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미중년'이 있습니까.
미중년이란 말이 낯서십니까. 그렇다면 '미소년'은 잘 아시겠죠. 미중년이란 멋진 중년 남성을 가리키는 신조어입니다. 이번주 개봉작 <엘레지>의 벤 킹슬리(65)도 미중년이겠군요.
(경향신문 자료사진)
데이비드는 지적이고 우아하고 카리스마 있는 문학 교수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으며, 이혼 후 혼자만의 시간을 즐깁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쿠바 출신의 대학원생 콘수엘라의 아름다움에 반합니다. 둘의 나이는 30년 차이. 가볍게 시작한 관계였지만, 둘은 서로에게 점점 깊이 빠져들죠. 데이비드가 자꾸만 콘수엘라를 소유하려 들면서 둘의 관계는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정작 콘수엘라가 자신의 가족을 소개해주려 하자, 데이비드는 뒤로 물러섭니다. 결국 둘의 관계는 정리됩니다. 2년 후, 콘수엘라가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걸어 예기치 못한 소식을 전합니다.
콘수엘라 역은 스페인 출신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스에게 맡겨졌습니다. 데이비드가 콘수엘라에게 빠져드는 과정은 자연스럽습니다. 세상 어느 남자가 그 깊고 아득한 눈망울을 거부하겠습니까.
킹슬리와 크루스는 실제로도 30여년의 나이차가 납니다. 하지만 둘의 데이트, 키스, 섹스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 어느 젊은 남녀 스타 못지않습니다. '젊은 여인의 육체를 탐하는 노인'을 떠올릴 때 느껴지는 음침함은 찾을 수 없습니다. 물론 데이비드 역할이 주는 후광에 힘입은 바 클 겁니다. 빼어난 비평가인 그는 열정적으로 운동을 즐기고 고급 아파트에서 안락한 삶을 누립니다. 지적이고 활력 넘치고 안정적인 남자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데이비드 역이 '느끼하지' 않을 수 있는 데에는 킹슬리의 공로가 큽니다. 영국 로열 세익스피어 극단 출신의 그는 낮고 분명한 톤의 대사를 합니다. 잘 관리된 몸매는 일찌감치 벨트 구멍을 늘려가기 시작한 한국의 30대 남성 직장인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삭발한 머리는 탈모를 감추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깁니다. 때론 부드럽고 때론 날카로운 눈매는 그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잠시 생각해봤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인 퓰리처 수상 작가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동물>을 한국에서 각색해 영화화한다면 누가 데이비드 역을 맡을 수 있을까요. 쉽사리 떠오르지 않습니다. 크루스보단 못하겠지만 나름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배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낭만적으로 연애하는 60대 남성을 연기할 배우는 찾기 힘듭니다.
한국의 중년 남성 배우는 잘났든 못났든 일단 '아버지'입니다. 가끔은 가정을 버린 채, 혹은 가정에서 버림받은 채 떠도는 낭인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연애는 '불륜'이고, 낭인은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합니다. 젊은 여성과 연애를 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한국의 남자 배우가 특별히 못생겼거나 몸매가 나쁘거나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닐 겁니다. 아마 관객의 고정관념이 중년 남우의 연애를 허락하지 않았겠죠. 개인의 연애 대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를 우리 관객은 원합니다.
하지만 언젠간 스크린 위에서라도 한국에서 연애하는 미중년을 만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미중년 영화를 보면서 눈을 반짝이는 중년 남성 관객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길 바랍니다. 스크린은 현실의 반영이지만, 때론 소망의 충족입니다. 멋있게 늙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도 죄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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