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쯤 넷플릭스 '더 크라운'을 몇 편 보다가 접어두었다. 공들인 '웰메이드' 시리즈인줄은 알겠으나, 전개가 지지부진한데다 캐릭터들의 고뇌에 온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일찍 왕위에 오른 20세기 중반의 영국 여왕 이야기는 나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배우를 교체해 시즌 3이 방영될 예정이라는 소식에 보다 만 지점에서 다시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엔 좋았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시리즈의 분위기에 좀 싫증이 나기도 한 터였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세 줄짜리 시놉시스와 예고편을 보면 대단히 독창적이지만 막상 본편은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하이 컨셉'이라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넷플릭스를 뒤지며 뭘 볼까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관람패턴을 보이는 것이다. 1. 예고편에 이끌려 두어 편을 봤지만 더 볼 동력이 생기지 않아 나머지는 남겨둔다(데이브레이크, 리빙 위드 유어셀프 등). 2. 예고편을 보고 내용에 궁금증이 생기지만 봐도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영화는 아예 인터넷을 뒤져 결말을 읽고 넘어간다(일라이, 상처의 해석 등). 수많은 컨텐츠가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넷플릭스에서 유저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간략하지만 자극적인 예고편과 시놉시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위와 같은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더 크라운'은 다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기에 별다르게 내세울 컨셉이 없다. 드라마가 다루는 에피소드는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전말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게다가 드라마 속 인물들이 대부분 살아있기에 명예훼손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주인공은 강대국의 여왕이다.
그러므로 '더 크라운'은 배우들의 연극적이면서도 능숙한 연기, 우아한 촬영과 편집, 많은 돈을 쓴 흔적이 역력한 미술 등 고전적 요소들로 승부한다. 시즌 1 후반부에 들면서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대본의 질이다. 왕위에 익숙하지 않던 엘리자베스는 점차 자리에 대한 자신감을 찾는다. 그러면서 왕으로서의 의무가 남편, 여동생 등 가족과의 사적 인연과 갈등한다. 에피소드 8에서 여왕과 동생 마거릿이 군주의 역할을 두고 나누는 설전, 에피소드 9에서 처칠과 그의 초상화가가 노화와 은퇴 시기를 두고 나누는 설전, 에피소드 10에서 여왕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지만 정부와 교회가 반대하는 마거릿의 결혼을 두고 고민하는 대목은 교과서적으로 잘 쓰여진 대사들로 구성됐다. 아무리 영국의 여왕과 총리라 해도 현실에서 그렇게 문어적이고 철학적이며 함축적인 대사를 틱탁틱탁 팽팽하게 연극적인 어조로 내뱉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즐기는 것이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엘리자베스는 '노잼'이다. 사적 인연보다는 공적 의무에 충실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는 당연히 재미없다. 그래서 제작진은 그의 빛나는 여동생 마거릿을 부각한다. 재치있고 활기넘치며 왕가의 규율을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마거릿과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언니 엘리자베스가 대비돼, 극적 재미를 준다. 제작진이 이 구도를 성격 다른 두 자매의 다툼 정도로 축소시키지도 않는다. 자매의 캐릭터가 공적인 의무, 규율, 전통에 스며들고 충돌하는 광경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비록 영화에서는 그리 빛나지 못한 듯하지만, '더 크라운'의 클레어 포이는 훌륭하다. 여기 나오는 모든 배우가 훌륭하다. 시즌 3에서는 중년의 배우로 교체된다고 한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올리비아 콜먼이 여왕, 헬레나 본햄 카터가 마거릿이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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