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에 해당되는 글 340건

  1.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 (4)
  2. 한 영화팬의 애도와 추억,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3. 일과 삶이 엮이는 순간, '본딩'
  4. 과격한 보헤미안 랩소디? '더 더트'
  5. 이것저것 섞여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 '아사코'
  6. 군주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7. 완결에 대해, '알리타: 배틀 엔젤'과 '킹덤'의 경우
  8. 50대 액션 스타, '폴라'
  9. 청소년이 볼 수 없는 청소년물, '아메리칸 반달리즘'
  10. 인터액티브 영화의 시작?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11. 마법 대신 가족 로맨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12. '퍼스트맨'에 대한 몇 가지 생각
  13. 트라우마와 킬러와 소녀, '너는 여기에 없었다'
  14. 짓다만 성, '안시성'
  15. 음악만 들어도,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16. 지속가능하지 않은 승리와 열정 '보리 vs 매켄로'
  17. 투명성의 지옥 '아논'
  18. 커다란 농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19. 유령을 보는 혹은 보는 척 하는 형사 '리버'
  20. 아이돌에 대한 몰입과 거리감 '도쿄 아이돌스'
  21. 산호초가 죽는다면? '산초호를 따라서'
  22. 이상한 감독, 주연, 투자자, 리뷰어, '서던 리치'
  23.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더 포스트'
  24. 서사가 아니라 감각,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5. 전통과 초현대가 공존하는 그곳, '블랙 팬서'
  26. '스타트렉'과 소화가능한 윤리적 딜레마
  27. 메트로폴리스에서 청년이 방 한 칸을 가진다는 것, '프란시스 하' (2)
  28. 에이리언의 기원, '에이리언: 커버넌트'
  29.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기, '특별시민'
  30. 영화는 영화다,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이상한 춤을 추는 조커

 

*스포일러 있음. 

 

불만과 혼란의 영화. '조커'는 그런 영화다. 조커는 DC코믹스에서 배트맨의 숙적이다. 잭 니컬슨, 히스 레저 등이 조커를 연기해왔다. 조커는 돈도 없고, 가문도 없고, 초능력도 없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질서를 추구하는 배트맨을 괴롭히지만, 왜 괴롭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돈 때문도 아니고 세계 정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 때문도 아니다. 왜 나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커는 무섭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놀음을 하는 것 같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이 허용되지 않을 법한 순간에 우스꽝스러운 일을 벌이기 떄문에 무섭다. 조커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다. 하지만 혼란 이후의 헤게모니 같은 것을 노리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세계가 혼란에 빠지는 걸 즐길 뿐인듯하다. 그래서 조커는 무섭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에서도 조커는 언제나처럼 고담시에 산다. 고담시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가 그러했든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됐다. 고담이란 이름을 지우고 '80년대 뉴욕'이라 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지만, 부유한 엘리트 정치인들은 그 불만을 감지하지 못한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은 고담시 시장 출마를 준비한다. 토마스 웨인은 공감 능력 부족한 엘리트의 전형이다. 소외계층의 불만을 '루저들의 불평' 정도로 해석한다. 도시의 질서를 회복하고 경제를 일으키면 자연스럽게 상황이 좋아지고 불만도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낙수효과의 신봉자다.

 

훗날 조커가 되는 아서 플렉은 파티 광대다. 광대 옷을 입고 상점을 홍보해주거나, 아동 병동에 가서 춤을 춘다. 아서는 그 일을 즐기지만,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서의 유머 감각은 기괴해서, 웃음보다는 불편을 준다. 게다가 상황에 상관 없이 웃음이 터지는 신경질환을 앓고 있다. 웃지 않아야 될 순간에 웃는 아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아서는 언젠가는 텔레비전 쇼를 진행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것은 관객 모두가 안다. 

 

아서는 꿈에 근접하기는커녕 조금씩 나쁜 상황으로 빠져든다. 알고 싶지 않았던 가족사에 얽힌 불편한 진실도 알게 된다. 그의 불행은 사소한 실수, 성격적이며 신체적인 결함, 주변 사람의 악의, 사회의 모순이 결합된 결과다. 어느 부분 하나에서도 난국을 돌파할 기색이 안보인다. 아주 예전에 보았던 만화 '이나중 탁구부'엔 그런 대사가 나온다. "아무렇게나 돼버려." 아서도 점점 그런 생각으로 빠지는 것 같다. 

 

아서는 우연히 사람을 죽인다. 지하철에서 만난 월스트리트 양복쟁이들이 아서를 집단 폭행하자,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아서는 고담시의 혼란을 증폭시킨다. 빈자들 사이에서 아서는 재수없는 양복쟁이들을 죽인 영웅이 된다. 본인은 의도치 않았지만, 아서는 카오스의 중심이 된다. 한국의 시위대는 이념이 어찌됐든 명목상으로는 '새로운 나라'를 꿈꾼다. 시위를 통해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고담시의 시위대는 그렇게 믿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오늘의 질서를 파괴하고 싶을 뿐이다. 내일 고담시가 멸망한다 해도 상관 없다. 고담시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조커와 그를 추앙하는 시위대가 벌이는 행동은 혁명이라기보단 폭동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그린 테러보다도 훨씬 무질서하다. 미국에선 '조커'가 총기 난사 같은 문제를 촉발할까봐 노심초사한다고 한다. '조커'가 하층민의 분노와 그로 인한 질서의 파괴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영화긴 하지만, 이런 영화 때문에 실제 혼란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사회는 얼마나 취약한가. 물론 담배 꽁초 하나도 거대한 산불을 일으킬 수 있다. 건기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다면. 

 

아이슬란드 첼리스트 힐두르 구드나도티르의 음악이 '조커'의 지분 4분의 1은 차지한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 이미 실력을 입증했다. 앞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창작자는 일단 구드나도티르를 떠올릴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도 꽤 큰 몫을 차지한다. 난 메소드 액터를 좋아하지 않지만, 피닉스의 연기를 보는 것이 흥미진진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저렇게 연기하는 배우의 몸과 마음이 온전할까, 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한다. 

 

웃어서 불편하게 하는 조커

*스포일러 있음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영화관에 들어갔지만, 기대치 이상의 감정으로 나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할리우드)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매우 이모셔널한(감상적, 감정적이라는 표현보다 왠지 '이모셔널'이 적절하다고 느낀다) 영화고, 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이 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어쩌면 이 두 가지 관점은 결국 연결된다. '할리우드'는 60을 바라보는 타란티노가 이모셔널하게 돌아보는 추억, 역사, 소망, 꿈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할리우드'는 미국 문화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라 할만한 '찰스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다.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3명의 불한당이 1969년 8월 8일 배우 샤론 테이트-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침입해 임신 8개월의 테이트와 그 친구들 등 5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폴란스키는 영화 촬영을 위해 해외에 있었다) 살인자와 테이트 일행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맨슨은 테이트 집의 이전 거주자와 인연이 있었고, 왜 그런지 지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죽이라고 지시했다. 촉망받는 여배우가 끔찍하게 살해됐고, 살인자들이 '악마'를 자처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상징이자 트라우마였다. 타란티노는 영화에서 이 살인자들을 당시 끝물이었던 히피즘의 추종자들로 묘사한다. 

 

'할리우드'의 주인공은 한물간 액션 스타 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 대역 겸 매니저 클리프(브래드 피트)다. 릭은 50년대 텔레비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제 전쟁영화, 서부영화의 악역으로 배우 경력을 간신히 이어간다. 릭의 일이 줄어드니 클리프의 일도 줄어든다. 클리프는 주로 릭을 촬영장으로 데려다주거나 그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정도의 일만 한다. 날이면 날마다 근사한 신인 배우들이 등장하므로, 릭에겐 산업과 대중의 시선 뒤편으로 조금씩 사라져 가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할리우드'의 초중반부는 느리다. '느리다'기보단 사건이 거의 전개되지 않는다. 릭을 중심으로 1969년 할리우드 풍경을 인류학적으로 재현하려는 목적으로 찍은 것 같다. 세트장과 촬영 장면이 재현되고, 감독, 배우, 스태프들의 관계가 묘사되며, 영화 사조의 흐름을 알려준다. 미국 서부극의 흐름이 쇠퇴하자, 이탈리아에서 수정주의 서부극,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이 나온다. 한 제작자(알 파치노)는 릭에게 수차례 이탈리아 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안한다. 릭은 자기 삶의 중심이었던 할리우드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아 하지만,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한다. 릭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가 다음날 대사를 완벽히 외우지 못해 스스로 자책하고, 그러다가 다시 배우로서의 소명을 깨달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릭은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 나쁘다기보단 스타로서의 적당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스타로서의 위치가 위협받고 더 이상 세상이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릭은 좌절하고 다시 노력하고 결국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릭을 옆에서 지켜보는 클리프는 트레일러에서 애견과 단둘이 산다. 있을 건 있는, 하지만 세련되진 않은 삶이다. 클리프는 릭의 관찰자로서, 한 스타의 전성기와 몰락을 함께 느낀다. 타란티노는 황혼기에 접어든 할리우드 사람들을 풍자하거나 비틀지 않고, 애상을 담아 그려낸다. 

 

끝물 히피 혹은 가장 끔찍하게 왜곡된 히피라 할 수 있는 맨슨 패밀리는 조롱하고 뒤튼다. 이들은 처음에는 캘리포니아 이곳저곳을 히치하이킹하며 다니는 천진난만한 젊은이처럼 보이지만, 기념비적인 악역을 만드는데 일가견 있는 타란티노 영화답게 곧 마각을 드러낸다. 한 농장주를 구워삶아 농장을 사실상 점거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죽어가는 쥐가 그대로 남아있을만큼 더럽게 산다. 무엇보다 참전용사이자 구시대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클리프에게 비겁하게 굴다가 얻어맞는다. (여기서 피트는 멋있는 '옛날 남자'를 잘 연기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안테나 고치다가 뜬금없이 상의 탈의하는 모습도 선보인다.) 영화 하이라이트인 테이트 집 습격 사건에서도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고,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멍청한 인간들로 묘사된다. 그럼 점에서 '할리우드'의 악역은 인상적이지만, 다른 타란티노 영화의 악역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무엇보다 타란티노의 트위스트는 맨슨 패밀리가 습격하는 곳이 테이트 집이 아니라 릭의 집으로 변경되는 대목이다. 무고하고 천진난만하며 자신이 나온 영화를 기쁨에 차서 관람하고 신나 하는 임신 8개월의 배우 테이트는 적어도 이 영화에선 안전하다. 대신 맨슨 패밀리는 클리프와 그의 잘 훈련된 개에게 끔찍하게 척살된다. 어쩌다 릭의 집 수영장으로 떨어진 용의자 중 한 명은 릭의 화염방사기를 맞고 새카맣게 구워진다. 이 대목은 타란티노의 전매특허와 같은 B급 영화 감성이다. 아무리 화염방사기를 사용한 영화에 출연했다 하더라도, 배우가 그걸 집에 뒀을 리는 없지 않은가. 죽음 묘사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산탄총을 맞고 죽은 악당같고, 영화에서만 가능한 대안 역사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히틀러 암살 성공 묘사 같다.

 

그렇게 영화에서만 가능만 상상과 무리를 해서라도 타란티노는 테이트와 친구들을 구해내고 추모한다. 아내가 개와 함께 잠들고, 부상을 입은 클리프는 병원으로 실려간 뒤 릭은 홀로 남는다. 그때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살아남은 옆집의 테이트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릭이 상황을 설명하자, 인터폰으로 테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릭은 평소 테이트, 폴란스키와 친해보려 했으나 인사조차 나누지 못해 아쉬워하던 참이다. 놀랍게도 테이트는 릭이 옆집에 산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릭이 테이트의 초대를 받아 그 집으로 올라가 이웃과 인사를 나누면서 영화는 끝난다. 타란티노 영화 중 가장 따뜻한 결말이다. 

기쁨에 찬 배우 샤론 테이트는 현실에서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산다. 

 

넷플릭스 시리즈 '본딩'을 봤다. '러시아 인형처럼' 이후 오랜만에 끝까지 본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일단 끝까지 보기에 부담이 없다. 편당 15분 안팎, 총 7편으로 구성돼 있다. 시리즈 전부를 봐도 2시간 정도라는 얘기다. 모바일폰 환경,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매체 환경이 이런 분량의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게이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인 피트가 오랜 친구 티프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극이 시작된다. 티프의 직업은 '도미나트릭스'다. 생소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성적으로 지배적인 여성'을 뜻한다. 티프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 간지럼을 태워달라거나, 펭귄옷을 입고 씨름을 한다거나, 막말을 들을 때 성적으로 흥분된다는 남자들이 티프를 찾아온다. 티프는 고분고분하진 않고,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미나트릭스'다. 자신에게 오줌을 눠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피트가 나서서 얼굴 위로 미적지근한 오줌을 뿌려준다. 피트는 티프의 조수가 돼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적 취향의 지하 세계를 그리지만, 중반 이후는 멜로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티프와 고객 사이가 아니라, 티프와 피트, 티프와 같은 대학 강의를 듣는 남자, 피트와 동성 남자 친구 이야기가 그렇다. 난 '본딩'을 보면서 멜로드라마는 아직 가능성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의 핵심은 남녀든, 여여든, 남남이든 '관계'의 얽히고 설키는 모양새다. 그런 모양새를 그림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재미와 의미는 무한대에 가깝다. 다만 멜로드라마의 가능성이 두 시간 안팎의 영화에서도 구현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딩' 후반부에서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일과 삶의 섞임이다. 우린 흔히 공과 사, 일터와 가정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구분선이 생각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당장 주 52시간 노동과 관련한 계산을 봐도 그렇다. 집에서 다음날 회의 때 제시할 아이디어를 열심히 생각하면 노동시간인가. 생각만 하면 노동이 아니라면, 집에서 컴퓨터를 열어 무언가 끄적이면 노동인가. 직장에서 배우자에게 전화하면 노동 시간에서 빼야 하나. 고객의 은밀한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티프의 직업은 어차피 고객의 삶에 깊숙히 개입돼 있다. 티프에겐 '일'이지만, 고객에겐 '삶'이다. 고객은 때로 티프에겐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티프의 삶 속으로 개입해 들어온다. 티프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하려는 순간에, 티프의 노예 노릇을 하며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던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티프와 데이트 하는 남자에게 질투를 드러낸다. 티프가 또다른 남자를 '지배'하려는 순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리즈 종반부 티프와 피트는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한다. 이 역시 일이 삶에 너무 깊숙히 파고들어왔기 때문에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Bonding'이라는 제목의 뜻도 '밀접한 감정적 교류'라는군. 일할 때 감정이 안섞일 수가 있나.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영화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석 달만에 해낼 순 없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넷플릭스에서 본 음악영화 '더 더트'는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가진다. 물론 좀 더 과격하긴 하다. 그건 퀸과 머틀리 크루의 음악, 태도적 간극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테고. 

