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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트 이슈

상식의 하한선

매순간 빛나는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상식의 하한선은 지키며 살아야 한다. 최근 구설에 오른 한 유명인의 인터뷰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되새겼다. 


함익병씨는 피부과 의사로 성공해 큰 돈을 벌었고, 최근에는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인기를 끌었다. 방송사는 50대의 그에게 연예대상 신인상을 안겼다. 문제는 그가 <월간조선>과 나눈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야 개인의 성향이다. 그의 재임기에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며, 많은 이들이 이를 박 대통령의 치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독재가 왜 잘못된 건가요?… 독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하나의 도그마입니다”라는 말을 읽고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한 명의 위대한 철학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끌어오면서, 박 대통령의 독재도 ‘선의’와 ‘효율성’에 근거했으므로 나쁘지 않다는 논지를 편다. 그는 2500년전 그리스와 현대 한국의 차이를 모른 채 한다. 마치 박 대통령이 세상 다스리는 지혜를 홀로 터득한 철인이라도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진짜 ‘폭탄’은 ‘국민의 4대 의무’를 언급하면서 터졌다. 그는 지금까지 딸에게 투표를 못하게 해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4대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투표권이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여자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식을 2명 낳은 여자는 예외”라는 ‘너그러운’ 조건을 덧붙였다. 


19세기부터 수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쟁취해낸 여성 참정권이 이렇게 간단히 부정된다. 한국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1948년이다. 지금까지 흐른 66년 세월조차 여성 참정권이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을까. 사회의 유명 인사가 여성 참정권을 부정하고, 시사 월간지는 이를 ‘유쾌한 직설’이라고 표현하는 상황이 오늘날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1913년 6월 4일 영국의 경마 대회 엡섬 더비가 진행되던 도중,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주로에 뛰어들어 말과 충돌후 사망했다. 영국 여성들은 이 사건으로부터 15년이 지난 뒤에야 완전한 참정권을 얻어냈다. 


함익병씨에 대한 비판이 부당하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는 수많은 직업군과 전공 분야가 있으며, 각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익혀야할 지식의 양도 과거에 비해 방대하다. 경제학자가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에 대해 모른다고, 역사학자가 스티븐 호킹의 우주론에 대해 모른다고 타박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의학이란 고도의 정신적·육체적 숙련을 요구하는 분야다. 피부과 의사가 정치 체제, 여성 운동의 역사에 대해 과격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 모른다. 그가 지상파 텔레비전을 통해 유명세를 얻기는 했지만, 모든 분야에 대해 합리적이고 탁월한 의견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리, 상식에도 하한선이 있다. 이것은 수학의 공리 같은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그에 대해 따로 증명할 필요도 없이 한 사회가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규칙들. 우리 사회는 그러한 윤리와 상식들을 오랜 기간, 다수의 협의를 통해 정립해왔다. 이것은 어떤 이가 해당 분야에서 쌓아온 업적의 탁월성 여부와 관계 없이 지켜야 하는 기본이다. 예를 들어 어느 뛰어난 재능의 소설가가 “현대 사회의 질병은 모두 서구 의료산업계의 음모에 의해 발병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중요한 이론을 만들어낸 물리학자가 “아동 노동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업적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를 한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품격있는 인사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사람되긴 힘들어도 괴물이 되진 맙시다.” 상식의 하한선을 넘는 사람이 유명세를 타거나 심지어 존경받는 사회는 불길하다. 그가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친구, 남편, 딸, 사위로 받아들여진다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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