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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히어로적인 슈퍼히어로, <데드풀> 10년, 아니 5년 전쯤이었다면 을 더 재미있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각양각색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나오고 있다. 옛 슈퍼히어로들에겐 용기, 헌신, 정의감이 필수 덕목이었지만, 요즘 히어로들은 복수심, 공명심, 편집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데드풀’은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하다. 17일 개봉한 은 가장 안티히어로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라 할만하다. 전직 특수부대원 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은 푼돈을 받는 해결사로 살아간다. 단골 술집에서 만난 연인 바네사 칼리슨(모레나 바카린)과는 침대 위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미래를 약속한 사이다. 어느날 윌슨은 불치의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받는다. 그런 윌슨에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은밀히 접근해 암 치료를 위한 비밀 실험을 제안한다. 윌슨은 자포자기의 .. 더보기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죽어가는 짐승> 오랜만에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었다. 2001년작 (The Dying Animal)이다. 옛 글을 정리하다가 벤 킹슬리, 페넬로페 크루즈가 나온 (2008)의 원작이 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마침 수중에 책이 있어 집어들었다. (확실히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을 읽으면 좋지 않다. 책을 읽다가 자꾸 킹슬리, 크루즈가 떠오른다) 200쪽이 안되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고, 사건이란 것도 얼마 벌어지지 않지만(노년의 문학교수 데이비드와 젊은 여제자 콘수엘라가 사랑하다가 헤어지고, 몇 년 뒤 콘수엘라는 유방암에 걸려 나타난다), 로스의 많은 소설들이 그렇듯 감정의 흐름이 폭포처럼 급격하다. 먼저 호색적인, 세간의 도덕 기준에 무심한 한 남자 이야기를 한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데이비드란 남자의 생.. 더보기
사랑은 디테일, <캐롤> 난 이 영화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귀여운 딸을 가진 유부녀, 착한 남자 친구를 가진 젊은 여자가 사랑을 하고, 둘 사이엔 확연한 계급차가 존재한다.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팽배하니, 여성의 동성애는 입에 올릴 수 조차 없는 보수적인 시대다. 극적인 사건과 감정을 만들 수 있는 갖가지 장치가 있지만, 제작진은 그런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 둘이 감정을 교감하는 과정을 그려내는데 집중한다. 멜로는 사건이 아니라 감정의 장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디테일이다. 아무리 극적인 이벤트가 이어진다 해도, 디테일을 살리지 못한 사랑은 나사를 조이지 않은 구조물처럼 허약할 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은 앞으로 멜로드라마의 고전으로 자리잡거나, 적어도 한동안 팬들 사이에서 회자될 영화다. 사랑을 나누는 대상이 여자.. 더보기
죽이지 않는 자객, <자객 섭은낭> 허우샤오시엔 8년만의 신작. 아름답고 낯설고 때로 길게 느껴지는 무협영화다. 한참 싸우다가 그냥 아무일 없었다는 듯 가버리는 섭은낭이 인상적이다. 은 이상한 무협영화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경공술이 없고, 강호의 도리를 설파하는 협객도 없다. 게다가 주인공은 사람을 죽이는데 실패하기 일수인 자객이다. 감독의 이름을 들으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로 유명한 대만 감독 허우샤오시엔(侯孝賢·69)이다. 지난해 제68회 칸국제영화제는 (2007) 이후 8년만에 돌아온 명장에게 감독상을 주며 환영했다. 9세기 당나라. 섭은낭은 위박 지역의 맹주인 전계안과 정혼했다가 파혼당한다. 전계안의 모친인 가성공주가 아들을 세력가의 딸과 결혼시키길 원했기 때문이다. 섭은낭은 가성공주의 쌍둥이 동생인 가신공주에게 맡겨져 .. 더보기
평범한 파시스트로 살아가기, <순응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46년전 영화가 이제 개봉한다. 30세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를 선보인 건 1970년이었다. 이 영화가 거의 반 세기가 흐른 2016년에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코엔 형제, 박찬욱이 최상급의 찬사를 보낸 46년전 작품에서 동시대 관객은 뭘 읽어낼 수 있을까. 로마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마르첼로는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한다. ‘주방과 침실이 어울리는’ 중산층 가정의 여성과 결혼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무솔리니 정권의 비밀경찰에 자원한다. 정부는 첫 임무로 파리에서 반파시스트 활동을 벌이고 있는 마르첼로의 대학 은사 콰드리 교수를 암살하라고 지시한다. 신혼여행을 겸해 파리로 떠난 마르첼로는 콰드리에게 접근했다가 그의 아내 안나의 매.. 더보기
