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정동야행이라는 축제가 있었다. 흥미가 있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상 가보지 못했다. 뒤늦게 들으니 꽤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미 대사관저 개방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정동에 있는 회사를 다닌 지도 10년을 훌쩍 넘겼다. 이 정도면 주변의 환경을 거저 주어진 것, 혹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길 만한 시간이지만, 난 여전히 이 지역에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상황을 감사히 여긴다. 특히 요즘 같이 좋은 날이 이어지는 계절이면 기쁨이 더욱 크다. 정동은 많지 않은 급여에 덧붙여진 보너스라고 정신승리를 하기도 한다.
갑자기 생각난 김에 정동삼락을 꼽아보노라니, 우선은 모두에게 익숙한 덕수궁 돌담길.
언젠가 야근 후 돌아가는 길에 찍은 듯.
이화여고 내의 공연장으로 가는 문의 가을 풍경. 들어가면 카페도 있다.
시민의 요구와 지자체의 자각으로 서울에도 걸을 만한 길이 많이 생기고 있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전통적으로 걷기 좋은 길이다. 난 대체로 2호선 시청역을 통해 출퇴근을 하기에, 하루에 이 길을 한 번 이상은 왕복한다. 급한 나머지 빠르게 종종걸음치는 날도 많지만, 다른 이들은 따로 시간을 내 찾는 길이다. 돌담길은 사계절의 운치가 다른데, 특히 가을엔 늘어선 은행나무가 장관이다. (한번은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신혼 부부가 길 한가운데서 웨딩 사진을 찍는 것도 봤다. 평소라면 경적을 울리고 난리쳤을 차들이 잠시는 기다려 주더라. )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남들은 잘 와본 적 없을 밤의 돌담길을 걸을 수도 있다. 최근엔 영국 대사관에 의해 막힌 일부 구간이 130년만에 공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잘 돼서 덕수궁을 한 바퀴 도는 산책 코스가 빨리 마련되면 좋겠다.
다음은 인왕산. 산이라고는 하지만 정상까지 오를 여유는 없고, 서울시교육청을 지나 인왕산 자락을 둘러 수성동계곡을 거쳐 서촌쪽으로 내려와 회사로 돌아오는 코스를 자주 걷는다. 이 경로를 걷는데는 약 1시간이 걸린다. 특히 수성동계곡은 옥인아파트가 철거된 자리에 2012년 복원됐는데, 개인적으로는 "오세훈 시장의 최대 치적"이라고 말하고 다니곤 한다. 겸재 정선이 수백년 전 그렸던 그 풍경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최근엔 이런 산책로도 마련됐다.
수성동계곡을 지나 서촌쪽으로 내려오다보면 있는 박노수 화백 가옥의 정원. 박 화백이 사후 기증해 현재 종로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일제시대부터 법원으로 쓰이던 건물로, 법원이 서초동쪽으로 옮겨간 뒤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때 이른바 '블록버스터 전시'라 불리는 인상파 화가의 대관 전시를 많이 했으나, 현재의 김홍희 관장이 온 이후로 대관은 거의 하지 않고 자체 기획전을 연다. 그래서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평도 있지만, 난 지금의 프로그램이 마음에 든다. 게다가 대부분 전시가 무료라서 언제든지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다. 지금은 윤석남 전을 하고 있으며, 다음주부터는 무려 지드래곤(!)을 주제로한 현대 작가들의 협업전이 열릴 예정이다. (오랜만에 아수라장이 벌어질 것 같다)
한 어린이가 미술관 정원에 있는 청동 인물상의 뒷태를 훔쳐보고 있다. 배형경 작가의 이 인물상은 정원 곳곳에 있으며, 최근엔 정동길 한가운데의 분수대에도 설치됐다.
그외에도 정동의 좋은 점은 더 있다. 서울도서관, 종로도서관 등이 인접해 있고, 쓸만한 식당도 꽤 있다. 그러나 정동사락이니 정동오락이니 하면 운율이 맞지 않고 더 쓰기도 귀찮으므로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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