한다. 메스클린 행성의 엄청난 중력이 이 하드SF가 보여주는 트릭의 원천이다. 

이 행성에는 납작한 애벌레 모양의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 중력이 너무 강해 인간처럼 직립한 생명체가 진화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메스클린인들이 이 행성 탐사에 나선 지구인(그들에게는 외계인)과 조우한다. 지구인은 반중력장치 개발을 위한 연구 도중 로켓을 메스클린의 극지방에서 잃어버렸다. 지구인은 메스클린인에게 로켓을 회수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몇 가지 반대 급부를 약속한다. 지구로 치면 15세기 수준의 문명을 가진 메스클린인 탐험대와 문명이 앞선 지구인과의 교감이 소설의 핵심이다. 

워낙 중력이 강한 행성이기에, 메스클린인의 가장 큰 공포는 높이다. 비행은 상상할 수 없고, 무언가를 던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불과 몇 cm에서만 떨어져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에 조금만 높은 곳에도 올라갈 수 없다. 메스클린인들은 머리 위에 무언가 있는데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낀다. 사실상 세계를 2차원으로 해석하던 메스클린인들이 지구인의 도움을 받아 3차원 세계에 적응해나간다. 물론 지구인은 선의가 아니라, 로켓 회수라는 큰 목적을 위해 메스클린인을 돕는다. 

작가 클레멘트는 공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복무했다. 퇴역한 뒤에는 대학 전공을 살려 메사추세츠주 작은 도시의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교사로 일했다는 배경을 들으니 정말 책이 교과서 같다) 책 뒤편의 저자 후기에는 클레멘트가 메스클린 행성을 설계해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실제로 관측된 백조자리 61 쌍성의 데이터를 근거로, 행성의 밀도, 중력, 질량, 자전속도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성에서 존재할만한 물질과 생명체의 가능성을 상상했다. 마치 건축가가 마천루를 설계하듯, 클레멘트는 천문학 데이터와 물리학 법칙을 근거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행성을 창조한 것이다. 클레멘트는 독자들에게 '게임의 규칙'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난 물론 그걸 찾을 능력이 없다)

작품이 탈고된 1954년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2차대전의 승리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소련과의 냉전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물질문명, 소비문명은 나날이 풍요를 구가한다. 과학은 한계없이 발전할 것처럼 보인다. 클레멘트는 세계의 과학적 원리에 호기심이 많고, 배우고 발전하고 싶어하는 메스클린 선장 발리넌의 캐릭터 구축에 가장 집중한다. 발리넌은 로켓을 회수한 직후 대담하게도 지구인에게 새로운 계약 조건을 내민다. 지구의 과학 문명을 전수해달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로켓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 지구인은 '쿨'하게 응한다. 매우 삐딱하게 생각하면, 아마존의 원주민에게 수학이나 철자법을 가르치려는 선교사의 겉으로는 너그러운 사실은 오만한 자세처럼 보인다. 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소설에서 지구인은 결코 악당처럼 행동하지 않고, 자신들보다 낮은 수준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을 내리깔아 보지도 않지만, 과연 물질문명의 최강대국 미국의 작가가 아니라면 이런 시선의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작가의 그러한 태도가 은연중 비친다고 해서, '중력의 임무'를 나쁘게 평하고 싶지는 않다. 이 시선은 64년전의 것이니까.   





***스포일러 있음. 

추석 영화 중 '안시성'을 보았다. 관람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투 장면의 표현 수위가 '12세 관람가'에 맞춰졌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전투 장면에선 인체가 크게 훼손됐다. 피가 낭자하진 않았지만, 신체는 여러번 절단됐다. 오히려 '12세 관람가'가 다소 후하게 받은 등급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본의 방향성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 세계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영화가 민족주의 색채를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연개소문과의 갈등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공성전이나 백병전도 잘 연출됐다고 생각한다. 과시적이면서도 흔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병사들의 동선이나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연출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9시간에 가까운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몇 차례의 대규모 공성전 뿐 아니라, 프로도의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빛, 골룸의 사악한 개성 같은 것들이다. '타이타닉'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배가 절반으로 쪼개지는 장면 뿐 아니라 잭과 로즈의 갑판 위 데이트 같은 장면이다. 전쟁영화는 전투장면의 연속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쟁영화는 고대 무기의 위력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역사 속 인물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사학도 아니다.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지 탐구해야 한다. 

'안시성'에는 40배 많은 20만 당 대군을 맞이하는 안시성 사람들의 '두려움'이 빠져있다. 고구려 본진으로부터의 지원도 요원한 가운데, 안시성주 양만춘과 군인들은 중과부적의 외적에 맞서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양만춘은 물론, 군인이나 백성 누구도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이란 갖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적을 맞이한다. 마치 '300'의 스파르탄 전사 같다. 하지만 '300'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300'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그래픽 노블 원작의 영화다. 나고 자라면서 약육강식의 혹독한 세계관을 습득하는 스파르타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명한다. 무엇보다 '300'은 전쟁에 대한 현실적인 감정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 군인들의 근육과 페르시아 군인들의 기괴함을 비교하는데서 쾌감을 주는 영화다. '안시성'은 '300'과 같은 방향의 영화가 아니다. 강대국에 맞선 약소민족의 용기를 기리고, 온정적이면서도 결단력있는 지휘자의 리더십을 칭송하며, 전쟁과 무관한 민초의 소박한 감정을 담아내려 한 영화다. '안시성'이 '300'처럼 되려 했다면, 앞에 말한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조금 더 과감하게 내질렀어야 한다. 하지만 '안시성'은 어정쩡한 태도를 135분간 꾸역꾸역 밀고 간다. 



