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소설 중에 '막장스러운' 내용이 많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만>의 줄거리는 그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에세이 <그늘에 대하여>는 내가 무척 좋아해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거나 선물한 적도 있는 책인데, 혹시라도 내 추천에 <그늘에 대하여>를 읽은 뒤 <만>이나 그외 다른 소설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볼까 하는 마음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타임스는 1965년 8월 6일 다지나키 준이치로의 부음 기사에서 그를 '동양의 D H. 로렌스'라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에서 드러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성관념은 로렌스식의 원초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 <만>의 네 남녀를 한 마디로 '변태'라 불러도 무방하다. 차라리 다지나키 준이치로를 매저키즘의 창시자의 이름을 따 '동양의 자허마조흐'라고 부르면 그런대로 수긍하겠다.
멀쩡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설을 써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
소설 속에는 네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는 돈, 남자는 번듯한 직업을 교환 조건으로 내걸어 결혼했지만 그다지 사랑이 넘치지는 않는 가키우치 부부, 비너스 같기도 하고 관음보살 같기도 한 절세의 미녀 미쓰코, 그의 숨겨진 애인이자 어딘가 음흉해보이면서 잘생긴 얼굴을 가졌지만 성적으로는 무능한 와타누키의 4인이다. 일단 어딘지 건강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구도는 확실히 갖춰졌다.
처음엔 가키우치 부인과 미쓰코가 통정한다. 이 소설은 1928~1930년 사이 연재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광수, 카프, 김동인 등이 계몽하거나 계급의식을 고취하거나 바람난 남녀 이야기를 그릴 때, 일본에선 본격 레즈비언 소설이 나왔던 셈이다. 둘은 처음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갈수록 대담해져 이곳저곳으로 데이트를 다니고 남편이 직장에 나간 틈을 타 가키우치 부부의 침실도 이용한다. 다음으론 미쓰코의 숨겨진 애인 와타누키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됨됨이나 신분이나 어느 것 하나 훌륭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미쓰코는 왠지 그의 잘생긴 얼굴만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미쓰코는 양성애자다. 와타누키는 미쓰코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가키우치 부인을 찾아와 서약서를 쓰자고 제안한다. 서약서의 내용이란 자기가 미쓰코와 결혼하게 가키우치 부인이 도와주면, 결혼 후에도 미쓰코와 가키우치 부인의 관계를 용인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래도 가장 결속력이 강한 사랑은 역시 가키우치 부인과 미쓰코 사이에 맺어진다. 둘은 일종의 자살소동을 벌여 자신들의 의지를 각자의 남편, 연인에게 알리고자 한다. 동성결혼이 허용된 것도 아니니 이혼을 하거나 파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둘의 관계를 인정해달라는 시위 같은 것이다. 이 소동 와중에 이번엔 미쓰코와 가키우치씨의 인연이 맺어진다. 미쓰코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지 않으면 못견디는 타입의 여자다. 결국 어느덧 와타누키의 존재는 흐지부지 사라지고, 미쓰코가 가키우치 부부로부터 동시에 애정 혹은 숭배를 받는다. 미쓰코는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둘이 부부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방법까지 고안한다.
매저키즘은 통념과 달리 그저 "날 떄려달라"며 육체적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 숭고한 것에 대한 자발적인 헌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구도에서 가키우치 부부는 일종의 매저키스트라 할 수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원작을 마스무라 야스조가 영화화한 <만지>(1964)
문학동네판 작품집에 <만>과 함께 실린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1949~1950년에 연재된 작품이다. 일본 고전문학을 재해석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작품에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기묘한 것은 그 사랑을 잊기 위해 쓰는 방법들이다. 호색한 헤이쥬는 "흠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아름다운 여인" 지쥬노기미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그녀로부터 정을 떼기 위한 수를 쓴다. 헤이쥬는 하녀가 내다버리려는 그녀의 변기를 다짜고짜 탈취한 뒤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 살펴본다. "여자의 변기를 훔쳐내서 그 내용물을 본다면, 그렇게 된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더러운 것을 싸는가 하고, 자기도 대변에 징그러워지며 정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변기를 가져가는데는 성공한 헤이쥬도 정을 떼는데는 실패한다. 그 안에는 "반쯤 담긴 향나무 색깔 액체 속에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에 두서너치 길이의 검정색이 섞인 누런 덩어리가 세 조각 정도 둥그스름하게 뭉쳐져" 있었는데 헤이쥬는 이것을 보자 정이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심지어 냄새를 맡고 나무 막대기로 찔러 맛을 보기도 한다. 그는 생각한다. "배설물까지도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 사내를 뇌쇄하려고 손을 쓰다니, 얼마나 얼마나 철저한 여자냐"
책에는 아예 사람의 정을 떼기 위한 수행법까지 등장한다. 이 수행법은 부정관(不淨觀)이라 불린다. 관능적인 쾌락이 한때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기 위해 내장이 튀어나오고 구더기가 슨 시체 같은 것을 매일 찾아 그 앞에서 묵상을 하는 방법이다. 즉 "내 몸은 부모님의 음탕한 즐거움의 산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후까지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부정관을 수련한 남자는 수행에 성공하지 못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대신 역시 성을 다루지만 상대적으로는 온건하고 서정적인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기록됐다. 만일 다지나키 준이치로가 노벨상을 받았다면 일본문학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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