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2009년을 살고 계십니까.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는 읽어나가기 힘든 소설이었습니다. 길지 않은 문장에 어려운 개념이나 비유도 없지만, 한 페이지 넘기는 것이 쇳덩이를 달고 발걸음을 떼는 기분이었습니다. 책장 사이엔 재가 뿌려져 있고, 표지 어딘가에서는 시신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7일 개봉하는 영화 <더 로드>도 원작의 분위기를 닮았습니다. 비고 모텐슨(반지의 제왕)이나 샤를리즈 테론(몬스터) 같은 스타가 나온다거나, 대중에게 친숙한 매체인 영화로 옮겨졌다고 해서 한줄기 빛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2010년을 맞이하며 기분 좋게 볼 영화가 아니란 뜻이죠.
(경향신문 자료사진)
모든 것이 불타버린 세계. 아버지와 아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슈퍼마켓용 카트에 물건을 싣고 남쪽으로 향합니다. 곳곳에는 물건을 빼앗으려는 약탈자와 인육을 먹으려는 살인자가 도사립니다. 간혹 꿈 속에선 아내와 함께 했던 옛 세상이 떠오르지만 이 잿빛 세상에선 환상도 부질없습니다.
소설과 영화 속의 절망은 깊이가 깊습니다. 너무나 깊어 현실이 아니라 추상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작가는 세계가 왜 이 모양이 됐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얼음과 재와 기아의 세계를 펼쳐 놓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펼쳐지는 묵시록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매카시가 70대를 넘어섰던 2006년 그는 자신의 아홉 살 아들을 보며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왜 노작가는 핵전쟁의 위협도 거의 사라진 이 세계에서 어린 아들을 보며 ‘허무의 글’을 썼을까요.
가진 것이 많은 이는 새 출발을 하기 어렵습니다. 따져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발목을 잡혀 우리는 그대로 주저앉고 맙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부유하고 잘생기고 야망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술을 마셨고, 여성들과 어울렸고, 세속의 명예를 탐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과거에 매였다면 80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을 겁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마음의 칼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나에게 손을 내미는 과거의 나를 내쳤습니다.
물론 과거는 오늘의 기반이겠지만, 가끔은 과거를 모조리 불사르고 새 시작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를 그리는 <더 로드>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단호하고 종교적인 영화입니다. 당신은 오늘 마음을 새롭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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