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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고 쓸쓸한 삶, <에브리맨>

정동길을 걸으면 매번 지나는 부대찌개 식당이 있다. (회사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집을 안다) 얼마전 늦은밤 퇴근을 하다가 이 식당을 지나치고 있었다.  영업이 끝났는지 매장엔 불이 꺼져있었고 오직 높게 매달린 텔레비전 불빛만 반짝였다. 낮에는 손님들이 앉았을 자리에 식당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종종 불을 모두 끄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다) 브라운관에서는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아마 김연아?)가 우아한 동작으로 은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식당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도 재빠르지 않을 법한 할머니는 그 날렵하고 아름다운 젊은이의 동작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매 페이지마다 독자에게 "메멘토 모리"라고 속삭이는 책이다. 번역본으로 200쪽에 미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출간 당시 73세(지금은 81세)였던 로스가 가진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로스 역시 이 책의 주인공처럼 오랫동안 육체 어딘가의 통증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고. 


근래 읽은 로스의 다른 소설들처럼 <에브리맨>의 주인공도 유대인. 그러나 <휴먼 스테인>, <울분>이 주요 등장인물의 죽음을 작품 시작 3분의 1 지점에서 알린 것과 달리, <에브리맨>은 아예 주인공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아버지를 기억하며 서럽게 울지만, 첫번째 부인의 두 아들은 다소 퉁명스럽다. 마지막이자 세번째 부인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소설은 주인공의 유년기와 세 번에 걸친 결혼생활 등을 되짚으며, '에브리맨'(각주에선 '보통 사람'이라고 설명)의 삶과 죽음을 전한다. 


'에브리맨'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업으로 삼았던 자그마한 보석가게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인근 서민을 상대로 시계, 보석 등을 팔아 주인공과 그의 형 등을 키워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말했다. "노동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는 건 큰 일이야. 아무리 작은 거라도 말이야. 마누라는 아름다워 보이려고 그걸 낄 수도 있고, 품위가 있어 보이려고 그걸 낄 수도 있어. 어쨌든 자기 마누라가 그걸 끼고 있으면 그 남편은 단순한 배관공이 아닌 거지. 다이아몬드를 손에 낀 마누라를 둔 남자가 되는 거야. 그의 마누라는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을 소유한 거지.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이거든.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불멸하는 다이아몬드와 비교되는 것이 필멸하는 인간이다. 바다 수영을 좋아하고, 소비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미국에서 광고업계 중역으로 경력을 쌓았으며, 그의 지위에 걸맞게 자신감으로 가득찼고, 그래서 (아내가 있음에도) 주변의 다른 여자들에게 다가가는데 거리낌이 없던 남자가 어떻게 병에 굴복하고 죽음에 다가가는지를 <에브리맨>은 보여준다. 이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보석상의 재고를 모두 합쳐도 그 가격에 못미칠 목걸이를 정부에게 선물하는 남자다. 개인 집무실에서 여비서와 짧지만 강렬한 성적 유희를 즐기는데도 두려움이 없는 남자다. 


이런 남자도 별 수가 없다. 세번째로 이혼하고 또 은퇴한 뒤, 9.11 테러의 공포를 피하겠다며 교외의 바닷가 은퇴자 마을로 이주한 남자는 7년째 매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할 처지에 놓인다. 육체적 무력감은 남자의 자신감과 평상심을 갉아먹는다. 순수한 우애를 나누었던 형과도, 단지 그가 자신에 비해 건강하다는 이유로 조금씩 멀어진다. 물론 주인공은 형과 멀어진 것이 형의 건강에 대한 자신의 질투 때문임을 처음엔 알지 못한다. 후에 그걸 깨닫고 난 뒤 더욱 비참해한다. 바닷가에 앉아 매번 그길로 조깅을 하는 젊은 여성에게 얼마 남았을지 모르는 인생의 마지막 '한 방'을 시도하지만, 쿨하게 그의 전화번호를 받아든 채 사라진 여성은 다음날부터 다른 길로 조깅을 한다. 


그는 생계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원치 않게 광고업계에서 일해야했지만, 사실은 그림에 큰 재능이 있으며 은퇴 후에는 그 재능을 펼칠 수 있음을 믿어왔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은퇴자 마을에서 미술 강의를 하고, 지역 화가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고, 유일하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인 딸이 그의 그림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열정이 바닥난 것인지, 좋지 않은 건강 상태가 많던 열정을 갉아먹은 것인지, 그는 더는 붓을 들지 못한다. 


그는 학창시절의 육상스타였으나 사소한 부상으로 인해 경력을 접은 어린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이 조언은 수십 년 뒤 노년에 이른 자신에게 필요한 것임을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로스는 이렇게 쓴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우연히도 로스의 은퇴 소식을 들었다. 로스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끝에 온 것 같다. 더 이상 쓸 것이 없다. 물론 두려웠다. 할 일이 없어서. 그러나 더 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글이) 나아질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하기'라는 위대한 임무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이 인터뷰가 공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위대한 작가도 '에브리맨'의 쓸쓸하지만 필연적인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언제 어디선가 그의 부음을 듣는다면, 우리의 '우연한 삶'을 다시 떠올려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