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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추자현
  2. 조금 특이한 최다니엘
  3. 김태희가 '옆집 여자'가 된다면
  4. 영화 ‘그랑프리’ 김태희  (1)
  5. 하라 세스코
  6. 영화 <엽문2> 전쯔단
  7. <사랑은 너무 복잡해> 메릴 스트리프
  8. 영화 <클로이> 줄리앤 무어
  9. 영화 <위핏> 드루 배리모어
  10. ‘엘라의 계곡’ ‘일렉트릭 미스트’ 토미 리 존스
  11. 가족을 사랑하는 ‘21세기 마초’
  12. ‘잭슨왕국’의 영원한 왕
추자현은 말을 잘 했다. 표현이 유려하다거나 말이 많다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정확하고 솔직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말을 넘어 그 속의 진심이 넘어다 보이는 경우가 있다. <참을 수 없는>에서도 추자현은 영리한 연기를 했다. 게다가 여배우로서의 중요한 능력, 즉 매력을 발산한다. 

난 원래 그가 이전 작품(사생결단, 미인도, 실종)에서 보여준 것 같은 연기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한국에서 '열연'에 대한 칭찬은 과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난 그가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서 열연했다고 믿게 됐다. 

추자현이 앞으로 좋은 작품을 선택해 오랫동안 스크린에 섰으면 한다.  





추자현은 자신의 5번째 영화 <참을 수 없는>에서 “깔깔대고 웃는 연기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영화 속 추자현은 마약중독자거나 지독한 짝사랑을 하거나 연쇄살인마와 대결해야 했다. 

<참을 수 없는>은 <싱글즈>, <뜨거운 것이 좋아>를 연출한 권칠인 감독의 신작이다. 전편과 유사하게 30대 언저리 여성의 삶, 사랑, 고민을 담는다.
이 영화에서 추자현은 하루 아침에 직장과 집을 잃고 신혼의 친구집에 얹혀살기 시작한 지흔 역을 맡았다. 겉으론 행복하지만 속으론 답답한 삶을 사는 친구 경린(한수연)이 ‘나쁜 남자’ 동주(김흥수)와 불륜에 빠진 사이, 지흔은 완벽하지만 재수없어 보이는 친구 남편 명원(정찬)과 교감을 나눈다. 


깔끔하게 정돈된 명원·경린 부부의 집에 들어온 지흔은 천덕꾸러기다. 술이 덜 깬 모습으로 주전자째로 물을 들이켠다. 소설을 쓰겠다고 자판을 두들기지만 제대로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자칫 혀를 끌끌 차게 만들 수 있는 캐릭터지만, 추자현의 능청스러운 연기 덕에 지흔은 활기를 얻었다. 관객은 이 주책없고 한심하고 무능력한 인물을 심지어 사랑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추자현으로서는 첫 주연작이다. 


“제가 못하겠으면 주인공을 줘도 안해요. 그런데 이제 추자현이 인생을 조금 알 것도 같고, 제가 지흔이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나이를 숫자로 하나 더 먹어서가 아니라, 인생에 찌릿한 무엇이 있다는 걸 알겠어요.”

영화 속에서 추자현은 3분의 1 정도 술을 마시고, 3분의 1 정도 술에 취해 있다. 나머지 시간엔 담배를 피운다. 그래도 전작들에 비해 여배우로서의 매력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예뻐 보여서 얻는 게 뭐냐”고 되물었다. 

“인기가 아니라 연기를 얻고 싶어요. 여배우로서 예쁜 모습을 보여서 얻는 행복도 좋지만 캐릭터를 분석해서 표현하고 영화에 빠지는 것이 더 행복해요.”

추자현은 이 영화에서 술취해 넋두리하는 연기를 실감나게 한다. 권 감독은 추자현이 실제 술을 마시면 눈동자가 불그스름해지는 걸 알아채고는 연기를 하면서 눈동자 색깔까지 바꿔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추자현은 그렇게까지 하진 못했지만 눈물이 나올 듯 말 듯 그렁그렁하는 모습은 표현했다며 흡족해했다.

<참을 수 없는>도 그랬지만 이전 작품에서도 추자현은 대역 없는 베드신을 선보였다. 그는 “베드신을 찍는데는 확신이 필요하다. 확신이 없는데 대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찍는 건 매우 위험하다. 확신만 있다면 베드신 연기는 다른 연기와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사생결단>으로 영화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지 추자현은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드라마 <카이스트>로 인기를 얻고, <명랑소녀 성공기>로 CF를 찍었지만, 당시의 자신을 배우로 볼 수 없다고까지 했다.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새 일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누군지조차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무언가 다른 것’을 하고 싶긴 한데, 20대 초반의 여배우에게 진지하고 과감한 역을 맡길 연출자는 없었다.

“데뷔했다고 다 연기자는 아니잖아요. 영화를 하면서부터 저는 비로소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배우가 된지는 얼마 안되죠. 전엔 감독 눈치를 보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면, 이제 같이 만들어간다고 할 수 있죠.”

