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 내내 문화부 부근에 주로 있어서 정치인들과는 인연이 없지만, 고 김근태 의원과는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2003년 가을 수습 기자 시절, 편집국 내 각 부서를 견학하다가 정치부에 들렀을 때였다. 정치부 선배는 10여명의 수습 기자들과 김 의원의 만남을 주선했다. 수습 기자들은 나란히 앉아 각자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문제는 자리 때문에 어쩌다 내가 첫 질문자로 지목됐다는 것이다. 난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비슷한 이력을 걸어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중의 큰 인기를 얻은 반면, 김근태 의원은 별로 인기가 없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인터뷰이와 만나자마자 이런 질문을 던지면 "나랑 싸우자"라는 뜻이라는 것쯤은 안다. 이 질문은 대부분의 정치부 기자들이 생각하지만 차마 면전에서 꺼내지는 못한 이야기라는 것은 훗날 들었다. 당시 자리를 주선한 정치부 선배(지금은 같은 부서에서 좀 더 책임있는 자리에 계신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김 의원은 허허실실한 미소를 지으며 "김 전 대통령은 양지에서 활동했고, 나는 음지에 주로 있었다"는 뉘앙스로 답변한 것 같다.
오늘은 고 김근태 의원 3주기 추모전 '생각하는 손'에 다녀왔다. 김 의원의 아내인 인재근 의원, 딸인 김병민씨도 나와있었다. 김병민씨는 큐레이터로 이 전시회에 참여했다. 정치인의 추모전이라니 그럴듯하게 듣기 좋은 미사여구로 치장하리라 짐작하기 쉽지만, 이 전시회에는 공들인 흔적이 묻어있었다. 주최측은 고인과의 친분을 고려하기 보다는, 고인이 품었던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을 우선 섭외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전시회는 '김근태라는 인간'이 아니라 '김근태가 품었던 생각'을 전하는데 주력한다. 예술은 원래 간접적이다.
전시회에는 '김근태의 서재'가 재현돼 있다. 고인이 타계하기 직전까지 글을 쓸 때 사용했다는 앉은뱅이 책상, 쌍으로 수배중이던 연인 인재근에게 보낸 연애편지, '열관리기사 1급' 같은 12개의 국가기술자격증을 볼 수 있다. 전시회장에 나온 인 의원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교통카드와 전화카드에 대해 설명했다. 고인은 국회의원에서 떨어지자마자 승용차를 팔았으며 이후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도청에 시달리던 과거가 있어서인지 공중전화를 애용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집에 다왔다고 하는데 안 들어와서 찾아보면 집 앞 공중전화에서 누군가에게 통화를 하는 모습을 수시로 목격했다고 한다.
'김근태의 서재'를 재현한 리무부아키텍쳐는 <근태의 방이란다>란 소책자도 편집해 발간했다. 이 책에는 고인의 편지, 강의노트, 복지부 장관 재직시의 메모, 인재근 의원의 탄원서, 공판 기록 등이 원문 형태 그대로 수록됐다. 나 역시 부모가 된 입장이라, 어린 딸이 교도소에 있는 아빠에게 보낸 편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감 하다가 슬쩍 보는데 더 읽다간 울 것 같아서 덮었다 나중에 다시 꺼내들었다
어린 병민은 자신이 자라는데 함께 있어주지 않은 아빠를 슬쩍 원망하면서도,아빠를 보고 싶다는 소망을 끝없이 드러낸다. 5년간 투옥됐고, 또 많은 시간 수배를 피해 숨어다녀야했던 아빠는 그만큼의 시간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했다. 아이가 나고 자라 웃고 걷고 말하고 자라나는 걸 곁에서 지켜보는게 부모의 큰 기쁨인데, 김근태는 그 기쁨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김병민씨는 에필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아빠가 나를 덜 사랑해서 멀리 계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립지만 참았던 것 같다. 아빠가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쫓기고, 수감되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 멀리 떨어져있어도 아빠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믿음을 주었고, 아빠의 일이 옳다는 확신을 주었다."
