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미지/영화는 묻는다

‘걸어도 걸어도’

죽은 이를 어떻게 기려야 합니까.

18일 개봉한 일본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영화에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10년 전 여름 바다에서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장남 준페이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합니다.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고향집에 모인 가족들의 1박2일을 영화는 차분히 그려냅니다.



은퇴한 의사인 아버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권위적이고 말수가 적습니다. 어머니는 온화해 보이지만 속으론 무서운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차남 료타는 처, 자식과 함께 고향집을 찾지만 여전히 형 준페이와 비교되는 상황이 못마땅합니다. 게다가 아내가 사별한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아 데려온 아들과는 여태 서먹합니다.

수면 위 가족 관계는 화목하고 예의 바릅니다. 하지만 수면 아래로는 팽팽한 긴장과 부글부글 끓는 원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모두 불의의 사고로 죽은 장남에 대한 각기 다른 기억 때문입니다.

“젊은이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애석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생전에 인기가 높았던 사람의 때이른 죽음은 그것을 더욱 가속화한다. 그의 결함을 알고 있었던 사람까지도 예상치 않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양자였던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병사들 사이에 신망이 높던 게르마니쿠스는 고열에 시달리다가 33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후 로마인들 사이에는 그를 추모하는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강하게 퍼집니다.

부재함으로써 존재감이 더욱 커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점은 잊혀지고 장점은 부각됩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사람일수록 ‘신화’는 강해집니다. <걸어도 걸어도>의 죽은 아들이 그렇고, 1979년 측근의 총에 맞아 숨진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박정희 신화’는 30년 이상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2009년 5월23일부터 1주일간 한국을 뒤흔들었던 추모 열기는 차츰 누그러진 것 같아 보이지만, 죽은 이에 대한 산 자의 기억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시 표출될지 알 수 없습니다. 선거, 거리의 투쟁뿐 아니라 예술 작품, 일상의 삶에서도 불쑥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니라 그가 남긴 ‘뜻’입니다.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는 죽은 장남에 대한 그리움이 지나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차마 해서는 안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이들을 괴롭히는 것이 나름의 추모 방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현세의 진리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말씀입니다. 여기는 유령이 아니라 산 사람의 세상입니다. 죽은 사람의 뜻과 그것이 올바르게 행해질 방도를 모색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