배역 구성에도 문제가 있다. '안시성'에는 몇 가지 짝패가 있다. 성주 양만춘(조인성)과 그의 충실한 부관 추수지(배성우), 양만춘의 동생 백하(김설현)와 그의 연인 파소(엄태구), 용맹한 군인으로서 라이벌이자 친구인 풍(박병은)과 활보(오대환)다. 이 중 두번째 짝패는 거의 불필요하고, 세번째 짝패는 활용 방식이 어정쩡하다. 다수 관객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200억원대 대작 특성상, 젊은 남녀의 로맨스와 티격태격하는 두 남성의 코미디를 모두 담으려 한 것 같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차라리 신녀(정은채) 캐릭터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채 낭비되서 아쉽다. 짧고 어설픈 에피소드와 몇 차례 애절하지도 않은 눈빛 교환으로 끝난 로맨스 같은 것은 없애버리고, 불길한 예언자인 동시 현실적인 조언자인 신녀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을 확장시켰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제작진은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신녀의 목을 딴다. 

게다가 냉정하게 말해,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케미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영화에서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2015년작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원제 The Heart Goes Last, 위즈덤하우스)를 읽다. 전에 읽은 애트우드의 대표작 '눈먼 암살자'는 무언가 굉장히 복잡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 소설이었는데,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속도가 났다. 읽으면서 뭔가 빠트린게 있나 싶을 정도였다. 

경제 위기로 미국 사회가 '카드로 지은 집'처럼 붕괴한 근미래,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집도 직장도 없이 자동차에 의탁해 떠돌며 살아간다. 그런 부부가 흥미로운 광고를 접한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는 포지트론 프로젝트 광고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마을로 구성됐다. 사람들은 한 달은 감옥에서, 한 달은 주민으로 살아간다. 한 사람이 한 집을 공유하며,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날 입소하고 출소해 엇갈리게 살아간다. 

젊은 부부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일로 몰락해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모습은 굉장히 개연성있게 그려졌다. SF라고 할 것도 없이, 경제위기를 겪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벌어질만한 일들이다. 부부가 포지트론 프로젝트에 자원한 이후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 듯, 판타지적인 구성이다. 여기부터는 사실성보다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추구한다. 

상황에 따라 쉽게 발현되는 인간의 가학 심리를 보여주는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연상케하는 설정이지만, 전개는 전혀 다르다. '심장은 마지막 순간에'는 의외로 제도적으로 구속된 부부의 마음 속 갈등과 욕망에 천착한다. 그리고 그 전개는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스탠과 샤메인 부부는 같은 집을 공유하는 다른 부부와 함께 일종의 스와핑 관계를 형성한다. 샤메인이 자발적이었다면, 스탠은 상대 여성에게 사실상 강간을 당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스탠이 기계공학 엔지니어, 샤메인이 의료계종사자라는 점도 이야기의 전개에 한 발단이 된다. 스탠의 기계공학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는 섹스봇과 관련 있고, 샤메인의 의술은 장기밀매 혹은 임의의 사형집행으로 이어진다. 한 남자는 갓 주문한 섹스봇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흥분해 목을 물어뜯는 바람에, 로봇이 합선되어 섹스 자세 그대로 끼어있다가 겨우 구출된 뒤 남은 생을 불구로 살아갈 처지다. 뇌신경을 개조해, 수술 뒤 처음 마주친 사람과 무조건 사랑에 빠지게 하는 기술도 등장한다. 수술당한 한 여성은 남성이 적당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그만 옆에 놓여있던 테디베어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고 살아간다(상당히 기괴한 유머다). 디스토피아 SF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자극적인 소재들이 급박하게, 차례차례 등장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애트우드가 자기가 쓰면서도 재미있을 정도의 통속적인 활극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시리즈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시녀 이야기'를 읽어볼까.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 제3부인 '검의 폭풍'(A Storm of Swords)을 읽다. 과거에 번역이 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요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개정판으로 나오고 있다. 4부는 2019년, 5부는 2020년 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미드 제목인 '왕좌의 게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는 소설의 진도를 이미 앞지른 상태이며, 내년에 마지막 시즌이 방영될 예정이다. 작가가 쓰지 않은 내용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마 드라마 제작진이 전개에 대해 작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쳤을 것이다. 나는 이 텔레비전 시리즈의 팬이기에 이번에 읽은 '검의 폭풍'의 내용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즐거운 독서 경험이었다. 