프레디 머큐리가 성적, 인종적 소수자이긴 했지만, 퀸의 다른 멤버들은 비교적 '정상가족'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머큐리의 떠들석한 파티를 묘사했지만, 그런 행동이 당대 록커들의 태도에 비해 그다지 튄다고 볼 수도 없다. 영국의 록 신은 이미 섹스 피스톨즈 같은 '개쌍놈'의 음악이 휩쓸고간 뒤였으니까. 하지만 머틀리 크루는 차원이 다르다. 어느 록커들의 삶에 견주어봐도 떠들석하고 요란하고 일탈적인 삶을 살았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머틀리 크루는 그러한 자신들의 태도를 밴드의 정체성으로 삼기도 했다. 1980년대 미국 헤비 메탈이 섹스, 마약, 폭력에 탐닉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머틀리 크루가 있다. 

'더 더트'는 시작부터 떠들석하다. 오랜 지병인 강직성 척추염을 앓고 있는 과묵한 기타리스트 믹 마스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보컬 빈스 닐, 베이시스트 니키 식스, 드러머 토미 리)는 말할 수 없이 난잡한 파티를 즐기고 있다. 곳곳에 마약과 섹스가 넘실댄다. 마약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섹스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빈스 닐은 거의 발정난 짐승처럼 묘사된다. 누구의 여자친구든, 약혼자든, 부인이든 아랑곳 않는다(물론 관계가 강제적이라는 흔적은 없다). 니키 식스는 헤어날 수 없는 마약중독자다. 맞고 깨면 또 맞는다. 팔뚝에 주사를 꽂은 채 피를 흘리며 잠들었다가 꺠어나곤 한다. 토미 리는 키만 큰 막되먹은 아이 같다. 니키 식스처럼 조용히 마약하거나, 빈스 닐처럼 문닫고 섹스하는 것이 아니라, 호텔 전체를 뒤집어놓으며 난동을 부린다. 

그런데도 '더 더트'가 '보헤미안 랩소디'와 '유사한 궤적'을 보인다고 말한 건, 이들의 떠들석한 소동이 내면의 상처에서 비롯됐으며, 모두가 결국 지독히 외로운 사람들이며, 급격한 성공이 그만큼 급격한 몰락을 가져올 뻔 했으며, 밴드 멤버들이 한때 다투다가도 결국은 가족처럼 재회해 화해한다는 내용 떄문이다. 베이시스트로선 특이하게 팀의 지주 역할을 한 니키 식스가 대표적 사례다. 영화는 아예 니키 식스의 내레이션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의 어린 시절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생부를 보지 못한 채 자랐고, 엄마는 한 주가 멀다하고 다른 남자를 집으로 들였으며, 그렇게 집에 온 남자들은 하나 같이 니키 식스를 학대했다. 니키 식스는 칼로 자해하는 소동 끝에 엄마와 격리되는데 성공한다. (니키 식스라는 이름은 그가 과거와 절연하면서 스스로 새로 지은 이름이다) 성인기의 난동에 대한 그럴듯한 알리바이긴 하지만, 기원을 알 수 없는 괴물이 더 무섭다는 것은 오랜 진실이다. 

PC함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던 80년대의 이야기고, 그래서 요즘 보기엔 구리지만 또 신기하고 재미있다. 나도 80년대 후반부터 록을 들었지만 머틀리 크루 음악은 많이 접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좀 심각한 가사 때문에 국내 발매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난 오히려 본 조비, 스키드 로, 건즈 앤 로지즈로 이어서 듣다가, 그보다 조금 앞 세대인 머틀리 크루는 나중에야 알았다. 다만 음악영화, 특히 록밴드를 다룬 영화가 '보헤미안 랩소디'나 '더 더트'같은 유형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선 약한 불만이 생겼다. 





**스포일러 있음

어제 오전에 극장에서 다섯명 쯤의 관객과 함께 '아사코'를 봤다. 영화가 너무너무 이상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했다. 서사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감정은 정확히 묘사됐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는 아니다. 이상한 흐름이 자꾸 생각나고, 왜 그리 이상하게 찍었는지 궁금하고, 스스로 해명해보고 싶다. 훌륭한 영화라는 뜻이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이상하다. 오사카의 아사코는 어느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말도 안되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사랑이이었다. 하지만 바쿠는 안정적이기보단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저녁에 빵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빵 사러 갔다가 동네 목욕탕에 들렀는데 거기서 만난 아저씨와 친해져서 그 아저씨 집에 가 만취하고 잔 뒤 빵은 주고 왔다....는 식이다. 결국 바쿠는 신발을 사러간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고 아사코의 내레이션을 통해 회상된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은 남겼다. 

2년 후, 아사코는 도쿄로 이사해 한 카페에서 일한다. 인근 회사의 직장인 료헤이라는 사람이 자꾸 아사코 앞에 나타난다. 놀랍게도 료헤이는 바쿠와 똑같이 생겼다(실제로 같은 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한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다가가지만, 아사코는 바쿠와 너무 닮은 모습에 자꾸 뒷걸음질친다. 사귀어 보려고도 하지만 마음이 온전히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이 잠시 두려움에 떨만한 지진이 발생한 날, 아사코는 료헤이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지진 묘사가 섬찟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하나도 안나오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혼란이 생생히 느껴진다. 거리 곳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후 5년간 둘은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료헤이는 성실하고 유머러스하며 다정다감하다.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질 사람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둘은 동일본대지진 피해를 입은 센다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 활동도 자주 한다. 주변 친구들도 그런 그들을 축복한다. 료헤이는 오사카 본사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청혼하기 전 빠진 에피소드가 있다. 바쿠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쿠는 그 사이 꽤 인기 있는 모델이 됐고, 아침 드라마에 나와 인기를 끄는 셀러브러티가 됐다. 청혼을 받은 순간, 아사코는 옛 연인 바쿠 이야기를 한다. 사실 바쿠가 료헤이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2년 전쯤 바쿠란 사람의 존재를 잡지에서 봤고,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사코가 자신을 처음 본 순간 멈칫한 이유도 이해했다고 말한다. 둘의 결혼은 문제 없이 진행될 것 같다. 오사카에는 창문에서 강이 바라다 보이는 집까지 구했다. 

아사코와 료헤이와 친한 친구들의 저녁 자리에 파국이 발생한다. 바쿠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료헤이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바쿠를 보고 놀란다. 바쿠는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펴 올린다. 2~3초쯤 고민하던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잡고, 둘은 그대로 나가버린다. 바쿠는 아사코를 차에 태우고 달린다. 부모님이 쓰지 않는 빈 집이 훗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자기 일을 대신할 사람은 많다며 휴대폰을 부서 던져버린다. 아사코도 돌아오라는 친구들에게 이별의 말, 사과의 말을 남긴 채 휴대폰을 던진다. 그렇게 자동차는 밤의 도로를 달린다. 

눈을 떠보니 새벽이다. 차는 방파제 근처에 서있다. 센다이 초입이다. 바쿠는 졸리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해서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파제 때문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아사코는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한다. 바쿠는 그러라고 한다. 차를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사코는 면허가 없다고 한다. 역까지 태워줄 필요도 없다고 한다. 바쿠는 그냥 떠나고, 아사코는 돈도 핸드폰도 없이 돌아간다. 

마침 센다이엔 평소 자원봉사를 하며 알고 지낸 지역 주민들이 있다. 한 할아버지가 돈을 빌려주면서도, 남자는 다른 남자와 놀다 들어온 여자는 용서하지 못하니 돌아가지 말라고 권한다. 하지만 아사코는 돌아가기로 한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이. 

아사코는 오사카의 료헤이 집을 찾아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전날 저녁이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혼집이 될 곳이었다. 아사코를 발견한 료헤이는 화를 내면서 무슨 낯으로 나타났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키우던 고양이는 버렸다고도 한다. 아사코는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앓아누웠다는 오사카 시절 고향 친구를 찾아가기도 한다. 활발하던 친구는 루게릭 병으로 침대에 누운 상태다. 아사코는 친구 어머니로부터 귀여운 반전이 담긴 옛 이야기를 듣는다.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의 집 앞으로 와 고양이를 찾는다. 사실 료헤이는 고양이를 버리지 않았고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아사코는 료헤이의 집으로 들어간다. 료헤이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다. 료헤이는 앞으로 아사코를 완전히 믿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사코는 수긍한다. 그리고 료헤이에게 덜 의지하겠다고 말한다. 둘은 베란다에 서서 비가 와 불어난 강을 바라본다. 료헤이는 물이 더럽다고 한다.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고 한다. 끝. 

자유로운 바쿠(위)와 성실한 료헤이(아래). 

처음엔 바쿠와 료헤이가 도플갱어인줄 알았다. 아니다. 도플갱어는 만나면 죽는데, 둘은 한 번 마주친다. 아니면 둘이 닮았다는 건 아사코만의 착각이었던가. 아니다. 바쿠와 사귀던 시절 아사코의 단짝 친구가 료헤이를 보고 똑같이 생긴 모습에 놀란다. 바쿠와 료헤이가 닮았다는 건 아사코의 주관이 아니라 제3자가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다. 

아사코는 다시 돌아온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바쿠를 외면하고, 오랜 시간 자신을 사랑할 료헤이를 찾기로 한다. 낭만과 현실의 대결에서 현실이 승리? 하지만 되찾은 현실이 그리 맑고 밝지만은 않다. 료헤이와 아사코의 마지막 대사는 시적이다. 강물은 더럽다. 하지만 아름답다. 폭우로 불어나 이것저것 뒤섞인 강물이지만 아름답다. 인간 관계는 단일한 감정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이나 숭배나 증오는 없다. 여러 가지 감정이 비율을 달리하며 섞이며 관계를 직조해나갈 따름이다. 최상의 잉꼬 부부라해도 미움이나 의심이나 권태의 싹은 마음 어딘가 뿌려져있다. 그것이 얼마나 자라나느냐, 자라났을 때 얼마나 현명하게 가지치기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실존인물인 영국 앤 여왕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어딘지 실제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아마 영화의 양식이 지금까지의 시대극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여왕이 중심인 영화야 많았지만, 그의 측근들까지 모두 여성으로 그린 영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왕과 두 여성 측근에 의해 조종되는 말에 불과하다. 권력있는 신하들조차 여왕 하녀의 술수에 놀아난다. 

세습군주국가의 많은 왕이 그러했겠지만,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꽤나 이상하다. 군주로서의 의무감으로 국정을 억지로 수행하지만,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국가를 운영할 능력은 없어 보인다. 안아픈 데가 없어서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기괴한 컴플렉스까지 갖고 있다. 그 와중에 오랜 친구인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가 여왕 대신 국정 전반에 관여한다. 신분 상승의 욕구에 불타는 귀족 출신 하녀 에비게일 힐(엠마 스톤)이 여왕과 사라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에비게일, 여왕, 사라,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전쟁이 벌어지는 화려한 궁궐. 

여왕의 존재감은 크면서도 없다. 하녀와 하인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릴 때, 호화찬란한 침실을 마음대로 사용할 때는 궁궐의 주인이지만, 국정을 관할할 때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길 기다리는 꼭둑각시 인형 같다. 흥겨운 무도회를 갑자기 중단시키거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현악5중주단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사라의 뺨을 후려치더니, 곧 그녀의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다. 군주제 권력 시스템의 허점, 앤 여왕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허점을 파고드는 모리배들이 나타난다. 사라가 왜 그리 권력을 휘두르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사라는 마치 권력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양 자연스럽게 휘두른다. 반면 에비게일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하다. 뚱뚱하고 성기가 작은 독일인에게 팔려가듯 시집간 경험이 있는 에비게일은 어떻게든 신분을 다시 상승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에비게일은 사라가 어떻게 앤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조심스레 살핀 뒤, 이를 업그레이드해 적용한다. 에비게일은 사라보다 젊고, 더 강한 동기부여가 돼 있다. 어쩌면 에비게일은 사라의 20여년전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더 페이버릿'은 무능해 보이지만 여전히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여왕을 중심으로, 획득하기도 다루기도 어렵지만 일단 쥐고 있으면 더없이 좋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두 여성의 이야기다.국가 운영의 큰 틀을 둘러싼 이념적 대결도, 셰익스피어식의 장엄한 궁중 비극도 없다. 누가 권력자의 비위를 잘 맞춰 환심을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뿐이다. 

두 차례 인상적인 롱테이크 클로즈업이 나온다. 앤 여왕이 무도회에서 사라의 춤을 보다가 조금씩 표정이 굳어가는 모습, 앤 여왕이 권력을 차지한 에비게일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며 다리를 주무르라고 하는 모습이다. 그때 앤 여왕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다.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올리비아 콜맨의 스산하면서도 무서운 표정으로 권력자 내면의 황폐한 풍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라와 에비게일, 두 여자가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건 쟁투를 벌였지만, 이 전쟁의 주인공은 결국, 당연히도 여왕이다. 여왕의 내면은 두 여자가 맞붙은 전쟁터가 됐다.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관객이 그 내면의 전쟁터 풍경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군주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묻는다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풍경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권력 일반의 속성에 대해서도 은근한 암시를 한다. 

아름다운 포스터. 



***스포일러 있음

'알리타: 배틀 엔젤'은 지금보다 더 근사할 수 있었던 영화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크게 흠잡을데가 없다. 이미 할리우드의 특수효과 기술은 가상 캐릭터를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 재현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는 SF의 오랜 소재지만, '알리타'는 인간과 사이보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이질성을 극복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세상을 시각적, 감정적 이물감 없이 보여준다. 사이보그지만 또한 10대 소녀의 외모와 행동 방식을 가진 알리타는 10대 소년과 자연스럽게 사랑한다. 알리타가 심장을 꺼내 보여주며 사랑을 증명하려 하자 소년 휴고가 당황하는 장면은 인간과 기계가 교류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마주칠 '언캐니 밸리'를 재치있게 그려낸다. 수십년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기계와 신체의 융합을 시적인 악몽처럼 그려냈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 상상의 산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AI'에서 그려낸 이물감 정도가 사이보그에 대한 동시대 이미지의 극한에 가까울 것 같다. 

문제는 서사다. 프로듀서 제임스 카메론과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알리타'의 서사가 조금 더 완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도 박사(크리스토퍼 왈츠)는 천공의 도시에서 떨어진 고철 더미에서 사이보그 소녀의 두뇌를 줍는다. 두뇌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 이도 박사는 소녀에게 그럴듯한 신체를 붙여주고는 죽은 딸의 이름 알리타를 선사한다. 하지만 알리타의 옛 기억은 사라졌다. 다만 거대한 경찰 기계를 맞아 전투 자세를 취하는 알리타의 반사 신경이 과거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줄 뿐이다. 

