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초상
자젠잉 지음·김명숙 옮김/돌베개/348쪽/1만7000원
현대 중국은 걸출한 인물들의 시대였다. 마오쩌둥, 장제스, 덩샤오핑 등 강렬한 캐릭터의 인물들이 역사의 변곡점에 그들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조조, 유비, 손권이 <삼국지>의 전부였겠는가. 20세기 중국은 수억 인민 하나 하나의 삶을 거대한 파도 위에 올려놓았다. 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인물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파도를 탔다.
<중국인의 초상>(원제 Tide Players: The Movers and Shakers of a Rising China)의 저자 자젠잉 역시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라 사람들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복잡한 삶을 살아왔다. 자젠잉 인생의 첫번째 파도는 문화혁명과 함께 찾아왔다. 자젠잉의 부모는 하루 아침에 ‘역겨운 지식인’에다가 ‘반혁명분자’로 몰렸고, 어린 자젠잉은 어제까지의 친구가 던진 돌멩이를 맞거나 베란다에 누군가가 버리고 간 똥이 놓인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고향인 베이징 외곽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자젠잉은 어느날 밭을 갈다가 베이징대 입학허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화혁명이 끝난 지 1년 뒤였다.
18세에 베이징대 중문과에 입학한 자젠잉은 자기보다 10살 가량 많은 동기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동기들은 문화혁명 기간 동안 공장,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뒤늦게 대입 허가를 받았다. 졸업한 대부분의 동기생이 국내에서 좋은 직장을 찾은 반면, 자젠잉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 영문과로 유학을 떠났다. 자젠잉은 그 학교가 개교한 이래 첫번째로 입학한 중국인 학생이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도전한 자젠잉은 평소 꿈꾸던 대로 작가가 됐다. 덩샤오핑이 개방 정책을 실시한 1980년대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선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자젠잉은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소설을 발표하고 동료들과 정치를 논했다. 그리고 자젠잉 인생의 두번째 파도가 찾아왔다. 1989년 6월의 톈안먼 항쟁이다. “기억을 검게 그을린 유혈의 새벽”이 있은 지 10일 뒤, 자젠잉은 미국으로 “도망쳤다”. 한동안 우울증과 혼란을 겪던 그는 훗날의 남편을 만나고 책을 쓰면서 조금씩 자아를 회복했다. 그리고 2003년 구겐하임 재단 창작기금의 수혜를 받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현대 중국의 두 가지 트라우마. 문화혁명 당시의 포스터(위)와 천안문 항쟁 당시의 사진.
자젠잉의 이복 오빠인 자젠궈는 ‘국가의 적’이었다. 책벌레였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홀로 마오쩌둥을 숭배하면서 학교의 ‘부르주아적 정서’를 비판할만큼 강직하고 행동력있는 학생이었다. 17세에 문화혁명을 맞은 그가 홍위병에 열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젠궈는 동료 홍위병들을 집으로 데려와 “마음에 드는 책은 무엇이든 가져가라”고 말했다. “생물학적 아버지들에게는 냉혹하지만 정신적 아버지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경향”을 보인 홍위병들이었다.
“가난한 시골을 변화시켜라”라는 마오의 명을 기꺼이 받은 자젠궈는 네이멍구자치구로 들어가 20년을 살았다. 문화혁명은 진작에 끝났지만 자젠궈는 그곳에서 혼자만의 혁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도시 청년인 자젠궈가 떠드는 ‘혁명에 대한 이상’엔 무심했지만, 자젠궈의 솔직하고 따뜻한 성품은 좋아했다. 자젠궈의 마지막 남은 홍위병 시절 기념품인 홍기로 누비이불을 만든 그의 아내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그러나 자젠궈가 베이징으로 돌아온 해는 하필 89년, 즉 톈안먼의 해였다. 89년의 젊은이들은 누추한 차림으로 돌아온 왕년의 혁명 전사를 반기지 않았다. 생활력 없는 이상주의자였던 자젠궈는 온갖 사업에 실패해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가면서도 여전히 중국을 구하기 위한 독서와 사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8년 초,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느슨해진 정치적 분위기를 틈타 현대 중국 최초의 야당인 중국민주당을 창당하는데 가담했다. 이듬해 체포된 자젠궈는 ‘국가전복죄’로 징역 9년형을 받았다. 자젠궈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도관이 ‘죄수’라고 부르면 답하지 않았고, 병보석을 받아 해외로 떠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도 “돌아올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중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커다란 톈안먼 사건, 작은 중국민주당 창당 사건도 과거로 흘렀다. 중국 경제는 급성장했고, 중국인들은 이념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에 무감해졌다. 아직 교도소에 정치범이 있다는 말에는 “다들 돈 문제로 징역살이 하는 줄 알았다”고 반응한다. 자젠궈는 분명 ‘새로운 시대의 미아’였다. 중국민주당 창당에 대해서는 지식인층 내에서도 냉정한 평가가 나온다. “당원 몇백 명이 서로 칭찬의 글이나 써주는 무력한 집단”이라는 외신의 평가, “자신의 신념을 주장할 용기는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가진 게 별로 없었다”는 저자의 평가, “그건 용기가 아니고 오만하고 멍청한 짓”이라는 자젠궈 어머니의 평가 등이 소개된다.