'검의 폭풍'에는 드라마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던 몇 가지 이벤트들이 담겨 있다. 드라마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피의 결혼식', 뜬금 없었던 조프리의 죽음, 역시 예상치 못했던 타이윈 라니스터의 죽음 등이 '검의 폭풍'에 담겼다. 이 이벤트들은 지금까지 7번에 걸친 '왕좌의 게임' 시즌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강렬했으니, 서사의 급격한 굴곡만으로도 '검의 폭풍'은 재미있다.  

하지만 '검의 폭풍'의 독서가 즐거웠던 건 충격적 사건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줄거리는 알고 있다. 이미 본 영화, 드라마의 원작을 읽는 재미란, 영상으로는 간략하게 다뤄진 인물들의 관계나 감정을 매우 천천히 되새기면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얼음과 불의 노래'는 챕터 별로 특정한 인물이 중심이 돼 서술된다. 예를 들어 제이미 라니스터는 때로 주인공이 되지만, 그의 쌍둥이 남매이자 제이미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인 세르세이는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르세이의 행동이나 생각 등은 제이미나 그외 주변 사람들의 서술로만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어떤 인물을 택해 서술했는지에 따라 그 인물 주변의 관계도가 그려진다. 감정과 사건의 허브가 되는 인물을 배치한 후, 그 주변 은하계가 형성된다. 유장한 서사를 이끌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데 유용한 방식이라고, 사후적이고 결과론적으로 생각한다.  

'검의 폭풍'의 특징 중 하나는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나긴 여정과 그 사이 싹트는 기묘한 우정, 사랑 등을 그린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제이미와 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는 브리엔느의 관계. 브리엔느는 여러번 그 외모가 묘사될 정도로 인상적으로 추한 외형의 키 큰 여성이다. 브리엔느는 '아가씨'로 남아야 하는 그 시대의 관습을 벗어나 기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아무도 이 거대한 추녀를 '기사'라고 인정하지 않지만, 브리엔느는 고집스럽게 기사의 행동수칙을 지킨다. 브리엔느는 주군인 캐틀린으로부터 포로 제이미를 킹스랜딩까지 호송하고 그 대신 캐틀린의 딸인 산사와 아리아를 데려오라는 명을 받는다. 캐틀린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명이지만, 브리엔느는 주군이 지시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고 그 명을 따르려 한다. 이죽대던 제이미는 차츰 브리엔느의 고집스러운 기사도에 감화된다. '얼음와 불의 노래'의 그 많은 기사들 중에서 가장 기사같은 인물은 기사도, 남성도 아닌 브리엔느다. 어쩌면 제이미는 브리엔느에게서 한때 자신이 가졌을지 모르는, 그러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왕가의 역학 관계에 휘말려 잊어버렸던 충성, 정직, 희생 등의 가치를 다시 기억했는지도 모른다. 

또 아리아와 '사냥개' 산도르 클리게인의 관계. 킹스가드의 일원이었던 사냥개는 정치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탈영한다. 아리아는 밤마다 외는 살생부에 산도르의 이름을 넣어두었다. 산도르가 아리아의 친구를 죽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아리아를 붙잡은 사냥개는 그를 엄마 캐틀린 혹은 이모 라이사에게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려 한다. 살인을 일삼는데다가 술고래이며 돈만 아는 남자와 그를 죽이려는 귀족 소녀가 예기치 않게 동행한다. 아리아는 처음엔 몇 차례 탈출 기회를 노리지만, 후엔 포기한다. 어찌된 일인지 아리아는 동행 시간이 길어질수록 산도르를 이해하는듯 보인다. 산도르로부터 도망치려는 생각도, 그를 죽이려는 생각도 사라진다.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것이 아니라, 아리아는 어느덧 산도르를 그냥 하나의 가여운 인간으로서 보게 된다. 산도르가 큰 부상을 입고 죽음에 근접했을 때, 아리아는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떠난다. 그 상황에서의 살인은 아리아에겐 복수가, 산도르에겐 자비가 될 것이었지만, 아리아는 그냥 말 없이 짐을 챙긴다.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못하는, 혹은 사랑하면서 증오하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된다. 

혹은 드라마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인 티리온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 티리온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때 모친은 죽었고 티리온은 난쟁이로 자랄 운명이 되었다. 아버지 타이윈은 아내를 '죽인',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도 말썽만 피우는 티리온을 인정하지 않는다. 티리온이 지독한 외모 컴플렉스와 그에 따른 방탕한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티리온은 라니스터 형제 중 누구보다 영리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심지어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여성에 대한 관점도 결과적으론 로맨틱하다. 티리온이 냉철한 아버지, 사악한 누나, 그래도 인간적인 형, 정의와 돈을 저울질하는 용병,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하는 아내, 헌신적으로 보이는 잠자리 파트너와 맺는 관계들은 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여러 인간 관계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4부 언제 나옵니까.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봤다. 이 영화가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감독 교체(드니 빌뇌브->스테파노 솔리마)보다는 에밀리 블런트의 부재가 더 큰 이유라고 꼽고 싶다. 에밀리 블런트는 전편에서 멕시코 마약 조직 소탕을 위해 투입된 FBI 요원 케이트 역을 맡았다. 케이트는 FBI로는 베테랑일지언정,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는 신참이다. 카르텔은 잔인무도하기가 세상에 이를데 없다. 이 카르텔에 비하면 '대부'의 마피아는 신사라고 느껴질 정도. 잔인무도한 조직에 맞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점잖을리 없다. 작전의 책임자인 CIA 요원 맷(조쉬 브롤린)과 '컨설턴트'라고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역시 알고보면 잔인무도한 사람들이다. 알레한드로가 조직원을 취조하기 위해 커다란 생수통을 들고 조사실로 들어오는 장면의 위압감은 압도적이다. 알레한드로가 어떤 방법으로 취조하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섬뜩하다. (그래서인지 '데이 오브 솔다도'에도 생수통 몇 통을 비치해둔 장면이 있다. 전편의 패러디로 보인다.)