그는 일을 시작하면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는 타입이라고 했다. 현장에선 대본 보면서 분석하기에 바빠 거울 들여다볼 시간도 없다고 밝혔다. 성격이 소탈한 것 같지만,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힘을 쏟아부어 평소에는 집에 있는 성격이다.

추자현은 언젠가 “영화 보는 내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답이 안 나오는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역할은 몸과 마음이 다 힘들지 않으냐’는 우문에는 “힘들다. 그런데 행복하다”는 현답을 내놨다.

영화 ‘시라노 ; 연애조작단’ 최다니엘

직접 만나본 최다니엘(24)은 좀 특이했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이지적인 의사,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숙맥 펀드매니저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싱글싱글 잘 웃다가도 양보하지 않을 기세로 주장을 내세우는가 하면, 남들은 사용하지 않을 어휘를 거침없이 대화 사이에 넣었다. 대답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통에, 준비한 질문은 거의 소용이 없었다.

안경은 어느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실제로 눈이 나쁜지 묻자 알 없는 안경테에 손을 넣어 빙글빙글 돌렸다. “연기할 때는 안경이 오히려 방해가 돼요. 하지만 대중의 입맛이 그걸(안경) 좋아한다면…”하며 웃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얼굴을 알린 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여성팬의 시선을 일시에 끌어모았다. 유명세를 느끼는지 물었다. “대중이 절 알아주면서 좋은 건 단 하나, 절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지고 쓰임새가 확장됐다는 것뿐이에요. 그외의 것은 다 나빠요. 날 물들게 한다거나, 사람이 아니게 한다거나….”‘사람이 아니게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사람과 사람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데, 색안경을 낀 뒤 날 발길질하거나 내게 고개를 숙이거나 한다. (유명세로 얻은) 편의는 좋지만, 위험요소가 많다”고 알듯 말듯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는 남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내 잣대가 있다. 그것 때문에 욕 먹을 때도 있고 오해받을 때도 있다. 그래도 설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배우와 배역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겠지만, 그의 여성팬들은 ‘실제 최다니엘’이 여전히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도 나 자신이 어떤지 모르겠다. 배역 맡으면 그 배역으로 살아가야 하고…. 실제 내 모습이 어느 역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달라지니까”라고 말하며 정체를 누설하지 않았다.

갑자기 얼굴을 알린 듯하지만, 오랜 무명생활을 거쳤다. 집이 가난하고 공부에도 흥미가 없어 무얼 할까 고민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스타로 만들어드립니다’라는 전단지를 들고 연기학원을 찾아갔다. 물론 수강료를 받고 연기 연습을 시켜주는 곳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학원에 ‘합격’했고 곧 스타가 될 줄 알았다고 했다. 갈수록 꿈의 크기가 줄어들고 현실의 벽은 높아졌다. “몇 년이 지났는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다가 편의점 알바하고 군대갔다가 제대하고 술에 절어서 대통령 욕하다가 길에서 객사할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CF, 드라마, 영화의 수많은 오디션에 ‘100 단위’로 응했다. 물론 대부분 떨어졌다. <그들이 사는 세상>의 표민수 PD, 노희경 작가가 은인이었다. 검증 안된 신인 최다니엘에게 주요 배역을 맡겼으니.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상업영화의 첫 주연급 배역이다. 구혜선과 함께 출연하는 드라마 <더 뮤지컬>에선 천재 작곡가로 등장한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를 볼 날이 많아질 것 같다.







사랑을 맺어주는 연애조작단의 ‘달콤한 로맨스’. <시라노; 연애조작단> 리뷰

여름 내내 한국 극장가에 난무했던 복수, 피, 칼질, 비명에 지친 관객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오랜만에 나온 수작 로맨틱 코미디다. 연애에 서투른 사람들을 배후조종해 사랑을 이뤄주는 ‘시라노 에이전시’란 회사가 있다. 가난한 연극 배우 4명이 모여 생계를 이어보려다가 주업으로 삼은 일이다.

잘나가는 펀드매니저 상용(최다니엘)이 이 회사의 문을 두드린다. 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희중(이민정)과의 사랑을 이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하지만 회사 대표 병훈(엄태웅)은 상용의 일을 맡기를 주저한다. 병훈은 민영(박신혜)을 비롯한 직원들의 성화에 못이겨 상용을 돕지만, 어쩐지 일이 틀어지기를 바라는 태도다.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 등으로 남다른 멜로와 코미디 감각을 보였던 김현석 감독이 16년 전 쓴 시나리오 초고에 바탕했다. 외모에 자신이 없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다른 이의 연애 편지를 대필하는 남자를 그린 프랑스 희곡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멜로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는 통상 여성 관객을 위한 장르로 여겨지지만,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남녀가 각기 다른 이유로 좋아할 요소를 가진 영화다. 이야기를 짜는 능력, 화면 구성의 재치, 배역의 배분 등 여러 면에서 좋은 균형감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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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인과 소속사, 심지어 대중들도 그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네. 말도 안된다는 원성이 여기까지 들립니다. 김태희는 성형외과 의사들의 밥줄을 끊을 외모를 지녔습니다. 함부로 그 얼굴에 손을 댔다가는 조물주와 인간 모두에게 비난을 받을겁니다. 게다가 그는 한국 최고 대학의 졸업장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역시 평범합니다. 전 김태희의 외모나 학벌, 이미지가 아닌 그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태희에게는 통상 배우가 가져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가지 품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열정, 야심, 질투, 이기심 등입니다. 배우란 어느 모임에서라도 시선을 독차지하지 않으면 못견뎌하는 족속이지만, 김태희는 구석에 조용히 있다가 자리를 떠도 아무 불만이 없는 사람인 듯합니다.

