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도 어느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될지 모르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명대사들이 많은데, 최근 발견한 건 이 대목이다. 세관 공무원 최익현(최민식)은 빼돌린 압수품인 마약을 처분하기 위해 건너건너 아는 조폭 최형배(하정우)와 접촉한다. 거래를 위해 만나 몇 잔 술을 걸친 최익현은 최형배의 본관, 파, 돌림자 등을 묻더니 대뜸 자기가 최형배의 고조 할아버지뻘이라며, 할아버지를 봤으면 절을 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부하 조폭에게 끌려가 몇 대를 쳐맞는다(이 장면에선 '맞는다'기보단 '쳐맞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최형배는 부하를 제지시키고는 말한다.
"어이 아저씨. 와 일하러와가 쓸데없는 소리 합니까."
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최익현은 최형배의 아버지를 찾아가 위세를 떨며 결국 최형배의 절을 받아내고, 이후 전직 공무원과 현직 조폭은 환상의 호흡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결국 사이가 벌어져 몰락의 길을 걷는다.
난 얼마전 모 감독의 오디션 중 성희롱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최형배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일하러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오디션을 볼 땐 오디션 얘기만 하면 된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터이고, 좀 더 확장해 배우의 인생관에 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배우의 삶이란 카메라 앞과 뒤가 무 자르듯 나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영화계 현실'을 알려준답시고, 어느 여배우가 어느 감독과 잤다느니, 주연이 되기 위해선 남자를 유혹할줄 알아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오디션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소리'다.
일하러 갔으면 일을 해야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면서도 난데없이 최형배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물먹은' 기자들 이야기다. 뉴욕타임즈가 국방부의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베트남전 정책과 관련한 잘못을 폭로한다. 닉슨 행정부는 타임즈를 고소해 그들의 발을 묶는다. 타임즈에 물먹은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 벤(톰 행크스)은 부들부들 떨면서 어떤 기사로든 낙종을 만회해보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포스트의 경영자인 캐서린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캐서린은 주식시장 상장, 정부와의 관계, 회사의 장기적인 생존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벤을 추동하는 최초의 힘은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도, 위험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도,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미국 청년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벤이 일하도록 몰아부치는 것은 라이벌 언론사에 대한 경쟁심이다. 벤은 타임즈의 에이스 기자가 몇 달 째 기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초조해한다. 해당 기자가 분명 엄청난 특종을 준비중이라고 예상하고, 그 기사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꼼수까지 쓴다. 마침내 타임즈가 '펜타곤 페이퍼' 특종을 내고 며칠 연속 관련 내용을 보도하자, 벤은 산하 기자들에게 히스테리를 폭발시킨다. 언론에 몸담은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유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손 쓸 방법이 없다. 해당 보고서를 입수하기 전까지는 별 수 없이 경쟁사의 단독 기사 행렬을 감수해야 한다. 전통적인 기자의 마인드로 볼 때, 이런 상태는 치욕이다. 벤은 보고서를 입수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고, 마침내 포스트에는 비행기 일등석을 탄 보고서 일부가 도착한다. 이제서야 포스트 기자들은 살맛을 느낀다.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것이 진짜 볼멘소리는 아님을 누구나 안다.
캐서린은 고민한다. 포스트가 쓰려는 기사는 캐서린의 오랜 친구인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을 괴롭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언론사 사주로서의 입장과 인간적인 우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벤도 직업 윤리와 인간 관계 사이에서 갈등한 적이 있었다. 벤은 JFK 부부와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기자와 취재원이 아닌,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음을 결정적인 순간 깨닫는다.
캐서린은 포스트의 이사, 변호사, 기자 사이에 둘러싸여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평생 직업을 가질 일이 없던 캐서린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포스트 경영자 자리에 올랐으나, 진정한 리더가 되진 못한 상태였다. 모든 것을 내건 결정을 내리고서야 캐서린은 진짜 경영자가 된다.
벤이 법정에 나란히 선 뉴욕 타임즈 관계자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다. 라이벌 의식과 동업자 의식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결국 일은 일이다. '쓸데없는 소리' 안하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고 '더 포스트'는 말한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직업윤리'의 고귀함 정도가 되겠다. 기자가 기자 윤리에 충실하고, 공무원은 공무원 윤리에 충실하며, 정치인은 정치인 윤리에 충실하면 된다. (조폭의 윤리, 사기꾼의 윤리는 말하지 말자) 지난해의 영화 '택시 운전사'도 결국은 택시 기사로서의 윤리에 충실했던 한 남자를 영웅으로 삼은 영화다. 두말할 것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는 영화인으로서의 윤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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