케이트는 카르텔과의 전쟁의 초심자로서 작전의 관찰자 역할을 수행했다. 맷이 주도하는 불법적이고 사악한 방법에 겉으로는 반발하면서도, 카르텔을 잡기 위해선 손에 피와 똥을 묻혀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는 안다. 케이트도 소극적으로만 반발함으로써 결국 이 작전을 승인하게 된다. 케이트는 사법기관의 윤리적 모호함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에밀리 블런트가 그 역을 잘 소화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데이 오브 솔다도'엔 케이트가 없다. 그래서 윤리적인 갈등 같은 것도 없다. '데이 오브 솔다도'는 먼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현재는 죽이 착착 맞는 두 남자 맷과 알레한드로의 건조한 버디 무비에 가깝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엔 유머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장면이 없다. 미국 영화에서 드문 경우다.) 멕시코-미국 국경을 통해 극단적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밀입국해 들어오자, 미국 정부는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주를 막으려 한다. 카르텔에게 멕시코발 불법 이주는 마약 밀수보다도 이윤이 남는 일이다. 맷과 알레한드로가 이 작전에 투입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 정부의 얕은 수는 몇 차례 스텝 끝에 꼬인다. 미국 정부는 꼬리를 자르고 발을 빼려하고, 말단들은 희생돼야 한다. 알레한드로는 그 말단이다. 


손가락 한 번 튕겨서 우주의 생명체 절반을 죽인다는 타노스, 조쉬 브롤린

'데이 오브 솔다도' 예고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델 토로는 멋진 배우다. 

카르텔과의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국 정부의 비열함이란 구도는 좀 흔하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정의로우려하나 끝내 심하게 흔들리고 마는 케이트의 존재 덕에 전편에서 독특한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데이 오브 솔다도'는 좀 더 흔한 액션, 스릴러 영화가 됐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꽤 즐겼다고 해야겠다. 전편이 조성한 사막같이 건조한 분위기를 잘 계승했고, 맷과 알레한드로 캐릭터의 매력도 잘 살렸다. 몇 차례 액션 장면도 잘 찍었다. 전편에서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의 평화로운 저녁 식사 자리에 난입한 장면 같은 숨막히는 긴장감은 없지만, 액션 자체는 전편보다 호쾌한 편이다. 

전편보다 확실히 기억에 남는 건 음악. '배트맨 VS 슈퍼맨'을 보고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원더우먼 테마 음악이듯,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본 뒤에도 테마 음악이 오랫동안 귀에 맴돈다. 작곡자는 Hildur Guðnadóttir라는, '힐두르 구드나도티르'라고 읽어야할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이다. 찾아보니 아이슬란드 출신 첼리스트이자 작곡자다. 솔로 앨범을 몇 장 내놓았고, 영화 음악에도 참여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없는 것 같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의 음악은 긴박감 넘치면서도 음산하고 음울하고 신비롭다. 이런 음악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아이슬란드 사람(들)인 시규어 로스다. 그 나라에 살면 다들 이런 감성을 갖는 건가. 아무튼 앞으로 이 작곡가의 음악을 더 많은 영화에서 듣게 될 것 같다. 

구드나도티르의 음악은 이런 느낌. https://www.youtube.com/watch?v=NmZ2pAFbXsE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황금가지)를 읽다. SF라고 알고 읽었는데 사실은 로맨스다. 사실 '스타터스'가 SF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저 내가 잘못 알았을 뿐이다.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황금가지의 '블랙 로맨스 클럽'의 일환으로 나왔다. 그러니 'SF가 아니라 SF적 설정이 있는 로맨스였다'고 통탄해봐야 내 잘못이다. 

미래 어느 시기, 태평양 양쪽 국가 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나 생물학 무기가 투하된다. 그 때문에 미국에는 '엔더스'라 불리는 노인들과 '스타터스'라 불리는 청소년, 어린이만 살아남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과학적 설명은 생략돼있다) 엔더스는 부유하고, 부모가 없는 스타터스는 가난하다. '스타터스'인 '나' 켈리는 큰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위험한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이 아르바이트는 젊은 몸을 갖고 싶은 엔더스에게 일정 기간 동안 몸을 빌려주는 일이다. 엔더스의 의식이 스타터스의 몸으로 들어간 사이, 원래 스타터스의 의식은 어딘가에서 쉬고 있다. 물론 스타터스의 몸을 렌트한 엔더스는 기간 동안 몸에 흠집을 내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 얼마간 몸을 렌트해준 스타터스는 목돈을 만질 수 있다. 

