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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영화는 묻는다

2009년, 이 영화 어땠습니까

당신에게 2009년은 무엇이었습니까. 해가 가기 전에 잠시 멈춰서서 무엇이든 ‘베스트 10’을 뽑아보시겠습니까.

12월31일과 1월1일은 같은 해가 뜨고 지는 날이겠지만,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심상은 전혀 다릅니다. 이 시점에서 나만의 ‘베스트 10’을 뽑는 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 인터넷판은 별의별 베스트 10을 다 뽑았더군요. 음반, 영화, 전시회, 소설 등에서부터 녹색 아이디어, 과학의 발견, 야한 농담, 반짝 스타, 어색한 순간 베스트 10 등을 선정했습니다. 이 영화지면에선 전통적·주관적으로 2009년의 영화 베스트 10을 뽑겠습니다.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5편씩 나눴습니다.

1. 그랜 토리노


(경향신문 자료사진)


올해 단 한 편의 영화를 뽑자면 대답은 0.1초도 안 걸립니다. 이 영화는 올해가 아니라 2000년대의 베스트 10에 들어도 손색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하고 주연한 <그랜 토리노>입니다.
드라마, 영화를 보고 좀처럼 운 적이 없는 저는 <그랜 토리노>를 2번 보고 2번 다 울었습니다. 보수적인 백인 노인과 이웃집의 몽(Hmong)족 출신 소년의 우정을 그린 이 영화에는 이스트우드의 삶과 경력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습니다.
시가를 씹는 건맨에서 현대 미국영화의 거장이 된 이스트우드는 영화가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반영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다시 일깨웁니다.




2. 레볼루셔너리 로드


(경향신문 자료사진)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겉으로 행복하고 속으로 썩어들어간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을 들춥니다. 결혼을 앞둔 청춘은 절대 봐서는 안될 영화이기도 합니다. 특히 케이트 윈슬렛은 <더 리더>가 아니라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어야 한다고 전 지금도 생각합니다.



3. 도쿄 소나타


가족의 문제를 다룬 <도쿄 소나타>의 배경은 불황에 빠진 일본 사회입니다. 공포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난 지금 벌어지는 사건을 담을 뿐”이라고 반박했는데, 그렇다면 ‘현대사회=공포’란 말이 되겠습니다. 이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외면받은 것은 공포영화같은 한국의 현실을 꼭 빼닮았기 때문이었을까요.



4. 드래그 미 투 헬

샘 레이미 감독의 <드래그 미 투 헬>은 정교한 롤러코스터처럼 설계된 영화입니다. 이 우스꽝스럽고도 무시무시한 공포영화 앞에서 전 멱살이라도 잡힌 듯 스크린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샘 레이미가 관객을 가지고 놀았다면, 쿠엔틴 타란티노는 역사를 가지고 놉니다.



5.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은 2차대전 영화에서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설정을 과감하게 무시합니다. 국제 영화계에선 무명이던 크리스토프 왈츠를 발굴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긴 것도 과연 천재의 솜씨라 할 만합니다.



6. 마더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게 ‘올해의 한국영화’는 그리스 비극을 닮은 <마더>입니다. 우리 모두 엄마가 있지만, 봉준호 감독처럼 엄마를 그려낸 이가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대중문화계에 ‘어머니 바람’이 불었다는 올해, <마더>는 어머니란 포근한 이름 뒤에 숨은 ‘동물성’을 포착한 수작이었습니다.


 

7. 김씨표류기

<김씨표류기>를 보고 자장면을 먹었다는 분이 적지 않더군요. 이 영화는 ‘점심 때 무심코 먹은 자장면 한 그릇의 소중함’을 깨우칩니다. 아울러 타인에게 다가서기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게 이은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명쾌하게 말해줍니다.




8. 파주


(경향신문 자료사진)


반면 <파주>는 안개처럼 모호했습니다. 줄거리도,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도, 감독의 주제의식도 안개처럼 뿌옇습니다. 하지만 모호함이야말로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모호한 사회를 모호하게 그려내는 건 당연합니다.



9. 박쥐

<박쥐>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은 아닐 겁니다. <올드보이>보다 대중적 흡입력은 떨어지고, <복수는 나의 것>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박쥐>는 세상의 숱한 뱀파이어 영화 리스트에서도 두드러져 보일 만큼 독창적입니다. 김옥빈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쓰임새가 많은 배우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10. 호우시절

<호우시절>은 맑습니다. 아마 관객에겐 이 맑음이 ‘민숭민숭함’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입니다.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 시절을 연상시키는 ‘한 듯 만 듯한 멜로’도 온갖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진 한국의 관객에겐 지루하게 여져졌을지 모르고요. 그래도 전 이 시류에 안 맞는 맑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