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앤 무어(49)는 위기의 중년 여성입니다. 남편과 아이가 바깥으로 나도는 사이, 그녀는 홀로 집에 머뭅니다. 직업이 있든 없든 그녀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그녀는 섣불리 화내지 않습니다. 그녀의 차분함은 이중인격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선택은 늦지만 무겁습니다.


25일 개봉작 <클로이>에서 무어는 다시 한 번 위기의 중년 여성이 됩니다. 캐서린(무어)은 능력있는 산부인과 의사, 남편 데이비드(리엄 니슨)는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음대 교수입니다. 캐서린은 남편을 위해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데, 남편은 그날따라 늦고 맙니다.
이후 캐서린은 남편을 의심하고, 급기야 남편을 시험하기 위해 아름다운 고급 콜걸 클로이(어맨다 사이프리드)를 부릅니다. 데이비드에게 접근한 클로이가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하자 캐서린은 절망에 빠집니다.


영화는 중반 이전과 이후가 다른 감독에 의해 연출된 듯 삐걱댑니다. 1990년대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품을 잇달아 내놓았던 아톰 에고이안 감독은 ‘관계’에 대한 탐구로 시작하더니, 할리우드식 치정극으로 섣불리 들어섭니다. 주제와 형식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영화를 지탱하는 건 어맨다 사이프리드의 매혹, 리엄 니슨의 중후함, 무엇보다 무어의 절제입니다. 표정은 얼음인데 마음은 불입니다. 가슴 안쪽 뜨거운 회한과 분노를 침착한 표정 너머로 아주 조금씩만 흘려놓는 연기에 있어 무어는 달인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전반부의 ‘이중인격적 차분함’ 덕에 후반부의 감정 폭발이 있었습니다. <파 프롬 헤븐> <디 아워스>에서도 무어는 겉으로 행복하고 속으로 불행한 상류층 여성 역을 훌륭히 소화한 바 있습니다.


무어의 실제 경력도 그랬습니다. 일찍이 배우에 뜻을 두고 연기 학교와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를 거쳤지만, 그녀의 20대는 흔히 ‘소프 오페라’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채워졌습니다. 30대 중반이 돼서야 그녀는 서서히 거대한 스크린에 어울리는 위용을 갖춘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로버트 앨트먼, 폴 토머스 앤더슨, 토드 헤인스 등 미국의 신·구세대 명장들이 무어를 자신의 작품에 앞다퉈 불러들였습니다.


한 사람이 삶에 쓸 수 있는 에너지에 총량이 있다면, 무어는 젊은 시절 그 에너지를 아껴두었습니다. 물론 어떤 이는 에너지를 다 소비하지 못하고 떠나겠죠. 하지만 무어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무어는 ‘위기가 오기를 기다린 중년 여성’입니다. 분노를 쏟아낼 기회만 노리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무섭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