사회 없는 예술은 가능한가 휴가라고 칼럼 차례 바꿔달랄 수도 없고, 미리 써놓고 갈 수도 없고. 때로 예술은 썩은 연못에 피어난 연꽃처럼 보인다. 우연히 마주친 예술의 감동은 삿된 세상에 찌든 영육을 고양시키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결한 연꽃조차 썩어들어가는 진흙 속에서 양분을 퍼올리고 있으니, 예술도 다를 바 없다. 예술은 속세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 이를 모르는 예술가는 무지하거나 어리석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예술감독과 대표의 동반 사퇴를 불러온 서울시향 사태의 발단은 박현정 전 대표의 폭압적 경영방식이었다. 언론에 공개된 녹취록에 나왔다시피 박 전 대표는 “방만한 행태를 바로잡겠다”는 이유로 직원들에게 막말을 일삼았고, 박 전 대표 취임 2년 만에 이를 견디지 못한 직원 절반이 퇴사했다. 법적으로 죄가 되는지 여.. 더보기
몽상가, 독재자, 선동가, <스티브 잡스> 가 보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뜬 2011년 10월5일부터 할리우드 사람들은 그를 스크린으로 소환할 방법을 궁리했을지 모른다. 잡스는 전 세계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생각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괴팍한 캐릭터와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으로도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가 에런 소킨이 의 시나리오를 쓴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기대감이 올랐다. 소킨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를 다룬 로 IT 천재의 내면에 도사린 빛과 어둠을 능란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소킨이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 를 저본으로 삼아 일찌감치 시나리오를 써나간 반면, 연출자를 정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를 연출했던 데이비드 핀처가 하차하고, 의 대니 보일이 합류했다. 배우도 애초 물망에 올.. 더보기
지루함의 제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기만큼 논란도 많은 작가지만, 나는 대체로 그의 작품을 즐겁게 읽었다. (읽다가 그만둔 건 에세이집 뿐이다.) 나 같은 소설도 재미있었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무라카미의 작품은 였다. 특히 옴 진리교 소속 신도들의 인터뷰를 담은 2편을 완전히 몰입해 읽었다. 이 인터뷰는 후일 의 창작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가 작심을 하고 취재를 시작해 그것을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옮길 때 훌륭한 작품이 나올 때가 있다. 조지 오웰의 가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오웰은 소설가이기 이전, 기자이기도 했다) 최근엔 알렉시예비치의 작품들이 훌륭했다. 그러고보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중요한게 아니다. 단지 왠지 모르게 우리의 문화 제도가 픽션에 예술적 가중치를 두는 것으로 합의를 해왔을 뿐이.. 더보기
대자연 속 생존 실험 보고서, <레버넌트> ***스포일러 있음. '영화적인 영화' 혹은 '시네마틱한 경험'이란 무엇인가. 이론가들은 이를 두고 몇 시간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감각적으로 '큰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영화인가'라고 자문한다. 얼마전 본 이 그랬다. 눈덮인 벌판을 달리는 마차가 나오는 첫 장면부터 "더 큰 스크린에서 볼 걸" 하고 후회했다. 은 절반 이상이 넓지 않은 실내에서 펼쳐지는 영화지만, 그래도 이를 담는 스크린이 커야 볼 맛이 난다. 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영화는 대부분 실외 촬영이다. 백인에 의해 개발되기 이전의 북미 서부 지역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힘없는 인간 몇 명이 피비린내 나는 생존 투쟁을 벌인다. 자연에는 자비심이 없다. 그 속에 내쳐진 인간의 힘겨운 투쟁을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가 자주 쓰는 테크닉은 급격한 패.. 더보기
애국주의 첩보소설? <레드 스패로우> 33년간 CIA에서 일한 제이슨 매튜스의 데뷔작 (오픈 하우스)는 흥미진진한 스파이 소설이다. 출판사는 '존 르 카레의 계보"를 잇는다고 홍보하고 있는데, 턱없는 과장은 아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치열한 정보전을 치르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 스파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 책은 상대를 포섭하고, 그런 상황을 역이용하고, 때론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잔인한 무력에 호소하고, 거대한 정보조직에는 다른 모든 관료 조직과 같이 비효율적이고 때론 음험함 음모가 판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솜씨가 근사하고 박진감 있다. 발레리나의 꿈을 키우다가 동료의 음모로 부상을 당한 뒤 무대를 떠나고 여러가지 우연으로 러시아의 스파이가 되는 도미니카, 안정적이고 부유한 가문을 벗어나 위험과 모험으로 가득찬 CIA .. 더보기
