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 중-노년 남성의 욕망을 그린 영화들을 잇달아 봤다. 확실한 건 이 영화속 역할을 중-노년 여성의 것으로 바꾼다면, 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
베스트셀러 <고객을 어떻게 대할까>의 저자 마이클 스톤은 강연을 위해 신시내티로 1박2일 출장을 온다. 스톤은 가족관계, 일 등 여러 측면에서 무기력을 느끼는 중이다. 스톤은 신시내티에 살고 있는 옛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지만, 옛 연인은 스톤의 한심한 모습에 화를 내며 돌아선다. 스톤은 자신의 강연을 듣기 위해 여행 온 제과회사 세일즈 담당자 리사에게 호감을 느낀다.
애니메이션의 대부분 하위 장르가 그렇듯,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역시 어린이용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아노말리사>는 작정한 ‘19금’이다. 베드신의 수위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역시 어린이는 물론 청소년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노말리사>는 무기력, 허무, 권태에 빠진 중년 남자의 하룻밤 이야기다. 이 남자가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이 남자는 그저 인기 저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로봇처럼 수행하는 데 지친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말하면 ‘중년의 위기’다.
얼핏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남자는 세상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는 상황이다. 택시 기사와의 대화마저 어색하다. 아내, 어린 아들과도 가족의 정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된 남자의 상황은 독특한 기법으로 묘사된다. 바로 주인공 스톤과 리사 외 작품 속 모든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한 사람이 연기한 것이다. 얼굴은 다르지만 목소리는 똑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남자의 마음은 우울을 넘어 공포로 치닫는다.
공동 연출로 참여한 찰리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 되기>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 <시네도키, 뉴욕>의 연출을 맡은 경력이 있다. 서구 대도시에 사는 백인 남성의 고독, 우울, 망상을 표현하는 데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아노말리사>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리사 역시 스톤을 격심한 소외에서 구원하는 수단으로 등장할 뿐, 그 자체로 온전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라 보기 어렵다.
문제는 마이클 스톤의 고뇌에 지역, 인종, 세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느냐는 점이다. 고민과 응석은 종이 한 장 차이일 텐데, 이 중상류층 백인 중년 남성의 독백은 때로 후자에 근접한다. <아노말리사>는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 방에 머무는 별 다를 것 없는 30분의 흐름조차 긴장감있게 그려내는 연출력을 선보이지만, 스톤의 실존이 걸린 고뇌는 묵직하기보다는 공허하다. 30일 개봉.
제이슨은 전형적인 ‘범생’이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이고, 금발 미녀인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 할아버지 딕은 손자 제이슨에게 플로리다 여행을 제안한다. 제이슨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할아버지를 따라나서지만, 주색을 밝히는 할아버지의 여정에 아연실색한다.
로버트 드니로는 지난해 <인턴>에서 젊은 경영인에게 기업 운영, 인간 관계의 경험을 전수했다. 그는 <오 마이 그랜파>(원제 Dirty Granpa)에선 손자에게 인생의 ‘진짜 즐거움’을 알려주려 한다. 아내의 장례식에 근엄한 모습으로 참석했던 딕은 곧 본색을 드러낸다. 72세 나이가 무색하게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하고, 손자에게 그 장면을 목격당한 뒤에도 “처음보냐?”며 당당하다. 아내가 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40년간 한 여자만 보고 살았다. 지난 15년간 섹스리스였다”며 여색을 탐하기 시작한다. 70대의 할아버지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20대 초반 젊은이처럼 술, 여자, 환각제로 달려든다. 이제 막 인생의 바른 궤도에 진입하려 애쓰는 손자에겐 그런 할아버지가 한심하게만 보인다. 영화는 노인 같은 청년, 청년 같은 노인의 세계관이 충돌할 때 빚는 긴장에서 웃음을 유발하려 든다.
노년이 되길 거부한 채 영원한 젊음을 누리겠다는 것은 많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바겠지만, <오 마이 그랜파>는 특히 노년 남성의 욕망에 집중한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방탕한 여행을 계획한 건 꽉막힌 인생을 앞둔 손자에게 모종의 깨달음을 안겨주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노인의 욕망을 추하지 않게 그려내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남들이 시키는대로가 아니라, 네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라’는 것이 이 영화의 표면적 교훈이지만, 그래도 그 교훈을 추구하는 과정은 어이없이 과격하다.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노년의 남성이 딸뻘의 젊은 여자를 탐하는 <오 마이 그랜파> <유스> 같은 최근 영화들을 ‘비아그라 영화’라고 불렀다. 브래드쇼는 “영화에선 자신이 영원히 38세라고 생각해 의기양양한 노년의 남성이 많다”며 “이는 할리우드 판타지 공장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평했다.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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