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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에 의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피드

**스포일러 있음

 

닉 클라크 윈도의 '피드'(구픽)를 읽다. 대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핵전쟁, 기후위기, 바이러스의 창궐이 아닌, '피드'라 불리는 IT 기기의 고장으로 인한 종말이 그려진다. 신체에 피드를 이식하면 별도의 디바이스 없이도 인터넷에 접속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피드를 통해 즉시 필요한 지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피드가 갑자기 다운되고, 이후 잠이 든 사람들이 깨어나면서 다른 인격체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잠이 들면 누군가가 반드시 그를 지켜보면서 다른 인격이 되는 순간을 보는 즉시 죽여줘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문명은 파괴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아 중세로 돌아간 듯한 삶을 이어간다. 

 

'피드'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묘사에서 새로운 건 없다. 그간의 지식은 모두 피드에 의존했기에, 피드가 다운된 이후 사람들은 지식을 얻을 길을 잃어버린다.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이 소규모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거나, 유랑인이 돼 문명의 잔해를 뒤지며 살아가거나, 날강도가 돼 약탈을 하며 삶을 잇는다. 여성이나 아이라고 안전이 보장되진 않는다. 톰과 케이트 부부는 피드 붕괴 이후 태어난 여섯살 딸 베아를 잃어버린 뒤, 아이를 찾아 세계를 헤맨다. 문명 붕괴 이후 세상을 떠도는 외톨이들의 모습은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라스트 오브 오스'에서도 잘 재현됐다. '피드'의 묘사가 그것들보다 탁월하거나 독창적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처절한 풍경 자체에는 설득력이 있다. 

 

소설의 반전은 잠이 들었다가 깨어날 때 바뀌는 인격체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나온다. 잠이 든 사이 낯선 이의 몸에 스며든 인격체는 외계인이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미래 인류의 정보화된 인격이었다. 브레이크 없는 문명 발전으로 지구의 환경은 파괴되고, 살아남은 인류는 지하로 파고들어가 세대를 이어간다. 이들은 피드로 전해진 조상들의 정신(인격, 영혼 등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간다. 조상들을 움직여 지구 파괴를 막기 위해서다. 그렇게 해서 환경 위기는 벗어났다. 대신 인류 문명이 파괴된다. 작가는 과거 중요한 사건에 영향을 줌으로써 또 하나 갈래의 역사가 생기는 개념을 채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피드'는 시간여행+대체역사물이다. 시간여행의 방법이 거대한 허브에 다운로드된 정신에 대한 해킹이라는 점이 새로울 뿐이다. 물리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는데,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해 다소 얼버무린다. 

 

미국에서 2018년 나온 책이다. 환경 위기에 무심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톰의 아버지가 피드 개발자라는 설정, 톰의 오이디푸스 여정은 쓸모없는 장치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피드 개발자가 톰의 아버지이든 아니든 이야기 전개는 크게 바뀌지 않기 떄문이다. 아마존에서 10부작 시리즈로 만들어 방영했는데, "'블랙 미러'에 대한 아마존의 응답'이란 제목의 기사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