단 하나의 파격, <스타 워즈: 깨어난 포스> **스포일러 있음 J J 에이브럼스가 바톤을 넘겨받은 스타워즈 신작 를 봤다. 줄거리의 이음새가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며, 어색하지 않은 컴퓨터 그래픽 화면이 연말 극장가의 한 자리를 차지할 상업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솔직히 불만이 있다. 이런 식이라면 에피소드 7, 8, 9가 아니라 70, 80, 90도 만들 수 있다. 의 구도는 에피소드 4와 거의 비슷하다. 다른 등장인물이 등장해 앞선 영화와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드로이드가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고,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한 영웅이 있고, 결국 이 영웅이 힘을 깨닫고 수련해 가는 과정을 예기하며, 악당은 대체로 한 점의 반성도 없는 순수 악 그 자체이지만, 그 중 행동대장 격인 인물은 일말의 망설임이 있다. 심지어 아버.. 더보기
버니 샌더스의 수수께끼, 샌더스 관련 2제 샌더스는 할 말 다 하고도 선거에서 이긴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버니 샌더스 지음·홍지수 옮김/원더박스/416쪽/1만8000원 버니 샌더스의 모든 것버니 샌더스 지음·이영 옮김/북로그컴퍼니/328쪽/1만5000원 “국민들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도 국민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법안을 거부하고 이 나라의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가족,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보다 나은 법안을 만들어낼 수 잇다고 믿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저는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2010년 12월 10일 오후 7시, 백발의 정치인이 미국 상원회의장 발언대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당시 69세였던 그는 식사를 하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8시간 37분의 연설을 이.. 더보기
호모 사피엔스의 3가지 혁명, <사피엔스> 얼마전 읽은 책. 장구한 역사를 잘 요약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봐도 손색이 없는지는 봐야겠지만.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음·조현욱 옮김/김영사/636쪽/2만2000원 셰퍼드, 요크셔 테리어, 시추 등 다양한 종류의 개가 있듯이, 200만~1만년 전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살았다. 인간 종들은 모두 250만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고,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등 각기 다른 장소로 퍼져나가 환경에 맞게 적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기자나 읽는 독자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호모 루돌펜시스 등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멸종했다. 7만년전쯤 동아프리카를 벗어난 호모 사피엔스가 아라비아 반도를 .. 더보기
가디언의 김영삼 오비추어리 (아마도) 오랜만에 가디언 오비추어리에 한국인이 올라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가디언 오비추어리는 냉정하고 정확하기로 정평났다. 오랜만에 모르는거 건너뛰면서 대충 번역해봤다. 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시류에 휩쓸린거 같다. 원문은 여기. 대담한 양 김씨(이 성은 한반도에서 가장 흔하다)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남한을 지배한 군부 독재자에 맞선 투쟁에 앞장섰다. 더 유명한 김대중은 북한 지도자 김정일과의 첫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연 뒤인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북한을 건국한 독재자 김일성이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그 상은 87세로 사망한 김영삼에게 돌아갔을지 모른다. 한국인들이 칭하는바를 따르자면, YS는 DJ같은 국제적 유명세는 없었지만 1993년 대통령에 선출됐다. 두 김씨.. 더보기
삶과 죽음은 연결돼 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자연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좋은 책은 학문의 분과를 뛰어넘는 깨달음을 준다. 이번에 읽은 가 그랬다. 생명에서 생명으로베른트 하인리히 지음·김명남 옮김/궁리/304쪽/1만8000원 삶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삶의 기간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종교는 언젠가 닥쳐올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더 넓은 물질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삶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 갓 숨이 끊어진 생명체가 있다. 생명의 기운은 사라졌지만, 육체만큼은 살아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체온마저 따뜻해 마치 깊은 잠에라도 빠진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몸이 식어간다. 이제 어딘가에서 ‘자연의 장의사’들이 나타난다. 이른바 청소동물이다. 송장벌레, 구더기, 큰.. 더보기