 2007년말, 출연작 <싸움> 개봉에 즈음해 김태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위에 적은 김태희에 대한 느낌은 그때 확실하게 굳어졌습니다. 타고난 외모 덕에 어쩌다가 배우의 길을 걷고 있지만, 김태희의 말투와 태도는 매우 평범했습니다. 그에게서는 특별한 ‘배우’의 아우라 대신, 여느 20대 여성의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때로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나’ 할 정도로 격의없는 솔직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김태희는 세번째 영화 주연작에서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개봉한 <그랑프리>의 흥행 수치는 밝히기 민망할 정도입니다. 추석 기간만 놓고 봤을 때, 하늘을 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캣츠 앤 독스2>보다 적은 관객이 들었다고만 해두죠.

 김태희가 평범하다고 해서 그에게 배우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김태희에게는 ‘연기력 논란’이 꼬리표와 같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그는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졌고, 발성이 비교적 정확합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하는 배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김태희는 표정이 단조롭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연기 지도를 제대로 못한 감독도 함께 나눠야할 책임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꼭둑각시같던 배우가 다른 영화에서 대단한 연기력을 보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김태희보다 훨씬 연기를 못하는 여배우도 많습니다. 다만 그들은 김태희 정도의 스타가 아닐 뿐이죠.
 
 우리는 김태희와 비슷한 인상이면서 조금 높은 연배의 배우를 한 명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김희선입니다. 김희선의 외모는 한때 미녀의 ‘표준’이었지만, 그 역시 언제나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곤 했습니다. 전 김희선이 안약이 아닌 눈물을 흘린 것 같다는 인상을 단 한 번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김희선이 연기한 배역 중 가장 평범한 <와니와 준하> 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김희선은 공주도, 귀신도 아닌 우리 주변의 20대 중반 여성이었습니다.
 
 김태희는 <와니와 준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특별한 외모와 화려한 ‘스펙’을 이용해 천인, 비밀요원, 하버드 대학생을 연기할게 아니라 ‘옆집 여자’가 돼 평범한 삶을 살고 사랑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도 불치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가 나거나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우연히 만났다가 작은 오해로 이별하고 먼훗날 한번쯤 생각나는 인연의 사랑을 연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김태희가 어떻게 ‘옆집 여자’냐고요. 그런 말씀 마세요. 원빈을 ‘옆집 아저씨’라고 우기는 것이 한국의 영화인들 아닙니까. 스크린 속 ‘보통 사람’의 기준은 현실보다 2.5배쯤 높습니다. 정말 평범하게 생긴 저와 당신이 진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건 설마 아니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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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인과 소속사, 심지어 대중들도 그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네. 말도 안된다는 원성이 여기까지 들립니다. 김태희는 성형외과 의사들의 밥줄을 끊을 외모를 지녔습니다. 함부로 그 얼굴에 손을 댔다가는 조물주와 인간 모두에게 비난을 받을 겁니다. 게다가 그는 한국 최고 대학의 졸업장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역시 평범합니다. 전 김태희의 외모나 학벌, 이미지가 아닌 그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태희에게는 통상 배우가 가져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가지 품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열정, 야심, 질투, 이기심 등입니다.
배우란 어느 모임에서라도 시선을 독차지하지 않으면 못 견뎌하는 족속이지만, 김태희는 구석에 조용히 있다가 자리를 떠도 아무 불만이 없는 사람인 듯합니다.



2007년 말, 출연작 <싸움> 개봉에 즈음해 김태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위에 적은 김태희에 대한 느낌은 그때 확실하게 굳어졌습니다.
타고난 외모 덕에 어쩌다가 배우의 길을 걷고 있지만, 김태희의 말투와 태도는 매우 평범했습니다. 그에게서는 특별한 ‘배우’의 아우라 대신, 여느 20대 여성의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때로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나’ 할 정도로 격의 없는 솔직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김태희는 세 번째 영화 주연작에서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개봉한 <그랑프리>의 흥행 수치는 밝히기 민망할 정도입니다. 추석 기간만 놓고 봤을 때, 하늘을 나는 개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캣츠 앤 독스 2>보다 적은 관객이 들었다고만 해두죠.



김태희가 평범하다고 해서 그에게 배우 자격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김태희에게는 ‘연기력 논란’이 꼬리표와 같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그는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졌고, 발성이 비교적 정확합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하는 배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김태희는 표정이 단조롭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연기 지도를 제대로 못한 감독도 함께 나눠야 할 책임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꼭두각시 같던 배우가 다른 영화에서 대단한 연기력을 보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김태희보다 훨씬 연기를 못하는 여배우도 많습니다. 다만 그들은 김태희 정도의 스타가 아닐 뿐이죠.