이도 박사, 알리타가 등장하고, 알리타와 밀당하는 소년 휴고가 등장하고, 이도 박사의 비밀이 밝혀지고, 알리타가 조금씩 기억을 회복한 뒤 능력을 발휘하는 중간 부분까지 영화는 매우 경쾌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중간을 넘어서면서 서사는 조금 숨을 고른다. 종반부의 장쾌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살짝 속력을 줄였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떄까지 흘러간 러닝타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알리타'는 서사의 장애물을 잘 피한 뒤에도 좀처럼 속력을 내지 않는다. 레이싱 게임으로 치면, 앞서가던 라이벌 차량을 다 따돌리고 결승선까지 직선 도로만 남았는데, 액셀레이터를 밟지 않는 모양이다. 왠일인지 레이서는 속력을 적당하게 줄이고, 심지어 타이어를 교체하러 들어가고, 괜히 오솔길을 탄다. 122분의 상영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자꾸 딴청을 부린다. 상영시간 내에 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카메론과 로드리게즈는 속편을 준비했다. 영화 내내 몇 번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다른 이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된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끝내 알리타와 마주하지 않는다. 모터볼 경기 선수로 나선 알리타가 천공의 도시쪽으로 칼을 치켜들면, 리더는 그런 알리타를 보고 웃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아마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은 다음 편에서 보여주려는 것 같다. 

일본 만화 원작이 있었고, 그 서사를 어느 정도는 담아내려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알리타'가 할리우드의 속편 관행을 너무 일찍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래서 한 영화에 전력을 다하는 대신, 후속편을 위해 서사의 꼭지들과 아이디어들을 남겨둔 것 같다. 이런 의심이 들었을 때 생각난 건 원빈이 '아저씨'에서 했던 대사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알리타: 배틀 엔젤'의 장면들. 인간과 기계의 로맨스에는 이물감이 없다. 

다음 편을 위해 이번 편의 아이디어를 아낀다고? 이번 편이 망해서 아예 다음 편을 제작할 기회가 없다면 어쩌려고? 카메론의 영화를 예로 들자.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가 터미네이터와의 대결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났다면? '아바타'에서 인간 군인들이 나비족의 터전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가 끝났다면? 할리우드가 속편을 만들어 사골 우리는 관행을 탓하자는게 아니다. 장기적,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려는 건 자본주의 기업의 속성이다. 다만 속편을 염두에 두었더라도 개별 영화의 서사적 완성도는 갖추어야 한다. 완성된 영화의 세계관이 워낙 탄탄할 때, 1편에서 구현되지 않은 아이디어가 풍부할 때, 속편은 제작될 수 있다. '터미네이터2'가 그런 영화였다. '터미네이터'는 그 자체로 뛰어났지만, 2편 역시 자체적으로 뛰어났다. (이후의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덤 혹은 향수 상품이다) 그때의 카메론은 아이디어를 하나의 영화에 모두 쏟아부은 뒤에도, 다시 다음 영화를 만들만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이었다. 이제 카메론은 더 이상 샘솟는 아이디어가 없을까봐, 아니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걱정이 많았던 걸까. '알리타'가 이런 식의 결말을 내려고 했다면, 애초에 천공의 도시의 리더는 그토록 자주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속편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 종반부에 힌트만 숨겨두었으면 됐다. 하지만 '알리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리타와 리더의 대결 구도를 조성한 뒤, 둘이 한 번도 대결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난다. 이건 완성된 영화가 아니다. 

'알리타' 얘기를 한참 해서 사족처럼 붙이는 격이 됐지만, 넷플릭스의 '킹덤' 역시 완결성 면에선 실격이다. '킹덤' 첫번째 시즌은 6편으로 끝났다. '킹덤'을 시즌제 드라마로 볼 수 있다면, 이건 시즌제를 오용하거나 악용한 사례다. 조선 중후반 어느 시대,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병이 발생한다. 역병은 죽어가는 왕을 무리하게 살려두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감염자들은 밤이면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바위 밑, 마루 밑 등에 숨는다. 이 조선판 좀비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제작진은 좀비의 출현 이유에 대해 제대로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다음 시즌으로 해결을 미룬다. 심지어 좀비와 인간의 일대 대결이 벌어지려는 순간 첫번째 시즌을 끝낸다. 여러 가지 인터뷰나 극의 전개로 짐작컨대, 제작진은 이미 모든 설정과 서사의 구상을 마친 것 같다. 시즌 2가 시즌 1의 인기에 힘입어 억지로 제작됐을 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시즌제 드라마라도 최소한의 완결성은 있어야 한다.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죄수들이 탈옥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면, 그걸 시즌의 끝이라 부를 수 있나. 

'킹덤'의 첫번째 시즌 여섯 개 에피소드는 완결된 시즌이라기보단 10~12편 시즌의 전반부로 보인다. 첫번째 시즌이 이렇게 끝나고 보니 '킹덤' 1, 2편이 다소 늘어지는 것처럼 보인 이유도 마음대로 추정해보고 싶다. 제작진은 '킹덤'을 두 개의 시즌으로 늘이기 위해 초반부 호흡을 일부러 늘어뜨린 것 아닐까. 차라리 두 개의 시즌이 아니라 10편짜리 한 개의 시즌으로 계획을 세웠다면, '킹덤'은 훨씬 깔끔한 호흡의 서사를 보여줬을 것 같다. 

  




넷플릭스 영화 '폴라'를 보다. 이름이 낯선 스웨덴 감독 요나스 오케르룬드가 연출했다.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쪽은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 대신 U2, 콜드플레이, 비욘세, 그리고 마돈나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경력이 확 들어온다. '폴라'는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에 대한 선입견을 고스란히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화려한 스타일(그리고 그것이 전부). 

던컨(매즈 미켈슨)은 50을 앞두고 은퇴 직전인 청부살인자다. 던컨은 은퇴와 함께 회사로부터 거액의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돼먹지 않은 사장은 그 퇴직금이 너무 아까워 은퇴 사원들을 미리 죽이려 한다. 그러면 퇴직금을 아껴 회사 자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젊은 킬러들을 던컨에게 보낸다. 하지만 애송이들에게 쉽게 죽을 던컨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에서 서사의 약점을 들어 굳이 작품성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폴라'는 최근 할리우드 산 B급 액션의 한 흐름에서 보는 편이 낫겠다. 그 흐름이란 '존 윅' 시리즈가 대표한다. 매우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선보이며, 그 액션은 때로 코믹스 원작이라는 태생을 증명할 정도로 물리 법칙을 거스른다. '인명 경시'라는 말을 써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주인공 한 명의 손에 의해 쉽게 죽어나간다. 너무나 패셔너블하게 차려입은 킬러 주인공이 있으니, 수백, 수천명 악당의 목숨을 연민할 시간은 없다. 

'존 윅'이 볼만한 건 키애누 리브스 덕이다. 연기를 못해도 상관 없다. 리브스가 잘 맞춘 검은 양복을 입고 총을 휘두르는 순간, 연기 같은 것은 필요없다. '아토믹 블론드'에선 샤를리즈 테론이 그랬다.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테론은 스모키 화장을 한 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너무 불편해 보이는 멋진 옷들을 입고 총을 쏘아댔다. '폴라'의 절반은 매즈 미켈슨이다. 54세의 미켈슨은 작심한듯 액션 배우로서의 포부를 선보인다. 마치 리암 니슨이 '테이큰 ' 이후 뒤늦게 액션 배우가 된 것처럼. 

10년간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활동하던 미켈슨은 2006년 '카지노 로얄'에 이르러 전세계 관객에게 얼굴을 알렸다. 티비 시리즈 '한니발'이나 슈퍼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출연하면서 명성을 한 단계 높였다. 그리고 자신이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폴라'에서 야심을 보인다. 

내보일만한 야심이다. 북유럽 겨울처럼 차가운 미켈슨의 표정과 액션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미국 이외 다른 문화권 배우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위해선 자국에서 확실하게 성공하고 이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어야 하기에, 미국이나 영국 배우보다 출발이 늦다. 그래서 경력이 얼마되지 않은 배우 같은데 나이가 꽤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이제 액션 영화 좀 찍어보려하는데 이미 50대 중반인 미켈슨. 하지만 60대 중반이 넘은 리암 니슨도 여전히 액션을 찍으니 미켈슨도 10년 이상 못 찍으리란 법이 없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아메리칸 반달리즘'(American Vandal) 시즌 1, 2를 봤다. 시즌 1은 고등학교 교직원 주차장에 있던 차량들에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로 남성 성기 낙서를 해놓은 사건을, 시즌 2는 고등학교 급식 레모네이드에 설사제를 넣거나 피냐타 안에 똥을 넣거나 하는 식의 '똥 테러'를 그린다. 두 명의 고등학생 프로듀서들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해나가는 페이크 다큐 형식이다. 두 사건 모두 유력한 용의자가 드러났고, 해당 학생은 퇴학당한 상태다. 일단 부딪히는 저널리즘 정신을 가진 두 프로듀서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꼼꼼히 살핀 끝에, 진범으로 몰린 이가 진범이 아님을 밝혀 나간다. 

범죄는 범죄인데 중범죄는 아니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피의자로 연루된 사건이다. 범행도 심각하다기보단 조금 웃긴다. 하지만 제작진은 시침 떼고 사건을 심각하게 바라본다. 마치 '외로운 늑대'가 끔찍한 테러라도 벌인 듯한 시선으로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별 거 아닌 걸 별 거 처럼 다루니, 웃음기는 거의 없다. 가끔 분량을 채우려는 듯한 억측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각 편 30분 분량, 총 8편의 시리즈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게다가 제작진은 분명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를 심어두었다. 각 시즌의 마지막 회를 보고나면 무척이나 씁쓸해지는 이유다. 첫 시즌에서 범인으로 지목받은 소년은 무죄가 입증된 뒤에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다큐 제작 과정에서 인터뷰한 동급생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평소 자신을 미워하던 스페인어 선생의 집에 실제로 페인트 테러를 하고 만다. 무죄가 밝혀진 뒤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세상이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주한다. 그 편견을 확신시켜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편견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간다. 

시즌2는 인터넷 세상의 가면에 대해 다룬다. 자주 언급되는 주제긴 하지만, 7편의 에피소드를 거치다가 마지막 회에 갑자기 주제를 제시한다. 소셜미디어의 시대,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는 친구인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나눌 친구는 없는 사람들. 또 그러한 약점을 노리는 사람들. 은밀한 따돌림, 따돌림을 이겨내기 위해 벌이는 자기방어적 기괴함, 관료적인 학교, 시즌 1에서도 언급된 주제인 편견. 그런 점에서 극으로서의 구성은 시즌 1이 나았을지 모르지만, 주제적인 확장성 측면에선 시즌 2가 나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긴 하지만, 청소년이 보고 생각해보면 좋을 주제다. 시즌 3가 나올 것을 확신한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다섯 번째 시즌이 신기한 시도를 했다. 12월 28일 공개된 첫 에피소드 제목은 '밴더스내치'. 사실 '블랙 미러'는 항상 신기한 이야기이긴 한데, '밴더스내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이 신기하다. '밴더스내치'는 간단히 말해 인터액티브 영화다. 관객의 선택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밴더스내치'가 인터액티브 영화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리고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 가지 옵션 중 10초 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항상 선택할 자세를 취하라고 일러준다. 난 집에서 PS4로 넷플릭스를 보았기에, 이 기계에 딸린 듀얼쇼크를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시대배경은 1980년대 초반. 주인공 스테판은 '밴더스내치'라는 소설을 게임으로 옮기려 하는 초보 개발자다. 이 소설은 작가가 정신착란에 빠져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밴더스내치'는 독자의 선택에 따라 주인공이 다른 길을 걷는 소설이다. 아마 "이러이러한 선택이면 00쪽, 다른 선택이면 xx쪽으로 가시오" 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스테판은 게임 출시를 위해 밤낮으로 코딩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극적 사고로 사망한데 대한 죄책감과 원망을 갖고 있는 스테판은 작업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조금씩 정신을 놓는다. '밴더스내치' 게임 속 주인공이 게이머의 손에 의해 이런 저런 선택을 하듯, 자기도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의 게임회사 사장과 천재 개발자, 그리고 초보 개발자 스테판(왼쪽부터)

작품을 보기 전에는 결정적인 몇 가지 선택지만 있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초반부터 선택지가 많다. 아침 시리얼로 무얼 먹을지,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떤 음악을 들을지도 선택해야 한다. 관객이 한 가지 옵션을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대로 그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 과정의 편집에 버퍼링이나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다. 아침 식사나 음악에 대한 선택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스테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난 어쩌다가 두 가지 엔딩을 보았다. 하나는 스테판이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떠나는 선택을 한 뒤, 성인이 된 스테판이 상담가와 상담하다가 갑자기 죽는 엔딩, 다른 하나는 스테판이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에 갇힌 뒤 그의 게임이 출시되지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하는 엔딩이다. 이미 해외 사이트에는 '밴더스내치'의 선택에 따른 플로우차트가 올라있다. 게임도 잘 만들고 스테판의 정신도 멀쩡한, 확실한 해피엔딩은 없는 것 같다. 스테판은 환각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정신과에서 주는 약을 먹고 밋밋한 게임을 만들거나, 약을 먹지 않고 조금 나은 게임을 만들지만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 시신을 토막내고 엄청난 게임을 만들거나 하는, 그런 엔딩들이 소개돼 있다. '블랙 미러'식 엔딩이라고 할까.  (외신을 보면, 다섯 가지 주요 엔딩이 있다고 한다.)

선택에 따라 결말에 너무 빨리 이르면, 친절하게도 앞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안내한다. 내가 두 가지 엔딩을 본 것도 이렇게 선택을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의 성격에 따라 자극적이고 흥미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상담가 만나고, 주는대로 약도 먹고, 자살도 하지 않으려 하고, 게임 회사 사장 말도 잘 듣다보니 자꾸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선택을 되돌려야 했다. 

이렇게 쓰다보니 매우 우울하고 무서운 이야기 같은데, 의외의 유머 코드도 있다. 스테판에게 지금 자기를 조종하는 것이 '넷플릭스'라고 알려주는 선택이다. 80년대의 스테판은 물론 넷플릭스를 모른다. 그러면 넷플릭스가 무엇인지 조금 더 설명해주는 옵션도 있다. 스테판이 천장을 보면서 "넷플릭스가 뭐야!"라고 외치는데 조금 웃긴다. 

