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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섞여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물, '아사코'


**스포일러 있음

어제 오전에 극장에서 다섯명 쯤의 관객과 함께 '아사코'를 봤다. 영화가 너무너무 이상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흥미진진했다. 서사는 종잡을 수 없었지만, 감정은 정확히 묘사됐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멜로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는 아니다. 이상한 흐름이 자꾸 생각나고, 왜 그리 이상하게 찍었는지 궁금하고, 스스로 해명해보고 싶다. 훌륭한 영화라는 뜻이다. 

줄거리만 요약해도 이상하다. 오사카의 아사코는 어느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말도 안되게 급작스럽게 시작한 사랑이이었다. 하지만 바쿠는 안정적이기보단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저녁에 빵 사러 간다고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돌아오는 사람이다. 빵 사러 갔다가 동네 목욕탕에 들렀는데 거기서 만난 아저씨와 친해져서 그 아저씨 집에 가 만취하고 잔 뒤 빵은 주고 왔다....는 식이다. 결국 바쿠는 신발을 사러간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고 아사코의 내레이션을 통해 회상된다. 꼭 돌아오겠다는 말은 남겼다. 

2년 후, 아사코는 도쿄로 이사해 한 카페에서 일한다. 인근 회사의 직장인 료헤이라는 사람이 자꾸 아사코 앞에 나타난다. 놀랍게도 료헤이는 바쿠와 똑같이 생겼다(실제로 같은 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한다).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다가가지만, 아사코는 바쿠와 너무 닮은 모습에 자꾸 뒷걸음질친다. 사귀어 보려고도 하지만 마음이 온전히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이 잠시 두려움에 떨만한 지진이 발생한 날, 아사코는 료헤이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지진 묘사가 섬찟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하나도 안나오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혼란이 생생히 느껴진다. 거리 곳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후 5년간 둘은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료헤이는 성실하고 유머러스하며 다정다감하다. 어딘가로 갑자기 사라질 사람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둘은 동일본대지진 피해를 입은 센다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 활동도 자주 한다. 주변 친구들도 그런 그들을 축복한다. 료헤이는 오사카 본사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아사코에게 청혼한다. 

청혼하기 전 빠진 에피소드가 있다. 바쿠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바쿠는 그 사이 꽤 인기 있는 모델이 됐고, 아침 드라마에 나와 인기를 끄는 셀러브러티가 됐다. 청혼을 받은 순간, 아사코는 옛 연인 바쿠 이야기를 한다. 사실 바쿠가 료헤이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2년 전쯤 바쿠란 사람의 존재를 잡지에서 봤고,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사코가 자신을 처음 본 순간 멈칫한 이유도 이해했다고 말한다. 둘의 결혼은 문제 없이 진행될 것 같다. 오사카에는 창문에서 강이 바라다 보이는 집까지 구했다. 

아사코와 료헤이와 친한 친구들의 저녁 자리에 파국이 발생한다. 바쿠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료헤이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바쿠를 보고 놀란다. 바쿠는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펴 올린다. 2~3초쯤 고민하던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잡고, 둘은 그대로 나가버린다. 바쿠는 아사코를 차에 태우고 달린다. 부모님이 쓰지 않는 빈 집이 훗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자기 일을 대신할 사람은 많다며 휴대폰을 부서 던져버린다. 아사코도 돌아오라는 친구들에게 이별의 말, 사과의 말을 남긴 채 휴대폰을 던진다. 그렇게 자동차는 밤의 도로를 달린다. 

눈을 떠보니 새벽이다. 차는 방파제 근처에 서있다. 센다이 초입이다. 바쿠는 졸리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해서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파제 때문에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아사코는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한다. 바쿠는 그러라고 한다. 차를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사코는 면허가 없다고 한다. 역까지 태워줄 필요도 없다고 한다. 바쿠는 그냥 떠나고, 아사코는 돈도 핸드폰도 없이 돌아간다. 

마침 센다이엔 평소 자원봉사를 하며 알고 지낸 지역 주민들이 있다. 한 할아버지가 돈을 빌려주면서도, 남자는 다른 남자와 놀다 들어온 여자는 용서하지 못하니 돌아가지 말라고 권한다. 하지만 아사코는 돌아가기로 한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예정된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이. 

아사코는 오사카의 료헤이 집을 찾아 문 앞에서 기다린다. 전날 저녁이었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혼집이 될 곳이었다. 아사코를 발견한 료헤이는 화를 내면서 무슨 낯으로 나타났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키우던 고양이는 버렸다고도 한다. 아사코는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앓아누웠다는 오사카 시절 고향 친구를 찾아가기도 한다. 활발하던 친구는 루게릭 병으로 침대에 누운 상태다. 아사코는 친구 어머니로부터 귀여운 반전이 담긴 옛 이야기를 듣는다.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의 집 앞으로 와 고양이를 찾는다. 사실 료헤이는 고양이를 버리지 않았고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아사코는 료헤이의 집으로 들어간다. 료헤이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다. 료헤이는 앞으로 아사코를 완전히 믿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사코는 수긍한다. 그리고 료헤이에게 덜 의지하겠다고 말한다. 둘은 베란다에 서서 비가 와 불어난 강을 바라본다. 료헤이는 물이 더럽다고 한다. 아사코는 그래도 아름답다고 한다. 끝. 

자유로운 바쿠(위)와 성실한 료헤이(아래). 

처음엔 바쿠와 료헤이가 도플갱어인줄 알았다. 아니다. 도플갱어는 만나면 죽는데, 둘은 한 번 마주친다. 아니면 둘이 닮았다는 건 아사코만의 착각이었던가. 아니다. 바쿠와 사귀던 시절 아사코의 단짝 친구가 료헤이를 보고 똑같이 생긴 모습에 놀란다. 바쿠와 료헤이가 닮았다는 건 아사코의 주관이 아니라 제3자가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이다. 

아사코는 다시 돌아온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바쿠를 외면하고, 오랜 시간 자신을 사랑할 료헤이를 찾기로 한다. 낭만과 현실의 대결에서 현실이 승리? 하지만 되찾은 현실이 그리 맑고 밝지만은 않다. 료헤이와 아사코의 마지막 대사는 시적이다. 강물은 더럽다. 하지만 아름답다. 폭우로 불어나 이것저것 뒤섞인 강물이지만 아름답다. 인간 관계는 단일한 감정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이나 숭배나 증오는 없다. 여러 가지 감정이 비율을 달리하며 섞이며 관계를 직조해나갈 따름이다. 최상의 잉꼬 부부라해도 미움이나 의심이나 권태의 싹은 마음 어딘가 뿌려져있다. 그것이 얼마나 자라나느냐, 자라났을 때 얼마나 현명하게 가지치기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