우리는 김태희와 비슷한 인상이면서 조금 높은 연배의 배우를 한 명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김희선입니다. 김희선의 외모는 한때 미녀의 ‘표준’이었지만, 그 역시 언제나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곤 했습니다.
전 김희선이 안약이 아닌 눈물을 흘린 것 같다는 인상을 단 한번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김희선이 연기한 배역 중 가장 평범한 <와니와 준하>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김희선은 공주도, 귀신도 아닌 우리 주변의 20대 중반 여성이었습니다.



김태희는 <와니와 준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특별한 외모와 화려한 ‘스펙’을 이용해 천인, 비밀요원, 하버드 대학생을 연기할 게 아니라 ‘옆집 여자’가 돼 평범한 삶을 살고 사랑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도 불치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가 나거나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우연히 만났다가 작은 오해로 이별하고 먼 훗날 한번쯤 생각나는 인연의 사랑을 연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김태희가 어떻게 ‘옆집 여자’냐고요. 그런 말씀 마세요. 원빈을 ‘옆집 아저씨’라고 우기는 것이 한국의 영화인들 아닙니까. 스크린 속 ‘보통 사람’의 기준은 현실보다 2.5배쯤 높습니다. 정말 평범하게 생긴 저와 당신이 진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건 설마 아니겠죠.

한 번 태어나 살기도 고통스러운 세상, 일본의 여배우 하라 세스코는 세 번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녀를 이른 은퇴로 내몬 것은 탄생과 부활에 따른 고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라는 일본과 독일 파시스트들의 친선 대사로 처음 태어납니다. 독일의 영화 감독 아놀드 팽크는 당시 신인급이던 하라 세스코를 주연으로 발탁해 일본·독일 합작 영화 <사무라이의 딸>(1937)에 출연시킵니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격찬한 이 영화를 통해 하라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전쟁 시기의 그녀는 주로 군인, 경관의 딸을 연기했습니다.


패기만만했던 젊은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는 1945년 봄 하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말괄량이 공주님>의 연출을 계획했습니다. 잔다르크 이야기의 일본판인 이 영화가 전쟁 막바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는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필름 공급이 어려워져 영화 제작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 사이 일본은 패전했습니다.


종전 직후 구로사와는 새 시대에 걸맞은 영화를 기획하고, 이제 하라의 두번째 삶이 시작됩니다.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고 있는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특별전’에서는 <우리 청춘 후회 없다>(1946)가 국내 최초로 공개됐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라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여신’으로 부활했음을 선언합니다.
극중 하라는 반전 좌익 운동을 하다 체포돼 옥사한 남편의 뜻을 이어 농촌 운동에 헌신하는 유키에 역을 연기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 여성 유키에는 ‘비국민’(非國民)이라는 시골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디며 고된 농사일을 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남편의 뜻이 알려지면서 유키에는 농촌 운동의 기수가 됩니다.
일본의 영화학자 요모타 이누히코는 <일본영화의 이해>에서 “누구도 그녀의 전향을 공공연히 비난할 수는 없”었다“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녀와 같은 전향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라의 세번째 삶은 거장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시작하고 끝났습니다. 당시의 일본여성답지 않게 큰 체구로 전후 민주주의 계몽선각자 역을 하던 그녀가 전통적인 미덕을 간직한 일본 여성으로 되돌아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라는 오즈와 6편의 영화를 함께 했는데, 그 중에는 현대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도쿄 이야기>(1957)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라는 이 영화에서 시골에서 올라온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착한 며느리 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하라의 배우 경력은 이로써 마지막이었습니다. 오즈가 60세의 나이로 사망한 1963년, 하라는 오즈의 장례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한 번도 대중,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하라의 은퇴는 배우란 직업 자체의 속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배우란 원래 다른 이의 삶을 짧은 시간에 대신 사는 사람들이긴 합니다만, 격동의 일본 현대사를 반영하는 영화 속 하라의 삶은 한 명의 여배우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파란만장했습니다. 그녀는 이 거친 삶 속에 정신적으로 조로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전쟁 전후 일본인들의 삶과 마음을 한 몸으로 겪어낸 하라는 이제 90세의 할머니가 됐습니다. 일본 지방의 한 절에 은둔해있다는 그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전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고수들은 하나 둘씩 강호를 등졌습니다. 누군가는 태평양을 건너 할리우드로 갔고, 누군가는 본토 베이징으로 갔습니다. 이제 전쯔단(甄子丹)은 홀로 남은 강호의 고수입니다.
<엽문2>는 리샤오룽의 스승으로 알려진 영춘권의 대가 엽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전편에서 일본군에 맞서다가 부상을 당한 엽문이 종전 이후 홍콩으로 건너와 겪는 일을 그렸습니다. 엽문은 홍콩의 여러 사범들의 텃세에 맞서 도장을 지켜내는 동시, 중국인을 무시하는 영국인 권투 챔피언과의 대결도 준비합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무술인 가족 출신인 전쯔단은 1980년대부터 배우와 무술지도를 겸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신용문객잔> <철마류> 등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할리우드 영화 <블레이드2>의 무술감독으로도 활약했습니다.


