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합 8시간에 이르는 <호빗> 3부작, 9시간이 넘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모두 본 관객들은 아마 1시간 이상 이어지는 치열한 전투 장면, 반지가 상징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 탐욕에 병든 잔인한 용 스마우그, 엘프들의 아름다운 외모 등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내겐 험난한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호빗들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쩌면 피터 잭슨 감독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듯한 이 결말부에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호빗족 빌보 배긴스는 평화로운 샤이어 마을에서 자족하며 살아간다. 푸른 초원 위 아늑한 마을에는 장난끼 있지만 온순한 종족이 모여 산다. 그러나 빌보가 마법사 간달프와 난쟁이족의 모험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면서 그의 삶은 이전과 달라진다.
뜻밖의 여정을 떠난 빌보는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난쟁이처럼 힘이 세거나 마법사처럼 마법을 쓸줄 모르는 연약한 호빗족에게 이 여정은 무척이나 힘겹다. 빌보는 그 과정에서 귀한 반지를 손에 넣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지만, 고향 마을에서의 안락한 삶, 무엇보다 목숨과 비교하면 잠시 모습을 감추게 해주는 반지 따위는 별 거 아니다.
<호빗: 다섯 군대 전투>의 티저 포스터. <반지의 제왕> 때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는데 얼굴은 늙어버린 슬픈 엘프 레골라스(위)와 영국식 썰렁한 유머를 구사하는 호빗 빌보.
천신만고 끝에 모험을 끝낸 빌보는 1년여만에 고향 샤이어 마을로 돌아온다. 동네에선 빌보를 ‘추정사망자’로 간주해 그의 세간을 경매에 부치는 등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빌보는 자신이 빌보 배긴스임을 증명한 뒤에야 텅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을 샤이어 마을의 이웃들에게 1년의 부재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빌보는 백발의 노인이 된다. 그러나 빌보는 왠일인지 심술 궃은 늙은이가 됐다. 늦은 오후의 방문객은 호통을 쳐서 쫓아보낼 정도다. 문을 두드리는 이가 모험길의 동무였던 마법사 간달프라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그를 맞이하게 위해 달려가는 빌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한 번의 모험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빌보는 더 이상 샤이어 마을의 안락함에 만족하지 못하는 호빗이 됐다. 이렇다할 친구도, 가족도 없어 보이는 빌보는 가끔 반지를 꺼내 보거나,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홀로 여생을 보낸다. 다른 호빗들이 쑥덕댈지 모르지만, 빌보는 이웃의 평가 따윈 개의치 않을 것 같다. 빌보에겐 위대한 모험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험을 되새기며 사는 것만으로도 빌보는 행복하다.
잃어버린 선조의 땅을 찾아 떠난 난쟁이족. 그런데 정작 왕자님을 빼고 사진 찍음.
빌보는 오매불망 또 한번의 모험을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빌보의 염원은 소설 <호빗>의 속편이자 영화로는 앞서 나온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왕의 귀환>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반지의 제왕>에서 모험의 주인공은 빌보의 조카인 프로도 배긴스다. 빌보 못지 않게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은 프로도와 동료 호빗들은 샤이어로 돌아와 기나긴 뒤풀이를 한다. 함께 모험을 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평소 마음에 두었던 여인에게 구애한다. 결혼을 하고 책도 쓴다.
그러나 프로도의 표정에도 빌보와 마찬가지로 그늘이 서려있다. 모험은 그를 오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프로도는 늙어서 거동조차 불편해 보이는 삼촌 빌보와 함께 또다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정을 떠난다. 다른 호빗 친구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프로도는 그것만이 자신의 길임을 확신한다.
모험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정신의 욕창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험을 해야 한다.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모험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 <호빗> 속 중간계의 신비로운 숲, <인터스텔라>의 웜홀보다 깊고 신비롭다. 자신의 마음, 타인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도 대단한 모험이다. 가지 않았던 길을 가고,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해야 우리는 조금 더 근사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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