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악당입니까.

미국 영화는 끝없이 새로운 악당을 창조해왔습니다. 주인공에게 제압당할 상대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냉전 시대엔 공산주의 스파이가 악당이었습니다. 때론 외계인이 까닭없이 미국만 골라 침략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냉전시대 핵전쟁에 대한 공포로 해석하는 평론가들이 있습니다. 한때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때론 아프리카 군벌이 악당이었습니다. 21세기형 첩보물의 전범이 된 '본' 시리즈에 이르면, 적이 사라져 존립기반을 잃어버린 미국의 정보 기관 자체가 악당으로 떠오릅니다.

이번주 개봉작 <인터내셔널>의 악당은 다국적 은행입니다. 인터폴 형사 루이(클라이브 오웬)는 전세계 190개국에 손을 뻗친 다국적 은행 IBBC의 비리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IBBC의 실체에 접근하던 동료가 살해당하는 광경을 눈 앞에서 목격한 루이는 뉴욕의 지방 검사관 엘레노어(나오미 왓츠)와 힘을 합칩니다. IBBC는 세계 각국의 돈 세탁, 무기 거래, 테러를 조장합니다. IBBC에 빚을 지게 하고, 이 빚을 이용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목적입니다. 실제로 그런 은행이 있을까 싶지만, <인터내셔널>은 1991년 폭로된 파키스탄의 BCCI 은행 스캔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70년대에 설립된 이 은행은 각국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국제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세계 금융 위기 이전에 기획된 이 영화가 다국적 은행을 악당으로 설정했다는 건 우연일까요, 제작진의 놀라운 통찰일까요. 숨 돌릴 틈 없는 스릴러를 기대하고 <인터내셔널>을 보셨다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본' 시리즈에 비하면 굼떠 보이고, 통쾌한 액션 장면도 드뭅니다. 주인공이 IBBC의 총책임자인 악당과 정면으로 마주쳐 싸울 일도 없습니다. 미리 노출하면 안되겠지만, 결말도 관객에 따라 '허무하다'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전선(戰線)이 명확했던 시대의 영화인들은 차라리 행복했을 겁니다. 이 편에는 정의의 수호자, 저 편에는 악의 결정체를 두고 마주치게 하면 되니까요. 고난 끝에 선이 승리, 악이 패배합니다. 관객은 명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악당은 정체가 없습니다. 어디서 누구와 싸워야할지가 불명확합니다. <인터내셔널>처럼 21세기의 은행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기부터가 꺼림칙합니다. 바다 건너편 어디의 누군가가 운영하는지도 모르는 펀드에 월급을 집어넣고, 얼마 뒤 그 돈이 더 큰 돈으로 돌아오기를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습니까. 그 돈으로 비싼 차, 큰 집을 살 수 있기를 미리부터 꿈꾸지 않았습니까. '돈 놓고 돈 먹기'의 국제적인 투전판에 서슴없이 끼어들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욕심은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지 않았습니까.

은행이 악당이라면, 은행을 과신하고 부질없는 욕망을 키웠던 우리도 악당입니다. '결국 내가 범인'이라는 설정은 추리 소설에서 종종 사용되는 트릭입니다. <인터내셔널>을 유쾌하게 볼 수 없는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부채를 우리 모두 조금씩 갚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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