정작 그가 관객의 눈에 띄기 시작한 건 2000년대 들어서였습니다. <영웅> <용호문> <도화선> <살파랑> 등이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한때 아시아 최고의 상업영화를 만들던 홍콩 영화계는 쇠퇴기에 접어든 지 한참이었습니다. 유력 영화인들은 홍콩의 중국 반환을 즈음해 구룡반도를 벗어났습니다.
그래도 전쯔단은 여전히 홍콩에 남아 꾸준히 무협영화를 만들었고, 세계의 관객은 전쯔단의 외로운 분투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알려졌기에 전쯔단을 젊은 세대의 액션 스타로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그는 리롄제(李連杰)와 동갑인 46세입니다.


<엽문2>는 두 가지 지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우선 전쯔단은 홍콩 무협영화에 세계적 인기를 안긴 리샤오룽의 스승을 연기함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찾습니다. 종합격투기 기술까지 끌어들인 공격적인 액션을 만들곤 했던 전쯔단은 공격보다 수비, 싸움보다 화해를 강조한 엽문을 연기하며 무예의 정신을 되새깁니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점은 청룽(成龍), 리롄제 등과 함께 80년대 홍콩 액션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홍진바오(洪金寶)의 출연입니다. 60대를 바라보는 이 노장은 예의 육중한 몸을 이끌고 상대적으로 젊고 빠른 전쯔단과 기꺼이 대련합니다. 좁은 원탁 위에서 두 고수가 펼치는 대결은 <엽문2>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적이 없는 고수는 외롭습니다. 실력을 뽐낼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수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엽문2> 속 두 고수는 주먹과 발을 맞부딪치면서 화려했지만 돌아올 수 없는 옛 시절을 추억합니다. 말이 필요없는 옛날 남자들의 대결, 멋있습니다.

메릴 스트리프는 특별히 잘하는 역이 없는 배우입니다. 모든 역을 다 잘하기 때문이죠. 메릴 스트리프가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질은 일정 수준 이상 보장됩니다.


이번주에는 그가 출연한 <사랑은 너무 복잡해>가 개봉합니다. 스트리프는 재결합을 원하는 전 남편(알렉 볼드윈), 다정다감한 건축가 애덤(스티브 마틴) 사이에서 갈등하는 요리사 제인 역을 맡았습니다.
연적으로 등장한 볼드윈과 마틴은 며칠전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동으로 사회를 맡기도 했습니다. 스트리프는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작이었던 <줄리&줄리아>에서도 요리사 역을 맡아 객석에 앉아있었고요.




(경향신문 자료사진)



에밀리 블런트, 앤 헤서웨이, 클레어 데인스, 페넬로페 크루즈. 스트리프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젊은 여배우의 명단입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스트리프는 연기뿐 아니라 사생활에 있어서도 딱히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조각가인 남편과 30년 이상 해로하면서 아이 넷을 키웠습니다. 결혼, 이혼, 또다른 결혼이 순식간에 이뤄지는 할리우드에선 보기 드문 삶입니다.


연기와 삶에 있어 모두 모범을 보이고 있는 스트리프이건만, 상복은 없는 편입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스트리프는 다시 한번 미끄러졌습니다. 역대 최다인 16번 노미네이트돼 2번 수상. 마지막 수상이 <소피의 선택>(1983)의 여우주연상이었으니, 27년간 아카데미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스트리프의 성공적인 경력을 생각한다면, 타율이 지나치게 낮아 보입니다.


스트리프 대신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이는 올해 처음으로 아카데미 후보로 지명된 샌드라 불럭이었습니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 최대의 축제답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길 좋아합니다. 주연상도 고르게 우수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보다는, 생애 다시 없을 열연을 펼친 배우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럭 역시 아카데미 전날 열린 라즈베리 상에서 최악의 여우상을 받을 정도로 들쭉날쭉한 연기를 보였습니다. 최근의 수상자 중에서는 리즈 위더스푼, 힐러리 스웽크, 할리 베리 등이 유사한 모습입니다. 스트리프는 지난해가 아니면 올해, 올해가 아니면 내년이라도 상을 받을 수 있지만, 다른 배우는 이번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래서 상복이 없는 스트리프가 불행할까요. 올해에도 여느 때처럼 스트리프는 무대 위의 수상자에게 환한 웃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속이야 모르지만, 표정엔 섭섭한 기운이 없었습니다. 따져보면 환갑이 넘도록 할리우드 영화의 주연 자리를 꿰차고 있는 여배우가 어디 있을까요. 상을 받는 건 영예롭지만, 대중과 제작자에게 끝없는 호출을 받는다는 건 더 영예롭습니다. 배우에게 상은 이벤트지만, 연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줄리앤 무어(49)는 위기의 중년 여성입니다. 남편과 아이가 바깥으로 나도는 사이, 그녀는 홀로 집에 머뭅니다. 직업이 있든 없든 그녀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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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섣불리 화내지 않습니다. 그녀의 차분함은 이중인격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선택은 늦지만 무겁습니다.


