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머금고 글을 쓴다. 뉴스의 최전선에 있는 처지라 뉴스에서 눈을 돌릴 수 없는 처지가 원망스럽다. 이렇게 심약해서 무슨 기자냐고 자책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간간히 눈물을 훔치는 동료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안한다. .
사고 당일 아침까지도 기자들의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침몰중’이라는 속보가 전해졌지만 곧 ‘학생 전원 구조’라는 소식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에 접어들어 정부가 구조자의 수를 정정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전원 구조, 368명 구조, 164명 구조…. 이날 서울에 가득했던 미세먼지같은 우울, 슬픔, 탄식이 기자들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사회부로 전입온 뒤 여러 건의 죽음을 접했다. 경주 마우나오션 리조트 붕괴사고의 대학생들, 송파의 세 모녀에 이어, 여객선 세월호의 고교생들까지. 이런 죽음들을 접하면 할 말도, 써야할 글도 생각나지 않는다. 굳고 커다란 벽 앞에 선 기분이다. 말이나 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감기 몸살에라도 걸린 듯 몸이 떨렸다. 소화가 되지 않아 죽을 먹었다. 하루종일 우왕좌왕 동분서주하다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힘껏 껴안았다. 아이가 뒤척였지만 잠시 그렇게 있고 싶었다. 가장 가까운 곁에 뜨겁게 숨쉬는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간직하기 위해. 그러다가 갑자기 진도 앞 차고 검은 밤바다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모르는 또다른 생명들에 죄책감이 들었다.
인과의 고리를 찾는건 현대인의 본성이다. 특히 어처구니 없고 황망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은 앞장서 그 원인을 파헤친다. 이 과정에는 흔히 분노가 동반된다. 누가, 무엇이,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 분노는 때론 정확한 방향으로, 때론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다. 아이들의 죽음 같은 큰 일이 터졌을 때, 이 분노를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금은 화낼 기운보다는 울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상가에서는 일단 울어야 한다. 충분히 울지 않으면 화낼 기운도, 앞으로 살아갈 힘도 낼 수 없다. 마음의 응어리는 절로 풀리지 않는다. 깊고 깊은 애도만이 응어리를 풀 수 있다.
공동체의 역량은 재난과 그에 대한 애도 과정에서 드러난다. 지난 15일은 영국 셰필드의 힐즈버러 스타디움에 모인 축구팬 96명이 불의의 사고로 압사한 지 25주기 되는 날이었다. 이날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모든 경기는 평소보다 7분 늦게 시작했다. 참사 당시 경기가 사고로 6분만에 끝났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참사를 기억하며, 프리미어 리그 중계를 시청하는 전세계의 축구팬도 그들의 경건한 순간을 목도했다.
또 이날은 미국의 보스턴 마라톤 테러 1주기이기도 했다. 추모식에서 드발 패트릭 메사추세츠 주지사는 “여기 일어난 일들은 우리를 하나로 엮었습니다. (…) 우리는 타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사건들에, 공통의 운명에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공포, 같은 희망, 같은 공동체를 공유합니다”라고 말했다. 영국과 미국의 공동체가 아직 건강하다면, 바로 이런 애도와 추모의 문화를 하나의 증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망자를 되살릴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산 자를 살게할 수는 있다. 인간은 그것을 해야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방식으로 추모하기. 떠난 생명을 안타깝게 여기고, 살아남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남은 사람의 곁에 서주기. 우리의 공동체가 유지되거나 혹 강해지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쓴다.
18일 저녁, 실종된 학생들이 돌아오길 기원하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 /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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