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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트 이슈

마을은 뜨는데 주민은 떠난다, 젠트리피케이션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골목’이란 이름의 엘피바를 운영하는 김진아씨(39)는 낮시간의 동네 풍경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부동산업자들이 사모님들 모시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언론에선 연일 ‘마지막 노른자위 땅’ 같은 기사를 내고, 그러면 임대료는 또 올라요.”

골목은 지난해 8월 문을 열었다. 계약 기간이 2년이니 아직 시간은 남았다. 김씨는 “한 번 정도는 더 재계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은 장담하기 어렵다”며 “앞집에 세들어 살던 노부부도 얼마 전 어딘가로 이사간 것 같다”고 말했다. 

1960~1970년대 서구의 도시 개발 과정에서 활발히 벌어지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홍익대 부근, 삼청동, 가로수길에 이어 최근엔 홍대 인근의 합정동과 상수동, 서촌, 경리단길, 성수동 등에서도 이 현상이 나타난다. 


임대료가 저렴한 구도심에 스튜디오, 갤러리, 공방 등 예술가들의 거점이 생기고, 이를 따라 문화인들이 즐겨 찾을 만한 카페, 식당이 문을 연다. 동네가 ‘물이 좋다’고 소문나면 더 많은 카페와 식당이 개점하고, 이어 프랜차이즈 식당도 진출한다. 대형 패션 매장까지 생기면 한국적 젠트리피케이션의 순환 주기가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과 그들에게 필요한 세탁소 등 소규모 가게, 예술가들이 떠나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효자동에 있던 바 ‘퍼블릭’은 2010년 12월 문을 열어 4년6개월 만인 올 5월 문을 닫았다. 퍼블릭이 개점했을 때만 해도 이곳은 한적한 주택가였으나, 효자동이 ‘서촌’이란 이름의 관광명소로 묶이면서 주변이 들썩였다. 퍼블릭을 운영했던 구정아씨(40)는 “임대차보호법으로 보호되는 계약 기간 5년이 지나면 임대료 인상의 한계가 사라진다”며 “마침 건물주도 임대료를 올리려는 기미가 보여 가게를 접었다”고 말했다. 


상수동(위), 서촌같은 동네가...





홍대(위), 가로수길 같이 됩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연구원 미래사회연구실의 나도삼 실장은 이를 “한 지역의 생로병사”로 표현했다. 지역이 노후했다가 재생해 사람들이 다시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도시 변천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서구와 달리 최근의 서울은 이 속도가 너무 빠른 것이 문제다. 나 실장은 “홍대, 대학로는 20년의 시간을 두고 이 과정이 이루어졌지만, 최근엔 5~6년 주기로 일어나고 있다”며 “정책적인 대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문화학계에선 관련 논의가 활발하다. 10일 성공회대 새천년관에서는 ‘아시아 도시에서 장소 형성과 공간 변환’ 워크숍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발제할 신현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는 도시 공간의 변화를 “중산층 일부의 새로운 문화적 욕망과 취향의 출현”과 연관지었다. 그는 “199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낸 30~40대 중에는 취직에 절대적 가치를 두기보다는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과 공간 사용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며 “이들이 서촌, 연남동, 해방촌, 성수동에 모여 공간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진아씨, 구정아씨는 각각 카피라이터, 영화 프로듀서라는 본업을 갖고 있으며 이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음악인, 영화인들이 모이는 명소였다. 

지난 5·6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는 제1회 홍대앞 문화연구포럼이 열렸다. 이 모임의 주제 역시 ‘홍대앞 문화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이었다. 이원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부산의 예술 창작공간 ‘또따또가’의 사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동안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의 예술 지원은 개인 창작기금 지원에 그쳐 왔는데, 또따또가에는 임대료를 지원했다. 이 소장은 “지자체가 해당 공간을 장기 임대계약하거나 매입한 뒤 복지 혹은 예술 공간으로 활용해 공공적 기능을 유지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대료 문제로 예술가, 업주가 떠나가면 지역의 활기도 사라진다. 한때 ‘젊음의 거리’로 이름 높았으나 이제는 활력을 잃은 신촌이 대표적이다. 최근 신촌의 일부 건물주들과 임차상인들은 ‘신촌 상권 임대료 안정화 협약’을 맺기도 했다. 계약 기간을 늘리고 임대료, 보증금 인상을 유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원재 소장은 “제도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주택 고급화. 신사 계급을 뜻하는 ‘젠트리’에서 파생된 말로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 과정에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까지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