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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소아응급센터에서의 하룻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한밤중에 응급실에 갈 일이 몇 번은 생긴다는데, 우리는 다행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이 그날이었다. 아이가 샤워를 하던 도중 갑자기 답답하다면서 코를 감싸쥐더라는 아내의 전화가 왔다. 나는 마침 야근을 하고 있었다. 당장 크게 아픈 것은 아닌 듯해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가보자는 의견과 당장 가보자는 의견이 우리 부부와 처가 사이에 갈렸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아내와 아이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 역시 야근을 끝낸 뒤 택시를 타고 아산병원 소아응급센터로 갔다. 그 시간에도 1호터널은 꽤 막혔다. 싱숭생숭했다. 


먼저 도착한 아내와 아이는 진료와 대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응급실과 이비인후과 진료병동을 오갔다. 평소 잠드는 시간을 한참 넘긴 아이는 피로와 진료에 대한 공포로 힘들어했다. 작은 코 속으로 가느다란 내시경을 넣어 살펴볼 때 아이는 온몸에 힘을 주고 반항했다. 결국 엑스레이까지 찍었다. 다행히도 의사들은 별 이상이 없어 보인다는 소견을 냈다.


늦은 봄밤, 병원앞은 서늘하고 한산했다. 집에 들어와 간단히 씻고 나니 어느덧 1시. 잠들기 전엔 예쁜 그림을 그리려던 꿈에 부풀었던 핑크색 색연필이 난데없이 콧구멍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핑크색 똥이 되어 나온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아이야. 앞으로 부러진 색연필 조각 같은 건 콧구멍 속으로 넣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 와중에 사진 찍은 걸 보면 제 정신을 갖고 있었던 듯. 


다음날의 몇 가지 이야기. 

1. 진료 받는 아이가 심하게 몸부림을 쳐서 달래느라 이런저런 말들을 쏟았다. 오늘 아침 아이는 그 말들을 고스란히 되갚았다. 그래서 메가테릭스는 언제 사줄 거예요? 잘해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울고 불고 하는 와중에 그걸 다 듣고 기억할줄은 몰랐다.


2. 아이는 유치원에서 간밤의 무용담을 자랑할 기대에 부풀었다. 길고 무섭게 생긴 기계를 콧구멍에 넣은 이야기, 엑스레이로 찍은 자기 해골을 본 얘기...


3. 평소 내성적이고 지나친 평화주의자의 면모를 보여 오히려 조금 걱정을 안겼던 아이가 바깥에서 이런 일을 하고 다닐줄은 몰랐다. '아이가 뭘 하고 다니는줄 알 수 없다'는 건 모든 부모의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에 슬기롭게 대처해야 아이는 독립적 개체로 자라고 부모는 더 좋은 부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