25일 개봉작 <클로이>에서 무어는 다시 한 번 위기의 중년 여성이 됩니다. 캐서린(무어)은 능력있는 산부인과 의사, 남편 데이비드(리엄 니슨)는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음대 교수입니다. 캐서린은 남편을 위해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데, 남편은 그날따라 늦고 맙니다.
이후 캐서린은 남편을 의심하고, 급기야 남편을 시험하기 위해 아름다운 고급 콜걸 클로이(어맨다 사이프리드)를 부릅니다. 데이비드에게 접근한 클로이가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하자 캐서린은 절망에 빠집니다.


영화는 중반 이전과 이후가 다른 감독에 의해 연출된 듯 삐걱댑니다. 1990년대 평단의 주목을 받은 작품을 잇달아 내놓았던 아톰 에고이안 감독은 ‘관계’에 대한 탐구로 시작하더니, 할리우드식 치정극으로 섣불리 들어섭니다. 주제와 형식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영화를 지탱하는 건 어맨다 사이프리드의 매혹, 리엄 니슨의 중후함, 무엇보다 무어의 절제입니다. 표정은 얼음인데 마음은 불입니다. 가슴 안쪽 뜨거운 회한과 분노를 침착한 표정 너머로 아주 조금씩만 흘려놓는 연기에 있어 무어는 달인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전반부의 ‘이중인격적 차분함’ 덕에 후반부의 감정 폭발이 있었습니다. <파 프롬 헤븐> <디 아워스>에서도 무어는 겉으로 행복하고 속으로 불행한 상류층 여성 역을 훌륭히 소화한 바 있습니다.


무어의 실제 경력도 그랬습니다. 일찍이 배우에 뜻을 두고 연기 학교와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를 거쳤지만, 그녀의 20대는 흔히 ‘소프 오페라’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채워졌습니다. 30대 중반이 돼서야 그녀는 서서히 거대한 스크린에 어울리는 위용을 갖춘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로버트 앨트먼, 폴 토머스 앤더슨, 토드 헤인스 등 미국의 신·구세대 명장들이 무어를 자신의 작품에 앞다퉈 불러들였습니다.


한 사람이 삶에 쓸 수 있는 에너지에 총량이 있다면, 무어는 젊은 시절 그 에너지를 아껴두었습니다. 물론 어떤 이는 에너지를 다 소비하지 못하고 떠나겠죠. 하지만 무어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무어는 ‘위기가 오기를 기다린 중년 여성’입니다. 분노를 쏟아낼 기회만 노리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드루 배리모어는 ‘돌아온 탕아입니다. 이 탕아는 오늘의 행복을 만끽할 줄 알되, 어제의 고통도 잊지 않습니다. 한때 힘든 시절을 보냈던 ‘언니’는 이제 방황하는 ‘여동생’에게 연민과 연대의 시선을 보냅니다.


18일 개봉하는 <위핏>(원제 Whip it)은 배리모어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할리우드의 정상급 여배우가 직접 메가폰을 잡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만, 10년 전부터 영화 제작에 뛰어들어 크고 작은 성공을 거뒀던 그가 연출에 욕심을 내는 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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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은 10대 후반의 소녀 블리스. 블리스는 극성스러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지역의 청소년 미인대회에 참여하곤 하지만, 마음은 몸에 맞지 않는 드레스를 입은 듯 불편합니다.
어느날 블리스의 눈 앞에 신천지가 펼쳐집니다. 롤러 스케이트를 탄 여자들이 치고받고 달리는 ‘롤러 더비’. 블리스는 나이와 신분을 숨긴 채 ‘헐 스카우트’팀에 지원합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조신한 숙녀의 길과 자신이 원하는 자유인의 길 사이에서 블리스는 고민합니다.


<위핏>은 사랑스럽고 활기찬 성장영화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 경계선을 그으면 만들기와 보기가 모두 쉬우련만, 배리모어의 감성은 단순한 이분법을 뛰어넘습니다. 딸의 길을 가로막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비열한 반칙을 구사하는 상대팀의 에이스에게조차 이해의 시선을 보냅니다. 롤러 더비가 펼쳐지는 미국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는 천사나 악마가 없습니다. 초라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모두 각자의 꿈과 행복을 위해 한걸음씩 내디디려 노력할 뿐입니다.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배리모어는 10대 초반에 이미 웬만한 사람이 평생 가도 못겪을 인생 역정을 걸었습니다. 유명 배우 가문에서 태어난 배리모어를 위해 스티븐 스필버그는 기꺼이 대부가 돼줬습니다.
그 유명한 <ET>의 아역을 맡은 배리모어는 6살에 이미 세계적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가파른 성공은 급격한 추락으로 이어졌습니다. 9살에 담배, 11살에 술을 시작했고, 12살엔 마리화나에 손을 댔습니다. 그리고 14살엔 스스로 손목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배리모어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때론 놀라운 연기파로, 때론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의 히로인으로, 무엇보다 그 많은 장난기와 욕망과 열정을 숨기지 않는 개인으로. 누구나 상처받고 약하고 방황하는 이들을 쓰다듬을 수 있지만, 그러한 시절을 직접 겪은 이의 손길은 더욱 따스할 겁니다.


