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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을 즐기다, <쇼를 사랑한 남자>

**스포일러 소량



저런 미소는 어떻게 짓는 것인가. 


소문은 들었지만 <쇼를 사랑한 남자>(원제 Behind the Candelabra) 에서 마이클 더글러스의 연기는 무시무시했다. 그의 연기가 늙은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전형을 기막히게 표현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아침에 자신의 침대에서 갓 일어난 맷 데이먼을 바라보는 더글러스의 그 눈빛, 미소!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피아니스트 월터 리버라치(더글러스)는 새 비서(겸 애인)로 스콧(맷 데이먼)을 들이고자 한다. 스콧은 이 늙은 남자의 애인이 돼도 좋은지 잠시 번민하는 척 하지만, 애초에 그는 '인생의 연인'을 찾아 방황하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가 머뭇댄 이유는 "돈에 팔려간다"는 주변의 비난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리버라치의 늙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버라치의 '쇼'는 늙음이라는 결점을 가린다. 그는 엔터테이너란, 제인 폰다같이 대중에게 자신의 사회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리버라치는 예술의 성채를 쌓지 않았다. 그의 피아노는 오직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리버라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숱한 시선을 온전히 즐길줄 알았다. 피아노 연주 재능이 아니라, 이야말로 타고난 것이다. 길 가다가 누군가와 눈길만 마주쳐도 불편해져 얼른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이고, 심지어 어떤 실존주의자들은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라고까지 말했지만, 리버라치는 무대로 향한 그많은 시선을 오히려 에너지로 삼았다. 심지어 더 많은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반짝이는 무대 의상을 입고, 피아노 위에 촛대를 얹고, 무대에 등장할 때는 와이어에 매달려 날아왔다.    



다정한 할머니같은 리버라치


얼마전까지 뮤지컬 담당을 한 적이 있다. 뮤지컬을 그다지 많이 봤다거나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처지지만, 왜 같은 뮤지컬을 보고 또 보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얼핏 이해한 순간이 있었다. 뮤지컬은 한 명의 배우가 가진 매력, 내뿜는 광휘를 극대화하는 매개체였다. 브라운관 너머, 스크린 너머에 간접적으로 재현된 배우들은 가질 수 없는 매력, 오직 눈앞의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에너지. 연극보다 훨씬 대중지향적인 뮤지컬의 배우들은 멋진 의상을 입고 춤추고 노래하는데다가, 자신을 위해 맞춰진 줄거리에 몸을 싣는다. 관객들은 배우에게 시선을 보내고 박수 치고 열광하는 수많은 추종자 중 하나가 되거나, 간혹 '나도 저 자리에 서봤으면' 하는 꿈을 품는다. 


무대 위와 아래는 다르다. 스콧은 무대 아래의 리버라치를 너무 오래 만났다. 물론 리버라치는 악당이 아니다. 대중의 갈채를 오랜 시간 얻어온 수많은 스타들이 그러하듯이 이기적이고 때론 천진난만하다 싶을 정도로 제멋대로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최소한의 배려도 할 줄 안다. 리버라치와 스콧의 이별은 어느 한쪽의 악의나 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꽃이 시들듯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물론 시든 꽃을 처분하는 방법은 다양하겠다. 


리버라치의 최후, 살아남은 스콧을 그리는 방식은 좀 전형적이다. 그러나 이와 다른 방식의 결말도 쉽게 상상하긴 어렵다. 지독히 환멸스러웠다 하더라도 정말 환멸스럽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욕망은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공유하고 싶지 않나.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