넷플릭스 시리즈 속 주인공이 대사로 넷플릭스를 언급하는 건 자기반영적 유머다. 인간에게 자유의지 같은 건 없고 누군가(신,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닌 외계인 등)의 조작을 따라 살아간다는 생각은 종종 만나는 아이디어다. 넷플릭스는 그들의 첫 인터액티브 영화를 인터액티브 매체 자체에 대한 영화로 만들었다. 영리하고 흥미로운 선택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영화가 지속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해외 언론에 '밴더스내치'에 대한 언급이 꽤 많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초기 반응은 괜찮은 거 같고(뉴욕타임스는 '시청자가 권력을 얻었다'고 표현), 넷플릭스나 다른 회사가 인터액티브 영화를 몇 편 더 만들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처럼 자기반영적인 영화를 계속 만들수는 없을 것이니, 그러면 영화의 인터액티브란 것이 관람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나만 해도 '밴더스내치'가 흥미로울지언정 여느 '블랙미러' 시리즈처럼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다. 프레임 자체, 프레임 바깥 세상을 자꾸 의식하게 만드는 건 전통적인 극작에서 금기다. 아마 이런 인식은 '작품'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에 근거했겠지. 하지만 배우가 관객을 향해 직접 말하거나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건 매우 드물게,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테크닉이다. 관객(독자)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완결된 창작자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에 호응하거나 반대할 뿐, 그 세계관과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에 동참하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한국 드라마야말로 가벼운 인터액티브 제작방식을 선보였는지도 모른다. 초반 몇 회분만 찍어놓고 시작한 뒤 시청자 여론을 보고 주인공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애초 작가는 주인공을 죽이는 비극적 결말을 쓰고 싶었지만, 극에 몰입한 시청자들이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주인공을 살리는 결말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그런 작품이 좋을 리가. 게다가 현대의 관객들은 이미 인터액티브한 또다른 매체에 충분히 익숙하다. 바로 게임이다. 매체와의 인터액티브한 상황을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를 보기보단 게임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스포일러 있음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는 대체적 평가대로 해리 포터 시리즈와 그 스핀오프 작품 중에서도 못 만든 편에 속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133분은 그리 긴 상영시간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유독 길게 느껴진다. 영화가 이렇게 제작된데에는 짐작가는 이유는 있다. 워너브라더스는 '신비한 동물' 시리즈를 격년에 한 편 꼴로, 모두 5편 선보이겠다고 공언했다. 5편의 시리즈를 동력을 잃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선 서사가 유장하고 굴곡지게 이어지고, 캐릭터는 충분한 깊이를 갖출 준비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작진은 '신비한 동물' 2편인 이번 영화에서 그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2편은 1편처럼 신비한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그 특성을 현시해 관객의 시선을 모으지 않고, 이렇다할 사건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저 1편에서 간략히 소개된 그린델왈드, 크레덴스 등 인물들의 개인사를 조금 더 보여주고, 내기니, 덤블도어 같은 새 캐릭터를 소개하며, 1편에서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 퀴니 같은 인물에게는 전혀 새로운 진로를 제시한다. 그래서 신비한 동물들과 마법을 보러왔던 관객들은 난데없는 '가족 로맨스'를 지켜보게 됐다. 말이 가족 로맨스긴 한데, "알고 보니 형제" "알고 보니 남매"로 이어지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가계도는 한국식 '막장 드라마'에서도 익숙하다. 

그래도 몇몇 배우의 퍼포먼스는 언급할만하다. 에디 레드메인이 '덕후 연기의 일인자'임은 다시 증명됐다. 이번 영화에선 뉴트 스캐맨더의 학창 시절도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방학 때도 집에 안가고 학교에 남아 동물을 돌보는 학생이었다. 사람보다, 마법사보다, 동물을 사랑하는 듯한 그는 대화를 할 때도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45도 각도 아래로 시선을 깐 채 대화하는가 하면, 좀 구부정한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활보하고, 마법과 동물 돌보기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제도에 속해 공식적인 일을 하기는 거부한다. 이 때문에 가족과도 다툴 정도로 고집이 센 인물이다. 이런 '양덕'을 연기하는데 레드매인 말고 다른 배우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조니 뎁은 악당 그린델왈드로 본격 등장한다. 가위손, 에드 우드, 윌리 웡카 같은 팀 버튼과의 협업작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당장 잭 스패로우 연기만 봐도 조니 뎁이 기괴하게 과장된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하는데 재능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린델왈드도 그렇다. 이번 영화에서도 출연 분량이 절대적으로 많진 않아 보이는데, 감옥에 갇힌 첫 장면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묘지에서의 연설 장면에선 좀 뻔한 논리(우리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을 더 큰 악에서 구하려 할 뿐이다) 에도 살짝 설득된다. 악 그 자체였던 볼드모트와 달리, 그린델왈드의 행동엔 그럴싸한 논리를 제공한다는 점이 '신비한 동물' 시리즈의 특색 같기도 하다. 반면, 그린델왈드의 카운터파트라 할 수 있는 주드 로의 덤블도어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만일 둘의 역할을 바꿨다면 주드 로가 조니 뎁만큼 할 수 있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덕중의 덕,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

설득력있는 악당 그린델왈드(조니 뎁)

허허실실 덤블도어(주드 로)

문제의 내기니(수현)와 크레덴스(에즈라 밀러).

 


**스포일러 조금(그런데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간게 스포일러일까?)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을 보고 몇 가지. 


1. '퍼스트맨'의 초반부 우주 유영 장면에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검고 광막한 우주 공간을 느리고 우아하게 유영하는 비행체의 모습은 모두 스탠리 큐브릭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소심하게 주장한다). 나른하고 아름다운 배경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큐브릭이 우주에서 트랜스 상태로 도달하는 방법은 관념이었지만, 셔젤은 철저히 물질이다. 큐브릭의 우주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한 끝에 제 머리 속의 관념 혹은 외계의 초인간적 존재를 만난다. 하지만 셔젤의 우주인들은 우주선의 예기치못한 사고로 인해 제자리에서 급회전을 하거나 엄청난 진동을 경험하면서 트랜스로 향한다. 영화 속 기자들은 우주를 경험한 이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해 묻지만, 이들 우주인은 철저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로 묘사된다. 닐 암스트롱은 우주에 기념품을 가져가느니 연료를 조금이라도 더 싣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2.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서의 솜씨를 보여줬듯, 셔젤은 엇박에 능한 재즈 뮤지션처럼 능란하게 서사의 리듬감을 과시한다. 난 두 가지 점에서 그 리듬감을 느꼈다. 자넷 암스트롱(클레어 포이)은 집에서 남편 닐(라이언 고슬링)의 안부에 대해 늘 노심초사한다. 나사의 배려로 라디오를 통해 우주와의 교신 내용에 대해 듣지만, 그 내용이 항상 유쾌하지만은 않다. 억지로 근심을 감추는 자넷 주변에는 두 명의 어린 아들들이 맴돈다. 아이들은 종종 천진난만하게 자넷의 근심 속으로 끼어들고, 아빠가 죽음의 목전에 다가섰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가 놀아도 되요?"라고 묻곤 한다. 닐이 달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날, 큰 아들만이 아빠가 살아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남편과 아내, 아내와 아들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사이의 감정의 엇박이 아이러니를 창출한다.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한 아폴로 계획에는 수많은 실험이 필요했고 그만큼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퍼스트맨'은 그 과정을 매우 공들여 보여준다. 그런데 암스트롱이 달에 가는 대목은 매우 재빠르게 처리한다. 암스트롱이 늦은 밤 집을 나선다. 우주인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이 짧게 삽입된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우주선에 탑승한다. 어떤 다짐도, 결의도, 절차도 생략한다. 우주선이 달에 내리고 암스트롱이 표면에 닿는 장면은 천천히 묘사하더니, 귀환하는 대목은 다시 생략한다. 또다른 엇박이다. 

3. 할리우드의 우주 영화에서 흔한, 나사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 치며 환호하는 결말부는 없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지 않는 듯 연기한다. 라이언 고슬링은 이미 이 분야의 특기를 여러 차례 자랑했다. 셔젤의 전작 '라라랜드'에서 그랬고,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에서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대사와 표정이 적었다. 그러면서도 할 연기는 다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클레어 포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걱정과 분노에 휩싸여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근엄한 척 위장하는 건 군주들의 특징 아닌가. 

4. '퍼스트맨'은 '위플래쉬'나 '라라랜드'보다 주제적으로 확정되고, 인간에 대한 시선에 깊이가 있으며, 서사의 세련미나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앞선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달에 착륙한 닐이 어린 나이에 죽은 딸을 회상하고(흔한 홈비디오 삽입 형식), 딸의 팔찌를 달의 분화구 속 어둠으로 던지는 대목은 좀 상투적으로 보인다. 닐이 공적인 임무, 사적인 감정을 모두 추구하는, 피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미 영화 속에서 드러났다. 달에 가서까지 딸과의 엣 추억을 떠올리게 한 건, 대중영화로서의 '킬링 파트'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과잉이었다. 내내 절제하던 영화가 이 대목에서 누선을 자극하려 애쓴다. 끝까지 쿨했으면 좋았을걸. 







  


**스포일러 있음

'케빈에 대하여'(2011)는 근 10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무섭다. 1시간 52분이면 긴 상영시간도 아닌데, 그 시간 내내 온몸이 굳어 있었다. 나중에는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봐도 무서웠다. 이 영화에서 '케빈' 역을 맡은 에즈라 밀라는 이후 어디서 봐도 무서워하게 됐다. 아무리 멀쩡한 역을 연기해도 무섭다. (하긴 멀쩡한 역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하다) 기자회견이나 팬미팅에서 활짝 웃고 있어도 무섭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린 램지가 '케빈에 대하여' 이후 6년만에 내놓은 영화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돼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받았다. '케빈에 대하여'만큼 무섭지는 않지만, 여전히 온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다. 

조(호아킨 피닉스)는 실종 혹은 납치된 사람을 구출하는 일을 하는 남자다. 물론 구출 과정에는 무지막지한 폭력이 수반되기에, 조는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노모와 함께 살아간다. 조에게 상원의원의 딸 니나를 구출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미성년자인 니나는 아마도 성적 착취를 당하는 곳에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 조는 (올드보이 최민식처럼) 망치 하나 들고 악당의 소굴에 잠입한다. 

소녀와 그를 지키는 킬러. 금세 '레옹'이나 '아저씨'가 떠오를만큼 대중영화에서 흔한 구도다. 램지는 킬러의 트라우마에 조금 더 접근한다. 물론 아저씨(원빈)나 레옹(장 르노)도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조는 그 양상이 조금 심각하다. 조는 일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 종종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친다. 짐작컨대 그는 어린 시절 심각한 가정폭력이 횡행하는 환경에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성인이 돼 군인으로 복무했으나 여전히 무언가 끔찍한 경험을 한 것 같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도 여러 차례 목격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는 일을 할 때는 폭력적인 남자지만, 평상시엔 자기파괴적인 남자다.조는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종종 자살을 흉내낸다.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거나 칼을 입 안으로 넣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꽤 체중을 불린 호아킨 피닉스가 그 육중한 육체 안에 갇혀 자기 자신과 싸운다. 트라우마는 이 남자의 온몸을 병들게 한 것 같다. 


자기가 죽인 남자 옆에서 괴로워하는 조(왼쪽). 


장례식을 치르는 조. (어머니 시체를 검은 비닐로 싸서 강물에 유기하는, 장례식 맞습니다)


가정폭력으로부터 도피하는 어린 시절의 조


조와 그가 구한 소녀 니나. 최종 보스의 결말은 예상밖으로 이뤄진다. 


'트라우마 탐구'라는 영화의 '예술적' 주제가 '킬러와 소녀'라는 대중영화의 구도와 정확히 어울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 각본상을 주는 것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한 남자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홀로 버둥거리는 모습을 89분간 관찰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남자가 무언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을 하다가 자신의 과거에 발목잡히는 구도가 영화를 풀어가기에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남우주연상엔 이의가 전혀 없다. 실제로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70%는 호아킨 피닉스다. 피닉스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 크리스찬 베일과 함께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메소드 액팅 남우가 아닐까.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은퇴를 선언했으니, 이제 걷는 뒷모습만으로도 긴장감을 주는 배우는 많지 않다. 베일의 연기를 보면서도 가끔 느끼는 거지만, 이 영화에서 피닉스를 보면서 "저러다 죽는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니.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이른 은퇴를 선언한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무당이라도, 접신을 반복해 신체와 정신을 변환하다보면 원래의 자기 자신을 건강히 유지할 수 있을까. 게다가 피닉스 같은 배우가 맡는 역할이라는 것이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처럼 거대한 고통을 체내에서 삭혀야하는 일이고 보면, 괜한 걱정은 아닐 듯하다. 

피닉스가 70%라면 나머지 30%는 음악을 맡은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다. 도입부의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부터 압도적이어서,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초반부터 관객의 기선을 제압한다. 카메라에 무엇이 찍혔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을 배경에 깔면 일단 그 영상은 볼 수밖에 없다. 

물론 호아킨 피닉스와 조니 그린우드를 불러모은 감독의 역할을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스포일러 있음. 

추석 영화 중 '안시성'을 보았다. 관람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전투 장면의 표현 수위가 '12세 관람가'에 맞춰졌기 때문일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렸다. 전투 장면에선 인체가 크게 훼손됐다. 피가 낭자하진 않았지만, 신체는 여러번 절단됐다. 오히려 '12세 관람가'가 다소 후하게 받은 등급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본의 방향성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 세계에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영화가 민족주의 색채를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연개소문과의 갈등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공성전이나 백병전도 잘 연출됐다고 생각한다. 과시적이면서도 흔한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병사들의 동선이나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연출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9시간에 가까운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몇 차례의 대규모 공성전 뿐 아니라, 프로도의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빛, 골룸의 사악한 개성 같은 것들이다. '타이타닉'을 본 뒤 기억에 남는 건, 배가 절반으로 쪼개지는 장면 뿐 아니라 잭과 로즈의 갑판 위 데이트 같은 장면이다. 전쟁영화는 전투장면의 연속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전쟁영화는 고대 무기의 위력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역사 속 인물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사학도 아니다.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지 탐구해야 한다. 

'안시성'에는 40배 많은 20만 당 대군을 맞이하는 안시성 사람들의 '두려움'이 빠져있다. 고구려 본진으로부터의 지원도 요원한 가운데, 안시성주 양만춘과 군인들은 중과부적의 외적에 맞서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다. 하지만 양만춘은 물론, 군인이나 백성 누구도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이란 갖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적을 맞이한다. 마치 '300'의 스파르탄 전사 같다. 하지만 '300'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300'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그래픽 노블 원작의 영화다. 나고 자라면서 약육강식의 혹독한 세계관을 습득하는 스파르타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명한다. 무엇보다 '300'은 전쟁에 대한 현실적인 감정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 군인들의 근육과 페르시아 군인들의 기괴함을 비교하는데서 쾌감을 주는 영화다. '안시성'은 '300'과 같은 방향의 영화가 아니다. 강대국에 맞선 약소민족의 용기를 기리고, 온정적이면서도 결단력있는 지휘자의 리더십을 칭송하며, 전쟁과 무관한 민초의 소박한 감정을 담아내려 한 영화다. '안시성'이 '300'처럼 되려 했다면, 앞에 말한 것들을 다 지워버리고, 조금 더 과감하게 내질렀어야 한다. 하지만 '안시성'은 어정쩡한 태도를 135분간 꾸역꾸역 밀고 간다. 