말하자면 자젠궈는 남들보다 한 걸음이 아니라 세 걸음 앞선 사람이었다. 전자는 지도자가 되지만 후자는 순교자가 된다. 자젠궈 같은 부류의 사람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이 정도다. “정치적으로는 어리석지만 그 순수한 이상과 용기는 정말 아름답다.” 아울러 이들은 이후 정치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보여줄 수 있는 ‘관용의 한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형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자젠궈는 동생에게 면회실의 수화기를 통해 말했다. “중국은 거대한 나라다. 인구가 13억이나 돼.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적어도 몇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자젠궈와 달리 작가 왕멍은 ‘국가의 종’이었다. 정치적 민주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투사들에게 왕멍은 언제나 공산당이라는 양지에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지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을 썼던 왕멍은 운이 좋았던 것인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인지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이주를 신청해 혁명의 태풍을 피할 수 있었다. 글을 실어주는 잡지는 한 곳도 없었지만 왕멍은 쓰고 또 썼다. 혁명이 지난 뒤에도 글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썼다. 78년, 중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예지에 왕멍의 작품이 실렸다. 왕멍은 1년도 안돼 복당했고, 25년간 서랍에 묻어둔 소설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베이징으로 돌아오자마자 문단의 중심에 섰고, 문화 관료의 길도 걷기 시작했다. 소설, 시, 평론 등에 두루 능해 ‘문학의 10종 경기 선수’라 불리며 중국을 대표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왕멍은 중국 권력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그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했다. 톈안먼 시위대와 싸우다 다친 인민군 병사들을 위문하라는 당의 지시에 대해 왕멍은 와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왕멍의 작가적 양심은 그 병사들의 발포로 죽어간 젊은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당내 강경파의 공격을 받았다.
왕멍은 신중하고 점잖고 중도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격변의 시대, 이같은 성향은 기회주의적으로 비춰지게 마련이다. 왕멍은 톈안먼 항쟁의 주역으로 훗날 노벨평화상을 받은 류샤오보와 특히 앙숙이었다. 류샤오보는 우상파괴자였지만, 왕멍은 “도저히 냉혹해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문화혁명같은 급변을 가장 경계한 왕멍은 파괴 대신 건설의 시대가 오기를 원했다. “나는 중국공산당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없으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을 옹호한다”고 왕멍은 말했다. 이 역시 급진주의자들에게는 비겁한 태도로 비춰질 테지만, 왕멍은 굴하지 않는다. 왕멍은 1980년대에 발표한 한 단편소설에 이렇게 썼다. “공포에 질린 분들일랑 도망들 가시지요.…넌 우울할지도 몰라. 넌 우울해할 권리가 있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난 현 중국의 주인이니까.” 왕멍은 체제 바깥에서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는대신, 체제 안에서 양심에 흙탕물을 튀겨가며 인민의 자유를 지켜내려 했다.
자젠잉은 21세기 중국의 주역인 기업인들에 대해서도 책의 절반을 할애한다. 대형 가전제품 유통업체 회장으로 중국 최대의 갑부 중 하나로 꼽히는 장다중은 경쟁 업체에 자신의 회사를 매각한 뒤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문화혁명 기간 중 마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다 ‘극악무도한 대죄인’으로 몰려 사형당한 어머니의 명예를 되찾는 일이다. 장다중은 그동안 쌓은 부를 이용해 정부에 법적으로 호소하고, 어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장다중은 중국 정부가 “벽장문을 열고 과거라는 해골바가지를 응시할 준비가 아직 안돼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노력을 멈추지는 않는다.
이밖에 베이징대에 미국대학식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려한 경제학자 장웨이잉, 전위적인 건물들을 지어 화제를 모은 ‘소호’(SOHO)의 부동산 개발업자 장신·판스이 부부, 문화혁명 시기 마오쩌둥의 칭찬을 받은 ‘맨발의 의사’에서 베스트셀러 출판사 사장으로 변신한 쑨리저 등 인물들이 소개된다.
6명 인물들의 이야기가 극적이어서 읽는 재미가 있고, 상징적이어서 중국을 이해하기 좋다. 저자 개인의 경험과 시각을 드러내 건조하지 않으면서도, 한 인간의 여러 면모를 살피는 이해심이 있다. 영어로 써 지난해 나온 것을 번역했다. 중국·중국인을 넘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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