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권총은 사랑하는 여인 샤로테의 남편에게서 빌렸죠. 샤로테는 베르테르가 자살을 결심한 것을 알면서도 남편의 권총을 손수 내주었습니다. 책의 인기와 함께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는 베르테르가 입었다는 노란 조끼가 유행했고, 베르테르처럼 자살을 결심한 젊은이도 늘었습니다.
하나 이 모든 건 낭만주의의 물결에 휩쓸렸던 200여년 전 유럽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연인이 사랑하고 이별하지만, 그 속도는 빠르고 상처는 가볍습니다. 이제 사랑의 상처는 하룻밤 눈물이나 소주 두어병, 혹은 미니홈피에서 상대방의 사진을 삭제하는 것으로 쉽게 치유됩니다.
그러므로 요즘 사랑 때문에 죽을 확률은 신종 플루 치사율 0.03%,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도 낮습니다. 아예 0에 수렴한다고 봐도 될 듯합니다. 그럼에도 2009년의 영화 속에서 사랑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는 이가 그렇게 많은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번주 개봉한 <킬 미>(사진)와 <펜트하우스 코끼리>에서는 실연에 괴로워하다가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는 인간이 등장합니다. <킬 미>의 진영(강혜정)은 외로운 킬러 현준(신현준)에게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달라고 의뢰합니다. 현준은 “목숨 가지고 장난하냐. 오래오래 장수해라. 이 미친 X아”라고 저주하지만, 세상에서 홀로 남겨진 듯 외로워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는 건 정해진 수순이겠죠.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돈은 많으나 정신은 없는 30대 전문직 남성들이 섹스 중독증에 걸리고, 친구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실연에 괴로워하다가 대마초를 피우는 풍경을 그립니다. 감독은 “현대를 살아가는 30대 남성의 우울과 불안, 성장을 그리고 싶었다”고 주장하더군요. 극중 포토그래퍼 현우(장혁)는 애인에게 버림받고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다가 계단에서 뛰어내리려 합니다.
이들 영화에서 인물이 받았던 상처의 깊이가 드러났다면 그나마 이해하기 쉬웠을 겁니다. 그러나 두 감독은 상처의 표면만을 표현합니다. 왜,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를 말하지 않은 채 그저 아프다고만 절규합니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기저귀를 갈아줄 때도 아닌데 이유 없이 숨이 넘어갈 듯 울어대는 아기를 보는 기분입니다. 그래도 아기는 달래줘야 하지만, 아기 같은 어른을 이해해줄 여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근거 없는 짜증을 들어주기 위해 주말 오후의 시간과 8000원의 돈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폴란드의 시인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사진첩’을 두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이미지 > 영화는 묻는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년, 이 영화 어땠습니까 (0) | 2009.12.24 |
---|---|
솔로이스트, 열정이 넘쳐 미치도록 빠진다면… (0) | 2009.11.20 |
‘9:나인’ (0) | 2009.09.11 |
복수는 가깝고 용서는 멀다 (0) | 2009.09.04 |
‘걸어도 걸어도’ (0) | 2009.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