배역 구성에도 문제가 있다. '안시성'에는 몇 가지 짝패가 있다. 성주 양만춘(조인성)과 그의 충실한 부관 추수지(배성우), 양만춘의 동생 백하(김설현)와 그의 연인 파소(엄태구), 용맹한 군인으로서 라이벌이자 친구인 풍(박병은)과 활보(오대환)다. 이 중 두번째 짝패는 거의 불필요하고, 세번째 짝패는 활용 방식이 어정쩡하다. 다수 관객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200억원대 대작 특성상, 젊은 남녀의 로맨스와 티격태격하는 두 남성의 코미디를 모두 담으려 한 것 같지만,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차라리 신녀(정은채) 캐릭터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채 낭비되서 아쉽다. 짧고 어설픈 에피소드와 몇 차례 애절하지도 않은 눈빛 교환으로 끝난 로맨스 같은 것은 없애버리고, 불길한 예언자인 동시 현실적인 조언자인 신녀로부터 비롯되는 갈등을 확장시켰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제작진은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신녀의 목을 딴다. 

게다가 냉정하게 말해,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케미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영화에서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봤다. 이 영화가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보다 못한 평가를 받는다면, 감독 교체(드니 빌뇌브->스테파노 솔리마)보다는 에밀리 블런트의 부재가 더 큰 이유라고 꼽고 싶다. 에밀리 블런트는 전편에서 멕시코 마약 조직 소탕을 위해 투입된 FBI 요원 케이트 역을 맡았다. 케이트는 FBI로는 베테랑일지언정,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에는 신참이다. 카르텔은 잔인무도하기가 세상에 이를데 없다. 이 카르텔에 비하면 '대부'의 마피아는 신사라고 느껴질 정도. 잔인무도한 조직에 맞서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이 점잖을리 없다. 작전의 책임자인 CIA 요원 맷(조쉬 브롤린)과 '컨설턴트'라고만 알려진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역시 알고보면 잔인무도한 사람들이다. 알레한드로가 조직원을 취조하기 위해 커다란 생수통을 들고 조사실로 들어오는 장면의 위압감은 압도적이다. 알레한드로가 어떤 방법으로 취조하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섬뜩하다. (그래서인지 '데이 오브 솔다도'에도 생수통 몇 통을 비치해둔 장면이 있다. 전편의 패러디로 보인다.)

케이트는 카르텔과의 전쟁의 초심자로서 작전의 관찰자 역할을 수행했다. 맷이 주도하는 불법적이고 사악한 방법에 겉으로는 반발하면서도, 카르텔을 잡기 위해선 손에 피와 똥을 묻혀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는 안다. 케이트도 소극적으로만 반발함으로써 결국 이 작전을 승인하게 된다. 케이트는 사법기관의 윤리적 모호함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에밀리 블런트가 그 역을 잘 소화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데이 오브 솔다도'엔 케이트가 없다. 그래서 윤리적인 갈등 같은 것도 없다. '데이 오브 솔다도'는 먼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현재는 죽이 착착 맞는 두 남자 맷과 알레한드로의 건조한 버디 무비에 가깝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엔 유머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는 장면이 없다. 미국 영화에서 드문 경우다.) 멕시코-미국 국경을 통해 극단적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밀입국해 들어오자, 미국 정부는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주를 막으려 한다. 카르텔에게 멕시코발 불법 이주는 마약 밀수보다도 이윤이 남는 일이다. 맷과 알레한드로가 이 작전에 투입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 정부의 얕은 수는 몇 차례 스텝 끝에 꼬인다. 미국 정부는 꼬리를 자르고 발을 빼려하고, 말단들은 희생돼야 한다. 알레한드로는 그 말단이다. 


손가락 한 번 튕겨서 우주의 생명체 절반을 죽인다는 타노스, 조쉬 브롤린

'데이 오브 솔다도' 예고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델 토로는 멋진 배우다. 

카르텔과의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국 정부의 비열함이란 구도는 좀 흔하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정의로우려하나 끝내 심하게 흔들리고 마는 케이트의 존재 덕에 전편에서 독특한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데이 오브 솔다도'는 좀 더 흔한 액션, 스릴러 영화가 됐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꽤 즐겼다고 해야겠다. 전편이 조성한 사막같이 건조한 분위기를 잘 계승했고, 맷과 알레한드로 캐릭터의 매력도 잘 살렸다. 몇 차례 액션 장면도 잘 찍었다. 전편에서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의 평화로운 저녁 식사 자리에 난입한 장면 같은 숨막히는 긴장감은 없지만, 액션 자체는 전편보다 호쾌한 편이다. 

전편보다 확실히 기억에 남는 건 음악. '배트맨 VS 슈퍼맨'을 보고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원더우먼 테마 음악이듯,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본 뒤에도 테마 음악이 오랫동안 귀에 맴돈다. 작곡자는 Hildur Guðnadóttir라는, '힐두르 구드나도티르'라고 읽어야할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이다. 찾아보니 아이슬란드 출신 첼리스트이자 작곡자다. 솔로 앨범을 몇 장 내놓았고, 영화 음악에도 참여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없는 것 같다.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의 음악은 긴박감 넘치면서도 음산하고 음울하고 신비롭다. 이런 음악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내가 아는 가장 유명한 아이슬란드 사람(들)인 시규어 로스다. 그 나라에 살면 다들 이런 감성을 갖는 건가. 아무튼 앞으로 이 작곡가의 음악을 더 많은 영화에서 듣게 될 것 같다. 

구드나도티르의 음악은 이런 느낌. https://www.youtube.com/watch?v=NmZ2pAFbXsE







야구 영화 본 뒤 야구하고 싶은 적은 없다. 축구 영화 본 뒤 축구하고 싶은 적도 없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를 보고 테니스를 치고 싶어졌다. 파란 잔디가 깔린 윔블던 센터 코트를 부감으로 잡은 초반부부터 그런 생각이 든다. 파란 잔디, 하얀 유니폼, 두 코트를 빠르게 오가는 작고 노란 공... 관중들이 숨죽인 사이, 코트를 때리고 튕겨나가는 공 소리가 경쾌하다. 두 플레이어의 재빠른 발소리와 힘겨운 신음 소리. 나도 잔디 코트에 공을 튀겨보고 싶다. 

오래전에 테니스를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운동에 소질있는 편이 아니라 실력이 쑥쑥 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제일 통쾌했던 순간은 역시 서브였다. 포핸드, 백핸드로 공을 제대로 맞혔을 때도 즐거웠지만, 높게 띄운 공을 상대편 코트로 순식간에 꽂아넣었을 때의 쾌감은 대단했다. 네트에 걸리지 않고 금에 걸치지도 않은 공이 코트를 때린 뒤 재빠르게 튕겨나가는 순간의 쾌감에 대해선,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클리셰를 쓸 수밖에 없다.

스포츠 영화에 스포츠 장면을 잘 잡는건 필수다. 하지만 '보리 VS 매켄로'는 테니스 경기만 박진감 넘치게 촬영한 영화는 아니다. 윔블던을 4번 연속 우승한 뒤 다섯 번째 우승에 도전하는 스웨덴의 스타 선수 비외른 보리와, 그에 도전하는 신성 존 매켄로의 1980년 윔블던 결승을 보여주는 동시, 두 선수의 성장기와 개인사를 조금씩 드러낸다. 영화는 두 선수의 극명한 스타일 차이를 대비해 보여준다. 매켄로는 알려져있다시피 '악동'이다. 판정에 납득할 수 없으면 심판에게 막말을 하며 대들고, 때로 관중하고도 싸운다. 관중은 그런 매켄로에게 야유를 퍼붓지만, 매켄로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반대로 보리는 '미스터 아이스'다. 경기 중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인터뷰로 대중과 만날 기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인 답변을 하고, 상대 선수를 칭찬한다. 보리는 록스타같은 인기를 누린다. 



달라 보이지만, 사실 둘은 비슷하기도 하다. 둘 모두 강박적으로 이기고 싶어하고, 이기지 못했을 때는 터져나갈 듯 분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리 역시 청소년기에는 매켄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사적인 스포츠'임을 자부하는 테니스계는 보리의 불같은 성격을 용납하지 않았고, 보리는 이기기 위해선 분노를 감춰야 한다는 사실을 꺠달았다. 물론 보리의 화는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코트 위에서, 대중 앞에서 차갑게 감추었을 뿐, 보리는 내면에선 여전히 불같은 사람이다. 가끔 바깥으로 넘실거리는 보리의 불꽃은 주변 사람을 괴롭게 한다. 약혼자에게 상처를 주고, 오랜 기간 함께한 코치를 갑작스럽게 해고하게 만든다. 

이기는 걸 너무나 좋아하고, 이기지 못하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성과를 낸다. 스포츠에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 스포츠 선수의 팬 서비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지만, 최고의 팬서비스는 역시 승리다. 그런 점에서 보리와 매켄로는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팬서비스를 제공한 엔터테이너였다. 그래서 선수들 본인이 행복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 상영후 나오는 자막에 따르면, 보리는 영화 배경으로부터 1년 뒤인 81년 윔블던 결승에서 매켄로에 패배했다. 그리고 얼마뒤 은퇴했다. 불과 26세의 나이였다.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승리를 추구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스포츠 영화, 만화에 나온 주인공처럼, 보리는 짧은 순간 모든 걸 불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일의 조' 식의 '완전연소'. 

보리 역의 스웨덴 배우 스베리르 구드나슨과 매켄로 역의 샤이어 라보프는 모두 잘한다. 구드나슨은 1978년생 배우인데, 이번에 처음 알아봤다. 스웨덴 배우가 비외른 보리 역을 연기한다는 건, 한국 여배우가 수십년 뒤 김연아를 연기하는 것 비슷한 심정일까. 라보프는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역시 이상한 사람 연기를 잘한다. 그에게 계속 이상한 역을 맡겨줬으면 좋겠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앤드류 니콜의 '아논'(Anon)을 보다. '아논'이란 '익명'(anonymous)의 줄임말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니콜은 '가타카'(1997)의 작가, 연출답게 비주얼은 유토피아지만 사는 모양은 디스토피아인 미래 사회를 '아논'에서 그린다. '가타카'가 유전자에 의해 계급이 사실상 결정되는 사회를 그렸다면, '아논'은 보는 모든 것이 기록돼 사생활과 익명성을 보장받기 힘든 사회를 그린다. '아논' 속 사람들은 한때 유행하려다 말았던 구글 글래스를 쓴 듯한 인터페이스 속에서 살아간다.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이름, 직업 등이 자막으로 나타나고, 노점상의 핫도그를 보면 각각의 이름과 성분이 나타난다. 이런 시각 이미지들은 모두 기록돼, 범죄 수사에 활용되거나 심지어 연인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너 어젯밤 누구하고 있었어? 어젯밤 기록 보여줘"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살(클라이브 오웬)은 형사다. 이 사회에서 경찰 노릇 하기란 2018년보다 쉬워보인다. 범죄가 일어났을 당시의 시각 기록을 확인하면 되니까.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면, 피해자의 시각 기록이 끊기기 전까지를 재생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서 흔히 그러하듯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범인을 잡기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의 마지막 시각 기록이 해킹됐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마지막 순간 살인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즉 일부 기록이 삭제되고, 불필요한 기록이 삽입된 채 남겨진 것이다. 살은 사건 배후에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삭제해주는 해커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언더커버에 착수한다. 살은 연인을 두고 매춘부를 부른 증권거래인인 척 해, 해커에게 자신이 매춘부와 접촉한 기록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한다. 살에게 익명의 해커(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접촉한다. 

'가타카'는 지금까지도 유전자 조작에 의한 사회 변화를 설명할 때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유전자 가위' 같은 기술이 키워드가 되면서 '가타카'의 혜안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가타카'는 컨셉을 잘 잡은 영화지, 잘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컨셉을 잘 잡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영화로서의 역량이 충분히 드러나진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 '가타카'의 시나리오와 미술을 사용해 다른 감독이 연출했다면 더 그럴싸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아논'도 비슷한 느낌이다. '아논'은 제목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듯, 현대사회의 빅데이터 축적과 투명성, 그로 인한 사생활 침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알 수 있다. 경찰은 간단한 접속 해제 코드로 많은 이들이 본 것을 고스란히 데이터화할 수 있다. 별다른 장치도 필요 없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현대 혹은 근미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유용한 설정이지만, '아논'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이후의 전개를 예측가능하게 만든다. 클라이브 오웬, 아만다 사이프리드 같은 배우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은밀하게 만나 쿨하게 일만 하고 헤어질리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기술을 악용하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등장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팜므 파탈은 궁극의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100년은 된 클리셰다. '블랙 미러'의 몇몇 에피소드들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와 반전이 '아논'에는 없다. 배우들은 의도적으로 무표정, 무감정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보여주기보다는 배우의 역량을 제한한다.  

결국 '가타카'처럼, 아논'은 잘만든 영화는 아니면서도 만듦새와 무관하게 종종 언급되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영화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사회학자나 IT 칼럼니스트가 더 언급하기 좋은 종류에 속한다. 




***스포일러 있음.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다. 자기도취에 빠진 백만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그 주인공이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착해지는 기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헐크'도 좋다. 사실 마크 러팔로의 헐크보다는, 에릭 바나의 헐크가 좋다. 리안의 그 기나긴 헐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좋아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처음엔 그 진지함이 지루했는데, 갈수록 진지함이 꼴통스럽게 변하면서 재밌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근래 나온 슈퍼히어로물 중 최고 수작이라 생각한다. '토르' 시리즈는 영화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의 캐릭터는 잘 구축됐다. 토르는 아이언맨과 다른 차원의 자아도취에 빠진 캐릭터다. 좀 얄미운 아이언맨과 달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뒤 잔을 깨트려버리는 단순무식함이 재미있다. '스파이더맨'은 좋은 성장영화다. 역시 핵심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메리제인과의 풋사랑이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좀 더 봐야 알겠는데, 공간을 쥐락펴락하는 시각적 트릭은 뛰어나다. 그건 정말 영화적인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인 '어벤져스' 시리즈를 좋아한 적은 없다. 지난 두 번의 어벤져스 시리즈는 반쯤은 의무적인 기분으로 봤다. 사실 뭘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러 영웅들이 나왔고, 악당이 시시했다는 것 정도. 헐크가 로키를 패대기치는 장면의 유머도 기억은 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오늘 봤다. 사실 이 영화를 두고 '독과점'을 말하는 건 진부하고 어색하다. 동시기 개봉작 중 이 영화와 상영관을 나눠가질 만한 상업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0분 표를 끊었는데, 사실상 매진이었다. 