'청년을 착취하는 노년'이란 알레고리가 너무나 확연하다. 확연한 것은 재미가 없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제몫을 인정받지 못하고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의 청년들이 읽으면 더욱 실감을 느낄텐데, '스타터스'의 목적은 세대간 착취의 폭로가 아니라 로맨스다. 

켈리를 둘러싸고 두 남자가 경쟁한다. 물론 둘 다 멋지다. 거리에서 생활할 때 만난 마이클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데 다정다감하고 생활력이 강하다. 켈리의 몸이 렌트된 뒤 만난 블레이크는 부유하고 로맨틱하다. 블레이크 앞에서 켈리는 '신데렐라'가 된다. 심지어 '신데렐라'처럼 벗겨진 구두를 블레이크가 줍는 에피소드까지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안해도 신데렐라인줄 아는데) 그리고 블레이크의 정체에는 한 가지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 켈리와의 로맨스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든다. 성실한 남자와 로맨틱한 남자. 그 사이의 순진무구한 소녀. '엑스맨'의 울버린과 사이클롭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처럼, 작은 디테일만 바뀌는 굵직한 로맨스의 구도다. 

이 세상에서 엔더스는 대체로 막대한 부를 누린다. 그 부에 따른 물질세계의 묘사가 또 한 축이다. 켈리가 입는 아름답고 비싼 옷들, 착용하는 장신구들, 입안에서 녹는 음식들이 자주 묘사된다. 켈리를 씩씩하고 보호본능강하며 정의로운 소녀로 묘사한 것도 이 책의 독자층을 위한 설정이다. '헝거 게임'의 캣니스 에버딘들이 여기저기 출몰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핵심은 켈리와 블레이크의 로맨스. 아래와 같은 대목은 '스타터스'의 인장과도 같다. 


"블레이크는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는, 나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또 키스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 이상 좋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도 그랬다. 나는 그 애의 목을 감싸 쥐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애가 내 허리 부근을 안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이 막힐 듯한 기분과 약간의 아찔함을 느끼면서 그 애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 애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아니면 이런 부분. 


"말 위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힐끗 바라보다가 그 애를 향해 미소 지었다. 블레이크 역시 미소로 답했다. 석양에 물들어 한쪽 얼굴이 붉어진 채 그 애는 그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블레이크로부터 나에게로 보이지 않는 따뜻한 광선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만약 이게 에어스크린 게임이었다면, 우리 사이에 조잡한 하트 아이콘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베껴쓰면서 손을 조금 떨었다. 요즘 초콜렛을 너무 많이 먹었나. 로맨스는 이렇게 쓰는 것이었군. 나는 3번쯤 환생해도 쓸 수 없는 문장이다. 



 


타계를 추모하는 혼자만의 의식으로 필립 로스의 2007년작 <유령 퇴장>(문학동네)을 뒤늦게 읽다. 국내에는 2014년 출간됐는데, 언젠가 입수했다가 회사 책상 앞 책꽂이에 꽂아놓은 뒤 읽지 않고 두었다. 알다시피, 책은 한 번 읽을 시기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로스의 책을 몇 권 읽어나갔을 때 <유령 퇴장>은 제 순서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난 로스의 책에 조금 지쳤고, 그렇게 <유령 퇴장>을 방치했다. 그래도 책을 치워버리지는 않아서 몇 번 자리를 옮기면서도 줄곧 눈에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 사이 <유령 퇴장>은 100년전부터 거기 있었던 정물처럼 놓여있었다.


'나'는 70대의 유대계 미국 소설가 네이선 주커먼이다. 주커먼은 1974년 로스의 책에 처음 나온 뒤, <유령 퇴장>까지 모두 9번 등장했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등 로스의 대표작이 그 9편에 속한다. <유령 퇴장>은 주커먼이 등장한 마지막 책이다.  주커먼은 로스의 '소설적 자아'라 할 수 있다. 


필립 로스(1933~2018)


<유령 퇴장>에서 주커먼은 11년간 은둔해있던 버크셔 산골을 떠나 뉴욕으로 온다. 전립선암의 후유증인 요실금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로스의 다른 책을 읽었다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병이 깨끗이 낫고 오랜만의 도시 나들이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시골로 평화롭게 돌아가 다시 멋진 소설을 쓰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진 않는다. 의사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오줌은 계속 새어나와 안전 팬티 속을 가득 채운다. 늙은 주커먼을 괴롭게하는 건 육체의 쇠락만이 아니다. 주커먼은 여러가지 혼란한 사건과 맞딱드린다. 존경하는 선배 작가 로노프의 연인으로 한때 자신도 마음에 두었던 에이미가 뇌종양 수술을 받아 머리카락이 절반은 없는 가난한 노파가 된 모습을 목격한다. 주커먼은 충동적으로 1년간 집을 바꿔 살기로 한 작가 지망생 부부를 만나는데, 그중 아내 제이미에게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주커먼은 이미 여성과의 육체적 사랑을 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말이다. 가장 큰 난관은 로노프의 전기를 쓰겠다고 달려드는 젊은 저널리스트 클리먼이다. 클리먼은 에너지가 넘치는, 하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야심만만한, 하지만 야심을 점잖치 않게 발산하는 남자다. 클리먼은 거의 잊혀진 로노프의 삶과 문학을 다시 미국인의 정신사적 궤적 속으로 돌려놓겠다는 포부를 밝히지만, 이를 위해선 죽은 로노프의 명예가 훼손되고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주커먼은 클리먼을 막기 위해 모든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미 주커먼에겐 그럴만한 기력이 없다. 