조성진의 음악은 조성진의 것 며칠간 집에 와서 조성진의 쇼팽 피아노 콩쿠르 음반을 들었다. 전주곡이 좋았고, 소나타는 조금 낯설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칼럼을 썼다. 조성진의 제17회 쇼팽 피아노콩쿠르 우승 실황 음반을 들었다. 24곡의 전주곡을 차례로 연주한 뒤 녹턴, 소나타, 폴로네즈 등을 조금씩 들려줬다. 콩쿠르는 세계의 젊은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짧은 시간에 실력을 뽐내는 대회다. 대회 특성상 열정적이고 다소 과시적인 연주가 나오지 않을까 짐작했다. 예상과 달랐다. 순진한 표정의 21세 피아니스트는 오히려 차갑고 절제된 연주를 들려줬다. 조성진의 연주는 차분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초도 발매된 음반 5만장은 1주일 만에 매진됐다. 발매 당일에는 새벽부터 음반 매장에 줄을 선 이들도 있었다. 통상 클래식 음반은.. 더보기
수목원에서의 오후, <우리나무 백가지> 이 인터뷰를 위해 20년 전에 산 를 책장에서 찾아봤다. 책 뒤편엔 대학 구내서점 영수증이 붙어있었다. 아직 그 서점이 '슬기샘'이란 이름을 쓰는지 모르겠다. 왠지 '위즈덤 파운틴'같은 이름으로 바뀌었을 것 같다. (농담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기자 선배와 함께 국립수목원을 잠시 걸었다. 때마침 날이 흐려 다소 음산했다. 하지만 잘생긴 나무 사이를 걷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인터뷰이나, 인터뷰이에게 안내해준 연구사 모두 사람이 좋아 보였다. 둘 다 국립수목원에서 20년, 10년은 근무한 이들이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난 그들이 '식물적 인간'이라 느꼈다. 사진 선배는 "수녀 같다"고 평했다. 1995년 나온 (현암사)는 식물학 도서로는 이례적으로 19쇄를 찍은 스테디 셀러였다. 일본, 유럽에서 들여온.. 더보기
투명한 사회의 첩보원, <007 스펙터> **스포 일부 있음 로저 무어나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을 즐긴 적은 없다. 별로 세련될 것도 없는 내 90년대 감수성으로 봐도 그들의 007은 구시대적이었으니까. 브로스넌이 북한의 가상 악당을 대상으로 싸운 는 그저 하나의 농담 같았다. 새 007에 캐스팅된 다니엘 크레이그는 듣도 보도 못한 배우였다. 얼굴을 처음 봤을 때, 그 얼굴에 악당이면 악당이지 제임스 본드 역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힘들었다. 크레이그의 첫 007 시리즈 (2006)은 첫 장면에서부터 제이슨 본 시리즈나 트리플 엑스 시리즈에 의해 놀림당할 대로 놀림당한 007의 전통을 품위있게 재창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선언은 실천됐다. 느끼하고 구닥다리 같은 007은 크레이그와 함께 기름기 없고 날렵하고 냉정하고 좀 더 현실.. 더보기
말하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 스파이 브릿지 **스포일러 조금 스티븐 스필버그의 는 마치 두 편의 영화를 이어붙인 듯 보인다. 스필버그답지 않게 그 이음새가 어색하다는 느낌도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57년을 배경으로, 보험전문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이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 루돌프 아벨의 변호를 맡아 법정 공방을 벌이는 대목이 전반부, 선고 이후 수감생활중인 아벨과 소련 상공에서 스파이 촬영을 하다가 불시착해 붙잡힌 미군 파일럿을 교환하기 위한 협상 대목이 후반부다. 전반부는 법정 영화의 틀을 따라가고, 후반부는 냉전 시대 스파이 영화의 형태를 보인다. 스필버그가 '하고 싶은 말'은 전반부에 응축돼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교실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 뒤 핵전쟁 비디오를 감상하는 시대다. 미국은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더보기
순도 높은 볼거리, <라 바야데르> 공연을 많이 보지는 못하는 편이지만, "다른 캐스팅으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공연이 최근 두 편 있었다. 하나는 뮤지컬 였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 였다. 는 다른 배우의 연기가 궁금해서였다면, 는 어떤 무용수라 하더라도 이 공연을 한 번 더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인도의 제국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무희, 그를 사랑하는 장군, 무희를 질투하는 공주, 무희를 남몰래 사랑하는 사제라는 4각 관계는, "드라마틱하다"기보다는 "막장 드라마 같다" 혹은 "낡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줄거리다. 근대 서구에서 만든 작품이 종종 그러하듯,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기도 어렵다. 이런 인물 구도와 줄거리를 대략 설명하는 1막은 다소 지루했다. 2막부터 분위기가 바뀐다. 이제부터는.. 더보기