춥습니다. 그러나 이 겨울을 겪은 뒤에야 봄볕의 따스함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배리모어는 <위핏>을 통해 방황하는 소녀, 소년에게 말을 건넵니다. “괜찮아, 모든 건 다 지나갈거야.”

토미 리 존스(63)는 늙고 고지식한 경찰입니다. 논두렁처럼 깊게 팬 주름살은 이 늙은 경찰이 세상에 대해 짊어진 근심에 비례합니다.


공교롭게도 토미 리 존스가 주연한 영화 2편이 한 주 간격으로 잇달아 개봉했습니다. 지난주 개봉한 <엘라의 계곡>은 지금까지 미국에서 나온 수많은 이라크전 영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감성과 세계를 파악하는 이성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진지함 때문에 2007년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선 가까스로 지각 개봉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에서 존스는 조국의 이상에 대한 신념, 군인으로서의 명예에 가득찬 전직 군 수사관 행크 역을 맡았습니다. 행크는 아들 마이크가 군인이 되길 바랐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마이크는 입대해 이라크전에 파병됐다가 귀국합니다. 그러나 마이크는 외출을 나갔다가 귀대하지 않고, 행크는 탈영 처리될 위기에 놓인 아들을 직접 찾아나섭니다.


이번주 개봉한 <일렉트릭 미스트>(사진)에서 토미 리 존스는 늙은 형사 데이브입니다.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19세 여성이 살해당합니다. 수사를 맡은 데이브는 사건이 인근의 영화 촬영장에서 발견된 유골 더미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브의 동분서주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는 두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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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에서 토미 리 존스는 모두 경찰 혹은 관련계통에 종사합니다. 돌아보면 토미 리 존스의 품에는 언제나 경찰 배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도망자>(1993)에선 누명쓴 용의자 해리슨 포드를 집요하게 뒤쫓았고, <맨 인 블랙>(1997)에선 지구에 망명한 외계인을 관리·감독하는 특수기관 요원이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에선 악마 같은 살인자와 쫓기는 도망자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늙은 경찰이었고요.


그러나 토미 리 존스는 미국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능글맞고 유머 넘치는 형사가 아니었습니다. 환히 웃는 모습을 거의 보여준 적이 없고, 썩어들어가는 세상에 대해 한탄했습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원칙에 집착해, 때로 주위와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엘라의 계곡>이나 <일렉트릭 미스트>에서 토미 리 존스는 수사를 방해하는 주위 환경에 굴하지 않고 끝내 사건의 실체에 근접합니다.


비슷한 이미지의 배우로 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때로 황야의 무법자였고, 때론 난폭한 경찰이었습니다. 범죄자와 법집행자의 이미지를 절반씩 거쳐온 이스트우드는 이제 세상의 밝음과 어두움을 모두 포용하는 현인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트우드의 원칙이 세상을 아우르는 지혜인 반면, 존스의 원칙은 직업인으로서의 윤리에 가깝습니다. 존스의 행동이 이스트우드에 비해 갑갑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이러한 ‘융통성 없는 공무원’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아무래도 이스트우드가 존스보단 한 수 위라고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요.


그러나 이 세상엔 존스같이 꼿꼿한 직업인이 필요합니다. 조직 내의 정치 논리나 조직 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직 오랜 세월 일터에서 겪어낸 윤리와 원칙에만 충실한 그런 노인. 코엔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비관했지만, 저는 그런 늙은 원칙주의자야말로 사회의 중요한 축이라고 믿습니다.

제라드 버틀러(40)는 지금 가장 뜨거운 ‘마초’입니다. 멜 깁슨과 러셀 크로가 늙거나 뚱뚱해진 사이, 버틀러는 비릿한 수컷 냄새를 물씬 풍기며 스크린 한가운데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버틀러가 선배 마초들과 가장 다른 점은, 그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음달 10일 개봉예정인 <모범 시민>은 ‘가족사랑형 마초’로서의 버틀러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가족과 함께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던 클라이드(버틀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2명의 무장강도에게 아내와 딸을 잃습니다. 범인은 곧 붙잡히지만, 둘 모두에게 유죄 판결을 받게 할 자신이 없던 검사 닉(제이미 폭스)은 유리한 증언을 받는 대가로 한 명의 죄를 경감해줍니다. 분노한 클라이드는 모습을 감춥니다. 10년 뒤 다시 나타난 클라이드는 범인은 물론 부조리한 사법 체계 전반에 대해 복수를 계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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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사람의 숫자만 보면, 클라이드는 무장 강도보다 더한 연쇄 살인마입니다.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검사든 경찰이든 판사든 동료 수형자든 가리지 않고 죽입니다. 그 재주가 기발해 감옥에 갇힌 뒤에도 살인을 계획하고 진행합니다. 버틀러는 <300>에서 가죽 팬티에 망토만 걸친 고대 스파르타의 왕을 연기함으로써 잘 다져진 상반신을 2시간가량 자랑한 적이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범 시민>에서도 한 차례 ‘팬 서비스’를 합니다.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와중에 스스로 옷을 모두 벗은 뒤 잡혀갑니다. 물론 이 모든 광기의 근원에는 죽은 아내와 딸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있습니다.