자식에게 이런 믿음을 주는 아빠가 얼마나 될까. 특히 아빠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힘에 맞서 혹독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그 때문에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는데도. 천하의 악당이 집에서는 '좋은 아빠'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가정에선 '나쁜 아빠'일 수도 있다. 공과 사는 다른 영역이라고 인식하지만, 이런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추정컨대, 김근태는 좋은 아빠, 좋은 정치인,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고 김근태 의원의 딸 김병민씨가 어린 시절 아빠에게 보낸 편지와 일기. 김 의원의 각종 자격증.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갤러리에 고 김근태 의원(1947~2011)의 서재가 마련됐다. 노동 잡지, 미술 서적, 대학시절 강의노트, 건설기술자면허증을 비롯한 12개의 국가기술자격증도 볼 수 있다.
두 가지가 특히 눈에 띈다. 수배 중에 보일러공으로 일하던 김 의원이 보일러를 때던 밤 잠시 책상에 앉아 역시 수배중이던 연인 인재근 의원에게 보낸 연애편지다. 본명을 쓸 수 없어 ‘옥순이’라는 가명 앞으로 보낸 편지에는 “오늘밤 꿈 속에서 우리 아가씨 귀여운 아가씨를 만나기로 하고 안녕” 같은 글귀, 자기만 아침을 챙겨먹고 나와 연인을 배고프게 한데 대한 변명 같은 것이 써있다. 1978년 봄에 만난 두 노동운동가는 같은 해 여름 별도의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살림을 차렸다.
서재 가운데에는 작달막한 앉은뱅이 책상이 있다. 이 책상은 인 의원이 초등학생 때부터 썼던 것으로, 김 의원이 탐내 훗날 살림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새로 니스칠까지 하는 등 책상에 공을 들였던 김 의원은 생전 글을 쓸 때면 언제나 이 책상에 앉았다. 고인이 사용했던 안경, 핸드폰, 교통카드, 펜 등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김 의원 3주기를 맞아 4일부터 21일까지 DDP 갤러리 문에서 추모전 ‘생각하는 손’이 열린다. ‘김근태의 서재’를 재현한 리무부아키텍쳐를 비롯해 김진송, 임민욱, 정정엽, 옥인콜렉티브 등 노동 문제를 적극적으로 표현해온 11명(팀)의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했다.
‘생각하는 손’은 정정엽 작가의 회화이자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다. 손의 형상에 붉은 핏줄을 복잡하게 그려넣어 마치 잔가지 많은 나무가 뻗어나가는 듯한 느낌을 냈다. 박계리 큐레이터는 “손과 머리가 함께하는 세계, 일과 놀이가 함께하는 사회를 ‘생각하는 손’이란 타이틀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생각하는 손'에 전시된 리무부아키텍쳐의 '김근태의 서재', 이윤엽 작가의 '까마귀'(왼쪽)와 '노동자는 올빼미가 아니다', 정정엽 작가의 작품들(위로부터)
생전 김 의원은 문화를 사랑했다. 문화계에서도 이에 화답하듯 영화(남영동 1985), 만화(짐승의 시간), 소설(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등 각 분야에서 김 의원을 기리는 작품을 잇달아 내놨다. 4일 전시장에서 기자들과 만난 인 의원은 “화장실 휴지도 3칸만 쓸 정도로 굉장히 검소한 사람이 유일하게 사치를 부린 건 화집을 살 때였다”고 회고했다.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딴 건 안 사도 비싼 화집은 사왔다고 한다. 박계리 큐레이터도 김 의원의 서재에 갔다가 깜짝 놀란 일화를 전했다. 정정엽 작가조차 잃어버려 갖고 있지 않았던 전시 도록이 김 의원의 서재에 있었다는 것이다.
박계리 큐레이터는 “말로 할 수 없는 것, 채워지지 않는 것을 미술로 추모하고자 했다”며 “고인이 자기 몸조차 돌보지 않고 지키고자 했던 ‘따뜻한 시장경제’라는 화두를 되새기는 전시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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