한국의 빌리 엘리어트, 서울발레시어터의 김인희 단장 인터뷰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인터뷰는 잘됐다. 인터뷰이의 사연이 풍부하고, 인터뷰이가 그 사연을 전하는 조리가 있으며,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를 존중하고, 인터뷰 자리가 화기애애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과정이 결과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인터뷰 내용에 비해 주목도는 떨어진 것 같다. 어딘지 아쉬워 인터뷰 내용을 블로그에 옮겨 놓는다. 아울러 서울발레시어터의 공연에 대한 표현은 모두 진심이다. 정말 입이 딱 벌어졌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20주년 기념공연이자 김인희 단장(52)의 은퇴공연이 된 의 마지막 장면. 와이어에 매달린 김 단장이 무대를 고속으로 가르질렀다. 객석 곳곳에서 탄성과 박수가 터졌다. 공연 초반엔 “우아하고 위엄있다”는 평이 어울.. 더보기
감정의 슈퍼맨, <마션> 을 보고 리들리 스콧의 인장을 느끼긴 어렵다. ,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스콧의 영화 중 이토록 긍정과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찬 영화가 있었던가. SF 장르만 한정해 보더라도 (2012)는 얼마나 우울하고 찝찝한가. 장르를 넓혀보면 (2013)같이 더 찝찝한 영화도 있다. 그런데 은? 전세계인이 화성에 홀로 남겨진 우주인 마크 와트니의 무사귀환을 빌고, 그가 화성을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함께 기뻐한다. 할리우드 SF의 클리셰, 임무 성공 소식이 전해졌을 때 NASA 사람들이 환호하는 장면에선 거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게 은 만족스러운 상업영화였다. 난 이 일종의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생각하고 즐겼기 때문이다. 식물학자로서의 지식을 총동원해 감자를 재배하고, .. 더보기
도식적인 구도, <리틀 스트레인저> ***스포일러 있음. 세라 워터스의 장편 를 읽었다. 워터스는 한국에선 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에 의해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고 있다. 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데, 는 2차대전 직후다. 이때라면 그저 '현대물'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는 시대물 분위기를 물씬 낸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귀족 에어즈 가문과 그들의 집 헌드레즈홀이기 때문이다. 헌드레즈홀에서 일했던 유모의 아들이자 자수성가한 의사 닥터 패러데이가 작중 화자인데, 독자는 그의 눈을 통해 한때 영화로웠던 헌드레즈홀과 전쟁 이후 완전히 몰락한 헌드레즈홀을 비교해 관찰한다. 패러데이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헌드레즈홀의 모습을 깊이 각인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에게 1950년대는 전후 상처를 치유하.. 더보기
안녕, CSI **스포일러?미국 드라마 라스베가스 시즌의 피날레를 봤다. 이 시리즈가 처음 시작한 것이 2000년이니 벌써 15년이다. 최근 몇 년 간은 전혀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편이 한국 지상파에서 방영했을 때에도 관람했던 시청자로서, 심지어 이 시리즈가 편성 문제 때문에 들쑥날쑥 방영되자 분노에 찬 기사를 쓰기도 한 처지로서, 시리즈의 엔딩에 대해 한 마디 보태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피날레는 피날레답게 그동안 하차했던 멤버들이 대거 모였다. 워릭은 극중 사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길 그리섬, 캐서린 윌로우스가 범인을 잡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 잊을만하면 길 그리섬과 썸을 타던 레이디 헤더가 연관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테러리즘 운운하며 거창하게 시작했던 초반부와 다르게,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이혼한.. 더보기
육즙이 내리는 땅, <전설의 땅 이야기> 전설의 땅 이야기움베르토 에코 지음·오숙은 옮김/열린책들/480쪽/5만5000원 에덴동산, 아틀란티스, 엘도라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현대 과학·상식의 견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장소다. 하지만 과거의 누군가는 이 장소들의 존재를 믿었고, 심지어는 지금도 믿는 사람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로 인해 ‘믿음의 흐름’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런 장소들은 신의 존재와 비교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이 신의 부재를 아무리 엄밀한 방식으로 검증한다 한들, 신자들은 신의 존재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신이 있건 없건, 신자들의 믿음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움베로트 에코의 는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전설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박학다식으로는 따를 이가 적은 이 작가·사상가는 동서고금의 전설적 장소들을 .. 더보기