주커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유대적인 협박 메시지 때문에 시골로 도피한 것으로 되어있다. 협박이 멈추었다면 뉴욕으로 돌아와야겠지만, 주커먼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철저한 은둔과 사회로부터의 망각을 택했다. 아니, 주커먼이 먼저 사회를 망각했다. 대중은 빠른 사회의 변화에 일희일비하겠지만, 오랜 세월 미국을 지켜본 주커먼은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견딜 수도 없고 바꿀 힘도 없는 모든 일에 대해 아예 귀를 닫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달리 무슨 이유로 내가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는 걸 포기했겠는가? 나는 더는 실망으로 곤두박칠 일이 없는 곳에서 살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겪는다. 어제의 뉴스가 오늘의 뉴스로 잊혀지고, 오늘의 뉴스는 또 내일 잊혀진다. 처음 들었을 땐 충격적인데, 하루 지나면 최초의 충격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결국은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제이미 부부는 아들 부시의 당선에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주커먼은 그러지 않는다. 그의 지친 눈빛은 모든 일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예전 같으면 그런 파당 정치의 대립을 지켜보면서 초연할 수 없었겠지만, 거의 한 세기의 4분의 3에 이르는 세월을 미국이라는 나라에 홀린 채 살고 나니, 더는 사 년마다 어린애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다. 어린애 같은 감정과 어른의 고통에 말이다."

역시 신랄한 대목은 쇠락한 육체에 대한 묘사다. 로스는 74세에 집필한 이 소설에서 한때 쓸만했을 듯한, 하지만 지금은 볼품없어진 주커먼의 성기를 아래처럼 묘사한다. 주커먼은 40세 연하의 여성 제이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마 에너지가 정신과 육체에 두루 뻗쳐있던 시절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런 실망감을 표현할 수 있겠지. 

"한때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던, 방광조임근도 완벽하게 제어되고 충분히 제 기능을 다하던 성기가 달려 있던 두 다리 사이에 이제는 쭈글거리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수도꼭지를 달고 있는 남자에게는 결코 무해할 리 없는 절망적인 사랑이 열병이 휘두르는 무자비함에 즉시 굴복한 채. 한때는 단단한 생식기였던 그것은 이제, 저 어딘가에 삐죽 튀어나와 우리 눈에 띄는 파이프의 끄트머리, 어느날 누가 밸브를 한 바퀴 더 조여 빌어먹을 물줄기를 완전히 잠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낼 때까지 물을 질질 흘리는, 종종 왈칵 뿜기도 하고 콸콸 쏟아내기도 하는 아무 의미 없는 파이프 한 토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령 퇴장>은 <에브리맨> <휴먼 스테인> <울분>처럼 서사에 몰입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실험적인 기법과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커먼의 생각들이 불쑥불쑥 끼어들어 난삽하다는 느낌까지 주는 책이다. 물론 그 난삽함이란 '노인의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듯한, 오히려 '노인의 자기혐오'라 부르는 편이 좋을 듯한, 하지만 정말 신랄하고 철저하고 까끌까끌해서 책을 읽어나가기 아슬아슬해지는 생각과 감정의 조각들의 모음이다. 로스의 명복을 빈다. 







야구 영화 본 뒤 야구하고 싶은 적은 없다. 축구 영화 본 뒤 축구하고 싶은 적도 없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를 보고 테니스를 치고 싶어졌다. 파란 잔디가 깔린 윔블던 센터 코트를 부감으로 잡은 초반부부터 그런 생각이 든다. 파란 잔디, 하얀 유니폼, 두 코트를 빠르게 오가는 작고 노란 공... 관중들이 숨죽인 사이, 코트를 때리고 튕겨나가는 공 소리가 경쾌하다. 두 플레이어의 재빠른 발소리와 힘겨운 신음 소리. 나도 잔디 코트에 공을 튀겨보고 싶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운동에 소질있는 편이 아니라 실력이 쑥쑥 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제일 통쾌했던 순간은 역시 서브였다. 포핸드, 백핸드로 공을 제대로 맞혔을 때도 즐거웠지만, 높게 띄운 공을 상대편 코트로 순식간에 꽂아넣었을 때의 쾌감은 대단했다. 네트에 걸리지 않고 금에 걸치지도 않은 공이 코트를 때린 뒤 재빠르게 튕겨나가는 순간의 쾌감에 대해선,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클리셰를 쓸 수밖에 없다.

