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재미있게 본 사람은 전세계에 나를 포함해 3명쯤 되는 것 같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슈퍼히어로물을 본 적이 있다면 소년·소녀, 나아가 성인도 궁금해할 ‘원초적’ 질문이다. 24일 개봉하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그 궁금증의 일부를 해소해준다. 그러나 잭 스나이더 감독 등 제작진이 더 강조한 것은 ‘누가 이기나’가 아니라 ‘왜 싸우나’이다. 고담시, 메트로폴리스라는 각자의 세계에서 악을 물리치고 선을 증진했던 배트맨과 슈퍼맨이 갈등한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는 정의가 충돌할 때 벌어지는 아이러니가 영화 속에 담겼다.
■배트맨, 어둠 속의 인간
배트맨은 인간이다. 고담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막대한 부를 가진 웨인 가문의 상속자이지만, 어두운 과거와 속내를 간직한 가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부모가 노상 강도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배트맨의 행복한 유년 시절은 끝났다.
우연히 발을 헛디뎌 떨어진 동굴 속에서 박쥐떼를 만난 뒤에는 이 음습하고 기괴한 생물을 자신의 상징물로 삼았다. 그는 가혹하게 단련한 신체, 거금을 투자해 개발한 무기나 탈것 등을 이용해 법망이 미치지 못하는 뒷골목에서 밤의 자경단 노릇을 해왔다.
슈퍼맨은 전편 <맨 오브 스틸>(2013)에서 같은 행성 출신의 조드 장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문제는 이 싸움이 인간들의 거주지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맨 오브 스틸>에선 두 외계인의 싸움을 다루느라 비쳐지지 않았지만, 메트로폴리스 시민 입장은 어땠을까. 배트맨은 전투의 와중에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초인간적 존재들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배트맨은 슈퍼히어로라기보다는 무기력한 구조요원처럼 보인다.
슈퍼맨에게는 악의가 없었겠지만, 배트맨은 슈퍼맨이 전 인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존재라고 여긴다. 이제 배트맨에게 고담시의 조무래기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도시의 안전이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다.
배트맨은 낮을 좋아하지 않는다. 검고 묵직한 배트모빌에 올라 도시의 밤거리를 질주한다. 배트맨은 언론을 타는 것도, 세상 사람들의 영웅이 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정보를 얻기 위해선 범죄 혐의자에 대한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
배트맨은 세상의 이목, 법과 제도 따위엔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만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슈퍼맨, 빛을 발하는 신
슈퍼맨은 외계인이다. 일각에선 그를 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까마득한 창공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모습은 기독교도들이 그려온 예수의 재림 순간을 연상케 한다.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힘을 가진 슈퍼맨이지만, 지구에서 슈퍼맨을 키운 양부모는 한적한 마을의 농부였다. 배트맨이 유서 깊은 가문, 거대한 부를 배경으로 가진 0.01%의 엘리트라면, 슈퍼맨은 시골 출신의 평범하고 건실한 청년이다. 그래서 슈퍼맨의 정의감도 그렇게 소박하다. 그는 세상의 범죄를 뿌리뽑거나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불이 난 빌딩에 갇혀 있는 소녀를 꺼내주고, 조난당한 배를 구해주는 데 더 많은 힘을 쓴다.
지구에 살긴 하지만, 슈퍼맨은 원래 지구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이는 슈퍼맨이 배트맨보다 인간의 일에 무심한 이유가 된다. 슈퍼맨은 배트맨처럼 밤거리를 헤매며 범죄의 흔적을 찾지도 않는다. 평소엔 언론사 데일리 플래닛의 별 볼 일 없는 기자로 출근하고, 연인 로이스 레인과 행복한 시간도 보낸다. 그러다 사건·사고가 터지면 재빨리 날아간다. 특히 연인이나 가족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와중에 더 큰 피해가 벌어져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배트맨이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찾아 제거하려 한다면, 슈퍼맨은 개인의 안타까운 사연에 집중한다.
인간들은 슈퍼맨의 존재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정치인은 “슈퍼맨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무얼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인들은 ‘초인에게 인간의 윤리적 제약을 가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토론한다. 슈퍼맨이 의회의 청문회장에 출석하는 장면은 신기하면서도 그럴싸해 대학 교양 강의 시간에 토론할 만한 주제를 남긴다. 그래서 배트맨은 슈퍼맨에게 가장 먼저 토론을 제의하는 존재라 할 만하다.
그리고 원더우먼!
'이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 이탈자' 곽재용 감독이 여배우를 예쁘게 찍는 방법 (0) | 2016.04.17 |
---|---|
계몽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4등' (0) | 2016.04.17 |
중-노년 남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아노말리사'와 '오 마이 그랜파' (0) | 2016.03.18 |
에로감독이 된 영화학도, 공자관 감독 (0) | 2016.03.18 |
테러의 영화화, '런던 해즈 폴른' (0) | 2016.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