세계의 문학과 대학가요제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쓰는 칼럼은 날짜를 선택할 수 없기에 더 힘들다. 언론 속성상 '시의성'이란 것이 중요한데,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쓸 날짜가 아니고 쓸 날짜가 다가오면 이렇다할 소재가 없게 마련이다. 이번 칼럼의 소재도 '고종석의 엠마 왓슨 편지 사태'로 시작해 '김훈의 라면 냄비 사은품 사태'로 넘어갔다가 결국 가장 최신의 사건인 '세계의 문학 발행 중단 사태'를 썼다. 모든 오래된 것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남긴다. 추억에 취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은 이 시대의 특징이다. 문예계간지 ‘세계의 문학’이 2015년 겨울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을 중단한다. 이 잡지를 발행해온 민음사는 ‘폐간’이란 말을 쓰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폐간한 모든 잡지는 일단 ‘발행 중단’한다. 수많은 잡지들이 발간과 폐간을 .. 더보기
술파는 무대, 뮤지컬 <원스> 뮤지컬 리뷰. 극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무대 위에선 흥겨운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관객들은 무대에 올라 뮤지션들을 둘러싸고 박수 치며 흥을 돋웠다. 공연시간이 가까워지자 관객들은 하나 둘씩 자리로 돌아갔고, 기타, 바이얼린,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악사들은 어느새 배우가 됐다. 공연 시작 전과 후는 객석의 불이 조금 어두워졌다는 점만 달랐다. 뮤지컬 는 그렇게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인터미션에는 무대에 올라 간단한 음료를 사마실 수도 있었다. 무대 자체가 아일랜드 더블린의 펍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는 2006년작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뮤지컬과 영화는 더블린 거리의 가난한 악사와 동유럽 출신 이민자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라는 뼈대를 공유한다. ‘폴링 슬로우리’ ‘이프 유 원트 미.. 더보기
배우가 창조하는 마법의 순간, <맨 오브 라만차> 내가 개막한 지 두 달도 더 된 뮤지컬 를 보러 간 건 버스 정류장을 지나다 본 아래 포스터 때문이다. 난 젊은 조승우와 늙은 조승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이 포스터는 티저 포스터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이 공연에 나오진 않는다는 뜻이다. 조승우의 젊음과 늙음은 종교재판을 앞두고 지하감옥에 수감된 작가이자 젊은 관료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 그가 감옥 속에서 연기하는 늙은 기사 돈키호테로 표현된다. 세르반테스는 실제로 작가라기보다는 군인, 관료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해적에 붙잡혔다가 몸값을 내고 풀려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포스터의 비밀이 궁금해 뮤지컬을 봤다면 살짝 '낚였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론 기분 좋은 '낚임'이 됐다. .. 더보기
일본 어느 자유주의자의 초상, <양의 노래> 아직 이런 말 하긴 좀 이른 것 같긴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서전, 전기류에 관심이 생긴다고 한다. 찾아보니 서경식 선생이 한겨레에 가토 슈이치의 부음을 접한 뒤 적은 글이 있다. 링크한다. 가토 슈이치, 한 교양인의 죽음 양의 노래가토 슈이치 지음·이목 옮김/글항아리/552쪽/2만5000원 가토 슈이치(1919~2008)란 인물을 쉽게 설명하긴 어렵다. 도쿄대 출신의 의사였는데 학창 시절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시, 소설, 평론을 썼다. 일본의 패전 직후 미·일 합동조사단의 일원으로 히로시마 원폭 피해 조사에 참여했고, 1951년 프랑스로 유학가 혈액학을 연구했다. 그러면서도 모국 언론에는 문예평론을 발표했다. 도쿄도립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했고, 베를린자유대,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조치대에서 학생들을 가.. 더보기
성스러운 카타콤, <일탈: 게일 루빈 선집> '카타콤'은 궁금하긴 한데.... 만약 가볼 기회가 생기더라도 나로선 여기서 묘사된 걸 읽는 정도로 충분하겠다. 일탈: 게일 루빈 선집게일 루빈 지음, 신혜수·임옥희·조혜영·허윤 옮김/현실문화/904쪽/4만4000원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게일 루빈 미국 미시간대 교수(66)는 문제적 인물이다. 인류학, 비교문학, 여성학을 가르치는 그는 1970년대부터 논쟁적인 글을 써왔는데, ‘진보’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통에 진영 내에서도 미움받거나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역자를 대표해 서문을 쓴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조차 1997년쯤 의 번역을 제안받고는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임 교수는 “마음속의 금서”였던 을 번역해 펴내기에 이르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