버틀러는 전작에서도 가족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출세작 <300>에서는 왕비와의 불타는 사랑, 아들에 대한 엄한 교육열을 보여줬습니다. <P.S. 아이 러브 유>에선 불치병으로 먼저 떠날 것을 안 뒤, 남겨진 아내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생전에 놀라운 계획을 짜둔 남편이었습니다.


멜 깁슨과 러셀 크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자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언제 떠날지 몰라 불안을 안겨주는 ‘나쁜 남자’였습니다. 대표작인 <리셀 웨폰> 시리즈의 깁슨을 떠올려 봅시다. 살짝 ‘맛이 간’ 듯한 그의 삶은 안정된 가정을 이룬 동료 형사 대니 글로버와 확연히 대조됐습니다. <글래디에이터>의 크로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그보다 더 사랑한 것은 로마라는 나라와 황제였습니다. 난봉꾼이었던 <아메리칸 갱스터>, 정신분열에 빠진 천재 수학자였던 <뷰티풀 마인드>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마초 배우이자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남들이 보지 않으면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초에게 가족이란 꽤 신경쓰이는 존재인가 봅니다.


하지만 가족 따윈 연연하지 않은 채 ‘큰 뜻’만을 바라보는 옛날 사나이의 시대는 갔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이르지 않았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도 행복하게 못해주는 이가, 어찌 온 나라 나아가 전 세계 사람을 행복하게 한단 말입니까. ‘큰 뜻’은 하늘 저편이 아니라, 추운 겨울밤 따뜻한 안방 한구석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 1000년 후에도 이름을 남기는 위인이 되기보단, 오늘 저녁 가족들에게 환영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팝의 왕’(King of Pop)이었습니다. 왕권을 넘어 신성을 획득한 그는 현대의 대중문화계에 신정일치의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이제 왕은 서거했고, 왕국은 무너졌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와 같이 전능한 왕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잭슨은 네번째 월드 투어 ‘디스 이즈 잇’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올해 6월25일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디스 이즈 잇’ 투어는 7월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전세계를 돌며 50일간 예정돼 있었습니다. 28일 전세계에서 동시 개봉해 2주간 한정 상영되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은 올 3~6월 진행된 리허설 장면과 콘서트용 영상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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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무대의 잭슨은 ‘제대로 공연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닐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을 일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몸놀림은 전성기에 다를 바 없고, 특유의 가창력도 여전합니다. 잭슨은 연주와 안무, 무대 장치와 배경 영상 등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통제력을 발휘합니다. 잭슨의 요구 사항은 구체적이고 표현력이 뛰어납니다. 키보드 주자에겐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듯이”, “달빛에 몸이 젖듯이”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고, 때론 입으로 고음의 기타 소리를 흉내내며 “실력을 발휘하라”고 독려합니다. 고압적인 지시가 아닌, 애정어린 요청입니다. 동료이기 이전 ‘잭슨교’의 신도인 스태프들은 양처럼 따르고 여우처럼 일합니다. 누가 이 날렵하고 기민한 사내를 50대라고 믿겠습니까.

이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잭슨의 노래는 ‘스무드 크리미널(Smooth Criminal)’, ‘스릴러(Theiller)’, ‘빌리 진(Billie Jean)’ 등 솔로 시절의 히트곡과 잭슨 파이브 시절의 인기곡을 망라합니다. 잭슨의 대단한 팬은 아니었던 저로서도 음악을 들으면서 발과 손을 가만히 두기 힘들었으니, 1980~90년대를 거쳐온 많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잭슨교 신도였던 셈이지요.

잭슨은 노래와 춤만을 위해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의 채찍을 맞으며 공연했습니다. 곧바로 슈퍼스타가 됐으나, 한 번도 또래의 보통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전하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는 여섯 살 어린이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에 대해선 순수하다는 호응과 단순하다는 비판이 공존할 수 있을 겁니다.

잭슨이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디스 이즈 잇> 대신 공연 실황 DVD를 볼 수 있었겠죠. 잭슨은 의상을 채 갖추지 않았고, 본 공연에 대비해 목을 보호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래하지 않습니다. 객석에는 수만명의 팬 대신 일부의 스태프만이 있습니다. 이런 <디스 이즈 잇>은 마치 못다 지은 왕궁의 청사진 혹은 몰락한 왕조의 성터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웅장하고 화려했을, 그러나 끝내 이뤄지지 못한 공연을 머리 속으로 상상할 뿐입니다. 언젠가 위대한 잭슨왕국이 폐허로 버려져도 그 자체로 아름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