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버릇없는 아이입니까. 문자는 고집쟁이 노인입니까.
1895년 12월28일 '영화'는 태어났습니다. 프랑스의 발명가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기차의 도착>이란 짤막한 영상이 파리의 한 카페에서 상영된 순간입니다. 기차가 스크린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놀란 관객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쳤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영화란 예술 형식도 이제 만 113세가 되는 셈입니다. 문학, 음악, 연극, 무용 등 다른 예술 형식에 비해 영화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지만 힘만은 장사입니다. 현대의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이번주 개봉작인 잭 블랙 주연의 <비카인드 리와인드>(Be kind rewind)는 '되감아 돌려주세요'라는 뜻입니다. DVD 대신 구식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주는 대여점이 배경입니다. 감전사고를 당해 몸에 자력이 흐르는 사고뭉치 제리는 친구 마이크가 점원으로 있는 비디오 대여점에 놀러갔다가 테이프의 내용물을 모두 지워버립니다. 제리와 마이크는 수공예 특수효과와 어설픈 연기력을 동원해 가짜 영화를 찍어 테이프에 채워넣습니다. <고스트 버스터즈>, <로보캅>,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러시 아워> 등 손님이 찾는 영화는 무엇이든 찍어냅니다. 그런데 이 어설픈 영화들이 원작보다 더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이디어는 좋습니다. 현재 미국 최고 수준의 코미디 배우 잭 블랙과 믿음직한 중진 대니 글로버, 시고니 위버, 미아 패로 등 캐스팅도 훌륭합니다. 문제는 미셀 공드리(<휴먼 네이처> <이터널 선샤인>)의 연출력이 여전히 못 미덥다는 것이죠. 흥미로운 소재를 지루하게 찍어내는 것도 이 감독의 재주일까요.
오히려 의미를 찾을 만한 부분은 '영화로 영화를 사고' 하는 새 세대의 감수성입니다. 방 안에는 텔레비전, 거리로 나서면 대형 멀티비전, 지하철을 타면 DMB를 볼 수 있는 우리 세대입니다. 한국에만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스크린이 2000개가 넘습니다. 활자보다 영상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습니다. 영화는 이미 우리 세대의 기억, 추억, 삶의 핵심에 놓여 있습니다.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영화로 영화를 사고하고, 영화의 틀 안에서 하루종일이라도 놀 수 있는 세대를 위한 영화입니다.
지난 연말 개봉했던 한국영화 <달콤한 거짓말>에도 영화 세대의 두꺼움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짓말에 능한 등장인물은 주변에 어지럽게 놓인 영화의 제목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꾸며냅니다. <러브 레터> <엽기적인 그녀> <봄날은 간다> <러브 액츄얼리> 등이 인용됩니다.
그러나 영상은 진정 문자언어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아이에게 문자 대신 영상을 먼저 보여줘도 괜찮을까요. <쌍화점>의 유하 감독은 5편의 상업 장편영화를 만든 중진이지만, 스스로가 여전히 "100% 언어적인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달팽이처럼 진보하던 인류는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책이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말처럼 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논리, 사고, 서사는 여전히 문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영상이 문자를 각박하게 몰아내거나, 문자가 영상을 고루하게 무시하는 상황을 전 바라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던 영화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로 진화한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날로 두꺼워지는 영화의 역사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문자의 힘을 잊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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