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을 읽은 김에 필립 로스의 소설을 한 편 더 꺼내들었다. 2008년작인 <울분>(Indignation)이다. 2권으로 분책될 정도의 분량인데다가 인종, 성, 계급 등 다양한 문제를 현학적인 문체로 다뤘던 <휴먼 스테인>과 달리 <울분>은 한 젊은이가 자신의 길지 않은 삶을 회상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더 쉽게 읽힌다. (혹시 번역 때문?)
약간의 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으나, <울분>의 주인공은 죽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생사의 경계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휴먼 스테인>에서도 그랬지만, 로스는 소설이 3분의 1쯤 전개됐을 때 주인공이 이미 죽었다는 암시를 한다. 주인공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고, 주변 인물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형성이 돼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점이다. 서서히 독서에 속도를 내 문장을 빠르게 훑어나가려는 차에 작가의 이런 기교에 마주치면, 마치 과속방지턱에 걸린 차량처럼 독서 두뇌가 움찔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뭘 잘못 읽었나" 하는 심정으로 앞 뒤 몇 페이지를 들춘다.
아예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첫 챕터의 제목이 '모르핀을 맞고'다. 주인공인 유대계 미국 청년 마커스 매스너는 징집돼서 한국전에 투입된 지 1주일만에 죽음의 기로에 놓인다. 큰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어가려는 찰라에 맞은 것이 모르핀이다. 모르핀에 취해있는 마커스는 자신의 지난 20년을 돌아본다. 유대식으로 정결하게 도살된 고기를 파는 코셔 정육점 집 외아들인 마커스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일을 돕는 것이 자신의 당연한 의무라고 여기는 가풍에서 자라난 성실한 아이였다. 마커스는 부모의 기대를 업고 인근 대학에 진학하지만, 이 무렵부터 아버지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강하고 성실하고 믿음직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의심, 불평, 세상에 대한 저주를 달고 사는 노인이 된 것이다. 아버지의 의심은 주로 아들에게로 향했고, 마커스는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다시 진학한다.
무엇이 아버지를 그리 만들었을까. 작가는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는다. 주변으로부터의 잘못된 정보? 호르몬의 변화 같은 생물학적 이유? 시대의 흐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변화가 무척이나 갑작스러웠다는 점이다. 평화로운 해변 마을에 몰아닥친 쓰나미처럼. 어제까지 평화로웠던 우리의 일상은 오늘 박살난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그때 이랬다면 이랬을텐데, 저랬다면 저랬을텐데. 이후 마커스의 삶은 그런 후회의 연속이다. 버트런드 러셀을 존경하는 자유주의자 청년은 1950년대의 보수적인 사회, 대학 분위기를 가까스로 견뎌 나간다. 무례한 룸메이트와 싸운 뒤 짐을 싸고, 꼰대스러운 학장과 상담하다가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고, 손목에 면도칼 자국이 있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고, 맹장수술 때문에 입원한 병원에서 그 여학생과 성적 장난을 치다가 간호사에게 목격되고, 저학년 남학생들이 갑작스러운 폭설에 흥분해 여학생 기숙사로 몰려가 기괴한 난동을 부리고... 당시 미국에선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 징집되지 않는 제도가 시행중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마커스 주변의 모든 사건과 사람을 마커스가 대학에서 쫓겨나는 방향으로 만지작대는 것 같다.
그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건 마커스의 가슴 속에 쌓여있던 '울분'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울분'이란 단어를 일본의 중국 침략기엔 항일운동가였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엔 국가가 된 노래의 가사에서 따왔다. 마커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채플에 참석해야할 때마다 가슴 속으로 중국 국가를 부른다. "우리 모든 동포의 가슴에 울분이 가득하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필립 로스가 그려내는 마커스를 보고 있으면, '울분'이 없는 젊은이는 젊은이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울분이 결국 만 20세의 마커스를 죽음의 길로 안내했다. 이렇게 써넣고도 맞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조만간이든 먼훗날이든, 아무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삶이니까. 전에 읽은 로스의 책 제목처럼, 한 사람의 인생은 길든 짧은 '얼룩'(stain)에 불과한 것일까. 로스가 이 얼룩을 검고 불길하게 그려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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