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탈자'의 곽재용 감독 인터뷰. 여배우가 울 때 얼굴 일그러지는게 싫어서 안약 쓰길 권한다는 대목이 인상적.
곽재용 감독(57)은 의심의 여지 없는 ‘멜로의 장인’이다. 데뷔작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부터 멜로 영화였고, 대표작 <엽기적인 그녀>(2001), <클래식>(2003)으로 한국 멜로 영화의 한 전범을 제시했다.
사실 <엽기적인 그녀>의 원작 소설은 코미디에 가까웠지만, 곽재용이 손을 댄 순간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거듭났다. 13일 개봉하는 <시간 이탈자>도 비슷하다. 가면 뒤의 살인범을 좇는 스릴러가 곽재용의 손을 탄 순간 시공을 뛰어넘는 멜로드라마로 바뀌었다. 왜 곽재용은 자꾸 멜로로 돌아오는 걸까. 최근 만나 직접 물었다.
곽재용 감독 /이석우 기자
-2008년 <무림여대생> 이후 8년만의 한국영화 복귀작으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스릴러를 택했다.
“한국 스릴러 영화를 많이 봤지만 다소 드라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성이 풍부한 스릴러를 하고 싶었다. 사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도 멜로드라마가 있다. 히치콕 영화의 여배우는 항상 아름답다. 남녀의 사링도 있다.”
-최근 한국의 멜로 영화가 하나같이 흥행에 실패했다.
“멜로는 영화의 탄생부터 있어온 장르다. 그래서 너무 관습화된 부분이 있다. 두 남녀가 아프거나 죽고, 해피엔딩이거나 새드엔딩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봤고,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힘들다. 이제 멜로드라마도 진화해 다른 장르와 결합해야할 때다. 원래 멜로드라마는 ‘가까이서 보는 느낌’을 주는 장르다. 그래서 감정을 많이 움직인다.”
-27년전 데뷔할 때의 멜로 감성이 지금도 통할까.
“얼마전 <클래식>과 <시간 이탈자>를 시사회에서 이어서 봤다.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요즘 관객은 감정을 많이 소비하지 않고 판단도 빠르다. ‘이 남자가 이때 어떻게 생각할까’ ‘두 남녀는 썸을 탈까’ 하고 생각하기 보단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길 원한다. <시간 이탈자>도 남녀의 멜로를 더 찍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많이 쳐냈다.”
-종반부 두 남녀를 가운데 두고 카메라가 360도로 회전한다. 멜로 영화에서 굉장히 오랜 테크닉인데, 반대로 낡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멜로드라마는 조심스럽다. 관객이 조금만 ‘올드하다’고 느껴도 금세 떠난다. 내부에서도 ‘다시 찍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찍어야만 했다. 카메라를 고정해 찍자니 감정이 안나올 것 같았다. 종반부 장면이라 그냥 내 뜻대로 밀고 나갔다. 요즘 젊은 감독들은 한 장면을 일단 다양한 각도에서 찍어놓고 본다. 현장에서 연출하기보다는 편집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 비슷해진다. 감독의 개성이 강조되기보다는 상품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찍으면 멜로 감성을 살리기 쉽지 않다.”
곽재용 감독의 영화들. 위로부터 <비오는 날의 수채화>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시간 이탈자>
-여배우를 아름답게 찍기로 유명하다. 비결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배우라도 약점이 있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배우가 움직이면 이상하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러면 그때마다 조명, 카메라 각도를 바꾼다. 난 우는 연기 할 때도 아름다운 여배우와 같이 가고 싶다. 배우는 백이면 백 우는 장면에서 진짜 울려고 하지만,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때는 전지현에게 안약을 쓰라고 권했다. 전지현도 처음엔 거부하다가, 시사회 때 보더니 안약 쓰길 잘했다고 하더라. 배우가 감정을 살리는 건 좋다. 하지만 슬퍼서 울든 노래를 들으며 울든 눈물은 같은 눈물이다.”
<시간 이탈자>에서도 임수정이 한겨울의 숲에서 살인자에게 쫓기는 장면이 있었다. 스태프들은 임수정이 바지를 입어야 한다고 했지만, 곽재용은 치마에 맨발을 원했다. 곽재용은 “바지를 입고 뛰었다면 여자 주인공이 별로 애처로워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데뷔할 때와 요즘 한국영화 시스템은 어떤 면에서 가장 달라졌나.
“예전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감독이 끌고 나갔다. 그래서 실력있는 감독과 없는 감독의 차이가 많이 났다. 배우들도 연습이 안돼 현장에서 일일이 만들어 가야 했다. 현장 통제도 너무 힘들었다. 조명 하나 옮기는데도 스태프가 감독 말을 따르지 않았다. 나이 많은 배우가 감독을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30살에 데뷔했을 때 나이 많아 보이려고 콧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요즘은 감독 간의 차이가 거의 없고, 배우들도 연기 연습이 잘 돼 있다. 한국영화가 ‘좋은 상품 만드는 시스템’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망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감독으로는 드물게 일본(싸이보그 그녀·2009), 중국(미스 히스테리·2014)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모두 경험했다.
“중국은 제작되는 영화는 많고 배우는 적다 보니 배우의 힘이 너무 세다. <양귀비> 촬영 때는 배우(판빙빙)가 감독을 속이고 개인적으로 시나리오 작가를 데려와 대본을 자기 중심으로 고쳤다. 그외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많았다. 의상을 다 새로 만들어라, 소품용 액세서리를 진짜 금으로 만들어라, 남자 주인공 수염을 깎게 해라…. 결국 못견디고 내가 스스로 하차했다. 일본은 현장 로케이션 하기가 너무 힘들다.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행인을 막지 않고 찍어야 한다. 현장에 장비를 설치하기도 어렵다. 일본영화가 핸드헬드(들고 찍기)나 한 자리에서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일본은 프로듀서의 힘이 매우 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노하우를 후배 영화인들에게 전수해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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