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싸움의 전제 조건은 무엇입니까.
이번주 개봉한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은 현란한 말싸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라면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매체인데, 말싸움이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소재일까요. 지루할 것이라 예단하진 맙시다. 이 영화가 다루는 말싸움은 언론인 데이비드 프로스트와 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인터뷰입니다. 1977년 여름 방영된 이 인터뷰는 미국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워터게이트 사건에 책임을 진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며 영화가 시작합니다. 평소 정치엔 관심이 없으며 투표조차 하지 않는 토크쇼 MC 데이비드 프로스트는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의 모습에 기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는 거액의 인터뷰료를 제시하면서 닉슨의 퇴임 후 첫 인터뷰를 추진합니다. 닉슨 역시 풋내기인 프로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계복귀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4일간의 인터뷰 날짜가 정해지고, 프로스트와 닉슨은 각각 인터뷰 준비 팀을 꾸립니다. 첫 3일간의 인터뷰는 노련한 닉슨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날의 주제는 드디어 워터게이트 사건. 프로스트는 마지막 대결을 기다립니다.
닉슨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도중 백악관을 떠난 대통령이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선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후임 포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닉슨을 사면했습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프로스트 팀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닉슨이 겪지 않은 재판을 받게 하겠어!" 프로스트 팀의 목적은 어떤 경우에든 닉슨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연예인을 출연시켜 눈물 몇 방울을 흘리게 하고는 감상주의로 덧칠된 면죄부를 내주는 한국의 토크쇼와는 꽤나 다른 살풍경입니다.
프로스트의 창과 닉슨의 방패가 부딪혀 불꽃을 튀깁니다. 4일간의 인터뷰를 위해 프로스트는 각계의 전문가를 고용해 여러 달을 준비합니다. 닉슨은 이미 사법의 그물망을 벗어난 상태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그의 자백을 통해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법망을 피해 은둔한 범죄자가 없지 않습니다. 양심 혹은 신은 그에게 죄를 묻겠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당당한 철면피, 사이코패스는 어디에나 있게 마련입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말'로 그들을 옭아맨 뒤 항복 선언을 듣는 일이 우리에게도 가능할까요.
'그렇다'고 얼른 대답하기엔 우리의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말보다 주먹이, 이성보다 감정이 기세를 떨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말과 이성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말은 의미를 갖지 못한 음운 덩어리에 불과했고, 이성은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가장 말 잘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모여든 국회에서조차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세상 어디에서 바른말을 듣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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