스포츠 영화에 스포츠 장면을 잘 잡는건 필수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는 테니스 경기만 박진감 넘치게 촬영한 영화는 아니다. 윔블던을 4번 연속 우승한 뒤 다섯 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스웨덴의 스타 선수 비외른 보리와, 그에 도전하는 신성 존 매켄로의 1980년 윔블던 결승을 보여주는 동시, 두 선수의 성장기와 개인사를 조금씩 드러낸다. 영화는 두 선수의 극명한 스타일 차이를 대비해 보여준다. 매켄로는 알려져있다시피 '악동'이다. 판정에 납득할 수 없으면 심판에게 막말을 하며 대들고, 때로 관중하고도 싸운다. 관중은 그런 매켄로에게 야유를 퍼붓지만, 매켄로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반대로 보리는 '미스터 아이스'다. 경기 중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인터뷰로 대중과 만날 기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인 답변을 하고, 상대 선수를 칭찬한다. 보리는 록스타같은 인기를 누린다. 



달라 보이지만, 사실 둘은 비슷하기도 하다. 둘 모두 강박적으로 이기고 싶어하고, 이기지 못했을 때는 터져나갈 듯 분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리 역시 청소년기에는 매켄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사적인 스포츠'임을 자부하는 테니스계는 보리의 불같은 성격을 용납하지 않았고, 보리는 이기기 위해선 분노를 감춰야 한다는 사실을 꺠달았다. 물론 보리의 화는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코트 위에서, 대중 앞에서 차갑게 감추었을 뿐, 보리는 내면에선 여전히 불같은 사람이다. 가끔 바깥으로 넘실거리는 보리의 불꽃은 주변 사람을 괴롭게 한다. 약혼자에게 상처를 주고, 오랜 기간 함께한 코치를 갑작스럽게 해고하게 만든다. 

이기는 걸 너무나 좋아하고, 이기지 못하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성과를 낸다. 스포츠에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 스포츠 선수의 팬 서비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지만, 최고의 팬서비스는 역시 승리다. 그런 점에서 보리와 매켄로는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팬서비스를 제공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래서 선수들 본인이 행복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 상영후 나오는 자막에 따르면, 보리는 영화 배경으로부터 1년 뒤인 81년 윔블던 결승에서 매켄로에 패배했다. 그리고 얼마뒤 은퇴했다. 불과 26세의 나이였다.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승리를 추구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스포츠 영화, 만화에 나온 주인공처럼, 보리는 짧은 순간 모든 걸 불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일의 조' 식의 '완전연소'. 

보리 역의 스웨덴 배우 스베리르 구드나슨과 매켄로 역의 샤이어 라보프는 모두 잘한다. 구드나슨은 1978년생 배우인데, 이번에 처음 알아봤다. 스웨덴 배우가 비외른 보리 역을 연기한다는 건, 한국 여배우가 수십년 뒤 김연아를 연기하는 것 비슷한 심정일까. 라보프는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역시 이상한 사람 연기를 잘한다. 그에게 계속 이상한 역을 맡겨줬으면 좋겠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앤드류 니콜의 '아논'(Anon)을 보다. '아논'이란 '익명'(anonymous)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니콜은 '가타카'(1997)의 작가, 연출답게 비주얼은 유토피아지만 사는 모양은 디스토피아인 미래 사회를 '아논'에서 그린다. '가타카'가 유전자에 의해 계급이 사실상 결정되는 사회를 그렸다면, '아논'은 보는 모든 것이 기록돼 사생활과 익명성을 보장받기 힘든 사회를 그린다. '아논' 속 사람들은 한때 유행하려다 말았던 구글 글래스를 쓴 듯한 인터페이스 속에서 살아간다.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이름, 직업 등이 자막으로 나타나고, 노점상의 핫도그를 보면 각각의 이름과 성분이 나타난다. 이런 시각 이미지들은 모두 기록돼, 범죄 수사에 활용되거나 심지어 연인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너 어젯밤 누구하고 있었어? 어젯밤 기록 보여줘"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살(클라이브 오웬)은 형사다. 이 사회에서 경찰 노릇 하기란 2018년보다 쉬워보인다. 범죄가 일어났을 당시의 시각 기록을 확인하면 되니까.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면, 피해자의 시각 기록이 끊기기 전까지를 재생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서 흔히 그러하듯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범인을 잡기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의 마지막 시각 기록이 해킹됐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마지막 순간 살인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즉 일부 기록이 삭제되고, 불필요한 기록이 삽입된 채 남겨진 것이다. 살은 사건 배후에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삭제해주는 해커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언더커버에 착수한다. 살은 연인을 두고 매춘부를 부른 증권거래인인 척 해, 해커에게 자신이 매춘부와 접촉한 기록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한다. 살에게 익명의 해커(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접촉한다. 