악당 타노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사실상 주인공.


난 '인피니티 워'를 커다란 농담처럼 여긴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저 이 영화의 '밖'에서는 할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시빌 워'에 나타난 히어로들의 대립구도나, 아이언맨이 미국의 군산복합 슈퍼리치를 그리는 방식이나, 헐크의 심리적 여정에 대해선 뭔가 말할 수 있다. 블랙 팬서와 흑인문화의 '쿨'과 '쉬크함'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피니티 워'는 영화 바깥으로 나가면 할 이야기가 없다. 이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우주 창조 설화니, 다 모으면 손가락을 튕겨서 우주를 절멸시킬 수 있는 인피니티 스톤 같은 것을, 난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할 뜻이 없다. 일각에선 이 영화의 악당 타노스가 '이유 있는 악당'이라며 '인피니티 워'에 깊이를 부여하려 한다. 다짜고짜 '죽이겠다'고 하는 악당보다야 깊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주의 자원이 부족하니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야한다는 논리는 18세기 '인구론'의 조야한 확장판에 불과하다.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피니티 스톤이라면, 생명체를 줄여 자원을 아끼기보단 자원을 늘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게 더 경제적이고 마음도 편할텐데. 차라리 비슷한 논리로 다수 인류를 죽이려한 '환경주의자' 발렌타인('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 타노스보다 그럴듯했다. (정말 발렌타인처럼 제정신이 아닌 IT 거물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반면 타노스의 존재나 행동 동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요즘 인기 있는 '이유 있는 악당'이 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차라리 로키처럼 그냥 천성이 비뚤어져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 있을 것 같다.

사실 '인피니티 워'는 웃긴다. 조금 진지해지려는 순간마다 농담을 배치한다. 그루트의 사춘기 유머, 드랙스의 부동자세 유머, 스타로드의 지방과 근육 유머 모두 웃긴다. 자아가 뾰족한 아이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브루스가 브루스 자신(헐크)과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웃긴다. '토르: 라그나로크' 때부터 본격 유머를 보여준 토르도 여전히 웃긴다. 와칸다의 '스타벅스' 유머에도 피식했다.  

그러므로 나는 '인피니티 워'를 2시간 40분짜리 유머이자 팬서비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많은 히어로와 빌런을 등장시키고도 균형을 유지한 점도 높이 사야겠다. 그외엔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영국의 6부작 텔레비전 시리즈 '리버'를 보다. 영국, 경찰, 티비 시리즈라 했을 때 떠올릴법한 정서는 '우울'이다. '리버'도 다르지 않다. 6부작, 6시간에 걸친 시간동안 내내 우울하다. 주인공이 70년대 디스코 'I love to love'에 맞춰 2인무를 추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우울하다. 

형사 존 리버와 파트너 스티비 스티븐슨이 함께 차를 타고 순찰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곧 스티비는 이미 죽은 사람임이 밝혀진다. 말하자면 리버는 죽은 이를 본다. '식스 센스'의 성인 버전이다. 하지만 '리버'는 '식스 센스'의 아이처럼 유령을 두려워하기보단 주로 짜증과 화를 낸다. 가끔 유령의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기도 한다. 다른 사람 눈에는 허공에 주먹질 하는 걸로 비춰지는게 문제긴 하다.  

이쯤되면 형사와 유령 형사의 버디물이라고 짐작할 법하다. 유령의 직관과 인간의 행동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구도가 그럴듯하다. 하지만 '리버'는 다른 길을 걷는다. 유령이 자주 나타나 무언가 말을 건네기는 하는데, 대부분 사건 해결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파트너 스티비의 유령 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어간 사건 관계자들의 유령도 종종 나타나는데 대부분 사건 해결의 단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사건을 헛짚는 리버를 빈정댈 뿐이다. 가장 특이한 유령은 옛날 내복을 입은 채 나타나는 남자다. 이 유령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 리버의 속을 긁는 이야기를 한다. 리버는 매번 광분한다. 


'리버'의 등장인물들. 가운데가 리버, 가장 왼쪽이 옛 경찰 파트너이자 지금은 죽은 스티비

그러니 회차가 거듭될수록 의심이 생긴다. 리버가 유령을 보긴 보는건가. 유령은 뭔가 얘기를 하긴 하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리버가 이미 아는 얘기들이다. 리버의 성질을 돋우는 말들도 결국 리버의 성격적 약점을 공략한다. 그러니, 유령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리버의 직관 혹은 무의식 아닌가. 리버는 유령의 도움을 받는 척 하며 이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을 해결하는 것 아닌가. 어찌된 일인지 경찰 조직은 제정신이 아닌 듯 혼잣말을 하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리버를 눈감아준다. 리버는 유령 혹은 자신의 죄의식과 싸우며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시즌2는 소식이 없다. 유령하고 이야기하는 이상한 형사 얘기를 또 보고 싶은 시청자들이 많지 않았나보다. 

스웨덴 배우 스텔란 스카스카드가 리버 역을 맡았다. 스카스가드는 사건 해결에 출중한, 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형사 역을 너무나 훌륭히 소화했다. 배우의 존재감이 작품의 50% 이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시 '토르'의 작은 역할에 그칠 배우는 아니다. 




명성이 자자하던 다큐멘터리 '도쿄 아이돌스'(감독 교코 미야케)를 보다. 소재가 눈길을 끌거니와, 그 소재를 다루는 태도가 좋다. 일본 지하 아이돌과 그들의 팬덤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적절한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소재를 장악하는 동시, 그에 대한 거리를 유지한다. 저널리즘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갖기 힘든 태도다. 

리오라는 지하 아이돌과 그의 팬덤이 중심이다. 팬덤은 주로 남성이다. 팬의 연령과 직업은 다양하다. 대체로 미혼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리오가 여는 소규모 콘서트에 빠짐없이 나오고, 씨디를 사고 또 사고, 악수회에 참여해 악수와 함께 1분 안팎의 대화를 한다. 리오의 인터넷 방송도 매번 시청한다. 한 팬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다 실패한 후,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아이돌을 위해 썼다고 말한다. 

팬은 후회가 없다. 40대에 접어든 한 팬은 생에 이러한 열정은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한다. 10년 뒤쯤에는 여기 저기 아프고 병들텐데, 그 전까지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한다. 일본의 아이돌은 한국처럼 '완성형'으로 데뷔하기보다는, 춤이든 노래든 캐릭터든 어딘가 어색한 상태에서 데뷔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관례인데, '도쿄 아이돌스'의 아이돌들도 그렇다.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어설픈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데, 팬들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응원한다. 예전 '우정의 무대'에서 봤을법한 함성과 일사분란한 응원이 아이돌 무대 앞에서 재현된다. 

젊은 여성 하나를 둘러싸고 수많은 남성들이 소리지르며 응원한다. 무섭거나 기괴할 것 같은데, 막상 이 남자들과 대화하면 대체로 순박하고 쑥스러워한다. 아이돌들도 팬들이 아빠처럼, 오빠처럼 잘 대해준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신체 접촉이 일절 금지돼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악수회'라는 '회색지대'가 생겼다. 아이돌은 청순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팬은 최소한의 성적인 접촉을 할 수 있다. 상상의 연애, 유사 연애가 이뤄진다고 할 수 있는데, 팬들도 이것이 '유사'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아무리 아이돌과 친해져도, 설령 아이돌 팬클럽의 회장이라 하더라도, 아이돌과의 관계가 진짜 연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 



'도쿄 아이돌스'의 중심인물인 아이돌 히라기 리오

'도쿄 아이돌스'는 아이돌과 남성팬의 관계가 현실의 연애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남성팬들은 거추장스럽게 실제 여성과 연애하지 않는다. 현실 연애에서 관계는 천변만화한다. 내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내 호의가 상대에겐 적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연애에선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다반사다. 그 모든 모순과 어려움을 견뎌내야 연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돌과 팬은 그렇지 않다. 돈을 쓰고, 정성을 다하면, 아이돌은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아이돌은 팬이 정성을 쏟는만큼의 정확한 비례로 미소지어준다. 연애란 상대에 대한 독점욕을 동반하지만, 아이돌과의 가상 연애는 팬덤에 의해 공유된다. 팬은 연애의 독점욕을 포기하는 대신, 연애의 정직한 거래를 확보한다. 

연애같은 거 귀찮아서 안해. 대신 아이돌과 가상 연애할래. 사실 이해가는 태도다. 연애는 귀찮다.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론 돈도 든다. 정치인이나 사회학자나 인류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대해 한숨을 쉴 것 같다. 하지만 난 항상 '후세의 일은 후세가 걱정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이 팬들에게 인구 걱정, 인류 걱정을 하라는건 가혹하다. 다만, '도쿄 아이돌스'의 엔딩이 10대 초반 아이돌을 보여주면서 끝난다는 건 기묘하고 아슬아슬하다.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봐도, 이제 초등 고학년이나 됐을 법한 소녀들이 아저씨들과 악수하는 모습은 이상하다. 그런 점에서 '도쿄 아이돌스'의 태도는 이 팬덤에 대해 끝내 비판적으로 보인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산호초를 따라서'를 보다. 열대 바다에서 아름답게 흐느적대는 산호초를 보여주는 자연 다큐멘터리인줄 알았다면 실패. 산호초를 보여주긴 보여주는데, 죽은 산호초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산호초가 죽은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인간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인류세'란 어휘가 점점 더 많이 들린다. 아니, 진작 들렸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모르고. 

영화는 '지난 30년간 전세계 산호초의 50%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향후 30년내 모든 산호초가 죽는다'는 자막과 함께 마무리된다. 생명이 죽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고, 알록달록 예쁜 산호초가 아니라 하얗고 검게 변한 산호초의 시신만이 있으면 다이버들이 심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호초가 죽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다. 산호초는 비유하자면 바다의 숲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먹이를 얻고 생명을 낳는다. 그러므로 산호초가 사라지면 바다 생물도 타격을 입는다. 바다 생물이 줄어들면, 바다 생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죽는다. 영화 속의 한 생물학자는 '한 세대 이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섬찟한 경고를 남긴다. 

산호초가 죽는 이유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기온 1~2도 높아지는게 대수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높아진 기온은 고스란히 해수로 흡수된다.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산호초 같은 생물이 곧바로 영향을 받는다. 해수의 온도는 비유하면 체온 같다. 36~37인 체온이 38~39도로 높아지면 그 사람은 심각하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산호초는 지구의 체온 변화 때문에 가장 먼저 아픈 생물인 셈이다.



'산호초를 따라서'에서 가장 기묘한 장면은 한 해상 레스토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자들은 이 레스토랑 사무실에 기지를 차리고 죽어가는 산호초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날 산호초 군락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형광색으로 빛난다. 이유를 알아보니 뜨거워지는 해수를 견디다 못해 햇빛으로부터라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산호초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을 목격한 연구자는 충격을 받는다. 장비를 챙겨 해상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데, 손님들은 천진난만하게 음식을 먹고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연구자는 그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당황한다.  

'산호초를 따라서'는 목적에 충실한 영화다. 산호초의 생태와 존재 의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산호초에 빠진 '덕후'들을 보여준다. 런던의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전직한 수중 사진작가, 어렸을 때부터 산호초 분류에만 몰두한 덕후, 해양생물학자들이 나온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데도 미사여구를 쓰거나, 영화의 미학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 영화 내용을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스포일러 있음. 

넷플릭스에서 '서던 리치: 소멸의 땅'(원제 Annihilation)을 보다. 감독이 '엑스 마키나'의 알렉스 갈랜드라기에 영화가 이상할 줄은 알았는데, 역시 이상하다. 일단 이런 영화 만든 감독이 이상하고, 이 영화 주연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 돈을 댄 투자자가 제일 이상하다. 찾아보니 제작비 추정치가 4000만 달러 정도 되던데, 설마 회수하겠다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우리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 너무 멀쩡한, 그래서 심심한 영화들이 대다수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땅을 칠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 아니니 알 바 아니다. 또다시 헛된 꿈을 꾸는 이상한 투자자들이 나타나길 바랄 뿐. 

미국의 한 국립공원 내 등대에 이상한 빛이 떨어진다. 이후 일대는 기묘한 빛으로 어른거리는 파장에 휩싸인다. 정부와 연구자들은 이 파장을 '쉬머'(the shimmer)라고 부른다. 쉬머가 점점 넓어지자 미국인들(아마 세계인들?)은 걱정에 빠진다. 그리고 쉬머 안으로 들어간 정찰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군복무 경험자인 생물학자 리나의 남편 역시 쉬머로 정찰나간 이였다. 1년이 흘러 남편이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온 뒤 곧 쓰러진다. 리나는 심리학자, 지리학자 등 또다른 4명의 정찰대(모두 여성)와 함께 쉬머 안으로 들어간다. 쉬머 안에서는 DNA가 '굴절'돼 동, 식물이 기형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리나 일행의 기억이나 지리 감각도 흐릿해지고, 정찰대는 하나 둘씩 죽거나 사라진다. 찾아보니 동명의 3부작 소설이 한국에서 출간돼있다.  

'지옥의 묵시록'처럼 시작해, '컨택트'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풍으로 해석하면서 끝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혹은 '서던 리치'의 속편이 '언더 더 스킨'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돌아보면 외계인이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지구를 공격해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는 생각은, 외계인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회고라 할만하다.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지난 세기(혹은 현재도 마찬가지) 제국주의 열강을 닮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디펜던스 데이' 속 외계인의 행동은 정확히 예측 가능하고, 그 동기도 분명하다. 하지만 '컨택트'나 '서던 리치'에서 외계인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그마나 '컨택트' 속 외계인의 동기는 선의에 가깝게 해석되지만, '서든 리치'는 그마저도 모호하다. 인류의 입장에선 위협으로 느끼겠지만, 외계인은 인류를 위협하거나 보호할 의사가 없다. 비둘기가 돌을 위협하는가? 바람이 거미를 보호하는가? 의미 없는 질문이다. 비둘기와 돌, 바람과 거미는 다른 차원의 존재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에 대해 무심하고, 각자의 논리대로 존재할 뿐이다. 

