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기대치 이상의 감정으로 나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매우 이모셔널한(감상적, 감정적이라는 표현보다 왠지 '이모셔널'이 적절하다고 느낀다) 영화고, 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이 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어쩌면 이 두 가지 관점은 결국 연결된다. '할리우드'는 60을 바라보는 타란티노가 이모셔널하게 돌아보는 추억, 역사, 소망, 꿈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 할만한 '찰스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다.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3명의 불한당이 1969년 8월 8일 배우 샤론 테이트-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침입해 임신 8개월의 테이트와 그 친구들 등 5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폴란스키는 영화 촬영을 위해 해외에 있었다) 살인자와 테이트 일행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맨슨은 테이트 집의 이전 거주자와 인연이 있었고, 왜 그런지 지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라고 지시했다. 촉망받는 여배우가 끔찍하게 살해됐고, 살인자들이 '악마'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상징이자 트라우마였다. 타란티노는 영화에서 이 살인자들을 당시 끝물이었던 히피즘의 추종자들로 묘사한다. 

 

'할리우드'의 주인공은 한물간 액션 스타 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 대역 겸 매니저 클리프(브래드 피트)다. 릭은 50년대 텔레비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제 전쟁영화, 서부영화의 악역으로 배우 경력을 간신히 이어간다. 릭의 일이 줄어드니 클리프의 일도 줄어든다. 클리프는 주로 릭을 촬영장으로 데려다주거나 그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정도의 일만 한다. 날이면 날마다 근사한 신인 배우들이 등장하므로, 릭에겐 산업과 대중의 시선 뒤편으로 조금씩 사라져 가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할리우드'의 초중반부는 느리다. '느리다'기보단 사건이 거의 전개되지 않는다. 릭을 중심으로 1969년 할리우드 풍경을 인류학적으로 재현하려는 목적으로 찍은 것 같다. 세트장과 촬영 장면이 재현되고, 감독, 배우, 스태프들의 관계가 묘사되며, 영화 사조의 흐름을 알려준다. 미국 서부극의 흐름이 쇠퇴하자, 이탈리아에서 수정주의 서부극,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이 나온다. 한 제작자(알 파치노)는 릭에게 수차례 이탈리아 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안한다. 릭은 자기 삶의 중심이었던 할리우드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아 하지만,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한다. 릭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가 다음날 대사를 완벽히 외우지 못해 스스로 자책하고, 그러다가 다시 배우로서의 소명을 깨달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릭은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 나쁘다기보단 스타로서의 적당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스타로서의 위치가 위협받고 더 이상 세상이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릭은 좌절하고 다시 노력하고 결국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릭을 옆에서 지켜보는 클리프는 트레일러에서 애견과 단둘이 산다. 있을 건 있는, 하지만 세련되진 않은 삶이다. 클리프는 릭의 관찰자로서, 한 스타의 전성기와 몰락을 함께 느낀다. 타란티노는 황혼기에 접어든 할리우드 사람들을 풍자하거나 비틀지 않고, 애상을 담아 그려낸다. 

 

끝물 히피 혹은 가장 끔찍하게 왜곡된 히피라 할 수 있는 맨슨 패밀리는 조롱하고 뒤튼다. 이들은 처음에는 캘리포니아 이곳저곳을 히치하이킹하며 다니는 천진난만한 젊은이처럼 보이지만, 기념비적인 악역을 만드는데 일가견 있는 타란티노 영화답게 곧 마각을 드러낸다. 한 농장주를 구워삶아 농장을 사실상 점거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죽어가는 쥐가 그대로 남아있을만큼 더럽게 산다. 무엇보다 참전용사이자 구시대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클리프에게 비겁하게 굴다가 얻어맞는다. (여기서 피트는 멋있는 '옛날 남자'를 잘 연기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안테나 고치다가 뜬금없이 상의 탈의하는 모습도 선보인다.) 영화 하이라이트인 테이트 집 습격 사건에서도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고,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멍청한 인간들로 묘사된다. 그럼 점에서 '할리우드'의 악역은 인상적이지만, 다른 타란티노 영화의 악역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무엇보다 타란티노의 트위스트는 맨슨 패밀리가 습격하는 곳이 테이트 집이 아니라 릭의 집으로 변경되는 대목이다. 무고하고 천진난만하며 자신이 나온 영화를 기쁨에 차서 관람하고 신나 하는 임신 8개월의 배우 테이트는 적어도 이 영화에선 안전하다. 대신 맨슨 패밀리는 클리프와 그의 잘 훈련된 개에게 끔찍하게 척살된다. 어쩌다 릭의 집 수영장으로 떨어진 용의자 중 한 명은 릭의 화염방사기를 맞고 새카맣게 구워진다. 이 대목은 타란티노의 전매특허와 같은 B급 영화 감성이다. 아무리 화염방사기를 사용한 영화에 출연했다 하더라도, 배우가 그걸 집에 뒀을 리는 없지 않은가. 죽음 묘사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산탄총을 맞고 죽은 악당같고, 영화에서만 가능한 대안 역사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히틀러 암살 성공 묘사 같다.

 

그렇게 영화에서만 가능만 상상과 무리를 해서라도 타란티노는 테이트와 친구들을 구해내고 추모한다. 아내가 개와 함께 잠들고, 부상을 입은 클리프는 병원으로 실려간 뒤 릭은 홀로 남는다. 그때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살아남은 옆집의 테이트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릭이 상황을 설명하자, 인터폰으로 테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릭은 평소 테이트, 폴란스키와 친해보려 했으나 인사조차 나누지 못해 아쉬워하던 참이다. 놀랍게도 테이트는 릭이 옆집에 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릭이 테이트의 초대를 받아 그 집으로 올라가 이웃과 인사를 나누면서 영화는 끝난다. 타란티노 영화 중 가장 따뜻한 결말이다. 

기쁨에 찬 배우 샤론 테이트는 현실에서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