'가타카'는 지금까지도 유전자 조작에 의한 사회 변화를 설명할 때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유전자 가위' 같은 기술이 키워드가 되면서 '가타카'의 혜안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가타카'는 컨셉을 잘 잡은 영화지, 잘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컨셉을 잘 잡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영화로서의 역량이 충분히 드러나진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 '가타카'의 시나리오와 미술을 사용해 다른 감독이 연출했다면 더 그럴싸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아논'도 비슷한 느낌이다. '아논'은 제목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듯, 현대사회의 빅데이터 축적과 투명성, 그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알 수 있다. 경찰은 간단한 접속 해제 코드로 많은 이들이 본 것을 고스란히 데이터화할 수 있다. 별다른 장치도 필요 없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현대 혹은 근미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유용한 설정이지만, '아논'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이후의 전개를 예측가능하게 만든다. 클라이브 오웬, 아만다 사이프리드 같은 배우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은밀하게 만나 쿨하게 일만 하고 헤어질리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기술을 악용하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등장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팜므 파탈은 궁극의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100년은 된 클리셰다. '블랙 미러'의 몇몇 에피소드들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와 반전이 '아논'에는 없다. 배우들은 의도적으로 무표정, 무감정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보여주기보다는 배우의 역량을 제한한다.  

결국 '가타카'처럼, 아논'은 잘만든 영화는 아니면서도 만듦새와 무관하게 종종 언급되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영화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사회학자나 IT 칼럼니스트가 더 언급하기 좋은 종류에 속한다. 




***스포일러 있음.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다. 자기도취에 빠진 백만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착해지는 기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헐크'도 좋다. 사실 마크 러팔로의 헐크보다는, 에릭 바나의 헐크가 좋다. 리안의 그 기나긴 헐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좋아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엔 그 진지함이 지루했는데, 갈수록 진지함이 꼴통스럽게 변하면서 재밌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근래 나온 슈퍼히어로물 중 최고 수작이라 생각한다. '토르' 시리즈는 영화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의 캐릭터는 잘 구축됐다. 토르는 아이언맨과 다른 차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캐릭터다. 좀 얄미운 아이언맨과 달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뒤 잔을 깨트려버리는 단순무식함이 재미있다. '스파이더맨'은 좋은 성장영화다. 역시 핵심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메리제인과의 풋사랑이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좀 더 봐야 알겠는데, 공간을 쥐락펴락하는 시각적 트릭은 뛰어나다. 그건 정말 영화적인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어벤져스' 시리즈를 좋아한 적은 없다. 지난 두 번의 어벤져스 시리즈는 반쯤은 의무적인 기분으로 봤다. 사실 뭘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러 영웅들이 나왔고, 악당이 시시했다는 것 정도. 헐크가 로키를 패대기치는 장면의 유머도 기억은 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오늘 봤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 '독과점'을 말하는 건 진부하고 어색하다. 동시기 개봉작 중 이 영화와 상영관을 나눠가질 만한 상업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0분 표를 끊었는데, 사실상 매진이었다. 



악당 타노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사실상 주인공.


난 '인피니티 워'를 커다란 농담처럼 여긴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저 이 영화의 '밖'에서는 할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시빌 워'에 나타난 히어로들의 대립구도나, 아이언맨이 미국의 군산복합 슈퍼리치를 그리는 방식이나, 헐크의 심리적 여정에 대해선 뭔가 말할 수 있다. 블랙 팬서와 흑인문화의 '쿨'과 '쉬크함'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피니티 워'는 영화 바깥으로 나가면 할 이야기가 없다. 이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주 창조 설화니, 다 모으면 손가락을 튕겨서 우주를 절멸시킬 수 있는 인피니티 스톤 같은 것을, 난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할 뜻이 없다. 일각에선 이 영화의 악당 타노스가 '이유 있는 악당'이라며 '인피니티 워'에 깊이를 부여하려 한다. 다짜고짜 '죽이겠다'고 하는 악당보다야 깊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의 자원이 부족하니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야한다는 논리는 18세기 '인구론'의 조야한 확장판에 불과하다.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피니티 스톤이라면, 생명체를 줄여 자원을 아끼기보단 자원을 늘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더 경제적이고 마음도 편할텐데. 차라리 비슷한 논리로 다수 인류를 죽이려한 '환경주의자' 발렌타인('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 타노스보다 그럴듯했다. (정말 발렌타인처럼 제정신이 아닌 IT 거물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반면 타노스의 존재나 행동 동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요즘 인기 있는 '이유 있는 악당'이 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차라리 로키처럼 그냥 천성이 비뚤어져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 있을 것 같다.

사실 '인피니티 워'는 웃긴다. 조금 진지해지려는 순간마다 농담을 배치한다. 그루트의 사춘기 유머, 드랙스의 부동자세 유머, 스타로드의 지방과 근육 유머 모두 웃긴다. 자아가 뾰족한 아이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브루스가 브루스 자신(헐크)과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토르: 라그나로크' 때부터 본격 유머를 보여준 토르도 여전히 웃긴다. 와칸다의 '스타벅스' 유머에도 피식했다.  

그러므로 나는 '인피니티 워'를 2시간 40분짜리 유머이자 팬서비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많은 히어로와 빌런을 등장시키고도 균형을 유지한 점도 높이 사야겠다. 그외엔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