감독의 취미인지, 대중적 고려인지 모르겠지만, 쉬머 안에 스릴러 혹은 호러 영화의 장치들이 조금 놓여있다. 그것 때문에 완전히 안심한 채 명상하고 사색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늑대(와 비슷한 생물)와 곰(과 비슷한 생물)이 정찰대를 공격한다. 특히 곰을 무섭게 그리는데 신경을 쓴 듯 보인다. '레버넌트'에서 디카프리오를 찢어발긴 바로 그 곰이 진화해서 '서던 리치'에 나오는 것 같다. 그저 흉포해서 무서운게 아니라, 이 곰이 인간의 목소리를 흡수해 들려준다. 방금 "살려줘!"라고 외치면서 죽은 사람의 "살려줘" 소리가 곰의 목에서 반복해서 들려온다면? 그것도 테이프가 조금 늘어진 듯 기괴하게 변형된 소리로 흘러나온다면? 

'서던 리치' 같은 영화를 보고나면 인식의 틀이 확장됨을 느낀다. 아니, 금세 수정하겠다. 인간의 인식틀이라는 것이 갑자기 확장될리도 없고, 확장되어봐야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확인하는 것 아닐까 . 그렇다면 '서던 리치'를 보고 내가 재확인한 사실은? 인간은 우주의 먼지라는 것. 인간을 이루는 구성물은 언젠가 우주의 일부가 되고, 그때 '나'라는 경계는 무의미하다는 것. 그 사실에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할 일은 없다는 것. 우주의 견지에서 보면 모든 것이 똑같다는 것. 이 영화 보고 이런 생각하는 나도 이상한가요. 









오늘 밤에도 어느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될지 모르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명대사들이 많은데, 최근 발견한 건 이 대목이다. 세관 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빼돌린 압수품인 마약을 처분하기 위해 건너건너 아는 조폭 최형배(하정우)와 접촉한다. 거래를 위해 만나 몇 잔 술을 걸친 최익현은 최형배의 본관, 파, 돌림자 등을 묻더니 대뜸 자기가 최형배의 고조 할아버지뻘이라며, 할아버지를 봤으면 절을 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부하 조폭에게 끌려가 몇 대를 쳐맞는다(이 장면에선 '맞는다'기보단 '쳐맞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최형배는 부하를 제지시키고는 말한다. 


"어이 아저씨.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아버지를 찾아가 위세를 떨며 결국 최형배의 절을 받아내고, 이후 전직 공무원과 현직 조폭은 환상의 호흡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결국 사이가 벌어져 몰락의 길을 걷는다. 


난 얼마전 모 감독의 오디션 중 성희롱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최형배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일하러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오디션을 볼 땐 오디션 얘기만 하면 된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터이고, 좀 더 확장해 배우의 인생관에 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배우의 삶이란 카메라 앞과 뒤가 무 자르듯 나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영화계 현실'을 알려준답시고, 어느 여배우가 어느 감독과 잤다느니, 주연이 되기 위해선 남자를 유혹할줄 알아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오디션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소리'다. 


일하러 갔으면 일을 해야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면서도 난데없이 최형배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물먹은' 기자들 이야기다. 뉴욕타임즈가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베트남전 정책과 관련한 잘못을 폭로한다. 닉슨 행정부는 타임즈를 고소해 그들의 발을 묶는다. 타임즈에 물먹은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벤(톰 행크스)은 부들부들 떨면서 어떤 기사로든 낙종을 만회해보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포스트의 경영자인 캐서린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캐서린은 주식시장 상장, 정부와의 관계, 회사의 장기적인 생존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을 추동하는 최초의 힘은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도, 위험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도,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미국 청년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벤이 일하도록 몰아부치는 것은 라이벌 언론사에 대한 경쟁심이다. 벤은 타임즈의 에이스 기자가 몇 달 째 기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초조해한다. 해당 기자가 분명 엄청난 특종을 준비중이라고 예상하고, 그 기사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꼼수까지 쓴다. 마침내 타임즈가 '펜타곤 페이퍼' 특종을 내고 며칠 연속 관련 내용을 보도하자, 벤은 산하 기자들에게 히스테리를 폭발시킨다. 언론에 몸담은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유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손 쓸 방법이 없다. 해당 보고서를 입수하기 전까지는 별 수 없이 경쟁사의 단독 기사 행렬을 감수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자의 마인드로 볼 때, 이런 상태는 치욕이다. 벤은 보고서를 입수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고, 마침내 포스트에는 비행기 일등석을 탄 보고서 일부가 도착한다. 이제서야 포스트 기자들은 살맛을 느낀다.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것이 진짜 볼멘소리는 아님을 누구나 안다. 


캐서린은 고민한다. 포스트가 쓰려는 기사는 캐서린의 오랜 친구인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을 괴롭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언론사 사주로서의 입장과 인간적인 우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벤도 직업 윤리와 인간 관계 사이에서 갈등한 적이 있었다. 벤은 JFK 부부와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기자와 취재원이 아닌,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음을 결정적인 순간 깨닫는다. 



캐서린은 포스트의 이사, 변호사, 기자 사이에 둘러싸여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평생 직업을 가질 일이 없던 캐서린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포스트 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나, 진정한 리더가 되진 못한 상태였다. 모든 것을 내건 결정을 내리고서야 캐서린은 진짜 경영자가 된다. 



벤이 법정에 나란히 선 뉴욕 타임즈 관계자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라이벌 의식과 동업자 의식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결국 일은 일이다.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고 '더 포스트'는 말한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직업윤리'의 고귀함 정도가 되겠다. 기자가 기자 윤리에 충실하고, 공무원은 공무원 윤리에 충실하며, 정치인은 정치인 윤리에 충실하면 된다. (조폭의 윤리, 사기꾼의 윤리는 말하지 말자) 지난해의 영화 '택시 운전사'도 결국은 택시 기사로서의 윤리에 충실했던 한 남자를 영웅으로 삼은 영화다. 두말할 것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는 영화인으로서의 윤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스포일러 있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서사가 아니라 감각의 영화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 단순해서 쉽게 요약된다. 말 못하는 청소부 엘라이자가 양서류 괴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끝.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이들의 사랑을 돕거나 방해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동료 청소부 젤다와 이웃집 게이 화가 자일스가 엘라이자를 돕고, 실험실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를 방해한다. 과학자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 사이에 끼어있다. 여기에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추근대는, 약간의 변주를 넣었다. 그래서 엘라이자-괴물-스트릭랜드의 삼각 관계가 조성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기능적으로 보인다.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에게 끌리는 과정이 매끈하지 않을 뿐더러(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섹스하며 아내의 입을 틀어막는 장면, 즉 조용한 여자를 좋아하는 스트릭랜드의 성적 취향이 유일한 단서인데, 좀 뜬금없다), 이 대목은 엘라이자와 스트릭랜드의 대립을 강화하는 '수단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느낌이다.



'괴물' 역의 더그 존스는 양서류를 닮은 피조물로 자주 등장한다. '헬보이'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등등. 


마이클 섀넌과 샐리 호킨스의 팽팽한 열연. 



대신 '셰이프 오브 워터'는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한다. 주인공 엘라이자가 듣기는 하지만 말하진 못하는 장애인이라는 설정이 도움된다. 물소리, 발소리, 차소리, 텔레비전 소리 등이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들어도 꽤 즐거울 것 같다.) 영미권 작곡가와는 작곡의 결이 다른 알렉산드르 데스플라의 복고적인 음악도 이 소리의 향연에 한몫한다. 엘라이자는 내내 수어로 대화하다가, 종반부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의 방식으로, 벼르고 별러 찍은 느낌이다. '라라랜드'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런 뮤지컬 장면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싶다.    


'동화같은 영화'라고 쉽게 말하기엔 표현 수위가 조금 높다. (당연히 청소년관람불가다) 초반에는 엘라이자의 자위 장면, 후반에는 엘라이자와 '괴물' 사이의 이종 섹스 장면이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폭력의 수위도 높아진다. 스트릭랜드가 호프스테들러의 총에 맞은 볼 안쪽의 입으로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기는 장면은 기예르모 델 토로식 잔혹 취미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얼굴 찢는데 취미가 있는지, '판의 미로' 때는 스페인 파시스트 군인의 볼을 찢은 적이 있다)


엘라이자 역의 샐리 호킨스, 스트릭랜드 역의 마이클 섀넌이 좋은 배우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들의 연기는 한국 관객, 감독이 좋아하는 방식의 열연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섀넌은 박찬욱이 연출하는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에 캐스팅됐다. 아울러 샐리 호킨스는 물론 좋은 배우지만,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는 그를 주연으로 삼은건 모험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영화가 한국 언론 시점에는 블록버스터지만, 미국에선 20세기 폭스가 아니라 그 산하 스튜디오인 폭스 서치라이트가 제작한 1900만달러 제작비의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블랙 컬쳐는 쿨하다. ('흑인 문화'보다는 '블랙 컬쳐'가 쿨해 보여서 그렇게 표현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 사회의 감수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블랙 컬쳐는 쿨하고 쉬크하고 모던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블랙 컬쳐는 미국 대중문화의 한 줄기임에는 분명했으나, '주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국에선 물론이다. 유색인종인 한국인들이 다른 유색인종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밀도 아니니까. 


분위기가 바뀐 건 힙합의 인기와 맞물린 듯하다. 지금 힙합은 대중음악의 확고부동한 중심 장르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쇼 미 더 머니'다. 그 서브 컨텐츠인 '언프리티 랩스타'나 '고등래퍼'까지 인기 있으니, 반면 록을 중심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 '탑밴드'는 어땠나. KBS라는 공영방송의 형식적, 감성적 한계가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탑밴드'는 한 마디로 '구렸다'. 내가 수십년간 록을 좋아했지만, '탑밴드'를 보면서 구리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방송에서 재현되는 록에선 더 이상 신선하거나 세련되거나 쿨한 무언가를 느낄 수 없었다. 음악은 물론이고 인터뷰 방식, 옷매무새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그래서 조금 슬펐다)


연휴기간중 '블랙 팬서'를 봤다. 또 마블 영화다. 사실 영화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마블의 최근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재치, '닥터 스트레인지'의 시각 효과적 도전이 없었다. 상영시간이 134분에 달하는데 이야기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 팬서'엔 다른 강점이 있다. 흑인 배우가 대부분의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그것도 미국 바깥 시장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는 배우들이다. 이건 블랙 컬쳐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쿨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자신감이다. 


배경은 서부 아프리카에 있다는 가상의 왕국 와칸다. 국제 사회에서는 '세게 최빈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와칸다는 우주에서 온 금속 비브라늄을 사용해 막대한 부와 첨단 기술을 축적한 국가다. 이곳의 생활수준과 이를 떠받치는 테크놀로지는 동시대 지구 어느 국가도 능가한다. 다만 와칸다는 국제 사회에 자신의 실체를 숨긴 채 자족적인 삶을 즐긴다. 외교적으로 일종의 '고립주의'다. 이들의 고립주의는 나중에 원로와 젊은 세대의 갈등 요소가 된다. 



전통과 초현대가 뒤섞인 '블랙 팬서'의 소품과 의상들. 저 망토를 펼치면 방패가 된다. 


재밌는 건 와칸다가 미래의 테크놀로지를 선취한 나라이면서도, 아프리카의 전통적 이미지(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여전히 간직한 나라라는 점이다. 와칸다는 왕정 국가이며, 왕위는 부계의 장자가 세습한다. 왕이 되기 위해선 와칸다의 주요한 여러 부족으로부터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대일 결투로 완력을 증명해야할 때도 있다. 도전자와의 결투에서 이기면 정당하게 왕위를 이어받는다. 부족의 원로들은 아프리카의 전통 의상을 입고 회의에 참여한다. 와칸다 국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창을 든 민머리 여인들인데, 이들 역시 전통에 기반한 의상을 입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총을 미개한 무기라고 여긴다. 왕은 신비한 허브로 만든 약을 마시고 '블랙 팬서'의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이 허브의 성분은 물론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과 초현대, 첨단 정보통신 기술과 고래로부터 내려온 신비의 영약이 공존하는 곳이 와칸다 왕국이다. 


과거였으면 아시아의 어느 국가에 이런 설정을 넣었을 것이다. 사실 '닥터 스트레인지'나 '배트맨 비긴즈'가 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그리긴 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한 나라 전체가 이렇게 묘사된 적은 없었다. 그건 이미 20세기 초 세계 열강에 든 일본은 물론,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과 중국이 더 이상 '신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에 '신비의 영약'이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꽁꽁 숨어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를 꾸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블랙 팬서'는 블랙 컬쳐의 근원인 아프리카의 전통을 '쿨'하게 그리면서도, 아프리카가 처한 저개발의 현실에서 나온 이미지를 교묘히 활용하는 영화다. 그래서 '블랙 팬서'의 시선은 어딘지 이중적이다. 아울러 아직 아시아계 슈퍼히어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블랙 컬쳐가 아시안 컬쳐보단 주류가 되었거나 주류에 거의 근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스타워즈'는 신화적이고 '스타트렉'은 철학적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금 유보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두 시리즈에 대한 팬덤이 너무나 강력해 뭐라고 함부로 말을 보태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조셉 캠벨이 잘 지적했듯 '스타워즈'는 신화에서 볼법한 오랜 영웅 서사를 담았다.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소명을 깨닫고 머나먼 여정에 나서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난을 당했다가, 결국 극복하고 목적을 성취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베이더 부자의 오이디푸스 궤적도 엮여있다. 요즘 나오고 있는 시퀄 시리즈에선 고아 소녀 레이에게 루크의 궤적을 따르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조금의 뒤틀림을 줬는데, 이 때문에 팬덤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다고도 한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 구조에 기반한 '스타워즈'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왕, 귀족, 기사, 유목민의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스타트렉'의 등장인물은 기본적으로 군인, 과학자, 탐험가다. 행성연방 소속의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 대원들은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는데, 그 과정에서 연방에 대항하는 적들을 만나 전투를 벌이거나, 미지의 행성 종족들의 낯선 풍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함선의 명칭과 대원들을 달리 하며 몇 차례의 시리즈가 이어져온데서 알 수 있듯, '스타트렉'에는 '스타워즈'에서 보이는 '중심 서사'랄 것이 없다. '스타트렉'은 기본적으로 단막극에 가깝고, 각 에피소드에서 각자 사건을 해결하고 윤리적 교훈을 주곤 한다. '스타워즈'는 전편을 보지 않으면 다음편에 정붙이기 어렵지만, '스타트렉'은 그 연계성이 희미하다. 


