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신화는 무엇입니까.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처음 설계를 시작할 때부터 건물 한 채, 길 하나까지 의미를 가진 계획도시였습니다. 계단의 개수에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런 ‘강박적 의미부여’는 미국의 짧은 역사에 기인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의미를 가질 시간이 없었기에, 의미를 힘들게 만들어 낸 셈이지요.


11일 개봉하는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은 고대 그리스 복장을 하고 삼지창을 든 거인이 뉴욕에 등장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 거인이 그리스 신화 속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라고 말합니다. 형제 사이인 포세이돈과 제우스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제우스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자신의 번개를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역정을 내면서 포세이돈의 아들을 도둑으로 의심합니다.
포세이돈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퍼시 잭슨은 평범한 고교생입니다. 반인 반신, 이른바 ‘데미갓’인 그는 자신의 정체와 능력을 아직 모릅니다. 제우스의 사자들이 잭슨을 찾아오고, 잭슨은 자신의 주변에서 정체를 숨기고 있던 수호신들의 도움을 받아 오명을 벗기 위한 모험을 떠납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영화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영향력이 명백히 보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채 알지 못하는 청소년이고,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연상케하는 데미갓 캠프에서 수련을 시작합니다. <해리 포터> 1, 2편의 감독인 크리스 컬럼버스가 메가폰을 잡았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합니다.


반면 <해리 포터>가 영국산인 데 반해 <퍼시 잭슨>은 미국산입니다. <해리 포터>에는 영국의 오랜 역사가 만들어낸 유산이 현대적으로 변형돼 자연스럽게 담겼습니다.
그러나 <퍼시 잭슨>이 그리스 신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다소 자의적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신들의 회합 장소인 올림포스로 가는 문이 숨겨져 있다거나, 유명한 ‘할리우드’ 입간판 옆에 지옥문이 있다는 식입니다.
지옥의 신 하데스가 현대의 록스타 같은 행색이고, 잘 닦여진 방패 대신 아이폰의 반사광을 이용해 메두사와 싸운다는 설정은 미국식 유머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퍼시 잭슨>엔 ‘신화 없는 미국’의 콤플렉스가 담겼습니다.


시작부터 모두가 평민이었기에 미국엔 귀족도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주와 왕자와 광대가 어울린 디즈니랜드는 구세계식 봉건 질서에 대한 미국식 대체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류는 신화에서 과학으로, 봉건제에서 민주제로 넘어왔건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사라진 옛 가치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천천히 단계를 밟아야 하나 봅니다. 남들이 수백년에 걸쳐 완성한 민주주의를 단 50여년 만에 만들어놓고 다 된 줄 알았던 건 큰 착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