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많이 보지는 못하는 편이지만, "다른 캐스팅으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공연이 최근 두 편 있었다. 하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였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 <라 바야데르>였다. <맨 오브 라만차>는 다른 배우의 연기가 궁금해서였다면, <라 바야데르>는 어떤 무용수라 하더라도 이 공연을 한 번 더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인도의 제국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무희, 그를 사랑하는 장군, 무희를 질투하는 공주, 무희를 남몰래 사랑하는 사제라는 4각 관계는, "드라마틱하다"기보다는 "막장 드라마 같다" 혹은 "낡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줄거리다. 근대 서구에서 만든 작품이 종종 그러하듯,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기도 어렵다. 이런 인물 구도와 줄거리를 대략 설명하는 1막은 다소 지루했다.
2막부터 분위기가 바뀐다. 이제부터는 줄거리를 이해할 필요도, 무대 상단의 자막에 신경쓸 필요도 없다. 장군과 공주가 결혼하고, 무희가 한때의 연인이었던 장군의 결혼 축하연을 장식한다. 이 결혼 축하연은 작정한 듯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대형 코끼리 같은 볼만한 소품이 등장하고, 무용수들은 각양각색의 이국적인 옷을 입고 차례로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인다. 이는 극중의 결혼 축하연이자, 관객에게는 눈호강이다. 남성 솔로인 '황금 신상'의 춤은 강렬한 에너지와 펄떡이는 동물성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3막은 숨을 쉬지 못한 채 봤다. 공연 전 해설에 나선 문훈숙 단장은 이 대목을 "추상 발레의 시작"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고전적인 2막과 모던한 3막은 극적인 대비를 이뤘다. 3막은 원을 품은 채 세상을 뜬 무희와 그녀를 그리워하는 왕자의 상상 속 만남을 재현하는데, 순백의 튀튀를 입은 32명의 발레리나들이 왕자의 상상 속 망령으로 등장한다. 19세기 러시아의 안무가들이 '모던'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32명의 발레리나들이 차례로 지상에 강림한 뒤 마치 아리랑 축전을 보는 듯 일사분란한 칼군무를 추는 대목에선 그저 말문이 닫혔다.
인간의 비인간적인 수련, 혹독한 자기학대가 빚어낸 기계같은 군무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나도 한 명의 관객으로서, 그런 고통을 무용수들에게 강요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었다. 푸르스름한 보름달빛 아래, 하얀 옷을 입은 발레리나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은, 미니멀하고 사이키델릭하고, 모던했다.
<라 바야데르> 3막, 망령들의 군무.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멍해진다.
무용수들의 도약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발을 움찔거리며 상상 속의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보통 휘어진 인간의 다리가 그렇게 곧게 펴질 수도 있다는 사실, 또 그렇게 펴졌던 다리가 생각지도 못한 각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저런 움직임은 해부학의 상식을 벗어난 것 아닐까. 혹시 무대 위의 중력은 무대 아래의 중력과 다르지 않겠냐는 SF적인 상상도 해봤다.
예술은 정신의 고양이지만, 또한 쇼(show)이기도 하다. 때로 기막힌 쇼로 정신을 고양시킬 수도 있다. 세상에 수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라 바야데르> 같은 발레는 그중에서도 순도가 매우 높은 볼거리다. 3막의 경우 순도는 99%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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