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주제를 생각하다가 마감하는 날 오전 급히 바꿨다. 원래 쓰려고 했던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더 정리해 꼭 쓰고 싶다.
아이돌도 사람이다. 팬들도 아이돌이 연애하고, 방귀 뀌고, 잘 때 이 간다는 사실을 짐작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예전의 팬들은 아이돌의 연애 사실이 밝혀지면 ‘팬질’을 그만두기도 했다. 아이돌이 “사랑해”라고 노래할 때, 그건 노래를 듣는 모든 팬을 위한 메시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인을 위한 연인이 된 순간, 아이돌에 대한 환상은 부서진다. 어떤 직업군에는 그에 기대되는 환상이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육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의 사진 밑에 성적 암시가 담긴 글을 남긴 예비 교사에 대해 대중은 분노했다. 대중의 사랑에 기대어 사는 연예인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한다. 연예인이라고 짜증스럽고 화나는 순간이 없겠냐마는, 만일 진짜 짜증을 내는 모습이 누군가의 스마트폰 카메라에 잡힌다면 그는 인터넷 공간에서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판사는 어떨까. 따져보면 판사는 법조문의 이해와 적용에 능숙한 기능인이다. 기자가 사건의 실체를 간결한 글로 전하는 데, 택배기사가 정확한 주소지로 신속하게 물건을 나르는 데, 투수가 공을 빠르고 변화무쌍하게 던지는 데 능숙한 것과 같다. 판사라고 평균 이상으로 검소하고 선량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최근 ‘악플 판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수도권 법원에 근무 중인 이모 부장판사는 2000년대 중반부터 여러 포털 사이트의 기사, 댓글에 5개의 서로 다른 아이디, 닉네임을 이용해 댓글을 달았다. 댓글은 특정 지역을 상습적으로 비하하고, 과거사 사건 피해자를 조롱하고, 동료 법관을 비난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노동조합, 촛불집회 참가자 등에 대해서는 저급한 표현을 사용했다. ‘독재 정권 시대의 물고문, 전기고문이 좋았다’는 말도 있었다. 비유의 수위, 방식, 정서가 정확히 ‘일베’를 가리킨다.
법원 로고. 안 예쁘다.
법관윤리강령은 판사에게 품위 유지, 공정성, 정치적 중립을 요구한다. 하지만 판사는 댓글에서 신분을 감췄다. 해당 판사의 정치적 편향성, 퇴행적 역사관, 인간에 대한 무례가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도 없다. 한마디로 온라인에서 해당 판사가 벌인 활동은 철저히 사적 개인으로서 벌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대중, 특히 법정에 선 사람들은 판사에게 법 전문가로서의 기능 이상을 기대한다. 판사도 악플을 달고, 밤에 ‘야동’을 보고, 긴 줄 앞에서 새치기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판사에 대한 환상은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전제한다. 판사는 법 전문가임을 넘어, 윤리적으로도 평균 이상 도야한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판사의 한마디에 재판 받는 사람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 판결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그런데 나보다, 아니 사회 평균보다 인격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 받는 판결을 이의 없이 수긍할 수 있겠는가.
간혹 언론에 나오는 판결 기사에는 “재판부는 준엄히 꾸짖었다”는 투의 표현이 나온다. 말이 안되는 표현이다. 판사는 양형 기준에 따라 판결하면 될 뿐, 누군가를 꾸짖을 권리는 없다. 꾸짖는 것은 부모, 스승, 사제가 할 일이다. 그럼에도 기사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건, 판사에 대한 윤리적 기대치가 높음을 암시한다.
군자는 유가가 그리는 이상적 지식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책상, 찻잔같이 한 가지 목적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을 갖춰 두루 신망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 앞에서 정적을 탄핵할 때면, 실제 행위와 함께 인격의 용렬함까지 비판하곤 했다. 글이나 그림에 사용된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선비다운 정신이 담겨 있지 않으면 높게 치지 않았다.
법관에게 군자가 되길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이 수긍할 만한 ‘한 줌의 도덕’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는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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