새로운 '스타트렉' 텔레비전 시리즈인 '스타트렉: 디스커버리'가 15개의 에피소드로 최근 끝났다. 두번째 시즌도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디스커버리'에는 몇 가지 새로운 설정이 있었다. 시리즈 최초로 선장이 아닌, 대원이 주인공이다. 게다가 그 대원은 반역죄를 저질렀다가 일시적으로 사면된 흑인 여성이다. 이 여성의 이름은 남성적인 마이클 버넘이다. 마이클이 보필하던 선장 필리파 조지우도 여성(양자경)이다. 조지우의 상급자인 제독도 여성이다. 남성은 악당이거나, 조력자 정도다. 중요한 또다른 남성 캐릭터가 있는데, 암시적이었던 예전 시리즈와 달리 동성애자임을 확실히 드러낸다. (동성 간의 키스신이 있다)


'디스커버리'는 9편까지 잇달아 방영되었다가 잠시 휴방후 10편부터 다시 방영되었다. 그리고 10~15편은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9편 마지막에 디스커버리호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마치고 기지로 귀환하기 위해 스포어 점프를 시도하는데, 이후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한다. 디스커버리호가 도착한 곳은 일종의 평행우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디스커버리호가 위치했던 우주와 정확히 같은 인물들이 살고 있지만, 역사는 전혀 달리 진행된 곳이다. 현우주의 인간이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연방제를 추구한다면, 평행우주의 인간은 무력에 근간한 독재, 제국을 구성하고 있다. 현우주에서 민주적인 리더십의 선장 필리파가, 평행우주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의 황제다. 디스커버리호는 우여곡절 끝에 현우주로 돌아오지만, 그 사이 연방은 숙적 클링온의 기세에 밀려 전쟁에 거의 진 상태였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마이클이 현우주로 충동적으로 데려온 평행우주의 황제가 유용해진다. 연방은 평행우주의 독재자 필리파의 리더십을 빌리려 한다. 필리파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포로에 대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다. 승리,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상과 원칙에 어긋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 미국이 좀 더 효율적인 대테러전을 수행하기 위해 도입한 '강화된 심문기술' 같은 것. 


물론 '디스커버리'는 청소년도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시리즈. 파국적이고 암울한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건 '스타트렉' 시리즈의 이상적이고 희망차고 낙관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으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은 정당화되는가'라는 윤리학의 오랜 딜레마를 슬쩍 던졌다가 회수하는 솜씨는 미국의 텔레비전 시리즈가 허용하는 적절한 수준이다. 시즌 2를 보고 싶다. 





'스타트렉: 디스커버리'의 주인공 마이클 버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역력하다. 

현우주에선 자애로웠던 필리파 조지우 선장이 평행우주에선 무자비한 황제로 등장한다. 양자경이 상반된 역할을 잘해냈다. 솔직히 황제 역은 최고였다. 


뒤늦게 노아 바움벡의 '프란시스 하'(2012)를 보다. 감독 바움벡과 주연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 이후 좋은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바움벡의 최근작 '마이로위츠 스토리'는 지난해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거윅의 연출 데뷔작 '레이디 버드'는 지난해 각종 시상식에서 가장 각광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바움벡하고 거윅은 지금 사귀고 있대나 어쨌대나. 


'프란시스 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흑백영화다. 20대 후반의 프란시스는 현대무용가, 그의 절친인 소피는 출판 편집자다. 하지만 아직 입지가 확고하지는 않다. 프란시스는 일종의 연습단원으로 겨우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상태다. 생활비 비싼 뉴욕에서의 생활은 당연히도 쉽지 않다. '프란시스 하'는 그래서 현대 대도시 청년 1인 가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프란시스는 소피와 함께 살기 위해 남자친구의 동거제안을 거부한다. 이를 계기로 프란시스와 남자친구는 헤어진다. 하지만 소피는 임대 계약이 끝나자 평소 동경하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 한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프란시스는 꽤 부유한 두 남자 사람 친구의 집의 방 한 칸에 자리잡지만, 그마저도 일시적이다. 무용가로서의 프란시스의 커리어는 피어날 기색이 없고, 그에 따라 프란시스의 주거 환경도 점점 열악해진다. 결국 프란시스는 오래전 떠난 대학의 기숙사로 돌아가는 신세가 된다. 이곳에서 프란시스는 행사 알바로 연명한다.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의 패러디.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배경음악으로 깔릴 때, 프란시스가 도심을 달려간다. '나쁜 피'에서 드니 라방은 오른쪽으로 달려가지만, 프란시스는 왼쪽으로 달려간다는 점이 다를뿐. 바움벡은 이 영화에서 '프랑스빠'임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영화 포스터로 쓰인 장면. 사실 영화에선 정말 짧게 스쳐간다. 


랜덤하우스 편집자는 왼쪽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제목인 '프란시스 하'란 프란시스가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뉴욕에서 얻어낸 자기 집 우편함에 끼워 넣은 이름이다. 풀 네임은 '프란시스 할러데이'인데, 우편함의 이름 적는 곳이 부족해 종이를 접다보니 '프란시스 하'로 끝났다. 이 이름이 보여주듯 부족한 것 많은 집이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차지한 프란시스의 표정은 뿌듯하다. 다 적히지 않은 이름을 보여주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간다. 귀엽고 적절하고 재치있는 엔딩이다. 


그래서 이 엔딩은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청년이 집값 비싼 도심에서 자기만의 번듯한 공간을 얻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 청년이 몸담고 있는 분야가 그 어느 곳보다 성공 가능성이 적은 예술 분야라면. 프란시스가 무용단의 행정직으로 일하며 틈틈이 만든 안무작을 작은 무대에 올리고, 그 공연으로 주변 사람에게 격려받는 엔딩은 소박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난 비슷하게 해피엔딩이지만, 그것이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호하게 처리된 한국영화 '4등'의 결말부가 좀 더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프란시스 하'가 현실과 무관한, 억지스러운 가짜 엔딩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난 '프란시스 하'가 좋았고, 때로 자기 자리에서 분투하는, 집정리를 안하고 얼렁뚱땅하고 철부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의 어깨를 토닥이는 연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태도가 정말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재미 없지는 않지만, 기대만큼 좋지도 않은 '에이리언: 커버넌트'. 


여섯 번째 ‘에이리언’ 시리즈인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갓 깨어난 인공지능(AI)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와 그의 창조자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의 대화 장면으로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피아노로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고, 차도 만들 줄 아는 데이비드는 자신의 창조주에게 문득 묻는다. “누가 당신을 창조했습니까?” 

42세에 전설적인 SF호러영화 <에이리언>(1979)을 만든 감독 리들리 스콧(80)은 30여년이 흐른 뒤 <에이리언>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2012)로 돌아왔다.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 이후의 상황을 그린다. 우주 식민지 개척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머나먼 목적지로 향하던 커버넌트호는 비행 도중 사고를 당한다. 예상보다 일찍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승무원들은 목적지 대신 인간이 살기에 적합해 보이는 근처의 또 다른 행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공포를 경험한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시도했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초기 시리즈로 돌아간 듯 에이리언과 인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과 살육전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스콧은 순수한 추격전과 폭력의 쾌감을 전시하는데서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1편 이후 3편의 후속작 <에이리언 2>(제임스 카메론·1986), <에이리언 3>(데이비드 핀처·1992), <에이리언 4>(장 피에르 주네·1997)가 더 제작됐지만, 그 어떤 영화도 내가 1편에서 던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데이비드가 인간의 기원에 대해 묻듯, 스콧 역시 자신이 창조한 에이리언 세계의 시발점을 궁금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악당이 기원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성장 배경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않지만, 철창 뒤의 한니발이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에게 몇 마디 건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무서웠다. 1편 제작 당시 <에이리언>을 소개하는 마케팅적 설명은 ‘우주의 죠스’였다. 밀폐된 우주선 안에서 에이리언과 인간은 숨막히는 생존게임을 벌였다. 그때 에이리언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있었을까. 죠스가 왜 사람을 공격하는지, 죠스의 어미는 누구인지, 혹시 죠스가 핵실험에 의해 생긴 돌연변이는 아닌지 궁금해하는 관객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AI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간적 감정까지 표현하는 AI 데이비드, 좀 더 이성적인 AI 월터로 1인 2역을 하는 마이클 패스벤더의 이름이 배우 중 제일 처음 등장한다. 인류 최고 과학기술의 결집인 AI와 인류의 힘을 능가하는 괴생명체인 에이리언이 만나는 셈이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과 미묘하게 다른 AI 패스벤더의 연기는 소름이 끼친다. 에이리언들이 인간의 육체를 갈가리 찢고, 피와 살과 뼈를 분리하는 풍경은 이 시리즈의 시각적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끔찍한 풍경이지만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충분히 즐길 만한 수위를 유지하는 데서는 스콧의 노련함이 느껴진다. 9일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아이디어라든가, 개봉시점이라든가, 괜찮았으나, 결과적으로 흥행은 미적지근.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표현하지만, 막상 선거를 치르는 후보와 참모들은 ‘꽃길’을 걷지 못한다. 선거전(選擧戰)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오늘날의 선거는 ‘전쟁’에 가깝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각 개인의 목소리가 증폭되는 요즘 세상에선 선거 캠프 바깥의 유권자까지도 이 전쟁에 뛰어들곤 한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특별시민>에선 더 원색적이고 색다른 표현을 쓴다. “선거는 똥 속에서 진주 꺼내는 거야. 손에 똥 안 묻히고 진주 꺼낼 수 있겠어?”(변종구 캠프 선거대책본부장 심혁수)

박인제 감독은 3년 전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촬영 기간은 지난해 4~8월이었다. 그땐 천하의 용한 점쟁이라도 19대 대선이 2017년 5월 치러질 것이라고 예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새자유당 소속 변종구(최민식)는 민선 3선에 도전하는 서울시장이다. 3선에 성공하면 청와대까지 노릴 기세다. 변종구는 정치공작의 달인 심혁수(곽도원)를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영입해 우세를 이어나간다. 젊고 패기 있는 광고인 박경(심은경)도 기발한 캠페인으로 변종구 캠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인해 판세는 혼란에 빠진다. 상대 후보인 인권변호사 출신의 다함께미래당 양진주(라미란)는 미국 유학파 ‘엄친아’인 아들 스티브 홍(이기홍)까지 불러들여 치열한 추격전을 벌인다.

이념, 돈, 복수심, 승부욕, 권력, 열정, 미신이 뒤섞인 선거전 자체가 상업영화의 소재로 사용되는 건 자연스럽다. <특별시민>을 보면, 선거 열기가 유독 뜨거운 한국에서 왜 지금까지 ‘선거영화’가 안 나왔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특별시민>은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는 데서 시작해, 선거 결과가 나오는 데서 끝난다. 선거 이전과 이후를 거두절미한 선택은, 선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인다.




과연 <특별시민>은 선거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변수들을 재현한다. 지하철 공사장 인근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각 후보 진영은 그 책임 소재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가족 문제도 불거진다. 변종구의 부인은 고가의 미술품을 샀다는 의혹을 받는다. 미술품 구입 자체가 범죄는 아니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은 후보자는 물론 그 주변 인물에게도 고결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양진주 진영도 마찬가지다. 양진주의 아들은 미국 변호사이자 자전적 에세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유명인이지만, 그를 유세에 활용하면 후보자의 이혼 문제, 아들의 국적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자신의 장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선거전에서 “어떤 서울을 만들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라진다. 변종구와 양진주는 모두 ‘승리를 위한 승리’를 추구하는 검투사들처럼 보인다. “일단 이기자”고 생각하는 이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은 공식적인 캠페인을 넘어, 도청하고 협박하고 증거를 인멸하고 검은돈을 쓴다.

다만, 선거의 다양한 변곡점들이 차곡차곡 쌓여 절정에 오르기보다, 평평하게 나열된다는 점은 문제다.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가 해결되고, 다음 변수가 발생했다가 또 해결되는 식이다. 매회 다른 에피소드를 다루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였다면 이런 방식이 어울렸겠지만, 상영시간 130분짜리 상업영화의 호흡으로서는 능란하지 않다. 각 에피소드의 성긴 틈새를 잇는 것은 최민식, 곽도원, 문소리(정치부 기자 정제이 역) 같은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다. 정치인을 ‘악마화’하거나, 설익은 계몽주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도 <특별시민>의 장점이다.

최민식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엔딩은 혐오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다. 18일 서울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최민식은 “ ‘정치 현실도 징글징글한데 이런 시국에 또 정치영화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라며 “이 작품은 그 지겨운 데로 들어가서 끝을 보고 결론을 내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박인제 감독은 “권력욕의 상징인 정치인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의 꽃이 선거라고 생각했다”며 “영화가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두렵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할리우드판 '공각기동대'를 영원히 기억할 걸작으로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원작'에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풍조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새로운 필드로 들어온 한, 새로운 평가 기준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1989년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만화, 1995년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얻은 <공각기동대>는 이후 나온 많은 SF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설정은 <매트릭스>(1999) <아바타>(2009) 등에서 만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기획 단계부터 여러모로 기대와 우려를 받았다. 복잡하고 기묘한 원작의 세계관을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어떻게 소화할지 관건이었다. 주인공 ‘메이저’ 역에 스타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됐다는 소식도 원작의 유색인 역할을 백인 배우로 대체하는 ‘화이트워싱(whitewashing)’ 논란을 불렀다.

인간의 영혼과 기계의 신체를 결합하는 방식이 일반화된 미래 사회. 메이저(스칼렛 요한슨)는 강력 범죄를 담당하는 특수부대 섹션 9을 이끈다. 섹션 9은 첨단 로봇 기술기업 한카 로보틱스를 파괴하려는 범죄 조직을 추적한다. 메이저는 사건의 실체에 근접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원작으로부터 30여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묻는 질문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프고 병든 사람들은 이미 신체의 많은 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인체의 확장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충격 이후, 인간은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 <공각기동대>는 원작의 정체성 질문을 주제적으로 확장하는 대신, 시각적으로 정교화했다. ‘잘하는 것을 잘하겠다’는 태도다. 빼어난 시각효과 기술력으로 인간과 기계의 기묘한 접점을 보여준다. 덕분에 주인공 메이저에게서는 ‘인간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다 상처를 입으면 ‘부상’이 아니라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 요한슨의 아름다운 얼굴 역시 인조 피부가 벗겨질 때 섬뜩한 느낌을 안긴다. 걸음걸이도 조금 부자연스럽고, 대사엔 웃음기가 말라있다. 크고 작게 이같은 ‘의체’를 받아들인 인물들이 많다보니, 온전한 인간으로 남은 인물들이 오히려 어색하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로봇에게 느끼는 불쾌감을 뜻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 정도는 아닐지언정, 음산하고 기괴한 시각효과와 음악으로 인해 <공각기동대>의 미래도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쪽에 가깝다. 

로봇끼리 싸우는 모습은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신물나게 봤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 기계를 이식한 인간, 기계가 얽혀 싸운다. 액션 설계가 독특하기보다는 분위기가 독특해 인상을 남긴다. 스칼렛 요한슨의 ‘백인 메이저’는 후반부에 나오는 설정 덕에 ‘화이트워싱’ 논란을 교묘히 피했다. 다만 여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요한슨이 중성적이고 기계적인 메이저 역에 잘 어울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정도 규모의 액션영화를 홀로 이끌 여배우가 요한슨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29일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